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시즌에 나를 처음으로 이곳에 데리고 와서 견학시켜준 사람. 나의 담당으로 사바캔부터 마구로 기념, 그리고 시니어 시즌까지 함께했던 트레이너. 시니어 시즌 겨울에 아무런 말도 없이 편지만 남기고 떠나버린 사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 situplay>1597038191>1 히다이 유우가 situplay>1597038191>2 메이사 프로키온 situplay>1597038191> situplay>1597039238> situplay>1597041174> situplay>1597044204> situplay>1597046156> situplay>1597046776>
내민 손이 걷어차였다. 뿌리쳐진 것도 아니고 발로 걷어차였다는 사실이, 통증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애써 너를 올려다보면 가슴을 깊게 후벼파는 말이 귀를 파고든다. 내가, 떼써서 얻어낸 그거. .....틀린 말이 아니다.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건, 거짓 한 톨 없는데도 믿기 싫은 건 오랜만이다. ....오랜만? 처음이 아니라? 하지만 어쩐지, 지금 느껴지는 배신감과 슬픔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매번 이런 식이야. 나는 유우가를 좋아하니까, 전부 믿어주는데. 유우가는 매번 배신만 해. 분명 같이 있어준다고 했잖아. 우리 쭉 같이라고 했잖아. 마구로가 끝나도, 중앙에 가도 계속계속 같이 있자고 그랬잖아.
툭툭 떨어져 바닥을 적시던 눈물이, 세 방울 째가 떨어지기도 전에 몸이 뒤로 기울어진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어깨를 밀어서 넘기는 유우가의 발에
짓밟혀서
"——윽!"
요란한 소리가 나며 뒤통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머리도, 등도 아프다. 아까 전의 통증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재차 찾아온 충격에 머리에선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싫어. 무서워. 아파. 도와줘 누가, 유우가....
"으, 아..." "————!!!!"
어깨를 짓누르던 발이 떨어져서 조금 안심하던 찰나, 귓가에 바로 큰 충격이, 파동이 내려꽂힌다. 천둥이 정수리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친 것처럼,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파동이 밀어닥치는 듯한 느낌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은 귀에서는 삐- 하는 단조로운 이명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우가가 하는 말이 전부, 마치 머리에 직접 밀어넣는 것처럼 알 수 있어서....
"우, 으으으....." "유우가아..... 컥..."
무서워. 무서워. 아파. 귀도 머리도 등도 손목도 전부 아픈데, 제일 아픈 건 마음이라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히끅거리면서 어떻게든 숨을 들이쉬고 있었는데, 이번엔 목을 짓밟힌다. 간신이 들이쉬던 숨이 거의 끊겨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우가의 발목을 잡는다. 잡아 밀어내려고 하지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그저 바지를 잡고 매달리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 되어버린다.
"끅... 으.....끄윽......" - 알겠으면 고개 끄덕여.
고개를 끄덕이면 이 발을 치워줄까. 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흐려진 시야로 유우가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그치만, 그치만 이미 우리 혼인신고서도 썼고, 나중에.. 나중에 분명 제출할 거라고...... 진짜.. 가족이 될...거라고.....
꺼져가는 숨을 내뱉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고개를 천천히 움직인다. 좌우로, 천천히 젓는다.
메이사가 발목을 잡고 밀어낸다. 숨이 막혀 그마저도 제대로 밀리지 않고, 바지만 밍기는 꼴이 되는 걸 남자는 발에 힘을 빼지 않은 채 내려다봤다. 피가 내려오지 못해 밟힌 곳부터 이마까지 전부 시뻘개져 가면서도 죽어도 고개를 끄덕이진 않는다. 생존 본능 때문에 눈에 핏줄이 서고 눈물이 나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아니, 기어코 고개를 옆으로 저어버렸다. 주제 파악따위는 평생 안 할 거라는 양. 그렇게 목을 부들부들 떨며 젓다가, 결국엔 눈을 까뒤집는다. 손에 힘이 탁 풀려 허공을 헤치고 떨어진다.
실신하기 직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집. 그제서야 발이 떨어진다. 의식 바깥으로 블러된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진짜 유우가가 하는 말일까? 그게 아니면 환청일까?
"독하네..."
쌕쌕 숨쉬는 소리와 섞여 잘 들리진 않지만. "이러니까 도쿄까지 따라오는 거지." "민폐라고, 포기 좀 해주면 안 되나..." "하........."
담배를 내던진 남자가 기어코.
명치를 발로 내리찍었다. 욱 올라오는 구토감, 산소로 돌아오던 의식을 다시 파앗 날려버리는 고통. 늑골 깊숙이 뒷꿈치를 쑤셔넣어 위와 폐를 모두 콱 짓누르는 집요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새하얘진 머리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뻑! 하고 옆구리가 걷어차인다. 운동화 앞코가 늑골을 제대로 때렸다. 축구공이라도 된 것처럼 매정하게 걷어차였다.
옆으로 새우처럼 말려서, 배를 움켜쥐고 신음한다. 삐이―――하는 이명이 어지럽게 울리고, 언제 또 추가타가 들어올지 몰라 몸이 바짝 긴장하고서 부들부들 떤다. 온몸에 닿는 옥상바닥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왜, 왜? 유우가가 왜 나한테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열어젖힌 눈물샘에서 또 서러움이 왈칵 흘러나왔다.
남자는 메이사를 완전 무력화 시켜놓고 새 담배를 꺼내들었다. 불을 붙이고 한숨처럼 내뱉는다. 메이사에게서 시선을 두고 싶지 않은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빨아마시고, 머리를 헝클이며 내쉰다. 자기가 걷어차놓고 심란한 척에 열심이다. 그게 참 유우가답다.
숨에 연기가 닿으면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고. 얻어맞은 폐가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또 수축한다. 기침할 때마다 명치가 욱신거린다. 뺨에 닿는 바닥은 눈물과 타액으로 축축해서 비참한 기분.
남자는 때리고 속이 시원해졌는지 더 이상 손 대지 않고 가만히 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또 한 개피 입에 물고 태우고 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정리하는 걸까. 또 다른 곳을 때릴 궁리중인가?
그런 모양이다. 메이사에게 다가가 서더니, 버르적거리는 몸 위로 내려앉았으니까. 등 위에 얹히는 성인 남성의 무게가 불길하다. 코어가 다리로 잡혀버려 저항할 수가 없다. 엎드린 채라 하체의 저항도 마땅찮다. 그렇게 메이사를 제압하고 찍어누른 히다이가 말했다. 타르로 거칠해진 목소리로.
