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실의 문이 닫혔다. 다른 녀석들을 보내버리고 아침부터 홀로 스튜디오를 독점한 탓에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낡은 나시티로 얼굴까지 흘러내린 땀을 닦아낸다. 이제는 한 여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저녁 바람은 시원하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에 아주 약간은 제정신이 돌아온다. 고개를 돌린다. 누군가가 있었다. 조금 어지러워서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몬 야요이는 그저 그 사람 옆에서 벽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건물의 외벽에 제멋대로 칠해진 일그러져있는 문구.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에 무언가를 그리듯 그려진 과거의 이름이 보고싶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몸에 전혀 힘이 실리지 않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무언가가 되어간다. 알고 있다. 이건 그냥 이 육체에 남은 얼마 안되는 기억이라는 것 정도는. 곧 소화되고나면 '누군가'의 것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망가진 앰프 위에 앉았다.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쫓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옛날 일이다. 내가 떠올릴만한 것 따위 남아있지 않은, 이미 사장 스스로가 지워버린 과거의 흔적이었다. 멍청하게, 남에 대한 것은 생각한 적도 없으면서.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
유명한 밴드의 흉내를 내듯이 그려놓고는 결국 자기들의 이름을 적어두지는 못하는 겁쟁이. 그래서 이렇게나 가려둔 거겠지. 이렇게 하면 자기의 치부를, 잘못을 지워버릴 수 있을 줄 알고. 그 누구도 달래주지 않을걸 알면서. 돌이키지 못할 옛날 일들을 홀로 떠올리려 한다. 멍청한녀석.
그 모습에 흠칫 거리며 잠깐 거릴 벌렸지만, 카가리는 그저 진을 외우면서 서서히 원래 모습을 취하기로 하였다. 공포에 질려, 두려움에 떨어, 머리가 뜨겁게 달궈진 지금에서 내가 카가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정리해야한다. 지금이 어쩌면 마지막 남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말을 꺼냈다.
" 당신은 의도적으로, 사토 가문의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게 아니야 "
지금까지 살펴본 야마후시즈메는 인간세상에 무심하다. 기본적인 지식도 부족하다.
즉 나의 형 사토 레이지를 미치게 만들고, 그런 활동을 유도할 수 없다. 분명히 사토 레이지가 미쳐버린 것은, 무카이 카가리의 피 때문이 맞다. 하지만 그 미쳐가는 와중에 그런 활동을 하도록 유도한 것은_
" 형을 미쳐버리게 만든건 다른 누군가겠지. 어쩌면 다른 사토 가문일수도 있고, 그렇기에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
결국 사토의 망령들도, 눈 앞의 이형. 야마후시즈메가 원인이니까..
" 그리고 그 자식. 갑자기 찾아온 녀석, 멋대로 저주 따위를 걸어두고 갔어. 블랑에 걸려있는 저주도, 나에게 걸려있는 불태우는 저주도..당장 풀어.. "
고개를 돌리면서 흰 볼을 부풀리는 네코바야시.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어둡게 비치는 얼굴. 못마땅한 목소리. 축축한 해초 씹는 양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 검은 눈동자는 제 발치를 향하는데. 못내 서운한 눈초리는 땅바닥을 뚫어내고, 또 한번 작게 내쉬는 한숨이 지저분한 부실 바닥에 내리앉기도 전에. 옆으로 향하는 걸음. 깜빡깜빡 켜진 불빛에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다.
"잔소리하지 마요. 눈부신 건 싫다고요."
불평스레 대꾸하는 네코바야시, 그대로 뒤를 돌아 준비해둔 찻잔, 접시에 올려진 뜨거운 것을 조신하게 가지고 나온다. 전에 앉았던 자리 그대로, 내려주면서 괜히 쭈뼛한 시선을 가지고 말없이 올려보는 고양이 닮은 눈.
