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오늘 하루도 조용히 마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교를 하고, 카와자토 본가에 들려 이것저것 청소를 하기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하고, 인수인계를 듣기도 하고, 요리를 만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돕기도 하고. 카와자토 일가를 모시고 있는 시라카와 가의 사명을 그는 오늘도 묵묵하게 수행했다.
야식으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오이무침을 만든 후, 그는 마지막으로 아야나에게 전달해주고 오늘은 돌아갈 생각이었다.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그는 시라카와 가에서 살고 있는만큼 너무 늦은 시간까지 있을 순 없었다. 야식을 전해주고 안부를 물은 후에 돌아가면 되겠거니 생각을 하며, 유우키는 오른손에 접시를 올리고 아야나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작은 노크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유우키는 안에 있을 아야나에게 말했다.
"아야나님. 유우키입니다. 야식을 가지고 왔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받은 적은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자신은 그녀의 집사같은 존재. 그렇기에 그는 늘 이렇게 허락을 받았다. 허락이 떨어지면 들어가고, 떨어지지 않으면 접시만 문앞에 두고 갈 생각이었다. 언제나처럼.
벌컥 하고 문을 열고 나온 카와자토 아야나의 모습은 실로 괴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반팔 원피스 잠옷 위에 어째서인지 어깨가 안보이도록 다 덮은 숄. 그리고 목을 다 덮은 스카프. 오이오이(cucumber cucumber) 정말로 안 덥습니까?????? 싶은 복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우군을 걱정 안시키려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이말이다. 활짝 웃으며 카와자토 아야나 유우키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려 하였다.
"잘 오신 것이와요. 유우군!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와요! "
후히히 웃으며 오이무침에는 전 혀 관심도 없이 유우군을 책상으로 이끄는 아야나.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상에 올려진 박스를 가리켜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어설프다고 유우키는 생각했다.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어깨와 목을 보이지 않게 감추는 그 모습에 유우키는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또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말을 꺼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녀는 괜찮다고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말을 고민하고 아끼는 와중 유우키가 자신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자 그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아야나님.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오이무침을 가지고 왔는데 보지 않으시다니. 몸이 아프십니까?!"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로 이 오이 요리를 무시할리가 없었다. 단번에 관심을 보이며 좋다고 함박웃음을 터트렸읕텐데, 요리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충분히 그에게 있어 낯선 광경이었다. 허나 이내 박스를 가리키며 선물이라고 하는 것에 유우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물론 선물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예상을 하지 못하기에 무슨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 딱 그런 것에 가까웠다. 일단 오이무침과 젓가락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야나에게 말했다.
"선물이라니. 뭔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후훗. 여기서 열어야만 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열어보겠습니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 무슨 물건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저렇게나 권유를 할 정도니 필시 뭐가 있어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근느 상자의 내용물을 바라보려고 했다.
"우이잉 몸이 아프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와요. 만약에 정말 그랬으면 스미스미 선배님이 주신 마법의 약을 먹었을 텐데 오늘 아야나는 그걸 먹지 않았으니 걱정은 No No 인것이와요. "
아무튼간에 오이무침은 나중에 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카와자토 아야나이다. 오이 무침? 솔직히 말하자면 엄 청 나 게 지금 군침이 당기긴 한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지금 유우군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열어봐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아야나는 어 서 어 서 선물을 열어보라며 열심히 파닥파닥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상자를 열자마자 나온 물건은......
아이폰 1n 프로 256GB 화이트. 네코바야시 히나의 새 핸드폰과 정확히 똑같은 디자인이다.
"그 스미스미 선배라는 분은 제가 모르는 신이나 요괴 분이신건가요? 마법의 약이라니. 이상한 것은 함부로 막 먹으면 안돼요. 아야나님."
보아하니 스미스미가 이름은 아닐테고, 이름에 스미가 들어가는 누군가가 아닐까라고 유우키는 생각했다. 그보다 마법의 약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한 어감이 강했다. 약사인 것일까. 아니면 의술의 신? 잘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마법의 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은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유우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상자 안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유우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최신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어째서 갑자기? 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지금 자신의 폰은 고장이 난 것이 아니었으며, 아직 잘 돌아가고 있었다. 선물 자체는 기쁘긴 했으나 영문이 모를 어리둥절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두 눈을 깜빡였다.
