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주인이라고 말을 하는 아오이의 말에 유우키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와자토 일가의 아가씨를 시종으로 두는 이라니. 엄청난 재벌가인가? 싶기도 했지만 아카가네라는 재벌가는 자신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유우키는 말을 아끼면서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아오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합의하에 한... 그러니까 일종의 장난이나 놀이 같은 계약인건가요? 그거?"
물론 한가지 가능성이 더 있긴 했다. 이를테면 신이라던가. 혹은 더 강한 요괴라던가. 하지만 그것까지 굳이 캐묻진 않으려고 하며 유우키는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천천히 정리했다.
"아니. 그게... 시종이라고 하기엔 그때 슬쩍 봤는데 일방적으로 놀림받고 장난을 당하시는 것 같아서..."
물론 자신도 자세하게 본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본 광경은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일방적으로 눈앞의 선배를 괴롭히는 광경이었다. 물론 괴롭힌다기보다는 그냥 장난을 치고 까부는 것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어 그는 적당히 혼자서 납득하려고 하며 살며시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말했다.
"아무튼 아야나님이 악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아닐테니... 귀엽고 예쁘게 봐주셨으면 해요. 선배. 후훗. 뭐, 너무 피곤하거나 곤란하게 하면 저에게 얘기해주셔도 되고요. 그렇다면 제가 나중에 조용히 얘기를 해볼테니까요. 하지 않는 방향으로요."
제 처지 하나 자각 못 하는 천진함에 얼이 빠지면서도 무심결 조소가 인다. 마냥 모른 채로 굴기엔 심심찮고, 역으로 본색을 탄로 내자니 뒤에 올 수습이 귀찮았다. 여태도 제 무리의 시선은 저 보라색 공을 향해있으니 관심 꺼질 즘까지 가지고 놀았다간 기어이 몸통에 바늘 수십 개는 꽂혀야 끝 날 성싶음에, 공을 깨무는 시늉하며 마냥 고민만 거듭했다. 언제부터 요괴 따위의 안위에 관심을 뒀냐마는, 뭣도 모른 채 놀잇감 행세나 하고 있는 순진함이 외려 동정을 낳았다.
"미야비, 라이터 없지?"
끄덕이니 공 갖고 일어섰다. 화장실로 가 세면대 넘치게 물을 담았다. 너머로 흘러 구둣발에 채이기 시작하면, 손에 쥔 것을 아래로 넣어 놔준다. 물먹어 꿉꿉한 소매에 괜스레 부아가 나선 아픔 느끼기 직전까지 꾹 찌르고 손 거뒀다.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가만히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는 것이 이곳의 상황을 확인하려 하는것 같다. 조용히 두리번 거리던 푸른 눈동자는 이내 곧 나기를 향한다. 후히히 웃으며 탱 탱 탱 화장실 바닥으로 통 통 통 튕겨나가듯 떨어지다가, 곧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쁘장한 인간 소녀의 모습으로.
"쨔자잔! 학생들의 수호천사 아야나님인 것이와요. 그런데 저의 모습은 왜 궁금해지신 것이와요? "
냉기에 극도로 강한 게 인어다. 헌데 척추를 타고 흐르는 이 한기는 무어인가. 창백한 뺨에 핏기가 슬몃 가신다. 묘한 느낌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던 스미레가 의구심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고 이상을 감지한 그때. 머리채 끄트머리가 삐죽 설 만큼 소름 한 줄기가 머리끝부터 발끝으로 추락했다. 입매를 꾹 다문 채 즐겁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아야나만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것밖에 행동할 수 없었다. 확장된 동공이 찰나이나 영원처럼 흔들렸다가 한차례 몰아친 밤바람에 냉정을 되찾았다. 내버려 둬. 누군가 귓가에 속삭였다. 건들지 마. 한 번 더, '인어'가 말했다. 스미레는 태연을 가장한 낯으로 웃었다.
"같은 반이니 단연. 왠지 죠세와 아는 듯하여 물어봤어. 별다른 일은 없었고? 죠세가 네게 뭐라던?"