차를 미끼로 사용하기에 차를 말한 것인데, 그게 조금 그녀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유우키는 자신의 머리를 천천히 긁적였다. 어둠 속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표정은 유우키의 눈에 그대로 비쳤다. 뭔가 섭섭한 것이 있는 표정.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는 느낌. 그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유우키는 굳이 깊게 추측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자고로 어설프게 추측해봐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보다는 빛이 낫잖아요. 어두컴컴한 곳에 조용히 혼자 있으면 괜히 울적해지는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는진 모르겠으나 제 생각을 말하며 유우키는 그녀가 가지고 오는 찻잔을 바라봤다. 향을 조용히 느끼면서 그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맛이 좋냐라고 하면 조금 애매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향도 맛도 조금 덜한 것 같은 그런 맛. 맹물 느낌이 나는 것 같은 그런 차를 느끼면서 그는 일단 침묵을 지켰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가 한번 차를 내볼까요? 이렇게 대접받았으니, 네코바야시씨에게도 한번 대접해주고 싶어서요."
하지만 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향도 나고 있었고. 대접받은 것에 악의는 느끼지 않았기에 그는 차분하게 웃음지으며 그녀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여기서 차를 내자니 남의 부실을 함부로 쓰는 것은 민폐일 수 있지 않은가.
"괜찮다면 언제 보온병에 담아올게요. 아무튼 고마워요. 차를 대접해줘서. 후훗. 차도 꽤 좋아하거든요. 물론 다른 음료수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비가 오는 날에는 차가 제일이죠.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쭈뻣한 시선으로 볼 거예요? 이전처럼 편하게 적대하는 느낌으로 대해줘도 되는데. 그쪽이 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았거든요."
마치 지금은... 뭔가를 숨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미소지었다.
음악의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그만 놀라버린 소년은 햐악, 작은 호흡을 내뱉고 만다. 문구에 신경이 팔린 사이 다가오는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해서 놀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와- 나 찐자로 심장 뜨러질뻔 했디, 옥상 슨배임이네예..."
어지간히 놀라버렸는지 반가운 인사 대신 살짝 약오른 표정이 되어 잡동사니 위에 올라선 선배를 바라본다. 멍청한 문구가 아니냐고, 해서 다시 바라봐도 그 의미를 알수가 없어 바보처럼 베시시 웃어버리고 만다.
"히.. 지는 영어 잘 몰라가 도통 무신 말인지 모리겠슴다-"
네바 마인도 쟈 보라꾸, 네바 마인도 쟈 보라꾸, 꼬부랑 글자를 꾸역꾸역 따라 읽는 시늉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춘다.
소년은 회백색 벽과 문구를 가리는 잡동사니에 등을 기댄채 버려지거나 망가진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망가진 다이얼 사이로 실밥처럼 튀어나온 전선이라든가 산산히 흩어진 퍼커션, 금이 가고 녹슨 일렉 기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것들이 이제는 빛을 잃어 버려진 몰골이 조금 쓸쓸해 보인다.
무武의 격 지녔기에, 경기 규칙으로서 제한을 두지 않은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라는 회상도 이번으로 어언 몇 번이던가. 그렇다 해도 정말 그 무엇에도 참가하지 않기엔 대결의 격도 겸하는 신으로서 몸이 근질거려 안 되겠고, 이 소소한 경기에는 참가할 수 있을 듯하니 기분도 제법 후련했다. 뽑아 든 제비에 쓰인 글귀를 보기 전까지는.
「여름기간 한정 유바리 멜론맛 칼피스」
……이걸 어찌 구해? 그런 생각 들기도 전에 몸부터 움직이는 반응속도가 더 빨랐다. 무엇이 되었건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무신에게는 물건 '빌리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니.
달리는 속도만을 따지자면 무신을 따라올 자 없다 단언할 수 있으나,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시간이 꽤 들고 말았다. 결승점을 통과한 시간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 만족스럽지 않지만 별 수 있나. 무신은 가져온 물건만 보여주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누구를 특정해 지목하기엔 짐작 가는 자도 없고, 지목 않는 것 또한 전략이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