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형용할 수 있는 낱말과 단어는 무수히 많아. 언니는 분명 그리 말했고, 사랑은 우습게도 반듯하게 잘려 돌아왔지. 언니, 최선이었어? 달의 총기 깃들어 존귀하며 현명하기 그지없었던 우리 언니, 아우렐리아, 맥시, 그게, 그게 정말 최선이었느냐고. 바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해 구천을 떠돌 언니의 멱살을 틀어쥐고 악이라도 쓰고 싶었다. 그놈의 빌어처먹을 사랑! 아둔하기 짝이 없는 그 울림에 비롯된 저주는 인어의 피를 타고 흐르는 게 명백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그놈의 사랑이란 게 제 모든 걸 자꾸만 앗아가려는 정당성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따위 것에 달의 총기 깃들게 분명한 그 두 눈 몽롱히 뜨고 멍청한 낯짝을 한 인어들이 그렇게 많았을 리 없었을 테니까. 이번에도 그 유치한 울림 — 사랑 — 이 제게서 앗아갈 준비를 했다.
허구한 날 상스러운 말이나 함부로 지껄여대는 입술이 달싹거리다 이내 닫히는 모습 도무지 여상스레 쳐다볼 수 없어서 부러 치켜올라간 눈매에 더욱 힘줬다. 격노라는 포장지로 감싼 두개골 안에서 뇌리는 복잡하게 엉기고 얽혀댔다. 종내엔 어찌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난해하고 번잡하게. 분노, 원망, 경멸, 혐오, 증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순간 우산이 내팽개쳐져 난폭하게 구르는 소리가 사고를 한 박자 끊고. 발치에서 찰랑이는 물웅덩이가 제 발목을 붙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직후 태양열에 깡그리 메마르고 즉각 깨닫는다. 제 발목을 움켜쥔 것은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수렁. 뜨겁고 건조한 수렁이 발목을 타고 목을 틀어쥐었다가 뇌리까지 바싹 말려대서 사고가 띄엄띄엄 겨우 잇느라 애쓴다. 진짜 말도 안되는데, 정말 개같은 가정인데 말이야, 너 지금 무슨 꼴인 줄 알고는 있니? 무슨, 마치, 꼭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묵직하고 밀도 높은 심해의 혼에 태양 격의 불 섞여든 순간부터 제 영혼 지저분해지리란 것은 어렴풋이 예견했었다. 바다의 혼 희미해지고 일렁이니 뇌에 드라이아이스라도 올려뒀다가 이따금 타올라 녹아내릴 듯 엉망이 되리란 풍랑까진 예견치 못했다. 이렇게 비가 억세게 바닥을 내리쳐대도, 너와 나만이 거기에서 유리되어 있으니 희끗해지는 인어의 갖가지 능력의 원인도 너일 것임이 확고하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지, 첫 시작부터 뒤엎어놓고 이어 계속해서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댔다. 좆같은 새끼. 그러면서 감히 사랑을 입에 담아? 스미레는, 나는, 사랑에 눈멀어 경주마처럼 혹 투우사처럼 어디가 종착지인 줄도 모르고 들이박기만 하는 그딴 꼴 따위 되고 싶지 않다. 사랑이건 애정이건, 여하간 그 비스름한 것에 홀린 인어들의 말로는 대개 좋지 않았으므로. 하여, 우린 타 종족과 사랑 따윈 해선 안된다. 헌데 언니, 이것도 사랑이야? 이것도 사랑일까? 저 개자식 심장에 칼이라도 꽂아 영원히 씻지 못할 상흔을 남겨 영영 앓게 해버리고 싶은 것도? 대답 따위 필요 없어. 알 거 같으니까. 사실 모르겠어, 알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 현기증이 핑 돈다. 핏기 가신 팔목에 시푸른 핏줄이 비쳤다. 그것을 들어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하, 하고 비식 웃음을 터트린다. 낭만이라곤 전무한 사랑 고백에 돌려줄 대꾸는 냉랭한 비소 뿐이었다.