"...저기. 아야나님."
새로운 폰이 있다는 것에 기쁨이 반. 하지만 어리둥절한 감정이 반. 바로 받진 못하고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 두 눈을 여러번 깜빡였다. 이어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제 궁금증을 물었다.
"감사합니다. 선물은 엄청 고맙긴 한데... 저, 폰이 필요하다고 아야나님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요? 아뇨. 싫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 생각도 못한 물건이라서. 아하하."
혹시 이 아가씨가 어디에 가서 핸드폰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닐까. 막 이상한 거 싸인해서 얼떨결에 상품을 받아온 것은 아닐까하는 아주 약한 불안감이 그의 가슴 속에서 불을 피웠다. 그야 너무나 뜬금없고 영문 모를 물건이었으니까.
"에에잉 스미스미 선배님은 예쁘고 수영도 잘하시는 아야나의 수영부 선배님인 것이와요. 인어의 힘으로 만드신 약이니 이상한 게 아니니 걱정 놓으셔도 된단 것이와요. "
후히히 웃으며 아무튼 유우군의 선물 언박싱을 감상 해 요 유우군이 왜 떨떠름하는 것인가? 에 대해선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쨩들 대부분은 그도 그럴게 선물을 받으면 대부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고가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네코바야시 쨩의 것과 다르게 유우군의 것은 아버지께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해 달라며 부탁해서 사온 물건이란 말이다. 그것도 아야나가 직접 골라온. 애케플까지 직접 들어놓은 물건이다 그 말이다.
"아니아니 그냥 이것은 그동안의 유우군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아야나가 드리는 선물이니까요? 자아 자, 어서 핸드폰을 들어 보시는 것이와요. 무척 잘 어울리지요? "
그 스미스미 선배라는 이가 자신의 정체를 대놓고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이라면 상관없을지도 모르나, 만약 숨기고 다니는 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함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스미스미 선배라는 이에게 있어서 곤란한 일이 아닐까 싶어 유우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실제로 자신은 그 자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인어라는 사실까지도 알 수 있지 않았는가. 일단 실제로 만난다고 해도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후훗. 그런 것이라면 고맙게 받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물론 핸드폰은 아직 잘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1년은 더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왕 이렇게 선물로 주는 것이니, 거절할 필요는 없겠다고 유우키는 판단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서 주는 것인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자신에게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모를까. 핸드폰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었다. 소중하게 잘 쓰겠다는 인사를 하며 그는 핸드폰을 확실하게 챙겼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생각도 못한 그 말에 유우키는 두 눈을 깜빡이며 아야나를 바라봤다.
"후훗. 알고 계셨나요?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여러모로 일이 많았으니까요."
딱히 숨기거나 당황하는 일 없이 태연하게 유우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굳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잘 어울리지 않냐는 말에 또 한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음 감사하게 받들게요. 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굳이 챙겨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야나님. 만약에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제가 스스로 할 생각이니까요. 그저... 여자친구와의 시간이 생길테니, 자연히 아야나님을 따르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 수도 있다는 점만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카와자토 가에 대해서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어느 한 쪽만 취할 필요가 있겠는가. 제 어머니처럼 자신도 둘 다 취하면 될 일이었다. 처음엔 조금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익숙해진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에에잉 어차피 그분은 유우군을 만나면 한눈에 누군지 알아보실테니 걱정은 no no 인것이와요. 스미스미 선배님은 아야나보다 더 기운을 알아채는 능력이 뚜렷하신 분인 것이와요. 분명 보자마자 유우군이 아야나의 집사님이시란 걸 아시게 될 것이와요. "
그리고는 카와자토를 따르는 시간이 줄어들 수 있다는 소리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대답하는 아야나 되시겠다.
"유우군 어차피 지금 저희들 하교도 같이 안 하게 된 상황에서 더이상 뭐가 바뀔 일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단 것이와요. 진짜로 뭐가 어떻게 되던 저희 사이는 변함이 없사와요? "
아니 진짜로. 우리들 지금 따로 따로 하교하게 되었고 심지어 한쪽은 그냥 하교만 같이 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뭐가 더 달라질 것이라고는 솔직히 생각하고 있지 않다. 후히히 웃으며 아야나 유우군을 향해 꼬옥 팔짱을 끼려 하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려 하고는 이렇게 말해보이려 하였다.
