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무책임한 약속의 연속, 미래 부재한 기약, 어느 때고 물안개처럼 흩어사라질 허상. 달에 바쳤던 언젠가의 처절한 기도들이 떠올라버린다. 배 까뒤집고 뜨던 인어의 사체들, 달이 차기 전 돌아오겠다더니 훗날 말라비틀어진 비늘 조각으로 돌아왔던 내 언니. 삶이 최초로 낙하하던 날로부터 언어같은 무형따윈 믿지 않기로 했다. 하여, 혀뿌리 위에 올려놓는 것들조차 한없이 가벼우며 독약 올리기에도 스스럼 전무했으므로, 나와 남 구분 없이 마구 함부로 해쳤다. 내 것들을 해쳤으니 나도 너희들을 해치겠노라며. 너와 내가 달 뜬 밤에 악을 썼다가 낭만을 속삭였대도 아무 의미 없는 짓이지. 근묵자흑이라더니. 덧없음을 깨닫는 순간 뇌를 표백제에 담갔다 뺀 듯 새하얘졌다. 머리가 한없이 가벼워졌다. 호숫가의 물안개처럼 하룻밤이 지나면 사라질 백주몽에 모든 걸 흘려넘기고 꿈에서 깰 셈이었다. 그랬는데. 이, 주제도 모르는 빌어먹을 자식이⋯⋯. 미친 짓도 정도가 있다. 이쯤하면 슬슬 피로할 법도 한데, 과연 개새끼라 힘이 워낙 넘쳐 또 선을 넘어 망나니처럼 질주한다. 대번 가까워진 낯. 피같이 붉은 눈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탄내 섞인 숨과 소금기 어린 바다 공기가 마구잡이로 얽힌다. 그마저도 거슬렸으나, 당장 매질이라도 하지 않음 분이 풀리지 않을 듯싶어 머리채를 더욱 억세게 쥔다. 조금이라도 자세를 달리하지 않으면 움켜쥔 손톱에 생채기가 나리라. 어떻든 간에, 아니 되레 그래야 기분이 그나마 나아짐이 명료해 손톱에 날을 세웠다. 피 좀 흘린다고 손금이 불에 탔던 저만할까. 그럼에도 들끓는 분에 치솟은 힘 무색하게 간단히 휘어잡힌다. 미동은커녕 느긋하기까지 한 작태에 불시에 잡힌 양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날카롭게 튀어나가려던 입술이 전연 상상 못한 방식으로 막힌다. 태양 특유의 열기와 향이 내리쬐는 광선처럼 머리 위에서부터 끼얹어진다. 어둠이 녹빛 사이로 파고든다. 단순히 입술만 부비적대는 행위인데, 빌어먹게 타 죽을 거 같다. 성적 행위에서 성적 함의는 일제 부재하고 오직 위협적이다. 태양이 내쉬는 숨은 인어를 태워 죽이고, 존재 자체가 생 갉아먹으니. 내 기어이 너 죽길 학망하는 바, 필경 운명일지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동작 멈춘 것도 잠시일 뿐. 사태 파악하자마자 있는 힘껏 이를 세워 입술을 우악스레 물어뜯고, 거칠게 손을 빼내더니 곧장 뺨을 올려붙히려 했다. 짜악, 하고. 직후 버석하게 메마른 입가를 닦는다. "개새끼가 분수도 모르고 누구에게 목줄을 채워. 애정결핍이라도 있니? 늘상 계집 끼고 다니더니, 이젠 비린내 나는 물고기까지 곁에 두고 싶어지셨어?" 나름 자제랍시고 했던 리미터가 완전히 풀렸다. 고귀한 인어의 몸체, 스스로의 것만이 아니라 여기는 것이 저 탕아 놈 자국 찍힌 듯 싶어 주체할 수 있을 리 만무. 하물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신조에 따라 순결과 절조를 맹세한 몸이다. 사랑하는 이 외 결단코 다룸이 불가해야 할 것이거늘! 이제는 고향에도 못 내려갈 몸이 되었다는 가정까지 가자 분노가 척추처럼 육신을 지탱했다. 두서없이 무작정 상대를 깎아내리기만을 위한 말들을 연거푸 내뱉는다. "아⋯⋯. 아까, 연모하던 이가 있다더니 한낱 허상을 계집들에게 씌우고 다니셨나? 잃어버린 시간에 목줄 매인 꼴이 따로 없군." 어둔 녹색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저가 할 말은 또 아니라서.
선혈마냥 붉게 물든 눈동자, 위협적으로 바라보는 눈빛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 살발한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네코바야시.
"'계약'이라고요?"
아야카미 학원에서 눈에 밟히는 일을 파악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은 지금껏 해왔던 풍기위원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포목점 주인장이 그런 말을 해오는 것은 상정에 없었다. 여전히 의문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며 지금이라도 도망쳐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였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냐 물어오는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방금처럼 목이 메인 듯이. 말을 꺼내고 싶은데 가슴이 꽉 메인 것처럼 말이 나오지가 않더랬다. 이곳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말을 하려 할수록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목을 죄어오는 듯한 느낌에 오기로라도 더더욱 '그'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지만, 결국 스스로 숨을 참다가 견디기 힘든 고통에 다시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듯 '하악'하는 소리를 내며 분하다는 듯 눈물 맺힌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