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렌타인데이. 라이벌에게 초콜릿을 줘서 체중을 늘리기 위한 무시무시한 계략들이 판치는 날. 클래식 시즌에는 단순히 체중증가가 아니라 사기마저 꺾어버리겠단 생각으로(사실 그냥 장난치고 싶었다) 초콜릿 안에 이것저것 다시마라던가 쌀밥이라던가 데스소스 같은 이상한 것(하지만 먹을 수는 있는 것)들을 넣었었지. 뭐, 올해도 재밌으니까 그런 초콜릿은 준비해두긴 했지. 하지만 지금 교무실로 들고 가는 초콜릿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씀.
작년에는 적당히 카레에 초콜릿을 넣어도 어쨌든 초콜릿 아님?하는 논리로 카레를 가지고 진심 도전장 초콜릿을 만들었지만.. 올해는 도전장 초콜릿이 아니라 그냥 진심 초콜릿이니까. 유우가는 달콤한 걸 잘 못 먹으니까, 단맛이 거의 없는 비터초콜릿을 깔끔하게 판 모양으로 굳히고 거기에 살짝 포인트로 밀크초콜릿을 이용해서 별자리를 그렸다. 메이사와 프로키온, 오리온자리와 작은개자리. ...물론 아무리 달지 않아도 유우가가 초콜릿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까, 크기를 작게 줄여서 면적도 좁은 탓에 부연설명이 없다면 별자리라고 알아보기 힘들 것 같긴 하지만. 뭐 어때. 내가 설명해주면 될 일이고!
그렇게 옆에서 설명해주면서 유우가에게 초콜릿 먹이는 상상을 하며 교무실에 도착했는데- 슬쩍 안을 보면... ...어라, 유우가 없네? 그보다 교무실에 사람 자체가 없었다. 선생님도 트레이너들도 전부 자리를 비운 건가... 어쩔 수 없네. 자리에 일단 두고 설명은 나중에 해줘야겠다. 통통 튀는 듯한 걸음으로 간 유우가의 자리, 이제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보나마나 또 책상 어지럽혀놨겠지~ 그래. 초콜릿 두고 가는 김에 조금 정리해둘까?
헤실거리면서 본 유우가의 책상 위에는, 누가 두고 갔는지 모를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하나도 아닌, 세 개가.
헤실거리던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점점 수그러들던 입꼬리는 이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누구지? 언제 여기에?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싸하게 식은 눈으로 초콜릿들을 빤히 보다가 잠시 시선을 올려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은 없다. .....CCTV도 없고. 내가 가지고 온 초콜릿을 꺼내 책상 위에 두고, 누가 두고 갔을지 모를 3개의 초콜릿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포장지와 상자가 우그러지는 것도 신경쓰지않고, 그대로 초콜릿을 담아왔던 봉투에 처박았다.
".....안되잖아, 유우가. 누가 줬는지도 모를 초콜릿 같은 거.... 위험하다구?"
그 자리에 없는 유우가에게 말을 걸듯 중얼거리면서 그렇게 봉투를 갈무리하고, 잠시 유우가의 책상을 내려다본다. ....내가 둔 초콜릿을 가운데에 두자. 아, 그리고 주변도 조금 정리하고. 응. 이러면 감쪽같지. 아니 감쪽같지가 아니지. 애초에 그 초콜릿들은 없었던 거야. 응.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도 좀 풀렸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유우가의 책상주변을 정리하고 있으니 교무실 문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면, 거기엔 유우가가 있었다.
찰렌타인 데이. 작년만 해도 나와 연없고, 연이 더 생길 일도 없고, 그냥저냥 넘기는 상술의 날이라고만 생각했지만. 1년동안 여러모로 일이 있었던 탓에... 그렇게 됐다.
메이사는 어제 무언가 결전을 치르는 듯한 얼굴로 집에 갔고, 오늘 조례시간서부터는 나에게 엄청 눈빛공세를 펼쳐서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느껴졌다. 음, 이 녀석. 나에게 키스도 하고 싶고 초콜릿도 줄 생각이로군.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메이사는 날... 혼인신고서까지 쓸 정도로 좋아하니까. 그런 애한테 진심 초코를 받아놓고서 나만 입 싹 닦는 건 내가 아무리 쓰레기라고 해도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어서. 준비했다. 레시피북을 보며 구워낸 초코쿠키. 성공시키기 위해 몇 판을 구워냈는지. 적당히 어떻게 저떻게 하면 되는 요리랑 다르게 엄청 세심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이 ㅆㅂ 하며 쟁반도 몇 번 엎고, 주걱도 집어던지긴 했지만 결국 완성했단 말이다. 보답으로 줄 필살 히다이 쿠키를.
