「미라이 쨩, 미안한데 오늘만 카구라(神楽) 대타 들어가 줄 수 있어?」 「으······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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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드리운 스즈네가 두 팔을 앞으로 드니 언뜻 음영을 안은 것 같은 형상이 된다. 그대로 실체 없는 그림자에 현실감이 드리워졌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부드러이 내민 손에 얹혀진 것은 밋밋하고 파삭한 돈봉투 뿐이었다. 스즈네의 손이 공손히 봉투를 받아드는 것을 본 링링이가 애웅. 작게 울었다.
"응. 그러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 뒤에는 마찬가지인 중얼거림이 뒤를 잇는다. 링링이는 스즈네의 반응을 보고 슥 일어나더니 복도 안쪽으로 종종 걸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살풋 기울인 스즈네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구불진 머리카락이 마찬가지로 구불거리는 그림자를 일순 드리우고 멀어진다.
스즈네는 그 이상의 권유도 되물음도 하지 않았다. 바깥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각하는 회갈색 눈동자가 두어번 깜빡일 뿐이었다.
이내, 봉투를 거둬들인 스즈네의 손은 조금 전과 같이 다소곳이 명치 언저리에 모아졌다. 그 때에서야 뒤로 한 걸음, 집 안으로 향하는 복도로 내딛어졌다. 햇살과 그림자 모두에게서 멀어진 스즈네가 웃는 얼굴로 미카즈키를 향해 말했다.
"찻잎이랑~ 가져올게~ 조금 걸리니까~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돌아서 안 쪽으로 들어가는 스즈네와 교대하듯 링링이가 돌아왔다. 밋밋한 사각 방석을 하나 물고 말이다.
"우웅."
링링이는 방석을 현관 가장자리에 놓고 미카즈키를 바라보았다. 앞발로 툭툭 두드리며 짧게 소리를 내는 것이 기다리는 동안 여기 앉으라는 의미 같다. 그 권유 아닌 권유에 응해 방석에 앉으면, 링링이는 다시 미카즈키의 무릎을 차지할 셈이었다. 과연 링링이의 속셈대로 되었을까.
미카즈키가 남겨진 키리야마 가의 현관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활짝 열린 문은 그대로. 문 밖의 타는 듯한 햇살도 그대로. 굳이 그 아름드리 나무 아래와 다른 점을 찾자면 여긴 실내이고 그늘이 드리워도 뜨끈한 벤치보다는 앉는 감이 좀 더 낫다 일까. 문득 열린 문 밖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다. 집 안의 어딘가에서 차라라랑. 풍령 소리 여럿 울리니 마치 웃는 소리 같다.
차라라랑... 차라라랑...
연달은 유리울림이 서서히 멎어갈 쯤.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서부터 타박타박 걸어오는 발소리 있다. 돌아보거든 양 손으로 뭔가를 받쳐 든 하얀 형상이 나폴나폴 걸어온다. 형상은 곧 사람의 형태가 되고 복도의 절반을 넘어오자 얼굴의 미소도 희미하게 보인다. 이윽고 그 인형이, 스즈네가 현관 앞에 섰을 때, 하나로 말끔히 올려묶은 머리와 가디건 없이 드러난 흰 팔과 여린 어깨가 유달리 눈에 띈다. 그 팔이 곧게 뻗어 들고 온 종이 가방을 미카즈키에게 내밀었다.
"대금만큼의 찻잎이랑~ 오늘 대접하려고 했던 화과자 넣었어~ 이번에 신작 양갱이랑 도라야끼 가져와서~ 잇치 할부지랑 먹으려구 했던 거라서~"
찻잎 외의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건네주었을 종이 가방엔 작은 보온병도 하나 있었다.
"그리구~ 나아 이제부터 차밭에 가야해서~ 대접할 시간이 없어서 차는 따로 담았어~ 지그음 가서~ 할부지랑 같이~ 화과자랑 먹으면 딱일 거야~"
스즈네의 말은 미카즈키가 차를 거절한 것이 아닌 스즈네의 예고 없는 외출로 인해 대접을 하지 못 한 것, 이었다. 이대로 돌아가 왜 벌써 왔느냐는 질문을 듣게 되거든 써먹으라는 듯이. 그 의미는 명확했으나 스즈네가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다. 그리 쓸 것인지 아닌지는 미카즈키에게 맡긴 듯이. 실내임에도 땀방울 살짝 맺힌 발갛게 익은 얼굴로 웃으면서 말이다.