"내도 이렇게까지 하기 싫다." "누가 좋아서 아를 패겠어, 때리는 사람도 참 기분 나쁘다 이거. 알아?"
그러면서도 할 거 다 해놓고선 능청이다. 늘 그랬지. 메이사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는 자기가 제일 힘든 척.
"근데 니가 말을 안 듣잖아. 그러니까 어쩔 수가 없다. 알제?"
너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고 나면 니도 내가 미워죽겠지." "그래도 이제 엮이긴 싫을 거야. 그제?" "그니까 좀만 참아."
뒷머리에 손을 턱 올려놓는다. 뺨이 타액 웅덩이에 꾹 눌렸다. 불길한 기분. 근데 더이상 저항도 할 수 없는 예감. 두쿵거리는 심장과 들썩거리는 허리, 파닥거리는 다리가 아무 소용이 없다. 유우가는 잘 싸우니까. 남을 찍어누르는 법을 본능 단위로 알고 있으니까.
서서히. 서서히 담배 냄새가 가까워져온다......
"나도 너랑 엮이기 싫은 건 마찬가지니까."
얹힌 손이 머리채를 휘잡고 당겼다. 허리가 역으로 휘며 당겨졌다. 아까 밝혔던 목, 끈적거리는 뺨이 선연히 드러났다. 아까부터 멈추지 않는 눈물도.
거꾸로 된 시야로 유우가를 바라본다. 지치고 피곤한 유우가. 내 목젖을 맘대로 휘저어놓고 괴로워하던 유우가. 변해버린 유우가가 나에게―
(분량조절 실패!🫠) - 이러니까 도쿄까지 따라오는 거지. - 민폐라고, 포기 좀 해주면 안 되나.... - 하........
멀찍이 의식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의식이 점점 또렷해진다. 트인 숨통으로 바쁘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동시에 가슴에 푹푹 박히는 비수에 소리를 죽여 울었다. 늘 마음 속에 있었던 불안감을,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을, 애써 아래로 감추고 있던 것을 타코야키라도 뒤집는 양 따끔따끔한 가시돋힌 말로 찔러서 뒤집어 꺼낸다. 쌕쌕거리는 숨이 진정되기도 전에, 불안감이 큰 파도가 되어 덮쳐오는 것이 끝나기도 전에, 대자로 누워 숨을 몰아쉬던 내 위로
유우가의 발이 떨어졌다. 정확하게 명치를 내리찍었다.
"카학.....!!" "———끄흑, 악....!! 흐...악... 윽........."
들이마셨던 숨을 전부 내뱉어버리고, 또 다시 시야가 하얗게 샜다가 돌아온다. 갑자기 충격을 받은 위가 꿀렁거리기도 전에 또 발이 날아든다. 통증에 비명을 지르던 뇌가 도망가라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는데도,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그대로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강제로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입으로 내보내며, 두어 바퀴를 굴러 옥상 바닥에 온몸을 뒹군 꼴이 되었다. 걷어차인 쪽이, 너무 아프다. 뼈가, 뼈가 부러졌을지도 몰라..
"힉... 으... 아..아아...." "우, 아.... 흑...... 으으..."
그만두라고 사정하고 싶은데,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니라 통증과 두려움에 헐떡이는 소리 뿐이었다. 연이어서 두번이나 큰 고통을 겪은 몸은 자연스럽게 급소를 보호하기 위해 둥글게 말리고, 언제 어디서 또 뭐가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시킨다. 정작 도망도 못치고 옥상바닥에서 덜덜 떠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떤다. 무섭다. 무서워, 유우가,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유, 유우가는 이런 짓 안 하잖아.... 통증과 두려움에 헐떡이던 소리는 서러움이 섞인 오열로 변했다. 왜 나한테 이렇게 하는 거야? 난 그저 유우가가 좋아서... 유우가를 좋아할 뿐인데. 유우가는 왜 나를 속이고, 버리고 가더니, 이젠 이렇게 때리기까지....
"으, 으으, 유우가아 왜... 왜 날...... 힉...!!!"
담배냄새가 난다. 터질 것처럼 공기를 탐하던 폐가 다급하게 밖으로 다시 밀어내고, 명치와 옆구리에서 울리는 끔찍한 통증과 함께 기침이 난다. 옥상 바닥은 눈물이며 침으로 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거기에서 얼굴을 치우는 것조차 하지 못해 얼굴은 온통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기침을 할 때마다 점점 나는 엉망진창이 되어간다. 그러다가 등을 묵직하게 누르는 느낌이 났다. 슬그머니 눈을 떠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엎드린 상태에서 유우가가 올라탄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도 잘 보이지 않아서, 하지만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잘 되지 않고, 다리를 버둥거려도 소용이 없는 걸 보면 그런 게 맞는 것 같다. 맞아. 유우가는 항상 이랬다. 억지로 끌고 가서, 내가 싫다고 깨물고 발로 차도 아무 소용없이 그냥 억지로 토하게 했으니까. 그때도 싫었어. 무서웠어.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싫고, 무섭고.... 아파... 그만해.....
뒷머리에 또 유우가의 손이 턱 올려진다. 축축한 웅덩이에 뺨이 눌려진다. 불길하다. 당장 도망치라고 알 수 없는 예감이 경고를 보낸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강력한 경고다. 하지만 아무리 일어서려고 해도, 다리를 버둥거려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채를 잡혀 몸이 역으로 휘어진다. 억지로 펴진 허리가, 아까 맞은 곳들이, 머리카락이 당겨지고 있는 두피가 너무 아프다.
하지만 그런 아픔들을 전부 '따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더 아픈 것이 찾아왔다. 매캐한 담배냄새에 지독한 냄새가 하나 더 섞인다. 머리카락이 타는 것 같은 냄새와—
"————아아아아아아악!!!!!!!!!"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 뜨거워, 아파, 아파, 아파!! 아프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아파!!!!!!!! 있는 힘껏 다리를 뻗대고, 몸을 뒤집으려고 하고, 머리채를 잡힌 채로 고개를 최대한 돌리고, 귀를 이리저리 젖히고 움직이면서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제대로 닿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손을 뻗어 어떻게든 하려고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을 비웃는 것처럼, 비참할 정도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무력함을 느끼며 결국 고통에 순응해간다. 버둥대던 팔다리도, 힘주어 돌리려던 고개도, 이리저리 파닥거리던 귀도 전부 축 늘어진다. 온몸의 수분이 전부 얼굴로 나와버리는 것 같았다. 눈물도 침도 콧물도 멈추지 않아서, 웅덩이에 처박혔던 부분은 물론이고 얼굴 전체가 축축하고 끈적거리게 되었다.