집에 두고와버렸지만 데헷⭐
결국 그걸 다시 들고오느라고 점심을 걸렀다. 돌아와보니까 메이사가 꼬리를 살랑살랑하며 내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교무실 문 너머에서 살짝 훔쳐보고는, 뒷짐으로 쿠키를 감췄다. 아직 점심시간 한창이라 다른 트레이너들도 선생님들도 없어서 편하게 말을 걸었다.
"시즌 404번째 고백하러왔냐?"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며 다가갔다. 의자에 털썩 앉고는 준비된 거절멘트를 던진다. 시즌 404번째 거절이다.
"아이, 안돼요 누나. 누나는 학생이고 전 트레이너잖아요...! 이거 잘못하시는 거예요. 저, 저는 이 고백 받을 수 없어요...💕 그래도 초코는 받을래."
쓰레기. 속물. 저질. 세상사람들아 날 욕하려거든 맘껏 해라. 그래도 황혼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누가 옳았는지는 명확해지리라.
책상 가운데에 놓인 초콜릿 상자를 보고, 메이사를 본다.
"이거...야?" "이거 말고 초콜릿은 없었어? 젠장, 이번엔 좀 기대했는데..."
물론 학생의 사랑을 받아서 좋을 건 없지만, 메이사만 준다는 건 뭔가 서글프잖아.
"역시 내 생각해주는 건 메이사밖에 없구나. 제자 녀석들 키워봤자 다 소용없어. 역시 우리 담당이 최고라니까~ 아~ 젠장~"
조금 아쉬워하며 메이사에게 기댔다. 한숨을 푹 쉬고 기댄 몸을 다시 일으켰다. 친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길면 또 그런 사이잖아 우린.
뒷짐을 진 채 교무실로 들어오는 유우가를 보며 헤헤 웃었다. 404번째 고백이라니 나 그렇게 많이 했던가? 그리고 그만큼 했다고 해도 한번도 받아준 적도 없으면서. 이번엔 또 어떤 거절멘트가 나올까, 별 관심없는 얼굴로 보다가 누나라는 말에 풉 웃음을 터트렸다.
"날 순식간에 연상 유부녀 만학도 말딸로 만들지 말라고. 그리고 초코는 받는 거야? 나 참."
히죽히죽 웃으면서 대꾸하면, 유우가의 시선은 그대로 책상 위를 향한다. 잘 정돈된 책상 가운데에 내가 둔 초코가 하나. 딱 하나. 기뻐해주려나~ 싶었는데 어째 실망스러운 느낌의 말이 유우가에게서 나왔다. 이거 말고 없었냐니. 나도 모르게 봉투를 든 손에 힘을 꽉 준다.
"—응. 없었어. 내가 두기 전에는 쓰레기랑 잡동사니 뿐이었으니까. 근데 기대했다니? 누구한테 받는 걸 기대한 건데?"
누군데? 그 사람은? 쓰레기를 두고 간 사람 중에 한 명이려나.
가만히 유우가를 보다가, 이쪽에 푹 기대오는 걸 보고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대로 꽈악 껴안아버릴까 했는데 손에 든 봉투 때문에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유우가의 몸이 훅 떠나갔다. ....아쉬운 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버렸다. 그치만, 아쉽고.
"응! 풀어 봐!!" "유우가는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지? 그래서 단맛을 가능한 줄여봤는데...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금방이라도 풀어볼 것 같은 유우가 옆에서 기대하는 눈으로 본다. 마음에 들려나, 입에 맞으려나. 너무 달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쓰지 않은 그 지점을 찾기 위해 어제 저녁부터 파파가 엄청 고생했다고~ 너무 많이 시식해서 오늘 아침엔 '이제 초콜릿은 당분간 보기도 싫다'고 해서 히든메뉴로 초콜릿가지찜이 나올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 같고~
"너 말이지 선생님 책상 위에 있는 걸 멋대로 쓰레기랑 잡동사니라고 분류하지 말아달라고!"