미소 지은 입매와 상반되게 휘어진 눈꺼풀에 감춰진 눈은 차게 가라앉아서.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조작을 건드리거나 깨트리지 않도록.
"오이잉? 별 일 없었사와요! 그냥 포목점에 가서 옷을 맞춘 게 다인 것이와요. 별 말 하신 것 없는 것이와요. "
이번에도 그녀는 아까와 똑같은 식으로 말하고 있다.
"진짜인 것이와요~ "
후히히 웃으며 스미스미 선배님에게 다가가 요 수면 아래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아닌 요괴. 이정도야 얼마든지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쫄래쫄래 스미스미 선배님을 향해 수영해 움직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구리 수영이다. 카에루족 티를 어디 안 벗어난다고 딱 그 모습이다.
"스미스미 선배니이임, 아야나 스미스미 선배님 무릎베개 해도 되어요? "
"슬슬 지치는 것 같사와요~ " 라 덧붙이며 물 위에서 파닥거린다. 아, 진짜로 지치는 건 아니고. 그냥 무릎베개가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진짜로....
사쿠야 선배님에 대해선 왜 물어보시는 것일까? 사쿠야 선배님에게 뭔가 있으셔서 그러신걸까? 모르겠다. 무릎베개나 하자.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게 좋을 것 같다.
정말로? 정말 그래? 마치 누군가 그러라고 입력한 것을 그대로 출력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의지도, 영혼도 없는 고철 덩어리. 거기서 스미레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무력감이 물밀듯 밀려온다. 물에서 숨 쉬는 인어임에도 꼭 익사라도 할 것 같았다. 우스운 일이지. 허나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은 여기까지. 고작 요괴 하나에 매달려서 인어의 명예를 저버리는 짓만큼 꼴사나운 일도 없으니까. 오늘도 스스로를 버리고 인어를 택한 스미레는 귓전을 때리는 속내들을 목청 뒤로 밀어 넣으며 기어이 웃었다.
“그러니. 그거 참… 즐거운 경험이었겠네.”
속도 모르고 무릎베개나 해달라 조르는 아야나의 작은 머리통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내리눌렀다. 뭐가 좋다고 그리 헤실 거리며 웃니. 너,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는 아니? 바보 같은 계집. 흠결 없는 미소는 아야나가 뒤를 돌면 금이 갔다. 입술 안쪽 여린 살을 짓이기며 정신 차리라 스스로를 일갈한 스미레는 평소와 같은 낯으로 이리 오라 손짓한다.
“우리 어리광쟁이. 지치면 해주는 이 스미레도 참.”
물 속에서 부유하며 아야나를 끌어안고 무릎베개를 해준 스미레는 영영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되짚고 되뇌었다. 닿지 못할 말이 닿기를 바라면서.
후히히 웃으며 물 속에서 무릎베개를 받고 있는 것은 제법 재밌는 경험이었다. 제 앞의 선배가 무슨 심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야나는 헤실거리며 스미레를 올려다 보았다. 달빛 아래 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스미스미 선배님은 정말 아름다우셨다! 특히 저 눈, 저 눈이 무척.....
"예뻐요. 선배님. "
헛, 내가 무슨 생각을. 스미스미 선배님에게 뭔 얘기를 하는 거야! 잠시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아야나는.....
"스미스미 선배님. "
헤실거리며 무릎에 가만히 머리를 벤 채, 올려다본 채로 아야나는 그대로 스미레를 향해 물었다.
놀이라니!!! 놀이라니!!!!!! 놀이라니!!!!!!!! 신과 하는 무시무시한 언약을 두고 감히 놀이라고 했어 지금!!!!!!!! 그러나 신인 걸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니. 그게... 시종이라고 하기엔 그때 슬쩍 봤는데 일방적으로 놀림받고 장난을 당하시는 것 같아서..."
"..."
"........그, 긋, ㄱ,ㄱ,그그그긋 그으 그렇게에 놀림받고 괴롭힘 당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럼 도와주지... 왜 그걸 멀리서 방관이나 해서..."
