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돌적으로 뛰어드니 버릇대로 받아들일까 싶었으나, 세상 물정 모르는 태도가 영 밋밋했다. 조금만 더 익으면 상대할 맛이 넉넉할 텐데, 곱씹을수록 아쉬움만 느글거린다. 제 발로 기회를 차버린 꼴임에 영 달갑잖다. 마주 안는 척 양 팔뚝 잡아 측면으로 비스듬히 흘렸다. 입매만 휘어 잠시간 옆모습 살피다가 일순 정적에서 피식 웃어버렸다. 잡은 팔은 만일 손에 힘주면 으스러질 듯 가녀려서 슬그머니 올려 머리칼이나 귀 뒤로 넘겨줬다.
"나중에."
본래 저라면 그 이상을 주겠다는 끝 단락에 득달같이 달려들었겠으나 지금으로선 김이 샜다. 대신 한눈에 담을 수 있게 걸음 반 보 물려 머리끝부터 발아래까지 살펴 내려갔다.
"어디 보자.. 키가..."
치수를 재는 척 정수리 위에다 손 갖다 대더니 아래로 꾹 눌렀다. 납작해져라ㅡ 실없이 중얼댄다. 머리칼 끝을 당겨 보고, 뺨을 꼬집기도 했다. 끝으로 한 번 손댔던 자리에 거듭 딱밤을 둔 이후에 미동 없이 눈만 응시했다. 한참을 바라봤다. 수도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소리가 멎으면 그제야 돌아선다.
인자한 인상의 노파, 세탁소 주인장이 주름 진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몹시 미안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첨예한 인상이 반사적으로 구겨진 이맛살에 한층 더 냉기를 풍겼으나, 사정을 들어보니 온전히 주인장 잘못도 아닌 듯하여 이내 표정을 펴 제 교복을 착각하여 가져간 이에 대해 전해 들었다. 샛노랗게 물드는 붉은 머리에 녹색 눈, 키가 큰 여성.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했다. 머리 빛깔이 워낙 특이한 듯싶으니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으리라. 투명 팩에 반듯이 싸인 교복을 집어 들었다. 팩 구석자리에 굴러다니는 명찰, 새겨진 이름은— 向害 かがり. 한 차례 양각된 그것을 노려보곤 세탁소를 나섰다.
*
다음 날. 날씨는 선선하고, 봄꽃 내를 실은 바람이 산뜻하게 불었다. 인도와 도로 곳곳에 만개한 이름 모를 꽃과 나무, 잡다한 식물들. 자동차 배기음 같이 풍광을 해치는 소음마저 전무하다. 싱그러운 진녹색 머리채는 가는 허리께에서 반듯이 잘려 얕게 흔들리고, 일자로 다문 입매도 흠 하나 없다. 모든 게 곧고 빗나감 없을진대… 유일한 결점. 손목이나 허리춤에서 마구잡이로 구겨진 와이셔츠, 재차 끌어올려도 자꾸만 미끄러지는 재킷, 가슴팍에 매달린 '무카이 카가리'라는 명찰……. ……빌어먹을! 기어이 내뱉어지고 마는 욕설에 한산한 인도에 몇 없던 아야카미 고교생들이 힐긋 쳐다보았다가 금세 못 본 체. 그게 더 성질이 났다. 뭐, 못 볼 꼴이라도 봤어? 우미 스미레를 아는 이-특히 이학년 C반-들은 드문 모습에 수업 내내 곁눈질하기 일쑤. 그에 다짐한다. 당장 돌려받으러 가야겠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스미레는 집히는 대로 붙잡고 무카이 카가리라는 학생 신상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일학년이고 B반. 점심 먹은 후이니 옥상에 있으려나… 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꾸하는 B반 학생을 내버려 두고 곧장 옥상으로 발걸음 한다. 거기면 바로 환복하기도 딱 좋네.
옥상 문을 열어젖히자 서늘한 봄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간다. 세탁 맡긴 직후의 교복에서 섬유유연제 향기가 훅 솟구쳤다. 향기에 홀릴 틈도 없이 타오르는 붉은 머리채를 발견한 스미레는 로퍼 굽 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무카이 카가리?"
섬유유연제 향기로도 가릴 수 없는 무신의 야생의 향. 즉각 깨닫는다. 이거, 사토 류지가 업은 무신이라고. 허나 이쪽은 아침부터 쏟아진 시선 탓에 뿔이 난 상태. 따라서 거름망 부재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죠세를 달리 읽으면 토코요라고 읽으며, 그 어원은 먼옛날 밀교의 마타라신이 무찔렀다고하는 신흥종교의 누에벌레신, 토코요를 의미했다. 왜 이런 이름을 따왔냐고 한다면, 내 오래전 복수를 통해 얻은 껍데기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어원이었다. 신흥종교의 꽃의 신은 그렇게 지금의 내 거짓된 모습으로 밖에 불과하지 않다.
