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혈마냥 붉게 물든 눈동자, 위협적으로 바라보는 눈빛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 살발한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네코바야시.
"'계약'이라고요?"
아야카미 학원에서 눈에 밟히는 일을 파악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은 지금껏 해왔던 풍기위원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포목점 주인장이 그런 말을 해오는 것은 상정에 없었다. 여전히 의문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며 지금이라도 도망쳐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였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냐 물어오는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방금처럼 목이 메인 듯이. 말을 꺼내고 싶은데 가슴이 꽉 메인 것처럼 말이 나오지가 않더랬다. 이곳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말을 하려 할수록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목을 죄어오는 듯한 느낌에 오기로라도 더더욱 '그'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지만, 결국 스스로 숨을 참다가 견디기 힘든 고통에 다시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듯 '하악'하는 소리를 내며 분하다는 듯 눈물 맺힌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침 9시. 이곳은 동네 작은 병원. 개원한지 꽤 됐는지. 누런 타일에 먼지 낀 창문은 전부 나무틀이고. 카운터 앞에 놓인 안내문도 빛이 바래 글씨가 흐릿하다. .....여러모로 세월의 흔적을 엿볼수 있다.
한산한 대기실에는 마스크를 거의 눈까지 올려쓴 히데미가 앉아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걸린다고 했는데. 환절기에도 고작 체육복 한장으로 돌아다니더니 결국 사단이 난것이다. 양 옆으로는 나이 지긋한 노인분들이 앉아 낡은 TV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바둑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
"에, 에, 에, 에─ㅅ치!야...........!"
기를 모으듯 단조로운 입소리 끝에 격한 재채기 한방!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들이 놀랐는지 느긋하게 반쯤 감겨있던 눈이 똥그래졌다. 꼬맹이는 민망한듯 베시시 웃음을 흘리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이름을 호명하는 간호사 아주머니. 뒤따라 진료실을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면 머지 않아 안에서 '으야아아아아아ㅏㅇ아갹─────!' 호들갑스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도망치듯 문을 열고 나온다.
KFC 할아버지를 닮은 의사선생님의 푸근한 인상에 그만 당해버리고 말았다. '감기라구용? 고럼 주사를 맞아야겠넹 잉~' 이라고, 바로 돌변해버릴줄 누가 알았겠냐고. 찌릿찌릿한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터덜터덜... 눈물을 찔끔하며 카운터 앞을 지나던 찰나. 벽에 놓인 신장계에 잠시 시선이 뺏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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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아주머니의 손을 빌려 신장계 위에 올라선 히데미.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정수리에 점점 가까워지는 턱을 올려다본다. 잠시후 '똑' 멈춰선 턱이 가리킨 숫자는.... 「158cm.」
"오오오─ 엄마야 말이 참말이어따─!!!"
일찍 코야 하면 요정들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나사를 끼릭끼릭- 풀어주고 사라진다고. 그래서 꼭 엄마야 말처럼 일찍 잤는데. 확실히 그 보람이 있다!! 신이 잔뜩 난 꼬맹이는 아주머니에게 땅콩 캔디를 하나 받아들고 우당탕탕 요란하게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바깥 풍경은 어느덧 무성해진 푸른 잎과 쨍쨍한 햇살. 그리고 푸른 하늘. 또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평소대로였다면 퉁명스러운 반응 나오고도 남았겠지만, 저를 신앙한단 말에 귀찮음 느끼기엔 신앙 하나하나가 아까운 상황이라. 결국 무신은 떨떠름한 표정 지으면서도 이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몸이 무슨 신인지는 알고?"
그래. 동경하는 마음 또한 받들고자 하는 마음이니 뭐가 되었건 신앙에 까다로운 기준 둘 생각은 없다. 다만 딱 하나 확실해진 것만은 하나 있었다. 이 요괴가 제게 신앙 지닌 한, 신앙이 필요한 무신은 이 요괴를 귀찮다며 죽이거나 내치기 어려우리라.
"알도 일단은 배에서, ……아니, 이 이야기는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대답만은 대충 해도 되겠다. 무심하던 시선에 황당함 서리더니, 잠시 허공을 향했다 이내 아야나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견지하고픈 자세를 물은 것이 아니래도. 기실 아야나의 접근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본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법을 닦고 스스로 진리를 구해야 하는 법. 제 나름의 대답을 계속해서 내는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문제는 옛 호법신에게 있었다. 이름까지 잃은 마당에 참구參究 제대로 행할 리가 있겠는가. 이제는 武에 더욱 치중된 신께서는, 본래는 차곡차곡 짜임새 있게 마주 나눠야 할 마땅할 수많은 구결을 생략한 채 결론부터 툭 뱉었다.
"생에는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니. 우주가 생겨나 이 세상이 만들어진 데에도, 네가 알 안에 생겨나기도 전 수정된 세포가 낱낱이 분열하던 규칙성에도, 그저 현상이 있을 뿐 그리해야겠단 의사는 없지. 생겨남 그 자체에 이유란 없다, 존재가 주어졌을 뿐. 욕망도 이와 같도다. 그저 이곳의 모든 것들은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욕망하는 존재로서 태어났기에 욕망함이라."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명이기에 욕망하고 즐거워하며, 그렇기에 괴로우나니. 생즉고生卽苦이며 이야말로 육도六道의 총칭과 통할지라. 간단히 마무리하고선 물끄러미 아야나를 바라보았다. 알아들었느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