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번도. 단 한번도 마츠시타 린은, 아니 하야시시타 나시네는 그녀의 오라비를 그를 포함한 과거의 인물을 환각속에서라도 불러올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츠시타 린의 자아는 자잘하게 깨진 유리창과 별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과거의 인물들을 향한 기억속 애정이 연약한 이음매가 되어 지탱해 있어 '인간성'이라는 창으로서의 틀이나마 되어 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넌."
"그대는."
오로지 '사제'로서의 역만 남은 다른 자신이 던진 단검을 가볍게 뛰어 딛는다. 상대의 무기를 받침대 삼아 허공에서 춤을 추듯 가까스로 위태하게 뛰어 오르며 린은 무너진 얼굴로 희게 질려서 그녀를 바라본다.
"마지막 마음마저 진정으로 버렸구나."
"너무나도 어리숙하고 미련하여요."
아하하. '그녀'가 잘 빚어진 인형같은 얼굴에 걸맞게 까르르 웃으며 다소곳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겨우 과거의 흔적으로 이리 흔들리다니, 앞으로의 역경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술하여요.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일진데 정말로 어찌하면 좋을지요. 역시나...포기하는 건 어찌 생각하시련지.""
허공을 감도는 안개를 파고들어 무너진 천장으로 겨우 숨어들었지만 피하지 못한 비수에 베이고 찔린 상처가 욱신거렸다. 붉은 핏망울이 여러군데서 떨어지는 것을 본 린은 입술을 꽉 물었다.
"흠, 그 사이에 다시 은신하셨는지요."
-이 오라버니를, 아버지도 같이 버렸듯이 말이란다. 나시네.
겨우 가라앉힌 숨을 훅 들이킨다. 심장이 뛰는 박동이 바로 귓가에서 울리듯 크게 요동친다.
왜 우리를 버린거지? 나시네. 하야시시타 나시네.
나의 딸
친구
동생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마음을 비워. 저건 진짜가 아니야. 이미 죽었어. 어쩔 수 없었어. 함정일 뿐이야. 침착하자. 생각해. 어떻게 공격하고 빠져나가서 다시 또 죽이고. 그렇게 살아나서.
하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연민의 빛을 띄우고 한숨을 쉬던 그녀가 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웃는다.
"차라리, 소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 곳에서 쉬고 계시는 것은 어떻겠사온지. 구차한 사랑도 비루한 미련도 버리고 말이어요. 모조리 그런 불필요한 연들은 소녀가 끝을 매듭짓는 무녀로서 제거해드릴 터이니."
그렇게 영원토록 말이어요. 그녀는 환청으로 말을 속삭이며 지근거리에서 발을 멈추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미소만 짓는다. 여전히 귀곡성을 귓가를 메웠다. 아마도
'망념이 많이 차올랐겠지.'
감정이 소진되어 그저 계산과 몸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들려오는 환청은 다른 환각으로 메운다. 자기 자신에게 환각을 거는데 성공하여 주변의 감각을 차단한 린은 뒤의 기둥을 멈춘 자기자신의 환각으로 바꾸고 그 뒤로 숨어들었다. 그녀가 쓴 것과 같은 속임수였다.
그림자를 타고 방심한 적의 뒤로 이동한다.
그림자 포옹-순식간에 어둠을 타고 그녀의 뒤를 점한 린은 붉게 빛나는 단검을 휘둘러 최대한 간결한 동작으로, 미심쩍음을 느끼고 미소를 지운채 급소를 피한 것의 어깨죽지를 베었다.
길게 자상을 입었음에도 어여쁘게 웃는 낯의 소녀의 어깨에는 피가 아닌 짓눌려 형체를 잃은 재가 흘렀다. 안개속으로 형체가 숨어드는 것을 집요하게 따라잡아 다시 검을 들어올린 손목에 비수가 날아들어 쳐낸다. 안개가 이리저리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흐트러지고 서로의 급소만을 노린 붉은 검의 궤적이 춤을 추듯 합을 맞추어 곡선을 그린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랑도 미련도 자신에게는 불필요한것. 오로지 그 모든것을 총체한 복수만이 마츠시타 린이 나시네를 허용하는 이유. 그것이 처음의 맹세가 아니었던가. 도대체 무슨 반박을 해야할지 하얘진 머리로 나시네는 검을 휘둘렀다.