"서로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던 주인님이 생기던 간에, " "카와자토와 시라카와의 관계는 영원히 굳건할 것이와요. " "그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문제 없을테니 염려 놓으시란 것이와요. "
자신을 알아본다고 해서, 과연 자신에게 인어라는 티를 낼지는 별개가 아닐까. 자신이 신이나 요괴라면 아마 어지간하면 정체를 밝히지 않았을거라고 유우키는 생각했다. 물론 이 또한 인간이기에 보일 수 있는 시선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상 정말로 신과 요괴라면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지도 모르는거니, 확신에 가까운 판단은 하지 않기로 하며 유우키는 말을 아꼈다.
"그건 그렇겠죠. 저는 시라카와 유우키. 시라카와 가문의 장남. 집안의 사명을 게을리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저, 그 시간의 일부를 제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허락은 구하고 싶을 뿐이거든요."
아마 그녀가 피칠을 한 그 날부터가 아니었을까. 하교는 따로 하게 되었으나 등교는 여전히 같이 하고 있었다. 과연 이후에 달라지는 것이 또 없을진 알 수 없었으나, 그녀나 카와자토 일가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는 좀 더 자신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에게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대려고 하는 그 행동을 굳이 피하진 않으며 유우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은혜와 이해심 감사드립니다. 아야나님. 그런 당신이기에 저는 카와자토를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철저한 주종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당시의 절박했던 순간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나, 이미 시간은 많이 흘렀다. 전국시대는 오래전 옛날의 이야기며, 그때의 기록이 명확하게 다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기에 두 가문의 맹세와 약속은 그때의 색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고, 유우키가 가진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카와자토 일가에서 만난 이가 카와자토 아야나. 그녀였기에 어쩌면 자신은 카와자토 일가를 모시는 사명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그 답을 알긴 쉽지 않았으나..아무렴 어떻겠는가.
"후히히, 아야나도 유우군이 카와자토를 모셔주시는 것이 너무너무 좋은 것이와요. 아야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계속 계속 유우군을 지켜주고 보듬아주는 수호천사가 될 테니까요. "
그러니까 유우군, 다치는 일 없고 평안하게 아야나와 같이 대학까지 가 주시는 것이와요~ 라는 말은 입안에만 남겨두도록 하고, 슬슬 먹을 건 먹어야 겠다 싶어서 팔짱을 풀고 오이무침을 먹기 위한 젓가락을 들려 하는 아야나 되시겠다. 아 숄에다 스카프에다 진짜 답답하다. 유우군 돌아가는 대로 바로 벗어야 겠다.
"오이무침, 오늘도 감사히 먹겠사와요? "
생글생글 웃으며 오늘도 브이를 해보이는 아야나 이다. 역시 이렇게 맛있는 오이무침을 챙겨주는 사람은 유우군 밖에 없다!
수호천사라. 사실 수호천사는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순수하게 힘으로 따져보자면 평범한 인간인 자신이 신이나 요괴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캇파족이 자신에게 달려들었을때 자신이 살아있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극히 드물다 못해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신이나 요괴가 아니라는 것이 그로서는 조금 한탄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저 역시도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할게요."
그 목소리는 아주 조금은 씁쓸한 톤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곧 표정을 관리하며 유우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 일단 비어있는 박스는 갖다버리기 위해서 손으로 챙겨들고, 그는 오이무침을 먹으려고 하는 아야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부디 맛있게 드세요. 저는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볼게요. 아. 접시는 언제나처럼 사용인에게 다 먹으면 치우라고 말을 해둘게요. 그럼 아야나님. 좋은 밤을. 평안하세요."
언제나처럼 기품있는 인삿말을 남기며 그는 살며시 문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새로운 핸드폰을 괜히 만져보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상냥하고 자상한 주인이었다. 그 상냥함과 자상함이 언제까지나 쭉 이어지길 바라며.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