"으... 끄윽....."
하하, 이거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래. 어미에게 버림받고 악어에게 산채로 뒷다리부터 씹어 먹히고 있는 새끼 가젤 같은 거. 갓 태어난 주제에 삶을 전부 포기해버리고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 언젠가 봤던 다큐멘터리에 나온 그 장면이 고스란히 내 위로 오버랩된다. 완전히 변해버린 유우가에게 짓눌려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나를 공중에 떠서 바라본다. 텅 비어버린 나의 눈과, 지켜보던 내 눈이 마주쳐서. 찢어지고 침범벅이 된 입술이 달싹이는 걸 바라보며——
"——윽!!! ........하아..."
눈을 번쩍 뜬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번쩍 뜨인 눈으로 사방을 재빠르게 살핀다. ....옥상이 아닌 침실이다. 차가운 타일 대신 푹신하고 조금 무거운 이불이 몸 아래에 깔려 있다. ...유우가의 집이다. 여긴 중앙이다. 츠나지도, 츠나센의 옥상도 아닌...... ......어쩌면 전부, 꿈이었을지도.... 그래.. 내 복장도 완전히 다른 걸. 체육복이 아닌 나시와 반바지. 예전하고 다르니까... 두리번거리던 불안한 시선이 그제야 옆에 있는 유우가를 발견했다. 담배 냄새가 짙게 난다. ...어라, 유우가..... 연초는 끊지 않았던가....
"힉.... .....유, 유우가....?"
선명하게 살아나는 꿈의 기억이, 유우가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 그거 전부 꿈이었으니까. 이, 이제 아니니까. 괜찮겠지... 조심스레 유우가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어째선지 잘 보이지 않는다. 역광이라서 그런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도....
>>552 (*별 건 없지만 그냥 스포를 걸었어요 🫠 모닝입니다 👋) 시끄럽고 길었던 시간이 지나, 머리채를 놓자 머리가 힘없이 바닥에 철퍽하고 떨어졌다. 남자는 제 귀를 만지작거린다. 하도 울어대서 귀가 아팠던 모양이다.
"...귀도 지지면 야키니쿠 냄새가 나는구나."
그리고 하는 말은 실없었다. 그게 정말이지 유우가다웠다.
"깼어?"
메이사에게 팔을 베주고는 남은 손으로 담배를 피고 있던 유우가. 담배를 입에 물더니 이마랑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들을 떼어준다. 연인처럼 다정한 손길이다. 표정은... 뭐랄까. 히죽거린다. 머리칼을 매만지는 손길은 좋지만,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으면 깨워주면 안됐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한 태도.
그러고나자 다시 손에 담배를 쥐고는 훅 가까워진다. 그리고 손을 뻗어―
메이사 등 뒤의 협탁, 그 위에 놓인 재떨이에 재를 턴다. 그 위에는 제때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꽁초가 꽤 쌓여있다.
"...왜 그렇게 쫄아." "내가 담배 하루이틀 피는 것도 아니고― 재 안 떨궈. 좀 믿어달라구." "왜, 꿈에서 담배 피다가 손이라도 데였어? 하하."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담배를 다시 무는 남자. 그리고 그걸 메이사 입가에 가져다 대고 집적거린다.
몇번인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거기엔 히죽거리는 유우가의 얼굴이 있었다. ....화가 나거나, 성가시다는 표정은 아닌 것 같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변을 좀 자각할 여유도 생기고. 유우가의 팔을 베고 자고 있던 건가.... ....이마랑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는 유우가의 손은 다정해서, 그래 역시 아까 그건 전부 꿈이었던거구나.... 그런데도, 담배를 쥔 채로 가까워지는 손에는 아까 전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려서——
"힉, 그, 그만....."
몸을 있는 힘껏 움츠리고 떨게 된다. ....하지만 담뱃불이 내 귀나 얼굴로 오는 일은 없었다. 조금 머쓱해져서, 하지만 그것보다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커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그냥.. 안 좋은 꿈을 꿔서 좀, 놀랐어...." "에?"
담배를 내 입에 가져다대며 채근하는 유우가를 멍하니 봤다. 톡톡, 입술을 두드리는 손끝에서 위화감이....
"......유우가, 이제 연초 안 피우지 않았어...?" "전자담배로 바꿨잖아. 그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내 뒤쪽에는 협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재떨이가 놓여져 있고. 아까 손을 뻗은 건 여기에 재를 털기 위해서였나. 이것조차도 위화감이 든다. 그래. 유우가의 침실에 이런 건.... ....없었다. 있다고 해도, 이렇게 꽁초와 재가 수북히 쌓여있지 않아. 왜냐하면....
"....집도, 말끔해졌잖아." "....내가......."
아까 꿈에서는 유우가가 날카로운 말들로, 제일 듣고싶지 않은 말들로 내 마음을 도려냈다. 지금은...... ......내가, 그 말들을 꺼내고 있었다. 듣고싶지 않은, 하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말들.
"........내가 없으니까, 더 잘.... 지냈잖아........"
깔끔하게 관리된 집, 연초가 아닌 전자담배, 나아진 안색과 약지에 낀 반지, 새로운 담당과 새로운 팀. 내가 없으니까, 나 하나가 사라지니까..... 츠나지에 있을 때보다도 유우가는 더 나아지고, 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같았다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일 것이다. 마음이 시큰거린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진짜로 짐짝이고, 쓸모없는 혹이었다고. 유우가가 그동안 힘들었던 것은 네가 고집부렸기 때문이라고.
픽 웃으면서 메이사에게 권하던 담배를 다시 자기 입에 물었다. 그리고선 새는 발음으로 말한다.
"그게 안 좋은 꿈인 거야? 내가 뭐... 전담피고. 너 없어서 더 잘 지내는 거." "무슨 소리야. 너 없이 내가 잘 지낼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는 유우가는 이런 말하는 게 제법 익숙해보인다. 어쩌면 여기서 메이사와 유우가는 동거하고 사귄 지 좀 시간이 지난 커플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베개를 베주던 손이 슬쩍 어깨를 스치고 내려오는 거까지.