하나 힌트를 주자면... 미카는 어장관리당하는 걸 순애라고 믿고 있다가 최악의 형태로 차인 끝에 상당한 인간불신에 빠져있어서, 한번에 훅 들어오지 않고 애매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극단화되어있는 상태야. 스즈네의 구름같은 태도가 그 경계심을 내내 자극하고 있었고. 경계심을 풀어주려면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정의해주는 게 필요하달까...
>>513 혹시 몰라 tmi 겸 지뢰 표시까지 하나 하자면 네가 행복하길 바라- 같은 두루뭉실한 이야길 더 하면 미카가 당신 정말 무책임하네. 하고 호감도가 확 깎이므로 주의.. 여기서 잘 풀리면 미카가 온 김에 일을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하고 태도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실컷 아는척 해놓고 똑같이 매워하면 우스워 보일까 옆으로 고개를 돌려 돌아갈것 같은 눈을 하고선 ‘■라 맵다..’ 라는 말을 억지로 삼켜냈다. 제법 손질된 것들을 벅벅 문질러 껍질을 벗겨내며 곁눈질로 옆을 힐끔 쳐다본다. 생각 없이 데려오긴 했지만 이 맹한 애를 가게까지 끌고 와선 이러고 있는거 아버지한테 들키면 그날로 날 잡는거다. 그것도 그런데다 보기보다 나름 진지하게 하는 것 같아서 이제 충분하다고. 손짓을 한다.
“야야. 됐어. 됐어. 그렇게 진심으로 일해버리면 내가 나쁜놈 같잖냐~”
하란다고 다 해버리긴. 어쩜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냐? 한쪽 코를 가볍게 훌쩍이며 ‘제발 좀 쉬세요-’란 표정을 지었다. 말은 그래도 어렸을때 엄청 괴롭히긴 했지. 유치하게 나뭇가지에 오동통하게 살 오른 송충이를 올려놓고 ‘에비-’ 콧잔등까지 들이민다거나. 아까처럼 물가에 앉아 있을때면 등을 떠밀어서 빠뜨려버렸을테니. 생강이 가득 담긴 채반 위로 쏴아아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요즘도 귀찮게 구는 애들 있어?”
채반 위로 둥둥 떠다니는 껍질들을 치워내고 남은 자잘한 것들을 깎아낸다. 복학하고나서 마이를 처음 봤을땐 나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게중에는 은근히 뒷담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따로 불러내 복도바닥하고 키갈 한번 찐하게 해보고 싶냐고. 차근히 이야기를 했었지. 이렇게 말하는것도 좀 웃기긴한데. 안해주면 예전처럼 계속 당하고만 있을것 같아서. 참견해버렸던 적이 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고양이다. 이미 밴드까지 붙여 놓고서는 여전히 칭얼대는 거 하며. 그와중에 그 얼룩진 공이 어디까지 도망갔을까 누가 벌써 주워가진 않았을까 슬 초조해지는 와중에 미카즈키가 ‘간식’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서야 삐죽했던 눈꼬리가 완만해졌다. 아니, 그렇다고해서 미카즈키에게 안겨 치료까지 받아놓고 염치없이 마실 것까지 바랬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그 커다랗고 파란 아이스박스 안에 뭐가 그리 잔뜩 들었는지 예전부터 궁금했는걸. ... 이제까지의 요량으로 살펴보자면 ‘필요없어’ 라며 새초롬하게 거절할 것 같더니 오히려 한결 얌전해진 마시로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꼭 숨겨놓고 고로롱 거리는 표정을 참았다.
치료해주던 미카즈키의 손이 일순간 멈췄듯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놓치고 있다는 기시감에 찔린 마시로 역시 여유가 흐르던 표정이 굳어졌다. 알려줬었다고? 하지만, 하지만... 미카라는 이름은 보통 여자 아이가 더 많이.... ..... 어라?