"그 애한테서 내 냄새가 나서 싫었니? 왜? 것도 사랑이라 말할래? 사랑해서 그랬어? 웃기지도 않은 궤변이지. 감히, 감히 네가!"
일족과의 이별과 한때의 지옥을 다시금 현현시킨 새끼가 감히 누구 면전에 대고⋯⋯. 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앗아가고 꺾어내고, 끝끝내 너 홀로 남아 그 모든 게 사랑이라 읊지. 나는 너무 많은 상실을 겪었고, 절반의 상실을 선사한 저 개새끼가 내게 남은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잿더미나 벌레 따위같은 절망이 내려앉고, 그럼에도 기어이 태양은 뜬다. 언제고 아침은 왔다. 빌어먹을, 젠장⋯⋯. 날빛이 뜬다고. 희망이 움트기 시작한 새카만 낙망 속에서 단박에 숨을 빼앗긴다. 빼앗긴다, 모든 것을. 장마철 공기를 가득 메우는 빗물 사이 메마른 입술이 성마르게 겹치길 반복했다. 낭만 부재한 채 그저 갈급하기만 한 키스가 빗소리에 묻힌다. 어깨 붙잡혀 허공을 배회하려던 손이 그의 와이셔츠를 콱 쥐었다가 가슴팍을 퍽 밀어내려 하며 호흡 창구를 향해 헤맨다. 산소 따위 없어도 살 수 있던 인어가 이제는 호흡 간구하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숨통 모자라 상기된 눈매 사이로 젖은 눈이 그를 향해 굴렀다. 하, 아하하⋯⋯. 비소 섞인 허탈한 웃음이 샜다.
"네가 말하는 사랑이 이거면, 나도 해줄게. 나밖에 안 남게 망가트려줄게. 그러니까 우리 개새끼, 남들한테 꼬리 작작 흔들어. 주인 심기 예민한 거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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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축제가 다가온다고 했다. 솔직히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라지만, 익숙한 풍경임은 부정할 수 없겠지.
딱히 혼자 축제를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이맘때쯤엔 내 옆에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나를 반기는 인자한 미소가 무엇에서 나온 것인지 알고 있기에, 그 가면은 위선과 역겨움 그 자체였지만 그럼에도 거절할 수 없었다.
... 단순히 축제라는 명제에서만 익숙하다는게 아니었다. 아야카미는 내가 몇번이고 찾아왔던 곳이고, 이젠 내가 머무르게 될 곳이었다. 도쿄를 떠나 이곳으로 오는 길에서 어머니께선 '결국 그렇게 되었다.' 라면서 나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셨지만... 그걸 이해 못할 정도로 어린건 아니었다.
오히려 죄송스러웠다. 당신의 짐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물론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비로소 제대로 맞추어진 퍼즐 앞에서 틀렸느니 어쩌느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되는 곳이었다. 범죄자가 족쇄를 풀고 도망친다고 범죄자라는 꼬리표가 사라지지 않듯이, 흉터가 사라졌다고 다쳤다는 기억까지 사라지진 않듯이,
사람은 자기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 그렇다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드는 의문 정도는 있었다. 자의적이었든 타의적이었든...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게 내 모든 것을 무너뜨릴만한 죄가 되는걸까?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없도록 정해졌다면, 과연 그게 나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
침묵하는 신은 여전히 나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따르라고만 했다.
... 나도 내가 투정부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른스럽지 못하단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면 순응하는 것이 맞겠지. 회피하고 부정해봤자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빨리 납득하고 인정하는게 속 편하니까.
빨라진 템포의 메트로놈, 배수구에 게워낸 감정들, 뜨겁고 쓰라리다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내 목에 매인 올가미를 벗겨내기 위해 손이 가는건 어째서일까. 나는 아직도 나를 포기할 수 없어서일까?
... 그럼에도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까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에게 걸린 주박조차도 스스로 풀어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