"메이사는 늘 그렇지. 으이그 이 바보."
거의 다 태운 담배를 쭉 마시더니, 메이사에게 다가온다. 목 아래를 받쳐주는 팔이 등을 밀며 유우가 쪽으로 메이사를 데려오는 게 느껴진다. 짙은 담배냄새에 코를 찡그리기도 전에 입술을 겹치고 연기를 잔뜩 먹였다. 입술만 문지르는 가벼운 키스지만 내용물은 발암물질들 뿐. 이런 애정인 걸까.
그렇게 숨결을 나누고 나서, 일부러 쪽 소리 나게 버드키스로 마무리한 유우가가 씩 웃었다. 껴안다시피한 팔 때문에 잔뜩 밀착된 상태. 어느새 다 태운 담배는 재떨이에 던져놓은 채로 옆구리를 더듬고 허리를 감았다.
"그래, 이제 좀 잠이 깨?"
뺨에도 가볍게 입술을 누르고, 껴안아 당기는 유우가. 상상만 해왔던 넘치는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오는 모습이, 아까는 정말 질 나쁜 꿈이라고 일러주는 듯 했다.
>>558 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진짜로요wwwwwwwwwwwwwwww 아 너무 웃겨서 함빡웃었어요 어떻게 이런 개그만화 같은 일이wwwwwwwww 코피가 난 건 걱정스럽지만 🥺 이런 개그만화 시추에이션은 너무 부럽단 말이죠 재밌어 보이고wwwwwwwwwwwwww 신선한 경험을 하셨네요...
>>560 저도 웃겨서 실실 웃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진짜로.. 이왜진wwwww 심하게 난 건 아니고 살짝 나다가 금방 멎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더 웃겼어요wwwwww 심하게 났으면 다른 원인을 의심해볼만도 한데 이건.. 진짜... 고자극 때문에 그런거구나 싶어서wwwwwwww
"아, 아니. 이건 꿈이 아니라 진짜였잖아." "꿈은 다른 내용이었는데, 으.... ....기분나쁘니까 말, 안 할래...."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잖아. 유우가가 날 집으로 데리고 온 첫날부터 느꼈는데. 무슨 소리냐며 부정하는 유우가를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베개를 베주던 손이 어깨를 스치고 내려오는 바람에 살짝 흠칫했다. 이런 스킨십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은데...
"뭐야. 그게 무슨—읍..."
내려온 팔이 등을 밀고, 유우가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담배연기를 가득 머금은 입술이 겹쳐진다. 필사적으로 기침을 참으며 견딘다. 그러다 일부러 내는 것이 분명한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유우가를 살짝 흘겨봤다. ...매캐하다. 하지만 익숙한 담배냄새에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 지금 유우가는..... ....담배냄새가 나는 유우가는, 예전의 유우가를 떠올리게 하니까. 어쩐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움 때문인지, 뭐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앗, 잠깐만... 유우가...."
등을 밀던 손은 허리를 감고 옆구리를 더듬으며, 담배를 다 태우고 난 입술은 내 뺨에 와닿는다. 틈이라곤 보이지도 않게 밀착해서, 마치 연인처럼. 항상 바라던, 상상만 해오던 애정이 온몸에 쏟아져 내린다. 정말로 꿈만 같은 상황이다. 조금 전은 악몽이었다면, 지금은..... 깨고 싶지 않은 꿈일지도 모른다.
아까 전도, 지금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아. 유우가가 다정하게 할 수록 위화감은 점점 더 커져간다. 그렇지 않아. 유우가는.... 나한테 이렇게 해주지 않아. 그도 그럴게, 츠나지에서도 계속 피하고, 선을 그었고, 결국엔 도쿄로 도망쳤고. 악착같이 쫓아서 도쿄로 갔더니 소리지르고, 화내고, 억지로 토하게 하고, 비아냥거리기만 하는 걸. 아까 전엔 무섭고 무시무시한 악몽이었다면, 이건 그거다. 깨고나서가 더 비참해지는... 어떤 의미로는 악몽인 그거... ....그거일거야. 분명.
귀찮게 구는 짐짝을, 네가 이렇게 소중하게 대할 리가 없으니까. 그야... 그렇잖아. 넌 날 버리고 갔으니까. 내가... 지긋지긋해졌으니까.
"........이거..." "꿈이구나....."
기분 좀 나아졌냐는 말에, 지금 이게 꿈이라는 확신을 담은 말로 대답한다. 확신보다는 체념이 섞였다는 말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건 꿈이고, 이렇게 다정한 유우가는 꿈에서만 있을테니까.
그래, 눈이. 토하게 만들어놓고서도 괴롭게,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갈무리하던 눈이 아니다. 메이사의 눈과 얼굴을 마주보는 눈이 아니라, 지금의 유우가는― 더 아래를 지그시 보고 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아닌가? 메이사가." "그날이던가?"
밀착했던 게 거짓말이라는 듯이 포옹이 풀린다. 팔베개도 매끄럽게 빠진다. 비스듬히 누워있던 유우가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까 다정해서 그런지 매정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날이면 어쩔 수 없지― 나도 처리하는 거 귀찮고 이해해."
재떨이 옆에 놓인 건... 본 적 있던 물건. 아까의 다정함은 이걸 위해서였나, 갑자기 꿈결같던 것들이 설명된다. 그래, 유우가는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목적이라면 나한테 호혜적으로 구는 게 완전 허황된 일은 아니다. 이렇게 사탕발림하는 말을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자주 했을까. 유우가는 마치 자기가 호의를 베푼다는 것마냥 이해한다면서 빙긋 웃었다.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메이사는 간단하게만 도와주라."
"자, 손."
손을 달라면서 내민 손. 내밀 때까지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 태도. 마치 개에게 명령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 악몽이다. 정말이지 유우가가 할 법한 것들로 이뤄진 악몽.
아까까지의 다정함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유우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래. 이것도... 현실의 유우가와는 다르다. 억지로 토하게 만든 후의 유우가는 좀 더, 복잡한 느낌의 표정이었고... 이런 얼굴은 아니었다. 이런 눈은 아니었고.. 시선도.... 내 눈이나 얼굴을 봤지, 그 아래로는....
"그게, 아니라—" "—윽..."