아야카미쵸 상점가의 토코요는 10년전 내가 꽃의 신의 모습으로 이 아야카미쵸에 도달하고 인간의 생활을 위장하기 위해 차린 가게에 해당한다. 따라서 위장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사람이 사는 것같은 느낌. 즉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 실제로 가게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전, 그 버릇없는 캇파의 옷을 지금도 제작중에 있고. 옷본은 완성했기에 원단을 조만간 신세지는 신자로부터 받아와야할 일을 연락해놓는다. 그쪽은 딱히 문제가 없을것이다. 외부에서 사정을 아는 녀석이고, 배신하면 죽을텐데 뭐.
"어라."
그때였을까, 문에 달린 현관종이 딸랑걸리며 울렸다. 일단은 가게니까. 접객은 해야한다. 기분이 나빴으면 이것저것 가게에 걸어둔 환술을 작동시켰을테지만, 딱히 그러기에는 귀찮아 가게 뒤쪽 문을 열고 나와 평소의 모습으로 접객을 한다.
납작납작해지는 느낌이 공일 떄 만지작거려지는 느낌같다!!! 꾹 꾹 눌릴때마다 계속 나오는 "끼엥" 소리가 제법 볼만하다. 머리칼 끝이 당겨질 때마다 뺨이 잡아댕겨질 때마다 계속해서 나오는 "끼엥" 소리. 웃긴건 뺨 역시 공일 떄 만져질 때처럼 탱탱하면서도 말랑말랑하고 잘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건 공일때나 사람의 모습일때나 비슷한 특징이지 않을까. 딱밤을 맞은 뒤에야 간신히 "끼엥" 소리가 멈춘다. 자....지금까지 끼엥 소리를 몇 번 했지? 셀 수도 없다. 이런!
"흐아아 살았사와요오오" "선배님, 아야나를 보고 싶으시면, 나중에 2학년 C반으로 오시는 것이와요? "
간신히 놓여진 뒤에야 흐물흐물하게 팔을 흔들고는, 예의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선배님을 올려다 보며 말하려 하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여기서 나가지. 이 선배님이 계신 곳을 보니 깨달은 것이 있다.
여기..... 남자화장실이다.......!!!
"끼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는 그제야 작게 소리지르는 아야나 되시겠다. 여여여여여여기 나나나나나남자화장실 이잖아 어떻게 나가야 하는 것이와요!!!!
어째서인지 훈계를 듣는 분위기가 되었다. 천 년 가까이를 힉힉호무리처럼 보내고 그 이전이라고 해서 딱히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고 할 법한─ 소위 말하는 너무도 소중해 도무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신은 딱히 평범한 친구에 관해 아는 것도 없어서 ( 친우라고 부를 신은 있었지만... 그것을 전부 평범한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응... 응... 하면서 풀죽은 듯이 들을 뿐이었다. 그야 이 신,
말 한마디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속 편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인간의 문명에 그리도 깊이 뿌리를 두었으되, 인간의 간원을 그 허리를 잘라 삼켰으되, 인간의 수없는 흉한 욕망을 보아오며, 우습다는 듯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손끝으로 살짝 쓸듯이 다스렸으되... 결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에 의해 영락하는 그 순간까지도.
"...........저기. 그, 그러면 말이야... 너희들이 말하는 친구라는 건... 어떻게... 만드는 거라 생각해...?"
그러나 신은 지금까지도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처지만큼은 똑똑히 이해했기 때문에. 인간의 형태로 빚은 혀 위에서 꽤나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 굴러간다.
"그, 그야... 나... 친구 만드는 법... 잘 모르거든... 간식 같은 걸주면 된다는것 외에는..."
너희들. 그 말에 유우키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친구가 아예 없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살아간다고 한다면.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살아가거나 집에서 방치를 너무나 길게 받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친구 하나는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더라도, 친구가 아예 없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 모두에게 적용할 순 없지만... 굳이 '너희들'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자신은 그 '너희들'에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이 눈앞의 상대는...
"친구를 만드는 법은 특별히 없어요. 그냥 알고 지내고, 가까워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뭔가를 하고... 같이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면 그게 친구가 아닐까요? 후훗. 선배는 그런 면에선 조금 서투른 모양이네요."
하지만 그는 굳이 가능성을 입에 담지 않았다. 상대가 신이건, 요괴이건 그건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특별하게 숭배할 이가 있다면 오직 하나. 그 이외에는 솔직히 현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상대가 어떤 이건... 자신은 자신이 대하는대로 대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저와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지내봐요. 뭐... 선배가 졸업을 한다면... 그럴 시간도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졸업 전에 친구 하나는 만들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저도... 아가씨가 그렇게 친근하게 지내는 이라면... 딱히 나쁜 분이라고 생각이 들진 않거든요."
필시 좋은 이기에 그렇게 친근하게 지낼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유우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어 그는 눈웃음을 지었다.
"시라카와 유우키는 아직 친구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친해질 수 있는 존재에요. 그리고 선배의 근처에 있는 인간들 역시 마찾가지에요. 그냥... 조금만 친근하게 말을 걸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면 응하는 이는 있을테고.. 그게 인연이 아닐까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아. 물론 모든 이가 다 착한 것은 아니라서... 가끔은 선배를 이용해먹으려는 나쁜 이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잠시 말을 끊으면서 말을 고르던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면서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세상엔 좋은 이가 더 많을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찾아보면... 친구 100명 만들기도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이룰 수 있는 꿈일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