...라고는 하지만 사실이다. 요즘 작업은 죄다 부실에서 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교무실을 쓰는 건 시험기간 출제 작업 때... 정도다. 교무실은 워낙 좁고 사람이 많은데다 뭐하는지 다 보여서 답답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꿍얼거리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이제 초콜릿을 풀어도 된다고 자리까지 깔아줬으니 뭐라고 해봤자 사족일 뿐이겠지. 조심스럽게 상자를 감싼 리본을 당겨 풀고, 뚜껑을 열면 거기엔―
"작아." "...하지만 작은 초코가 맛있는 법. 불만 없습니다요 마님."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을 애써 갈무리했다. 사실 알기야 알지, 초콜릿이 커봤자 먹다가 물리고 얼굴 노랗게 뜨고 커피 무진장 마시고 싶어질 뿐이라는 거. 알지만... 넌 나를 혼인신고서 쓸만큼 좋아하잖아? 그런 거 치곤 좀 작지 않냐구. 그런 아쉬움은 있었다. 실리와 로망은 반대니까. 그래, 메이사 아니면 난 이번 찰렌타인데이도 선생님들의 의리초코가 최선이었을 테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자고.
그렇게 초코를 먹기 전에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 사진도 한 컷 찍었다. 아니 그냥, 그 뭐, 못 찍을 건 또 뭐야. 그렇게 찍고나니 보이는 게 있었는데,
"이거 오리온자리잖아? 그리고 이건 뭐더라... 큰곰? 아닌데, 개자리?"
어찌됐건 맥락은 알았다. 메이사는 초콜릿에 이렇게 써놓은 거지. 메이사 프로키온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아~? 작다고? 보리초코 한 알에 비하면 무지 크잖아? 그리고 크게 만들어주면 유우가 분명 먹다가 물린다고 남길 거잖아." "내가 다 계산해서 만든 거니까 그냥 감사히 먹으라고, 유우가💕"
그나저나, 분명 포장을 풀면 그냥 낼름 먹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유, 유우가가... 음식 사진을 찍는다고...?! 잠시 그 사실에 경악했다가 아차 싶어서 허둥지둥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아, 어어 맞아 오리온자리! 용케 알아봤네. 그리고 작은개자리야." "응 맞아. 유우가는 날 먹는 거라구💕💕"
히이죽, 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이렇게 웃지만 딱히 안에 이상한 걸 넣진 않았으니까. 나더러 메이사를 먹으라는 거잖아, 라고 말하길래 놀릴 겸 말했던 건데 전혀 망설임없이 입에 넣는 걸 보고 조금 김이 샜다. 으으, 이, 이게 아닌데.... 좀 더 당황해야 하는 거 아냐...? 역시 별자리로 돌려말해서 그런가? 대놓고 이름을 적었어야 했나.. 아니면 나한테 초콜릿을 끼얹는 쪽이 좋았을까(?).
".....자, 잠깐만 그거 그만해. 뭔가 기분이 이상하니까...."
그냥 먹으면 될 걸 왜 입안에서 그렇게 굴리는 건데.... 굴리면서 말도 하고 있잖아 대체 왜.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다 먹은 다음에 하는 말도 묘한 기분을 불러와서 뭔가, 뭔가 역으로 당한 기분이 드는데. 애매하달까 미묘한 표정을 짓게 된다... 우우....
"흐음~ 그래? 어때? 나 맛있었어?"
그래도 여기서 질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네. 이건 가능하면 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주머니에 감춰둔 걸 슬쩍 꺼내서 유우가에게 내민다.
"자, 이거. 모쏠○○○다이한테 선물~💕" "방금 전이랑 다른 맛도 먹어보라고 주는 거야💕"
어쭈, 나름 성인이다 이거지. 어디의 유부녀 멘트인진 몰라도 아직 어설프다. 어설프다고. 히죽히죽하다가도 레로레로 한 번에 부끄러워하고 말이지. 아직 멀었다니깐. 히다이 유우가를 시모네타로 흔들려고 해도 이게 나이차에서 나오는 짬차이.. ...아 씁, 음울한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해버렸다.
아무튼, 이런 괘씸한 질문에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음~ 글쎄. 메이사 거는 작아서 잘 모르겠던데. 좀 큰 거 가져오면 이야기해줄게."
