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러시아에 비하면 따뜻한 건 맞을테니까요. 일본에도 겨울은 오니 아주 추울 정도는 아니라 괜찮아요." 하기야, 그의 원래 고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온이 낮았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서울의 겨울은 아마 러시아의 봄 정도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러시아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국가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흰 눈으로 온 사방이 덮힌 척박하며 야생이 살아 움직이는 겨울의 나라가 그녀의 머릿속 러시아의 이미지였다. 물론 어렸을때 러시아의 사회상에 대해 아예 공부를 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나이도 어리고 후계자도 아니였던 만큼 그저 상식삼아 붉은 곰 예카르의 모국이자 꽤 폐쇄적인 교육방침을 가진 가디언 아카데미가 존재한다. 정도만 대강 알고 있었다. 유의할 점이라면 정보전쟁의 존재일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배려에 알렌이 진동벨을 가지러 간 사이 조금 뾰루퉁해진 얼굴로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그의 뒷모습을 쳐다본다. 이내 그가 뒤를 돌아 다시 돌아오기 무섭게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는 척을 한다.
'그를 싫어하지 않지만.' 아니 어쩌면 꽤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도 이 다정한 순간이 좋아서 그저 생각없이 흐르는 대로 행동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해버렸다.
척박한 어머니의 대지 러시아에서 아무런 연고없는 고아 소년이 어떻게 자랐을지는 굳이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려진다. 그 끝에 만난 구원이 얼마나 소중했을지. 그의 다정함을 느끼는 순간에 린은 얄궂게도 제가 사랑하는 그 다정함이 어디에서 왔을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이 자신과 얼마나 다를지도.
'아,싫다.'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러시아는 꽤나 추웠을것 같아요. 저도 몇 년전에 항상 이때쯤이면..." 멍하게 따뜻한 기운에 젖어 비관적인 생각을 이어가다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추억을 꺼내든다. 단 한번도 심지어 지금 제 앞에 앉은 당사자에게도 자세하게 그때의 심정을 말해본적은 없었다.
강산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같은 것을 봐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은 다르기 마련이니까.
"제주도에서요? 음...사람이 많이 죽었죠."
식인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목소리에 조금 기운이 빠진다. 강산은 주변에 다른 사람이나 듣는 귀가 있는지 몇 초간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살피고, 그것도 모자라 방음 배리어까지 주위에 치고서야 마저 입을 연다.
"뭘 어떻게 한 건지 하필 제주도 주변의 해양 게이트들이 난리일 때 되살아난 식인귀가 제주도에 들어오고. 그 이후 정체를 숨기고 있던 식인귀를 호의로 받아줬던 사람들이나 그 주변 사람들이 차례대로 당하고...그러다 나중에는 연쇄 실종 사건의 범인을 쫓던 가디언들과 헌터들까지 차례로 당했었죠. 심지어는 제주도의 큰 길드 하나가 전멸하기에 이르렀더군요. 저희가 도착했을 땐 저희에게 의뢰를 줬던 정보원분도 이미 당한 뒤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즐겁게 할 수 있을리가 없긴 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였지만 인간이 아니라 식인 맹수였습니다.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어요."
여전히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쥐고 놀듯이 태연하게, 웃듯 말듯 그리 행동하면서도 정작 이 상황 속에서 린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는 친구니까. 친구를 위해 즐거운 시간을 위해 여기까지 왔을텐데 자신은 제멋대로 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기실, 그녀는 언제나 저의 심술속에 갇혀 제멋대로였다.
"...그때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마치 이렇게 추운 날에 길거리를 오가다 온 세계가 저를 저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니 제가 상대의 좋지 않은 기억을 불러왔음을 알며서도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버린다. 비록 나는 당신을 그녀처럼 인도할 수도 앞에 서서 이끌어 줄 수도 없지만,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으로 함께 걸어갈 수는 있을테니까.