-너, 이름이 뭐야 - ? -■■ ! ! !
마치 오늘과 같이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 귀를 어지르는 매미소리와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소란스러웠던 날. 벌어진 거리만큼 입가에 손을 마주 모아 서로 있는 힘껏 목청을 질렀던. 결국 아쉽게도 여름의 소리에 파묻혀 소녀의 이름을 듣지 못했지만 무척이나 귀여운 두 글자였던 것 같다. 그래, 그 입모양과 어조는 마치 ‘미카’ 정도라면 알맞으려나. 기시감의 정체가 성별이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머리 위 전구가 반짝 켜진 듯한 마시로의 고장난 외마디가 툭 튄다.
“으에?”
그 추억 속에 조그마하여 따스하고 귀여웠던 소녀가 성장하여 어마무시한 소년이 된 거지. ... 마침내 퍼즐같았던 기억의 조각이 맞춰지고 가려졌던 안개가 걷힌 마시로는 버튼이라도 눌린 듯 ‘딸꾹’ 소리를 낸다. 그게 성별 다른 타 인물이 아니라 동일인이었다는, 거.... 동그래진 눈으로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지만 ‘너 남자였어?’ 같은 예의상실 한 말은 뱉지 않았다. 그저 충격에 딸꾹질로 몸이 이따금씩 들썩 거렸지.
온기 어린 두 손으로 서늘한 볼을 마주잡고 집중하는 치켜 뜬 눈으로 메마른 얼굴을 빤히 살핀다. 숨길 수 없는 가르마와 곱슬기, 조금 바래긴 했어도 어쨌든 옆집 고양이 체셔와 달리 절대 흔치 않은 눈동자 고유의 색. 야구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이얀 피부하며 무정하며 무구하게 뜬 눈까지. 아 그러고보니 그때도 나는 피부를 간질이는 조심스러운 손길 속에서도 네 속눈썹을 세었었는데. 와-. 무의식의 작은 감탄이 새어나오고,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마시로는 오늘 아래 가장 환하게 웃으며 미카의 볼을 손으로 부비적 뭉개어 우스운 얼굴로 만들려했다.
같이 나눠 먹자는 말에 눈을 빛내며 잠시 자신이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상상해보는 마이. 하지만, 방금 가리가리군을 먹고 난 직후여서 그런가 지금 당장 생각나는 아이스크림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렇게 늘어져 있는 것이 더 좋아. 아이스크림은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나니까.
"더웠겠다..."
안쓰러운 얼굴로 하나요를 바라보다 에어컨을 보았다. 리모콘, 리모콘이 어디있지-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마이는 사무실 안내 데스크 안 쪽에 위치한 것을 찾아 하나요에게 건냈다. 더울 테니, 온도와 풍량을 조절하라는 의미였다.
"그렇네- 편지에도 부끄러움 많다고 적어뒀으니까 말이야."
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펜과 종이를 찾았다.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볼펜과 A4페이퍼. 귀여운 편지지와 봉투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시내로 가서 사오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카렌짱이 너무 오래 기다리고야 말 테니까.
"답장...."
테이블 위에 종이와 펜을 두고 나서 잠시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작문에 자신 있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어떤 식으로 답장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미야마 마이입니다. 라는 첫 줄을 쓰고는 눈만 깜빡이다 하나요를 바라본다. 도움을 바라는 눈길이다.
뜨악하는 표정. 얼굴을 돌리는 타케루를 보다가 생강을 내려다본다. 엄청 많은데... 하고 혼자 입술을 쌜죽거리고는 소매로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고 한 조각을 더 입에 넣었다. 매우니까 입 안에만 물고 있다가 아주 아주 천천히 그것을 씹기 시작했다. 다 먹지는 못 할 것 같은데... 집에 가져가서 먹어도 되나?
이윽고 타케루가 됐다는 소리를 들은 마이는 고민을 멈추고는 다시 생강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울망울망한 눈 너머로는 타케루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아니, 안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었을지 모른다.
"응? 에-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런 이야기를 종종 듣고는 한다. 그 순간마다 마이의 대답은 일관되게 "잘 모르겠다" 였다. 있는거야? 하고 되물으며 마이는 계속 생강을 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