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끝이 파르르 떨려오고,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술렁거림이 점점 커진다. 아, 이 느낌. 싫다... 불안해... 무심코 시선을 돌린 창밖에 비치는 하늘엔 점점 구름이 모여들고 있어서, 아 설마.
"으, 으으...."
비가 오는 건 괜찮지만, 천둥소리는 싫어어.... 상상만 해도 오싹하고 몸이 떨린다. 싫어, 불안해. 반사적으로 귀를 더듬거렸다. 아, 맞다. 지금은 멘코가 없지... 어쩌지, 어쩌지. 점점 커져가는 불안감에 팔뚝을 긁어대다가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향하는 곳은 침실의 협탁. 상비약이 있던 장소다. 물론 그동안의 실랑이 끝에 집에 상비약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알고 있지만 그래도 미약한 희망 하나로, 혹시나 하는 마음 하나로 협탁을 뒤져보기로 한 것이다.
쉬는 날이라서 유우가도 집에 있지만, 요즘은 거의 말도 잘 안 섞고 있었다. 이른바 냉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약을 마구 집어먹으면 유우가가 억지로 토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유우가를 발로 차거나 깨물고. 그런 식으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같은 집에서 지내지만 소파와 침실로 나눠져, 서로 본체만체 하기가 부지기수. 그런 상황인 지금, 내가 다급하게 침실로 들어와 협탁을 뒤지기 시작한 게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까지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상비약... 약이 왜 하나도 없는 거야... 우우... 약이 없어.... 없다구우...."
하지만 예상한 대로 상비약은 하나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병에 걸리면 다같이 사이좋게 죽겠네 아주. 그런 비꼬는 생각조차 제대로 들지 않을 정도로 초조했다. 불안감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하늘은 이제 완전히 흐려져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고.... 사러 나갈까? 아니야, 나갔다가 바로 천둥이 치면 더 무서워... 절대 못 나가... 그럼 어쩌지... 어쩌지?? 엉망진창이 된 서랍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유우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혹시라도 유우가가 다른 곳에 숨겨놨을 수도 있잖아?
>>426 무릎이 아팠다. 그게 내 태도에 대한 변명이 되진 않는다만 나에게도 사정은 있었단 소리다. 나에게 무릎은 꽤 큰 문제고, 그게 욱신거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꽤 예민해진다. 원래라면 눈 감고 넘겼을 일도 한 번 곱씹고는 ‘이거 맥이는 건가?’ 하게 되고, 좀 사람이 심술궂어지는 게 있다.
그래서인가, 한동안 말도 않던 메이사가 대뜸 침실로 들어와 협탁부터 뒤적거리는 걸 보고 혀를 찼다. 반사적으로 나온 제스처였다. 그냥, 들어봐봐. 마땅히 집도 없이 몸만 중앙으로 와서는 아저씨들 신세를 지면 되니 뭐니 하길래 집에 데려왔단 말이지. 그랬더니 술에 약을 같이 먹고, 술도 애교처럼 마시는 것도 아냐 완전 고래 수준이라고. 그래서 토를 시켜놨더니 손가락을 물어뜯질 않나 무릎을 걷어차질 않나…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커녕 미안하단 말도 변변히 못 들어. 빡칠 만 하지 않냐? 귀엽게 생기면 다야?
…뭐 그건 아니지. 츠나지에서의 일도 있고 우리가 지낸 시간도 있으니까. 좀 떠나있었다곤 해도 들은 정이 있던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이렇게 몇 달째 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런 날에는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지. 얘 또 정신 못차렸네 하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고 협탁 뒤지는 걸 보고 있었는데, 며칠동안 말도 안 걸다가 하는 이야기가 “약 다른 데에 있어?” 다 보니까… 그냥 좀 울컥했다.
그래서 협탁을 뒤지던 손을 확 잡아채 당겼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좀 울렁울렁하는 표정이긴 했는데, 정신 아픈 메이사는 늘 그런 느낌이라고만 생각했다. 애초에 신경쓸 여유가 나한텐 없었고.
평소라면 바로 발끈해서 받아쳤을만한 말투와 내용인데, 지금은 그걸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아니, 거기에 쏠릴 신경도 지금은 다른 곳으로 향해서 마구 곤두서있는 상태라. 앞에 내용들은 다 쳐내고, '다 갖다버렸는데'라는 부분만 귀에 술술 들어오고 있었다. 처졌던 귀가 삐죽 섰다가 다시 뒤로 바싹 붙는다. 쓸데없이 예민해진 청각이 이 앞에서 말하는 내용보다도 저 멀리서 '우르릉'하는 소리만 먼저 포착해버린 것이었다. 제대로 치기 전에 경고라도 하듯 들린 소리에 잡히지 않은 쪽의 손을 입가로 가져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없어.. 없다고.... 이제 곧 올텐데....." "약이 하나도 없잖아..... 무서워.... 으으....."