하면서 이쪽도 히죽히죽 웃는 것 뿐이다. 물론, 메이사가 여자아이니까 할 수 있는 농담. 여자아이라서 다행이라니까... ......정말로 다행이라니까.
그렇게 한 차례 시련을 여유롭게 통과했나 싶었는데, 새로운 시련이 눈 앞에 도착했다. 압착된 비닐 포장. 동그랗게 솟은 링의 실루엣... 지금 생각하면 교묘하게 엄지로 비타민 C 로고를 가렸지만, 이 실루엣의 폭룡적인 시각적 자극에 나는 딸꾹질했다.
"자, 잠깐." "너, 너너 너. 너... 니가 이걸 살, 살 수 있겠지 당연히..."
요즘은 자판기로도 파니까. 내가 어릴 때는 누나 친구들한테 사달라고 부탁도 했었고 뭐 어디서든 공짜로 주워올수도 있는 게 이거인...데. 아니, 애초에 메이사는 성인이니까 못 살 게 뭐야. 애초에 성인 아니어도 살 수 있...
아 얼굴 빨개지고 있어 O됐다... 진짜 O다이 같잖아 아 몇번이고 말하지만 싫다고 이 체질!
"..............그―래. 너 말고 다른 애들 초콜릿도 제 대 로 먹어보마."
메이사의 손에서 그것을 탁 낚아챘다. 아니, 이거 촉감이 좀 다른... 조심스럽게 손아귀를 펴보자, 거기에는 발랄한 색깔로 비타민C라고 적혀있었다. 촉감이 딱딱한 건 물론이고.
아, 얼굴 빨개진다. 우와아~ 엄청 빨갛게 됐잖아. 유우가 진짜 모쏠○○○다이였어!? 딸꾹질까지 할 정도야? 이게 이렇게 잘 먹혔다는 게 꽤 놀랍지만, 그치만... 이런 반응, 재밌으니까 싫지 않다고. 히이죽 입꼬리를 끌어당기면서 비타민C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마 내 꼬리도 살랑이고 있겠지.
"응? 당연히 살 수 있지~?" "요즘은 안 파는 곳이 더 드물잖아? 어디서든 살 수 있는 걸."
비타민C 정도야 뭐, 약국은 물론이고 그냥 집 앞 편의점에만 가도 파는 걸. 어깨를 으쓱하기가 무섭게 유우가가 비타민을 채갔다. 아. 눈치챘네. 엄지로 가리고 있던 로고가 한눈에 들어올테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유우가의 몸부림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핳!!! 그거 비타민C라구? 유우가 대체 무슨 생각 한 거야?" "난 그냥 유우가 건강 생각해서 비타민 챙겨준건데~ 뭘로 생각했길래 그래애~? 응?💕 헨따이💕엣치치💕선생 실격💕"
그렇게 내가 한참 놀리고, 유우가는 온몸을 뒤틀던 그 때, 툭하는 소리랑 같이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우가가 난리치는 소리에 묻힐 법도 하지만 아쉽게도 난 우마무스메고, 우마무스메의 청력은 꽤 예민한 편이라서.
"......뭐야 저거?"
바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놓인 건... ...어디선가 튀어나온 과자봉지였다. .........아, 아까 미처 못 치운 쓰레기인가.
"...헤에. 아까 못 봤던 건데. 어디에 있었던 거지..."
조금 전까지 유우가를 놀리면서 웃던 얼굴은 조금, 아니 좀 많이 싸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아까 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 숨겨놨던거야... .....누가 숨겨놓은건데. 가만히 땅에 떨어진 걸 응시하다가 슬쩍 유우가를 봤다. ...유우가가 없었다면 내가 당장 들어다 봉투에 넣어서, 아까 쓰레기하고 같이 집에서 불태웠을텐데. 바로 눈앞에서 집어다 그러는 건 좀. 그리고 아까 그것들도 들킬 수도 있으니까....
모른다고. 유우가가 모른다는 건 수상한 거라는 뜻이겠지? 그럼 그렇게 수상한 건 내가 처분해도 되는 거겠지? 유우가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지? 유우가가 들여다본다면 궤변이라고 할 만한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떨어진 봉지 쪽으로 다가간다. 손을 있는대로 펼쳐서 봉지를 우악스럽게 쥐기 바로 직전에—
"—엣, 유우가가? 구운 거라고?" "나, 나... 나한테???"