아까 전까지 그런 다정함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맞닿아 있던 몸이 떨어진다. 매정함까지 느껴지는 모습으로 뒤돌아 또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냄새가 또 매캐하게, 퍼진다. 무심코 돌린 고개는 자연스레 유우가의 반대편으로, 협탁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재와 꽁초가 수북히 쌓인 재떨이 옆에 놓인 그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아아, 그런가. 이건 그런 꿈인거다.... 결국 악몽이다. 지금 내 앞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우가의 목적은 이거였던거야. 영문모를 다정함도, 결국은 이걸 위해서였다. 길에서 갈 곳이 없어 벤치에 앉아 있으면,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웃으며 다가오는 그 녀석들처럼. 배고프지 않냐고,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오늘 잘 곳은 있냐고 상냥한 물음과 함께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시선으로 내 몸을 징그럽게 핥아대는 녀석들처럼.
그래. 지금 빙긋 웃고 있는 유우가의 표정이랑, 똑같은 웃음을 짓는 녀석들처럼.....
"........"
간단하게 도와만 달라는 말과 다르게, 개에게 명령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내가 알아서 쓸테니 손만 내밀라고 하는 말에 숨은... 마치 도구라도 되는 양 취급하는 그...것들이....
괴롭다. 아까 전에는 신체적으로 괴로웠다면, 지금은 정신적으로 괴롭다. 나는... 이런 다정함을 원한 게 아냐.. 이런 유우가를 원하는 게 아닌데.. 왜 이런 게 꿈에 나오는 거야. 유우가에게 내미는 대신, 손으로 옆구리를 가린다. 아까 꿈에서 걷어차인 그 부분이다.
"......싫어...." "이런 건.. 싫어......"
도리질을 치면서 뒤로 슬쩍 물러선다. 꿈이겠지, 이건 꿈일거야. 꿈이어야한다. 제발, 꿈이니까 빨리 깨줘....
내밀었던 손을 접는다. 얼굴은 옥상 바닥만큼이나 싸늘한 무표정이다. 이렇게 보면, 히다이 유우가가 메이사 앞에서는 얼마나 표정을 열심히 관리해왔는지가 보인다. 실실 웃고 다니던 건 그늘진 눈을 무디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심란할 때.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쉴 때. 그럴 때 포착했던 힘빠진 눈초리가 꿈에서 재현된다. 유우가는 그러고서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다시 만들었지만, 이 남자는 그러지 않는다. 싫다고 확실히 거부의사를 표현한 메이사를 무감각하게 내려다볼 뿐이다. 그리고 두 손을 얼굴 위에 포개 삭삭 마른 세수를 한다. 주욱 끌어당기는 얼굴에 흰자가 훤히 보였다. 아래로 당겨지는 붉은 눈살도.
"내가 싫다네." "그럴 수 있지, 어. 뭐."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유우가는 일어선다.
"하긴 내가 요즘 너무 봐줬지."
담배를 문 채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협탁 아래에서 뭐 하나를 꺼낸다. 반듯하게 반 접힌 종이다. 한쪽을 잡으면 대롱대롱 나머지 쪽이 아래로 늘어지며 그 안의 내용이 보였다.
혼인신고서.
그게 재떨이 위로 떨어졌다.
"그럼 이렇게 하자."
물고 있던 담배를 집어들고, 어떤 불길한 예감이 메이사를 감싼다. 꿈인 걸 알면서도 당한다. 협탁 아래에는 상비약만 있었다가 이젠 그마저도 없단 거, 아는데. 아는데. 구타당하면서도 애타게 떠올렸던, 유우가가 없을 때 집안을 살피며 찾아나 보던, 아직도 어떻게 쓰였는지를 똑똑히 기억하는. 메이사의 허벅지 위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쓰고 서명했던 그 혼인신고서니까.
그 위에 담뱃불이 내려꽂혔다. 하필이면 메이사 프로키온이라는 이름 위였다. 담뱃불은 종이 위를 밍기는 손짓과 함께 꺼지고, 남은 건 직립한 꽁초와 그 주변의 검게 그을린 자국 뿐. 불타진 않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종종 보이던— 그것도 일부러 속을 긁어놓거나 심란하게 만들 때마다 나오던 힘빠진 눈초리가 그대로 나왔으니까. 너무 현실적이라서, 어쩌면 이거 꿈이 아니라 현실 아니야? 라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 정도였다.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옆구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쩐지 정말로, 아직도, 욱신거리고 아파...
"...엣... 뭘...."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귀가 바르르 떨렸다. 뭐, 뭘... 봐줬다니.... 중앙에 와서 지금까지 했던 일들을 저도 모르게 되짚고 있다보면, 유우가는 무언가를 꺼낸다. 한쪽을 잡아 늘어트린 그것은...... 혼인신고서였다.
재떨이 위로 팔랑이며 떨어진 그것 위로, 유우가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서...
"아......."
담뱃불에 종이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전부 불타지는 않았고, 으레 꽁초를 비벼서 껐을 때처럼 그을렸을 뿐이다. .......내 이름이, 적힌 곳에. 내 이름을 완벽하게 지워버리듯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떨면서 고개를 올린다. 눈이 마주친다. 내가 아는 것 같기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유우가의 눈과.
"......"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내밀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밀지 않으면 혼인신고서가..... 다시 쓰면 된다지만, 이제 다시 써줄 리가 없다. 그렇게나 귀찮고 성가시게 굴었으니 있던 정도 다 떨어졌겠지. 우리 사이를 간신히 이어주고 있는 건 애정도 호감도 아닌 그저.... ....그저.... 뭐지....? 얄팍한 죄책감? 지극히 수동적으로만 하고 있는 복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종이를 다시 집어들었다. 꽁초를 손으로 튕겨 치우고, 종이를 접고 접고 접어... 한손으로 집어들기 편한 사이즈로 만든다. 그러는 동안 다시 묻지도 않았다. 이 혼인신고서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건 메이사 뿐인 것 마냥. 담배로 지질 때도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었지. 그러면서 이런 능청을 떤다.
"네가 협조해주지 않으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칙, 칙. 값싼 라이터의 부싯돌이 당겨진다. 불이 치솟아 닿는 곳은 종이의 끝. 우글거리며 일그러지던 혼인신고서는 어느 새 불이 붙어 잘 타오른다. 유우가는 그걸 들고 새 담배 끝에 갖다대는 장난기를 보여준다. 유명한 영화의 패러디를 하는 거다. 혼인신고서로. 그건 가짜 돈이기라도 했는데 이건 부정할 도리 없는 진짜다.