그렇게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소리보다 빠르게 빛이 먼저 도착한다. 창밖이 한순간 번쩍 빛나는 걸 보고 나는 다급하게 귀로 손을 뻗었다.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털어내고(히또미미의 손을 털어낼 정도의 힘은 있다) 귀를 잡으려고 했는데, 그것보다 천둥소리가 조금 더 빨라서.
바로 머리 위에서 내려치는 것 같은 크고 강한 소리에 창틀도 조금 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떨린 건 내 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사실 내가 떨고 있는 걸지도. 어쩌면 셋 다 맞을지도 모르고. 멘코가 없어서 더 선명하게 들린 이 소리에 귀를 꽉 부여잡으면, 멘코 대신 박아넣은 피어스가 손바닥을 찌른다. 바닥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납작하게 엎드리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찾게 된다.
"으... 으으.. 유우가아......"
아까까지 내 손을 잡고 무어라 하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내 앞에 멀쩡히 있을 그 사람이 아니라. 시니어 시즌에 천둥이 칠 때마다 다독이고 달래주던 유우가를 나도 모르게 찾게 된다. 이젠 더는 없어서, 내 추억 속에만 남아있을텐데도.
"무서워어... 버, 벌써 왔다고오..... 유우가아...."
눈물로 번진 시야 가장자리에 또 번쩍하고 빛이 빛난다. 더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애기처럼 손을 잘근거리며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던 메이사. 결국은 바깥에서 한 줄기 섬광이 꽂힘과 동시에 내 손을 뿌리치고 귀를 막았다. 이윽고 들리는 요란한 천둥소리.
귀가 얼얼할 정도의 소리에 나도 잠깐 얼타는 사이, 메이사는 바짝 웅크려 귀를 머리에 딱 붙인 채로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분명한 패닉의 증상. 거기에 걱정스런 마음도 분명 들었지만, 어쩐지 아까 손을 거칠게 뿌리친 게 마음에 쿡 박혀서 좀 쓰라렸다.
...아까까지 핀잔만 주던 주제에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서 손을 뻗다가 주저했다. 역시 기분 나쁘겠지. 손대면 구토나 시키는 사람인데 좋을 리가. 이젠 나 좋아하지도 않을걸. 손을 꾹 말아쥐었다. 담요나 덮어줄까 하는데,
- 유우가아...
하면서 애처롭게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딱히 생각할 새도 없이 메이사의 겨드랑이를 잡고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 그제서야 보인 메이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라 조금 뭣했다. 내가 이렇게 울린 건가 싶기도 하고. 약간의 몸부림이 있었고,
"알았어. 내가 미안해. 미안해. 알았으니까..."
하며 메이사의 얼굴을 품에 묻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심해서가 아니고...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났다. 이런 거 보면 옛날이랑 똑같은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바뀌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 누가 심장에 후추를 잔뜩 뿌린 것처럼 지끈거렸다.
메이사의 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귓바퀴를 뺨에 딱 붙였다. 그대로 팔을 머리에 감싸면 한쪽은 팔뚝, 한쪽은 손으로 막아줄 수 있고 한 손이 빈다. 빈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손에 익은 위로법이다.
😿 유우가가 바뀌긴 했죠... 하지만 그건 다 멧쨔가 없었기 때문이야...🫠 있을 곳도 주고 사랑도 주고 정도 줬던 인생최애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 다 박차고 나왔으니까 🫠 그런 결정을 한 사람은 분명 어딘가가 바뀐다고 생각해요 동거하는 멧쨔한테 선도 좀 더 확실히 긋고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불쌍하면 껴안고 달래주지만 🤭 으히히..
또 온다. 또, 또.... 귀를 잡고 떨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바닥이 아니라 침대 위에 있었다. 상황파악은 잘 안 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르지만.... ....익숙한 느낌이다. 시니어 시즌에 자주 이렇게, 천둥이 치던 날에는....
"우우... 유우가아....."
히끅거리는 소리가 섞여 이상한 발음이지만, 그렇게 부르면서 파고들었다. 따듯하게 감싸인 귓가에 닿는 천둥소리는 아까와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으로 작아져 있었지만, 그래도 무서워서. 좀 더 깊게 파고든다. 그치만 이상하지. 이제 유우가, 이렇게 해줄 리가 없는데.... 그런가. 이건 어쩌면 내가 너무 간절하게 바란 나머지 환각이라던가, 환청이라던가... 그런 걸지도 몰라. 시니어 시즌의 유우가를 다시 보여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치지 않는 천둥번개라던가, 어질어질한 머리라던가.... 그래서 그런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게 됐다. 하지만 어차피 혼자만의 환상이라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겠지.
"....왜 버리고 간거야.. 나, 나 혼자서 얼마나 히, 힘들었, 는데..." "내년 마구로는, 나, 꼭 1착 할테니까, 그러니, 까..."
눈가를 닦는 손에 얼굴을 부비면서, 필사적으로 온기를 끌어안는다. 놓치지 않게.
"그러니까아..... 두고 가지 말아줘....."
지금 이건 꿈일까. 꿈이라도 좋으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고, 손에는 더 힘을 준다. 멀리서 사납게 하늘이 울부짖고, 나는 또 다시 몸을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