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신앙은 본디 너와 같은 주장으로 이루어진 기만을 뜻했지. 올바른 방식의 기만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아. 내 신앙이란 그 가면에 기대어 이루어진 죄책감들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있었으니까."
서양에서는 그것을 페르소나라고 하던가. 결국 자신이외에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사회의 질서, 규율에 맞는 가면.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결국 그 가면덕택에 본성을 죽이고 사는 사람들이 만든 신앙이니까.
"하지만 민낯을 드러냈을때, 순진하게 다른 사람을 폄하하지도않고, 이익을 위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이 있던가. 그건 비단 인간만 일반화하는게 아니야."
너희 모두 웃는 얼굴을 하고서 뒤에서는 비수를 가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잖아.
"신은 인간을 본뜬 것. 인간의 더러움은 요괴로 본뜬 것이지. 그래서 딱히 인간에 한정되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야. 너희에 발전에 시기와 질투, 분노같은 것이 촉진제가 된다는 사실도 부정하지는 않지. 다만 이 나라만 하더라도 전쟁이라는 광기에 물들지 않았던가. 그것도 시대를 거듭해서. 꼭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도아니야. 각자의 이익만으로도 어떤 존재든 다른 모든 것을 같잖게 보는건 별반 다를게 없지."
지독하리 만큼 염세주의적이고 인간비판, 나아가 지성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를 설파할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제 믿지않으니까. 믿어야할 대상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너라는 인간도 법이란 규율에 통제되고 있을뿐이지, 누군가를 해함으로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규율의 금기를 깨버릴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 그런 이야기지."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것이, 이익을 위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건가요? 저는 누구나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속으로만 생각해 악용하여 퍼뜨리지 않고, 그릇된 방법으로 욕구를 이루지 않으려 애쓸 뿐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전쟁이라는 무서운 일도 있었지만... 바로잡으려 하고,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되잖아요."
다만, 생각이 왜 그렇게 망가졌어요?라는 말은 감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어요. 폭력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대가를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
"그건 굉장히 탁상공론적인 이야기지. 고쳐쓸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고쳐쓸 수 없는 것도 수없이 많으니 백날 같은 일을 방지하지 않는다면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그렇게 두번의 큰 전쟁의 업화가 있었는데도, 여전히 세상어디에서는 불길에 휩싸여있기는 매한가지잖아."
차라리 자기가 불행하다고 해서, 남에게 불행을 전가하지 말라고 했다면 정론일터였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것을 올바르게 고쳐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게 그렇게 망가진 발상이냐고 한다면, 지극히 냉정하게 나는 세상을 직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네 자기 보신을 위해서 내게 머리를 조아린 시점에서, 네가 넘긴 정보가 나에게는 불신의 싹으로 진화하겠지. 그날 참극의 범인으로서 벌을 논하고 싶다면 자신의 처지부터 생각하는게 어때."
>>407 실수했다. 주목, 회양목, 남천, 갖가지 풀과 나무 향을 불사르는 화마는 대양마저 바닥을 드러내게 할 화기를 지녔음을 간과한 점. 제아무리 신의 이름이 지상에 추락했대도 신과 요괴의 간극은 무척이나 좁히기 어렵다는 점. 뿐만 아니지. 일이 잘못되어 돌아감을 인지한 것은 최근이나,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실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르겠고. 불현듯, 벼락같이 깨달았다. 돌다 못해 삼백육십도 돌아버린 미친놈한테 걸렸구나. 덫에 걸리고 만 거야. 인간에게 느꼈던 무력감과는 질 자체가 달랐다. 수조에 처넣어진 금붕어처럼 먹이마냥 던져지는 자비를 꼴딱꼴딱 먹어야 하는 신세. 허나 이대로 고개 숙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스스로가 고작 이까짓 것으로 헤엄치길 관두는 한심한 작자가 아님을 안다. 살 정도는 내어주리라, 그러나 언젠가는 뼈를 취할 터다. 푸슬 웃는 낯짝 표정 부재한 채 가만 응시한다. 욕망은 무엇이고, 탐욕은 무엇이기에 생의 기로에서 매번 제 발목을 틀어쥐는지. 매번 제게서 자꾸만 앗아가는지. 밤은 고요히 찾아오고, 파도는 삽시간에 몸을 부풀린다. 반대로 낮은 찬란하고도 화려하게, 황혼은 느릿하게 내려앉는다. 너는 그렇게 내 위로 내려앉았지. 일광에 짓눌리고 깔려죽든지 말든지, 그렇게. 뭐가 그리 즐거우니? 잔뜩 날 세우며 이 박아넣는 년 거듭 가지려는 게 이해가 안 가서. 이해하길 단념하고, 그저 제 격이 숨 막히게 뜨거워서 미쳐버린 거라고.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손아귀에 쥐여진 신의 목. 희고 매끈하다. 풀썩 꺾이면 볼만할 만큼. 당장이라도 경동맥에 초승달을 새겨주고 싶을 만큼. 힘주어 조르고, 당긴다. 죽기 싫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손아귀를 팽팽히 하며 넘어오는 숨을 받아들인다. 진득한 피가 엉긴 지저분하고 추잡스러운 입맞춤. 붉은 피가, 붉은 눈이, 붉은 빛이, 붉음이. 붉음으로 물들여지는 감각, 마비되는 이성 속에서도 달빛으로 빛나는 첨예한 에고만은 눈 감지 않는다. 가졌음 가졌고, 빼앗겼음 배로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 여즉 꼿꼿했으니. 조였던 손힘이 풀리고, 눈매가 나릿하게 뜨인다. "줄게." 영원 같던 찰나, 순간 같던 기나긴 투쟁에서 끝끝내 토해낸 항복 선언. "허나, 언젠가 곱절로 돌려받아갈 터이니. 그게 무엇이든." 이어 선전포고. 전쟁은 이대로 끝나지 않음을, 월색 입혀진 낯으로 나지막이 고한다. 인어를 주체로 한 동화에서, 아둔한 인어는 왕자에게 차마 칼 꽂지 못해 물거품으로 돌아갔지. 그러나 하늘과 바다에 있는 내 혈족들이여, 당신들의 누이는 그리 멍청하지 않으니. 당신들이 쥐여준 은빛 칼, 언젠가 기필고 태양에 꽂아넣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