—우아아악 멈춰멈춰멈춰! 뒤늦게 명령을 전달받은 손이 우뚝 멈춘다. ...다행히 봉지에 닿아 바스락 소리만 나고 내용물은 무사한 것 같다. 크, 큰일날 뻔했네!!!! 유우가가 준 걸 가차없이 망쳐버릴뻔... 아까 확 손을 뻗은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부서지지 않게 살며시 들어올렸다. 하아. 다행이다. 그 근데, 유우가가 나한테. 나, 나한테..... 그럼 이거... 진심 초코라는 그거...?
"풀어봐도 돼?"
그렇게 묻긴 했지만 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단 풀었다. 하트모양의 쿠키. 초코쿠키인가. ...하트모양이야. 하트라구. 이것만으로도 이미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에헤, 에헤헤. 그렇구나아. 이건 유우가의 사랑이라는 거지?
"...에헤헤, 귀여워. 이거 진심 초코인거지? 고마워 유우가!!"
귀여워... 유우가가 날 위해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더 귀엽고, 엄청 사랑스럽잖아. 먹기 아까울 정도. 하지만 안 먹기에도 아까워. 그래서 하나를 집어 그대로 입에 쏙 넣었다. 바삭한 식감, 달콤한 맛... 시판 과자보다 단맛이 조금 덜한 것 같긴 하지만, 체중조절을 생각하면 딱 좋은 맛이다. 응, 엄청 맛있어!!
"맛있다아~ 유우가의 사랑은 이런 맛이 나는구나~ 히히히."
그렇게 말하면서 봉투를 조심조심, 다시 원래대로 갈무리해둔다. ...한번에 다 먹기엔 아까워서, 조금씩 먹을 거니까.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 메이사라면 흐물흐물 뭐든 해도 돼~인 팔불출 아빠인 나도 종종 단호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딱 선을 그어둬야 할 일은 하나 뿐이지.
"트레이너로서 주는 거니까, 이거."
'좋아해' 라고 주는 건 아니라고. 하트 모양이긴 하지만. 물론 좋아도 하지만, 가족으로서. 그래도 일단 분명히는 말해둔다. 이렇게 사소한 실망이 겹쳐서 결국 나한테 정이 떨어지면 좋은 일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진심초코인 걸 부정하진 않았다. 부정하는 게 우리 관계에 좋으려나,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쳐는 지나갔다. 그치만 그래도,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쓰린 속이 더 쓰리게 될 것 같아 그냥 선을 긋는 거로 퉁쳤다. 오늘은 그래도 되겠지.
"그리고 나 점심 못 먹었으니까 쿠키 하나 줘봐라. 거기 민둥한 거 있을 거야."
봉지 안에는 여러 맛의 과자를 넣었다. 일단 발렌타인데이니까 초콜렛, 말차, 일반적인 버터맛에다가 딸기잼. 그리고 버터 세가지로 구성했다. 그래서 포장은 센스가 좀 떨어져도 열어보면 알록달록해서 보기는 좋겠지. 내심 뿌듯했다.
그러고보면 버터맛은 딸기잼으로만 하기 재미없을 거 같아서 초콜릿으로 데코도 좀 했었는데... ...잠깐.
있었다. Yuuga라고 썼던 게...
나, 나는 메이사랑 다르게 순수해서(?) 유우가로부터~😄라는 느낌으로 썼던 건데, 아까 그거 때문에 이거.........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진 말에 살짝 귀가 처진다. ...이런 날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 꼭 그렇게 초치는 말을 해야겠냐구.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거, 유우가 나름대로의 부끄러워하는 방법 아닐까? 그렇겠지? 아니 그렇잖아? '일단 말해두지만, 트레이너로서 주는 거니까. 차 착각하지 말라고 바보야!'같은 대사랑 완전 똑같은 뜻이잖아? 츤데레잖아? 그럼 저 말의 진짜 뜻은 '바 바보야 네가 좋아서 준 건 맞지만 부끄러우니까 그만하라구' 정도가 되겠구나. 히히히, 유우가는 진짜 귀엽네에.