"손만 주면 되는 일이었잖아, 메이사." "어떡해. 니가 자존심 하나 못 굽혀가 이래 됐다이가~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뻗대냐, 너는."
불붙은 담배를 쪼옵 맛있게 빨고 짧게 연기를 몇 번 뱉다가, 어느새 금방 타버린 종이에 '앗뜨뜨, 씨바.'하며 종이를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꽁초와 함께 잘만 탔다.
"이제 어떡할 거야? 너 나랑 가족되긴 멀었네." "이거 내놓기만 하면 금방 되는 거였는데 니가 마다해가지고. 이제 생판 남이잖아." "가족이 되려거든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을텐데..."
가족이 되는 유일한 방법. 뇌리에 팍 떠오르는 네글자. 유우가가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담아뒀던 복수 방식.
"기정사실 만드는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생각해? 메이사."
유우가는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꿈이라면 참 못된 꿈이다. 한 조각 순정까지 끌고와 더럽혀버리니까. 어쩌면 현실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정떨구고 나와버릴 수 있을 테니.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퍼뜩 고개를 들고 깊고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종이에 불이 붙는다. 무어라 말하려고 벌렸던 입은 이내 경악만을 호소하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불이 붙은 혼인신고서를 가지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이는 유우가를 본다. ....혼인신고서에 미련이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고, 애초에 그건 너에게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했던, 정말로 종잇조각 하나에 불과했다고 말하듯이.
아니...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쉽게 서명해줄 리가 없었으니까... 그냥 질질 짜는 애가 귀찮아서 달래려고 적당히 아무렇게나 적어버린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남이 떠들어댄 것도 아니라 스스로가 떠올린 것이라서 더더욱. 툭, 투욱. 손등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기도 전에 유우가가 느물거리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으, 으으...."
생각을 안 해봤던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시니어 시즌에도, 버려진 이후에도.... 혼인신고서는 재가 되어 재떨이에 담겨져 있고, 새로 써달라고 해도 도저히 적어줄 것 같지가 않아. 그렇다면 이제, 유우가랑 가족이 되기 위해선, 이제, 이젠 그것밖에....
"......하, 하면...." "기정사실... 만들면.... 같이 있어줄거야....? 계속...?"
이미 정상적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꿈일텐데, 분명 꿈이어야 하는데. 지독하게도 깨지 않아서. ....어쩌면 현실이고, 혼인신고서도 진짜로 없어져버렸고, 이제 남은 게 이것뿐일지도 모르니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는 더 이상 판단이 불가능했다.
아니,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려서, 이젠 도저히 아무것도....
손을 내미는 걸 시작으로, 애완동물 취급하는 듯한 명령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해낸다. 내 몸인데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진짜 가족도, 고향도, 친구들도 전부 저버리고 중앙으로 와서 하는 일이 이런 애완동물 취급이라니. 그런데도 보상으로 받는 입맞춤이 기뻐서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리고, 그런 스스로가 역겨워서, 웃으면서도 찡그린 기묘한 표정이 되어 계속해서 울었다. 목줄만 차지 않았지 완전히... 아니, 어쩌면 목줄조차 없는데도 스스로 이러고 있으니 개만도 못한 게 틀림없지. 하하. 한심해서 또 눈물이 나는데. 그런데도 클래식 시즌 때처럼, 웃어주면서 팔을 벌리는 유우가가 좋아서. 저 품에 안기면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사라지고, 클래식 때로 돌아갈 것만 같아서. 당장이라도 뛰어들려고 했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유, 유우가. 나, 나 다리가...."
누가 단단하게 붙여두기라도 한 것처럼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서, 다급하게 유우가를 부른다.
"아, 안 움직여. 진짜야. 우, 움직일 수가 없어... 가고 싶은데...."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손으로라도 잡아서 끌어보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유우가를 보면, 또 다시 웃음기가 사라진 유우가의 얼굴이— 안돼. 이러다간, 이러다간....
——또 버려지고 만다.
그렇게 떠올린 순간 엄청난 공포가 엄습했다. 온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나, 나 열심히 할테니까... 이제 유우가가 하라는 대로 다 할테니까...! 야, 약도 이제 안 먹을게. 나가서 자고 오는 것도 안 할게, 마, 말도 잘 들을게!! 아까도, 아까도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버리지 말아줘.....!" "또, 또 나만 두고 가지 말아줘...... 봐, 봐봐아. 나, 어떻게든 해볼게... 노, 노력하고 있다고.... 제발...." "제발.... 가지마아......"
울음섞인 애원을 토해내며, 맨다리를 쥐어뜯듯이 잡아당겨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했다. 어떻게든 유우가의 곁으로 가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잡아당겨서 다리도 손도 전부 피투성이가 되도록, 성한 부분이 없을 정도로 긁히고 찢긴 상처가 가득해질 정도인데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아서. 피투성이가 된 손과 다리를 보며 무력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든다. 거기엔 이미 유우가는 없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낯익은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손을 뻗는다. 못을 박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꼴사납게 엎어지면서, 간신히 손끝에 닿은 편지를 질질 끌어와서 펼쳐보면.
거기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리. 다리는 움직이나? 허겁지겁 무릎을 굽혀보면, 움직인다. 그걸 확인하고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면, 거기엔 유우가가 있었다. 아직도 초점이 흐릿한 시야로 다급하게 유우가의 안색을 살핀다. 화, 화났나? 아니, 어떻게 된 거지...? 아까, 이리 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유우가가 여기에, 이렇게 가까이....
"—유, 우가..."
아, 담배냄새가 난다. .....떨면서 협탁 쪽을 돌아본다. ...재떨이는 없었다. 그럼, 어디서 나는 거지. 잔뜩 확장된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핀다. 보이진 않지만, 냄새는 계속해서 난다. 가까이에서.... ....유우가한테서. 몸을 움츠렸다. 담뱃불에 지져졌던 귀가 다시 아파오는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귀를 잡아 감춘다. 아, 그치만. 분명 이렇게 감춰도 소용없겠지. 그때도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당했으니까. 아, 하지만...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또 버려진다. 그건, 그것도 싫어..... 어떻게 해야할지 혼란스럽다.
"으, 흑... 우읏...."
