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쨩, 미안한데 오늘만 카구라(神楽) 대타 들어가 줄 수 있어?」 「으······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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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요구나. 잘 지내고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내면에 차갑게 채워둔 얼음 제방을 무너뜨리고 해일처럼 와르르 기억들이 밀려들어와버리고 만다. 미키군, 하고,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는 그 목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것만 같아, 미카즈키는 거기에 못박히듯이 서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툭, 하고, 어깨에서 흘러떨어져내려 바닥에 볼품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스포츠백이 마치, 기억의 비참한 파도에 뒤흔들린 난파선의 낡고 낡은 돛대가 마침내 부러지는 것 같다.
"하나요."
분명히 기억한다. 커튼 아래로 보이던 양말 신은 하얀 발목을. 그 뒤에서 자신을 놀래켜줄 생각으로 짓궂게 웃고 있던 소녀를. 미키군, 하고 상냥하게 불러주던 어떤 소녀와 함께 지내오던, 토키와라에서의 나날들을. 오사카에서 하루하루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육체적인 괴로움과 정신적인 괴로움 사이에서, 자신을 미카쨩, 혹은 미키군으로 계속 유지시켜주고 있던 것이 바로 그 나날들의 기억이었던 걸.
"하나요......"
분명히 기억한다. 나 얼마 뒤에 오사카로 간대, 라고 말하던 그날,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물방울이 맺히던 네 눈가를. 마지막으로 만나서 재밌게 놀자. 하고 나누었던 그 약속을. 그리고 그 약속이 처참하게 깨어지던 그 비참한 날을. 아버지의 우악스런 손에 손목이 나꿔채여, 뒷좌석에 내동댕이쳐지고, 철컥 하고 잠긴 자동차 문이 아무리 애를 써도 요지부동이던 그 때의 절망을.
"아들과 아비가 함께, 보란 듯이 뛰어넘자는 거다! 저 마왕을!!"
자신은 전혀 생각도 없던 이야기를, 귓전에 쩌렁쩌렁 소리쳐대는 류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기억의 여기저기로 쩌렁쩌렁 울려간 메아리는, 이내 온갖 형태의 반향을 몰고 삼각파가 되어 또다시 난파선을 덮쳐왔다.
"내가 니네 학년이었을 때는 니들보다 더 고생했어! 사이오의 이름에 걸맞는 프로가 되는 길이라는 건 이런 거야!" "이게 내 행복이야. 나는 내가 원하는 행복을 주는 사람을 고르기로 했을 뿐인걸." "나는 그저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원했을 뿐인데, 네가 나한테서 그 사람을 빼앗아갔어. 그러니, 책임을 져." "내, 고시엔에 갈 끼다!"
"...슬퍼하지 마렴, 내 아들. 네가 살아감으로서... 엄마는 항상 네 안에서 살아있는 거야. 너와 함께. 내 삶을 네게 물려줄게. 그러니 아들, 내 아들... 결국에는 행복하기를 바라요."
소원이, 소원들이 비참하게 몰려온다
정신을 차려보니, 미카즈키는 달리고 있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려간 스포츠백의 존재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볼캡은 어느샌가 머리에서 날려가 없고, 땀에 젖은 까만 곱슬머리가 볼썽사납게 헝클어져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숨은 공기를 채우는 게 아니라 폐를 틀어막고 있었고, 다리는 근섬유 하나하나가 갈가리 찢어져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결국 미카즈키의 다리는 더 이상 미카즈키를 지탱하는 데에 실패했고, 소년은 땅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피부에 부딪는 조약돌들이 아픈 것도 잊고, 소년은 황망히 고개를 들었다. 땅을 짚고 비틀비틀 들어올린 시선 끝에, 문득 그리운 풍경이 걸린다.
어느 작은 호수. 집의 뒤편으로 오솔길을 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곳. 어릴 적, 할아버지가 알려준 비밀 장소. 두어 명의 동네 친구들과만 이런 곳이 있어- 하고 공유하던, 냇가가 흐르다 말고 낮은 폭포에서 떨어지며 만들어진 조그만 연못. ...동네 친구들과, 하나요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물장구치던 작고 얕은 연못.
정처없는 도주의 목적지를 이리로 이끈 것은 소년의 무의식일까. 추억의 그 순간으로, 모든 것이 잘못된 그 순간으로, 아니 어쩌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소년의 옛 갈망이 그를 이리로 인도한 걸까.
그러나 소용없다. 여기에 당도한 소년은 미키군도 미카쨩도 아니라 나가쿠모 미카즈키였으니까. 그러니 아무리 물리적으로 그때 그 추억이 어린 장소에 도달하더라도, 결코 자신이 알던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소년은 무릎을 꿇은 채로, 간신히 땅을 짚고 상반신을 일으켰던 손을 들어다가 땅바닥을 쾅 내리쳤다.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소원 같은 게 있단 말이야...!"
그 옛날과 지금의 현실의 가혹한 낙차가,
"하고 싶은 게 있단 말이야...!" "나도 행복하고 싶었단 말이야...!"