왠지 모르게 억울해져서 급기야 싱싱미역을 건들려서 눈에 가득찬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블─랑─의 점원도 그렇고 눈앞의 이 집사?도 그렇고 요즘 것들은( 특히 신과 요괴와 강하게 인연이 묶인 것들은 ) 원래 이렇게 남의 불행을 모른 척 하는 데 이렇게나 도가 튼 걸까?????? 이딴 게 요즘 것들의 예절정신???????? 과거의 철저한 예의작법을 그리워하는 한편... 나는 눈물을 훔치려 하고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유우키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유우키, 내 말 명심하고 들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노빠꾸 요비스테는 일단 무시해주고!!!!!!
"네가 모시는 아가씨는 조만간 한번 강하게 예절 교육을 시켜줄 필요가 있어..."
"아주 강한, 아아주 강한, 넋이 빠질 정도의 혹독한 예절 교육을 말이야... 가까이서 지켜봤으니까, 내 말 믿어도 좋아."
가까이는 개뿔. 얼마나 캇파에게 관심이 없었으면 유우키의 존재도 몰랐지만.
"그 높은 카와자토 가잖아? 이대로면 네 아가씨, 예禮를 따르지 못한 죄로 언젠가 봉변을 당할 거야... 아니면 이미 당했거나. 뭐어, 나는 모르지."
"제가 거기에 끼이면, 그거야말로 선배의 프라이드에 더욱 상처를 낼 것 같았거든요. 정말로 심했고 악의적인 행동이었다고 한다면, 말리긴 했겠지만요."
어디까지나 가볍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보였기에 유우키는 차마 그 현장에 끼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거기에 끼여서 도와주고 구해줬다고 한다면 과연 이 선배는 정말로 괜찮다고 넘길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유우키는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도 다음에는 경우에 따라선 조금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에 유우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강하고 넋이 빠질 정도의 예절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는 그 말에 그는 가만히 아오이의 눈을 바라봤다. 이 선배. 생각보다 쌓인 것이 많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는 아오이의 말이 끝나자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느 정도 참작은 하겠지만... 명심까지는 글쎄요. 저는 카와자토 가를 모시는 사람이어서."
즉, 어느 정도 부탁으로서 받을 순 있으나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 나름대로 그가 긋는 선이었다. 일단 어느 정도 생각을 해보겠으나, 그 말 그대로 해줄지는 또 별개에 가까웠다. 정말로 일방적이고 악독한 괴롭힘이라고 한다면 조금 진지하게 나서겠으나, 일단 자신이 본 것은 그냥 좋아서 하는 장난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더더욱.
"일단 아야나님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 분은... 애초에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을 하지 못할 분이거든요. 물론 장난이 가끔은 짓궂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 곤란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아니면..."
유우키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아오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아야나님이 정말로 싫으신가요? 지금 대하는 행동이 정말로 짜증이 나고, 정신을 빼줘야 할 정도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어느 정도 진지하게 말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정말로 싫어하는 이에게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라 악의적 괴롭힘이니까요."
카와자토 아야나의 눈은 지극히 동그랗고 너무 새파랬다. 먼지 한 톨 숨 쉴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맑았다. 아야나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먼지가 되어 질식할 것 같다가도 뇌 속이 깨끗이 청명해지기도 했다. 대부분은 후자였지만, 오늘은 끝내 전자였다. 낮때의 일에서 비롯한 염증 같은 죄책감. 그건 스스로가 결국 자신이 아닌 일족을 택하리란 사실을 사무치게 아는 탓으로, 이것은 비로소 카와자토 아야나를……. 아야나를 버리는 선택이 된다. 웃는 낯을 유지한 스미레는 고요히 대꾸했다.
“알아. ‘이건’ 바다의 귀보니까.”
짐짓 오만으로 비춰질 수 있는 발언.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족의 눈에 한정되어 거기에 일말 스미레를 대상으로 한 칭찬으론 전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랑스러운 것. 어쩌면 끔찍이도 전체주의적인.
스미레는 등을 기댄 수영장 벽이자 바닥 위로 턱을 괴곤 아야나를 고요히 내려다본다. 여전히 푸르른 눈이 저를 올곧게 향하여 양심까지 쿡쿡 찔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