아픈 건 싫어. 하지만 또 나만 남겨지는 것도 싫어.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덜덜 떨면서 눈을 질끈 감고 우는 수밖에 없었다. 유우가가 어떤 것을 할지 두려움에 떨면서.
애를 쓰는 메이사를 남자는 무표정으로 본다. 활짝 열려있던 품은 서서히 닫히고, 결국 남자는 다시 팔짱을 끼고 못마땅하게 말한다.
"거짓말."
그냥 그런 날이 있다. 연초가 존나 땡기는 날. 아니 이게, 아주, 무척, 되게― 이런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존나. 그렇게밖에 말이 안 돼. 아무튼 그래서, 새벽에 깨서는 뒤척거리는 메이사 몰래 걔 추리닝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쌔볐다...는 거죠. 한심해? 그래, 나도 내가 한심해. 하지만 후회없었다.
아니 그게, 바다에서 메이사 담배를 10연타 하고 나니까 앓아눕긴 했는데 진짜 맛있더라고. 그 이후로 연초 금단증상이 생겨서 어쩔 수가... ...다시 끊을 거야. 진짜로. 이번만. 생각하며 베란다에서 필터 앞까지 꼼꼼히 아껴피리라 다짐했는데. 닫아놓은 문 너머로도 들리는 메이사의 소리에 결국 담배를 끄고 베란다에서 안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꿈을 꾸는지 온몸을 움찔거리면서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있었는데, 뭐랄까 누가 칼들고 쫓아오나 싶을 정도로 불안해하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메이사의 손을 잡고 주무르며 깨웠다. 이거 잘 듣거든, 손 주무르는 거. 그러더니 귀를 쫑긋하며 깨더니 두리번거리더라고.
"내가 깨웠..."
깼으니까 안심하겠지 했는데 나를 보고선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는 겁먹은 소동물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웅크리고는 귀를 닫고 훌쩍거렸다.
...당황스럽다. 그걸 넘어서 좀 난처하다. 대체 왜지? 왜 날 보고.
"왜 그래. 왜 울어." "응? 메이사, 여기 봐봐."
일단 침대 위에 앉아 메이사 근처로 슬슬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찡그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찔끔 흐르는 수준이 아니어서 손등으로 닦아내지만 그런다고 닦일 리가. 어쩐지 내가 닿을 때마다 흠칫거리면서 무서워하는 거 같은 기분도 들고.
"에구, 울지 마아..."
난감하네 진짜. 일단 협탁에서 곽티슈를 가져와 벅벅 뽑았다. 그리고 메이사 턱 밑도 닦고, 코 밑도 문질러 닦는다. 아니, 대체 뭔 꿈을 꿨길래 그 메이사가 이렇게 서럼게 우나.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대체 어땠길래... 으휴."
이렇게 울어대는 메이사의 모습을 보자니, 시니어 시즌 때 레이스를 족친 메이사가 떠올라 마음이 안 좋았다. 메이사를 껴안고 등을 다독여줄 심산으로 팔을 뻗었다.
여기 보라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야 가득히 들어오는 것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유우가의 손이었다. 머리를 잡아서 거칠게 흔들고, 머리채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그 모습이 떠올라서, 몸이 굳어버린다. 그대로 눈을 질끈 감고서 곧 덮쳐올 충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그런 게 아니라, 눈물로 범벅이 된 눈가를 닦아낼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까의 그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아서 자꾸만 흠칫거리며 떨게 된다. 눈물을 닦아내는 게 손이 아니라 티슈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그랬다. ....쉽게 잊혀지지가 않았다. 아직도 배랑 옆구리가 아픈 것 같고, 귀도.... ....담배냄새가 나니까 금방이라도 귀가, 그렇게 될까봐.....
"흐그, 으..."
무섭고 아프다, 어쩌면 이것도 아직 꿈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눈물을 닦아주는 유우가도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무서운 꿈이라도 꿨냐는 말에도 고개 하나 끄덕이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떨리는 몸을, 유난히 욱신거리는 듯한 옆구리를 감싸고 있다보면 유우가가 팔을 뻗어온다.
"—히이익, 싫어엇!!"
엄청난 공포가 되살아난다. 또, 또다. 이번엔 어디지. 머리? 팔? 귀?? 도망, 도망을, 도망쳐야하는데, 무서운데 나도 모르게 유우가의 팔을 막으려고 버둥거렸다. 팔을 쳐내고 몸을 돌리고 웅크리는 과정에서 무언가 딱딱한걸 쳐낸 느낌이 들었다. 질끈 감은 눈을 조심스럽게 떠서 보면, 유우가의 안경이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내,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큰일났다...
"아, 아.... 으...... 미, 미안.. 잘못, 잘못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았다. 억지로 내쉬고 들이쉬느라 끅끅거리는 소리가 섞인 사과를 연신 입에 올리며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엎드렸다고 해야할지, 웅크렸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귀도 있는대로 납작하게 뒤로 붙이고, 꼬리는 다리 사이로 바짝 감추고...
🥹 답레는 킵하고 일단 저녁 먹고 컨디션을 보겠습니다... 히히... 오늘 진도 많이 빼서 너무 행복하네요 🙄 정말이지 저는 축복받았다니까요 이런거 다 받아주시는 분과 일대일을 하게 되고.. 저 정말 여한이 없습니다 이런 거... 어디 커뮤를 가도 못한다고...😇........... 메이사... 종종 이 악몽을 떠올려줘...😇 내가 진짜 300년전통종갓집맏며느리 손맛으로 담갔으니까...😇
히히히... 저도..😏이런 거 혼자서 망상만 하지 어디서 할 생각은 엄두도 못냈는데 이렇게 하게 되다니... 정말 감동이 엄청 크네요....🥹 이 악몽 꾸고나서 멧쟈는 종종 유우가가 한숨 개크게 쉬고 그러면 움찔하고 눈치보고 하지 않았을까요🙄 비맞고 쉬어가던 그때도 이거 생각하고 쭈굴했을지도 모르죠.. 으히힉......
아니 근데 진짜로.. 악몽 한 번으로 신체적DV와 정신적DV 둘 다 맛보다니 너무 최고야아아아.....🥹 유우가가 손내밀면 움찔하는 멧쨔를 자주 내보내고 싶어졌어요 으헤헤..헤헤헤헤.... 화해할 때도 이 악몽 생각나서 조금 울었겠지.. 유우가 무서워😿하고 바들바들했겠지..🙄으히힉......