어느새 카운터에서 차를 받아든 알렌의 옆에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직원에 눈이 휘둥그레지던 말던 린은 생긋 웃는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런 추운 날에 한 명이라도 같이 있어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로 기대어 체온을 나눌 믿을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아직 어렸던, 두번째 배신을 당하지 않은 나시네는 모포를 두르고 제 손을 호호 불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옆에 기대 졸던 이가 거짓 온기에 골아떨어져 얼지 않도록 손을 잡을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지금은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가끔 장난질을 받아줄 사람도 있으니까요." 종업원이 내민 녹차를 제가 가로채고서 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아 한 걸음 테이블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 미소를 짓는다.
"언젠가는 이런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있겠죠. 그렇지 않나요?" 먼저 나아가는 인도자가 아닌 곁에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서겠다며 그녀에게 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츠시타 린은 그리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질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대신 이런 식으로 실컷 속마음을 가리다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릴 뿐이다. //8
토고는 보물상자에서 나온 것을 보고선 말한다. 그래도 평평하게 생긴 것이... 물수제비 뜨기에 좋지 않은가? 토고는 휙 돌멩이를 가로채서는... 매의 눈..! 각도 좋고! 거너의 감 OK! 돌을 수평으로 던진다!! 탓-! 타- 타- 타- 타-! 돌멩이는 빠르게 회전하며 물 위를 촐랑거리듯이 뛰어다니며 나아갔고 여덟번 정도를 뛴 뒤엔 자신이 왔던 바다로 가라앉아 버렸다. 퐁당. 거리는 소리가 제법 기분 좋다.
"...내 멋대로 썼는데 괜찮제? 그냥 돌멩이...니까."
아, 그래도 돌에 맞았는지 생선 한 마리가 꼬르륵 거리며 올라와 배를 내밀었다. 죽은 모양이다....
마침 바닷가니까 넓직한 돌만 찾아서 바닷물에 씻으면 된다. 칼...은 없지만 말이다. 하기야 의념각성자니까 그냥 생으로 뜯어 먹어도 기생충에 감염되거나 그러진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 정신력이라는 게 있어서 생으로 뜯어 먹으면 좀;;; 비위가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지. 토고는 마침 불을 피우는 기술도 가지고 있고, 아, 그냥 강산의 마도로 알아서 다 할 수 있지 않나?
"바람의 칼날로 배 잘라가 내장 물로 씻어내고 불로 구우면 끝이네. 와따, 마도 사기 아니가???"
조미료는..아, 마침 별커피에서 훔쳐온 설탕과 정육점에서 고기 사고 받은 솔트허브가 있다. 일회용으로 포장되어 있는 그거. 그거 쓰면 되겠네.
토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낚시용품점을 포착했다. 그냥 저기에 가서 구워달라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도 있고... 여긴... 아무래도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 같고. 정 못해도 주방만 좀 빌리겠수다 하믄 그만아이가? 토고는 그리 생각하고는 낚시용품점을 가리킨다.
"저기 가서 구워달라 말 하자."
"내 한 마리, 니 한 마리 하면 딱 될 것 같은데? 내 처음에 낚은 거 있고 그 다음에 돌멩이로 죽인 거... 있으니까. 양심상 멀쩡한 건 니가 무라. 돌멩이 맞은 건 내 묵을게."
"활발하네요. 정신이 없기도 하고 활력이 넘치기도 하고." 순간 울컥하여 툭 내뱉은 진심의 조각이 언제였냐는 듯 린의 표정은 평안해 보였다. 잔잔한 얼굴로 알렌의 말에 맞추어 밖을 바라보다가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많이 어색하시긴 했어요." 이런 저런 메뉴를 주문하고 카페에 적응하는 중에 사소한 소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굉장히 어색하게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니며 어수룩하게 행동하던 그가 떠오른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지만요." 설레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오히려 지금은 제가 어색하게 굴 것 같았다. 동요를 보이기 싫어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신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평소 어울릴때는 그리 생각히지 않고 말이 잘 나왔는데 자리가 마련되어 잔잔한 분위기에서 마주하고 있자니 오히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인 것과 다르게 정작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디저트를 시킬까요?" 그저 편안하게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그제서야 린은 자신이 여유 없이 달려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와 이런 자리를 가져본적이 별로 없어 제가 그의 태도에 어색해 하는 것도. 그에 묘한 불안감으로 툭 얘기를 던져버린 것도.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