라고 머리속에서 제멋대로 변환도 하고 납득도 하고 나니, 칫-하는 소리를 낸 것과는 다르게 표정이 헤실헤실 풀린다. 하지만 하나 달라니.... 자기가 줘놓고 다시 돌려받는거야? 수수료 있는 거야 이거?
"에... 수수료가 있었어? 소비세도 아니고 이게 뭐야..."
마지못한 척을 하면서 봉지를 다시 연다. 아까 먹었던 건 초코맛이고, 유우가는.... 말차를 주는 게 좋을라나. 아니면 평범해보이는 이거? 아, 이건 딸기잼이 있잖아. 유우가 단맛은 NG니까 이건 패스. 그 옆에 있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딸기잼이 없는 걸 집어서 뒤집어보니—
"....유우가?" "...헤에, 그렇구나아💕 이건 유우가 맛인건가아💕"
초콜릿으로 적힌 Yuuga라는 글씨가 있었다. 이런 이스터에그라니 상상도 못했네. 히이죽 입꼬리를 올리고 유우가를 보다가, 유우가를 덥석 물었다. ....그러니까, 유우가라고 적힌 쿠키를 입에 물었다.
"하 허히" (자 여기)
그리고나서 봉지를 슥 내밀었다. 아니, 자기가 꺼내서 먹는다고 하니까 말이지. 유우가가 꺼내는 사이에 나는 이 유우가를 차분하게 맛보려고. 봉지를 건네준 다음, 빈손을 들어서 유우가(쿠키)를 잡고 그대로 끄트머리를 오물거린다. ...사실 한번에 와작 씹어먹기엔 아까워서... 초콜릿부터 다 레로레로낼름낼름 한 다음에 먹을 생각이다.
"잠깐, 잠깐잠깐잠깐. 달라고 했다? 메이사 멈춰. 진정해. 자... 그대로 봉지를 아아아아악 먹고말았어 이녀석!!!!!!!!"
메이사가 꺼내든 쿠키를 보고 절규했다. 아 진짜 먹어치우고 "아무일도없엇는뎁쇼? 무슨헛소리를하시는지? 테엥?" 하고 모른 척 할 생각이었는데! 결국 발견해서 물어버렸다. ...메이사는 그러고보면 예전부터 이런 데에 시야 스킬을 썼었지...
어찌됐건 결론은 명확하다. 나는 오늘도 메이사 조련에 실패했다... 또레나 실격이야... 실격시켜줘... 아니 진짜로 실격시키면 울 거지만 이럴 때마다 아빠 울고 싶어. 아빠 말 좀 들어 이것아.
그래, 난 시모네타를 내 쪽에서 꺼낼 땐 실실 웃을 수도 있고 여유만만이지만 당할 때에는 끊임없는 현타와 상실되어가는 남성성에 울고싶어지는 타입이다. 혹자는 이런 캐릭터성이 오히려 좋다고도 하지만 난 싫다고. 아니 진심으로 싫어. 다른 녀석들이라면 진작에 몸서리를 쳤을 거지만... 문제는.
나한테 시모네타를 꺼내는 녀석은 메이사밖에 없다는 거다........그게 날 울고싶게 만드는 거다....................... 새빨개진 얼굴로 마른 세수를 하고 "아빠 이러는 거 싫어 진짜 하지마아 메이사..." 라고 애원도 하고 한숨도 푹푹 쉰 후에야 나는 어른스럽게(?) 갈무리할 수 있었다.
"...그으래. 또레나님이 준 쿠키경단의 맛 잊지 마려무나......" "그리고, 이거는 방부제 안 넣은 완전 수제 쿠키니까 오늘 안에 싹싹 먹어. 괜히 아까워서 못 먹겠어어😿 했다간 내가 다 먹어버릴 거니까."
메이사 이 녀석, 결국 나한테 삥뜯어간 증명사진 그거 어디다 썼냐고 물어보니까 🥺 아까워서 서랍에 넣어놧어 4장 전부... 라고 했던 녀석이니까 쿠키라고 다를 바 없겠지.
뭐야, 이 쿠키를 노리고 있던 건가. 에~ 부끄러워서 감추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이미 먹어버렸지롱. 쿠키를 전부 먹어치운 후, 티배깅이라도 하듯 입맛을 쓱 다시면서 히죽 웃었다. 아, 유우가 얼굴 엄청 빨갛게 됐네. 히히.