뿌듯하네요...🤤🤤🤤🤤🤤😇 저도 두가지맛 백탕 홍탕 DV 모두 담궈서 행복했어요 😇 그리고 멍멍쨔는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솔직히 좀 쫄았었는데 잘 받아주셔서 정말 압도적 감사한...🥰 근데정말이지... 극상의 행복이었어요...😚 다음주는 이 일상만으로 세끼 밥에 도시락까지 싸서 버틸 수 있어요
>>585 이거 진짜 고자극이네요 🙄... 하지만 오히려 역으로 멧쨔가 내민 손에 유우가가 손 올려놔서 얼떨떨하게 만들어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어요 😏 유우가는 멍다이가 공식이니까 히히...
화해할 때도 우는구나...😏😏😏😏😏 이히히 저 근데 악몽에서 딥키스가 안 나온 건 멧쨔의 경험부족도 있지만 시니어 시즌 막날의 기억을 자기도 모르게 회피해서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메이사를 껴안아 달래주려 했고, 거부당했다. 그것도 꽤나 요란하게. 팔이 쳐내진 건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메이사의 손끝이 내 안경을 치고 지나갔다. 툭 어디론가 떨어진 건 알겠는데 보이질 않는다. 그야 난 안경 없으면 눈뜬 장님이니까. 실루엣만 보이지 다른 건 전혀 보이지 않다시피한다. 어릴 때 싸움질 하다가 눈을 요란하게 얻어맞은 것 때문에 그렇다.
그 기억 때문에 인상을 확 찡그려버린다. 그 상태로 주변을 더듬어보지만 안경으로 보이는 건 전혀 찾아지지 않고, 메이사는 엎드려선 훌쩍훌쩍 끅끅하며 연신 사과만 하고 있다. 난 딱히 사과를 바란 적도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안경부터 좀 찾아? 아니면 달래놓고 생각해?
...결국 나는 엎드린 메이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으키고 껴안는대도 아까같은 일만 생길 거 같아서. 마치 강아지를 달래는 것처럼 그렇게 쓰다듬었다.
"...뭘 버려, 네가 물건도 아니고." "네가 버린다고 버려질 녀석도 아니잖아."
츠나지에 남겨두고 왔더니 기어코 라이센스를 따와서 내 집에 눌러앉아버리지 않았나. 그런 녀석이 버려진다고 말해도 농담인가 싶을 뿐이다. 비록 웃진 않았지만.
"일단... 이거라도 껴안고 진정해. 나 안경 좀 찾을라니까."
옆에 있던 내 베개를 메이사의 웅크린 틈 아래에 끼워넣어본다. 틈이 너무 좁아서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필요하면 알아서 껴안겠지 싶다. 그리고 더듬더듬 안경을 찾다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들어올렸다. ...안경테가 나갔네. 테만 새로 하나 사야겠다. 일단 없는 대로 비뚜름히 안경을 쓰고는 메이사의 동태를 살핀다. 여전히 대화하기엔 좀 그래보여 안방을 나간다.
왜 이럴 땐 캐모마일 차 같은 게 효과가 좋다잖아. 우리 집에 그런 건 없지만. 없는대로 따뜻한 우롱차를 끓여 위스키 약간을 타서 내왔다. 겸사겸사 나도 작은 잔으로 한 잔 쭉 마시고. 만든 우롱차도 한 모금 마셔서 온도도 체크했다. 뜨끈하니 속 풀린다. 우롱차인 척 하는 우롱하이 완성이오.
"메이사, 차 마실래?"
꿈에서 봤듯이 침대에 걸터앉아 협탁 위에 머그잔을 툭 올려놓는다. 식기 전에 마시면 좋으련만.
"따뜻하니까 기분이 풀릴 거야. 마시고 다시 자."
따뜻한 몸에 알콜기운이 돌아 푹 자겠지. 나도 메이사의 베개를 품에 넣고는 침대에 상체를 푹 기댔다. 껴안을 수도 없으니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네.
- 네가 버린다고 버려질 녀석도 아니잖아. - 이러니까 도쿄까지 따라오는 거지. - 민폐라고, 포기 좀 해주면 안 되나.... - 하........
"—힉, 그,마안...."
들었던 그 말이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서러운 것보다도 먼저 두려움이 불쑥 솟았다. 이 말을 들은 다음에 명치랑 옆구리를 맞았었다. 이번엔 머리 쪽으로 손이 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몸을 더 웅크리고, 머리를 더 아래로 피하고, 혀가 바짝 타들어간다. 이를 꽉 물고 언제 찾아올지 모를 통증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으면—
—머리에 닿은 손은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어잡지도, 머리를 쥐고 마구 흔들지도 않았다. 그냥 부드럽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클래식 시즌에, 시니어 시즌에 그랬던 것처럼. 눈물이 또 왈칵 쏟아진다. 버릇대로 머리를 부비기 전에 손은 떨어졌고, 대신하듯 옆에 베개가 놓인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면... 유우가는 방에 없었다. 여전히 이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래도 훌쩍거리면서 끌어안은 베개엔 유우가의 향이 가득해서. 옥상에서 발로 채일 때도, 그 뒤에 방에서 밀착했을 때도 느껴지지 않던 게 지금은 느껴지니까,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베개를 안고 있다보면 유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머그잔을 들고서. 협탁 위에 올려진 머그잔에서는 우롱차와 약간의 알코올향이 났다.
"....응..."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머그잔을 가지고 온다. 한 입 마셔보면... 혀가 데일 정도는 아니지만 속이 풀릴 정도로는 따끈했다. 하도 울어서 따갑고 아픈 목도 진정이 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잔을 기울이다가 슬쩍 유우가 쪽을 살핀다. 내 베개를 안고서 침대에 기대고 있었다. .....꿈에서와 다르게 조금 비뚜름한 안경을 쓰고.
다 마신 컵을 협탁에 내려두고 슬그머니 유우가의 옆으로 향했다. 똑같이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기댔다.
".....꿈을 꿨는데, 엄청 아프고 무서운 꿈이어서..." "그러다가 깼는데도, 또 다시 꿈이었어. ...그래서 지금도, 꿈일까봐 무서워...."
그렇게 중얼거리고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마음같아서는 바로 옆에 있는 유우가를 끌어안고 싶지만, 혹시라도 또 꿈일까봐, 아직 현실이 아닐까봐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