피와 재가 어둠속에 점점히 떨어진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에 린은 망념을 끌어 신체를 강화하며 검을 휘둘렀다. 상대는 여전히 재로 변하는 중에도 감정한톨없이 매끄럽게 웃으며 맞써 비수를 날렸다. 훅, 갑자기 독액이 날아든다. 순간에 벌어져 환각인지 진짜인지 분간할 틈 없어 멀어진 간격으로 그녀가 다시 은신을 한다.
"할 말이 없으신 듯하오니."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이 싸우니 자연스레 더 많은 상처를 입은 린이 차오른 숨을 내쉬며 진정하기 무섭게 검이 날아와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그 찰나로 환각으로 감춘 무너진 바닥에 발목이 낀다.
"이만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어요."
신체를 강화하여 다리를 뭉갠 돌더미를 그대로 부수려하자 다가온 소녀가 그 부분을 아예 발로 차버려 부러뜨리며 강화하지 못하도록 한다. 재를 풀풀 날리며 상체가 온통 검게 물든 소녀의 낯은 여전히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입술이 피가 나도록 짓이기며 린은 그녀, 아니 그 것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아니, 이거 하나 놓친게 있어. 미련이 불필요하다고 하였니."
아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 피식 깨진 유리와 같은 웃음이 버석하게 흘러나온다. 마치 그 날처럼 공기가 뜨겁고 머리가 핑 돌았다. 다리에는 어느새 감각이 사라지고 고통이 타인의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
"감정을 잊으니 암살자로서 신념도 잊은 모양인데 내가 가졌던 마음은 미련이 아니야."
죽도록 절망스러운 그 순간에 억지로 잡고 벼텼던 것은. 무력한 나시네 오라버니와 아버지도 구하지 못한 하야시시타의 미련한 막내딸이 짊어진 건
"마음에 남은 건 오로지 그 날의 업화니까."
남은 망념을 망념화하지 않을 정도로만 모조리 불사지른다. 자신을 태워 만들어낸 환각의 불길이 매캐하게 주변을 삼켜먹을듯 날름거리며 천지를 붉게 뒤덮는다. 불티가 뜨겁게 튀고 건조해진 눈에 피와 물이 섞여 붉은 선이 되어 뺨을 타고 턱 밑으로 방울방울 떨어진다.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그것의 눈이 크게 확장되더니 점점히 떨어지던 재가 마구잡이로 쏟아지며 휘날린다.
"그만 둬! 그러다간 당신도 무사하진 못할텐데 어리석은-"
"오라버니를...아버지를 그리 함부러 이용할 정도면..."
너는 이 기억도 도피하듯 마음속에 숨겨두었을 테니까. 그러니, 마지막 말은 맽지 못하고 차잔뜩 어두워진 시선으로 그녀가 발작하다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다 마지막 재가 날아감과 동시에 쓰러진다.
그 주인이 의식을 잃자 사그러든 불길의 공간에는 여전히 전과 같이 희게 무너진 폐허와 잿가루가 쓰러진 소녀의 주변을 둥글게 돌며 바람에 날아갔다.
의념이 눈보라의 형태를 취하며 하인리히의 마도가 미노타우르스를 쇠락시키자 윤성은 그 광경을 눈으로 담고 있었다 안그래도 신속이 낮은 윤성에게 있어선 저것만큼이나 귀찮은 마도가 없을 것 이다 하지만 또 뭐가 있을까 윤성은 미노타우르스가 하인리히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이동하자 막을 수 있음에도 그것을 놓쳤다
"하인리히씨! 그 쪽으로 갑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했지?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마도를 보여주라고 아저씨'
윤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연기하면서 미노타우르스를 뒤쫓았고 그러면서도 하인리히의 행동을 눈으로 기록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