"이 정도로 새빨개지다니 역시 유우가는 모쏠○○○다이구나💕" "에? 진짜아?! 에, 에우우.... 그냥 먹긴 아까운데에...."
히죽 웃으면서 놀리다가, 오늘 안에 싹싹 먹으라는 말에 귀도 꼬리도 바짝 섰다. 에엑, 진짜로?! 아까운데에.... 이대로 평생 보관하다가 나중에 손자한테 '이게 네 할아버지가 할머니 시니어 시즌에 줬던 거란다'라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농담이지만. ..농담은 농담이지만, 그래도 아까운 건 진짜라서. 오래 보관하고 싶지만 방부제 안 넣은 수제 쿠키니까 수명이 길지 않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으으....
"이잉, 아깝다. 그래두 어쩔 수 없네. 알았어.... 오늘 안에 전부 먹을게."
일단 좀 전에 두 개 먹고, 나머지는.. 쉬는 시간에 하나씩 먹을까. 아니, 학교에서 먹으면 한입만~ 하는 애들한테 뺏길 가능성이 있으니까, 역시 방과후까진 봉인해두는게...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예비종이 울렸다. 아, 점심시간도 곧 끝인가. ...근데 유우가 점심 못 먹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점심시간 끝났네. ...유우가 점심 안 먹었는데 괜찮아? 이따가 끝나고 하야나미 갈래?"
...생각해보면 요즘 유우가, 하야나미에 잘 안 왔지. 우리집이 싫어서 그랬던 건가. 와서 말하면 될 걸 일부러 전화로 불러내서 나오라고 하기도 했고.. 그게 이거 때문이었나. 내, 내가 싫어진 건 아니겠지...? 훅하고 치고 들어오는 불안감을 발로 차버리듯, 유우가의 말이 이어졌다.
"에... 그런 이유였어? 알았어! 약속할게! 근데 파파가 유우가를 죽일 리가 없잖아~ 정말~"
파파가 유우가를 왜 죽인다는 거야. 물론 좀 노려보거나 숫돌을 꺼내거나 뜨거운 웍을 들거나 하는 일은 좀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냥 보여주는 선에서 그친다. 왜냐면 유우가 옆엔 내가 있고, 아니면 마마가 적당히 말려주거나 하니까. 내가 없을 때, 그리고 마마도 없을 때 간다면 모를까... 내가 있는데 내 앞에서 유우가를 푹찍 한다던가 전기톱 한다던가 샷건 한다던가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으니까?
"정 걱정되면 이따가 내가 먼저 들어가서 숫돌이랑 전기톱 압수해둘테니까. 그럼 됐지?" "그럼 가는 거다? ...그래도 앞으로 수업도 있고, 간단하게 요기는 해둬. ...쿠키 하나 나눠줄게. 자, 수수료 쿠키."
직접 만든 쿠키를 수수료로 떼가는 것 같아서 웃기지만, 그래도 아예 안 먹으면 힘들테니까. 봉지를 열어 말차맛 쿠키를 꺼내 유우가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먹고 방과후까지 버티라고. ...초콜릿, 더 만들어 올 걸 그랬나. 작은 후회를 곱씹다보면 어느새 또 종소리가 울린다. 이런, 수업 시작인데!
"으앗, 그, 그럼 나 갈게! 나중에 봐, 유우가!!"
그렇게 남기고서 후다닥 교무실을 나섰다. 팔에 걸린 봉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아아, 그러고보니 이 쓰레기들도 처리해야하지. ....뒤뜰에 양철통, 아직 꺼내놨었지. 집에 가면, 유우가랑 저녁먹고나서 나중에 불태워야겠네.
/양철통을 암?시하며... 적당히 막레를 가져왔습니다🫠 시니어시즌은 짧게짧게 여러번 돌려도 좋을 것 같아서요..히히....
이것조차 후히히 네트워크가😏 다음 일상은...🤔 만우절도 좋고 시니어 여름합숙도 좋고... 아니면 시니어말고 다른 일상도 좋을 것 같고... ....언제나처럼 선택장애가 왔군요 히히,...🫠 맥주를 사오신 다음에 저희 다이스의 힘을 빌려보도록 하죠.... 저도 얼음 리필하러 잠시 다녀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