비참한 전단응력이 되어 소년을 부수고 있었다.
"나도," "나도 거기에 있었는데....."
잘 안다. 이제 와서 부질없다는 것을.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돌려줘. 내 여름을 돌려줘... 내 토키와라를 돌려줘...... 그 날 하나요와 했던 약속을 돌려줘......"
깨어진 약속을 다시 붙여낼 수는 없다는 것을. 쏟아진 청춘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나도 같이 있고 싶었단 말이야. 고시엔 따위보다 메이저리그 따위보다 토키와라에 더 있고 싶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나만... 어째서 나만 이렇게 된 거야...... 어째서......"
오히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소년은 비참한 울부짖음을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라는 것은 친구의 이야기로, 지난번 마이 쨩과 함께 대화하던 것을 친구가 목격한 것이 시발점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은 3초면 된다고 하지요. 친구인 이토바야시 양의 말에, 그 3초는 3시간처럼 느리게 갔다고 합니다.
"헤에~"
호리이 하나요는 이토바야시 양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기하고, 조금은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도 그런 사랑을 해볼 수 있을까?! 하나요에게는 아직 첫사랑의 경험은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미, 미, 미야마 선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예쁘게 하고 왔는데요. 저, 좀처럼 자신이 없어서...."
한 살 아래의 친구인 이토바야시 양은 올해 처음 만난 토키고의 같은 1학년생으로, 자신감이 없고 수줍은 여자아이입니다. 그렇지만 가린 머리카락 뒤의 눈은 누구보다 예쁘다고, 하나요는 칭찬하고 있습니다.
"에~ 일부러 예쁘게 하고 왔는데 직접 전해주는 것이 낫지 않아~~??" "그, 그, 그래도요.... 상상을 해도 심장이 떨려서, 바보같아 보일까 봐, 실수를 저지를 것 같고....."
싫어하면 어떡해요.,... 하면서 작은 입술을 움찔거리는 이토바야시 양. 호리이 하나요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흡! 하며 허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정 그렇다면, 하나요에게 맡겨~!! 틀림없이 잘 전해줄 테니까~~!!" "정말인가요....~!!" "응, 마이쨩도 이토바야시 양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구~~"
화색이 도는 이토바야시 양을 보고서 안심감을 주기위해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웃는 하나요입니다. 이토바야시 양은 떨린다는 듯, 한 손은 가슴에 얹고 다른 쪽의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건넸습니다.......
♥
"그렇지만 이런 소중한 편지를 어떻게 전해줘야 좋담...."
어딘가의 계단에서 이토바야시 양을 배웅한 하나요는, 건네받은 편지봉투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고운 미색의 편지봉투는 만지면 부들부들, 요철이 있는 재질이었습니다. 미야마 마이를 보고 부드러워진 이토바야시 양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 같아,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아졌습니다. 귀여운 원형 스티커로 봉해두어서 내용물은 볼 수 없습니다. 뒤편을 보면 정성들인 글씨로 또박또박,
'미야마 마이 선배님에게.
토키와라 고교 1학년 x반, 이토바야시 카렌.'
하고 받는 사람과 전하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으~음~~."
평소처럼 마이 쨩네 집으로캠핑장으로 그녀를 만나러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이토바야시 양의 소중한 마음을 전하러 가는 것이라고 하니 자신도 긴장되는 하나요입니다.
"가자~!!"
마음을 먹고 걸음을 옮깁니다. 미야마 마이의 집 근처에 왔을 때, 문 앞에서 마이에게 라인을 보내는 하나요입니다.
- 마이 쨩- 마이 쨩네 놀러 왔어~ 들여보내 줄래? 그것이 어렵다면, 잠깐만 나와 주겠어? 중요한 일이 있어~~
이건 미카의 야구부 사이드 독백으로 준비중인데, 미카의 코칭 덕분에 고시엔 지역예선 통과라는 성과를 거둔 야구부 아이들과 야구부 주장이, 미카의 '그냥 이대로 야구 좋아하는 동네 친구들 모임으로 남는 게 좋다고 생각해. 여름 고시엔이라는 건... 거기서부터는 야구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 곳이니까.' 하는 말에 대해 대답하는 대사로 준비한 문장이야.
과연 마이는 그 라인을 보았을까? 정답은 아니요. 사무실에 둘 아이스크림이 아주 떨어진 까닭에 마이는 집 밖으로 나선 상황이었다. 바로 옆 집인 코하네의 잡화점에 들려서 잠시 더위를 식히고, 아이스크림을 한 봉투 가득히 담아서 돌아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손에 있어야 할 스마트폰은 아직도 사무실 안에 있었다.
조금 기다렸을까? 아니면 오래? 그러한 기다림은 상상도 못 한 체로 마이는 제 집 앞까지 도착했고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하나요? 조금 더 가까이 가야 확신할 수 있겠다며 다가간 거리는 퍼스널 스페이스!
"아- 역시 하나짱이다, 놀러 왔어?"
상대임을 확인하자 베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봉투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건네주었다. 아직 아슬아슬하게 그 형태가 유지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