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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연구소를 못 가거나 안 가는 날이 오면 그 전 날, 유준의 사무실에 그 날 입은 겉옷을 놓고 가곤 했다. 아메가 나를 기다린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그렇게 했다. 그러면 다음 날 내가 연구소에 가지 않아도 나를 대신한 옷에 쏙 들어가 편안히 자고 있는 아메의 사진을 받을 수 있었다.
성운도 그럴까.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가슴 안 쪽이 간지러워졌다.
부드러이 깨운 성운이 눈을 떴을 때 살짝 과거 생각이 났다. 그리 오래 전은 아니었다. 성운이 아지와 프리허그를 다녀왔다던 그 날, 나를 보며 허그할래요? 라고 묻던 순박한 소년의 눈빛이었다. 나직하게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지만 그 때 그 부실에서의 울림이 남아있었다.
아아, 역시 성운은 성운이구나. 그 때도,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전부 서성운이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별빛 소년이었다.
조금 더 귀엽게 있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곧 잠이 다 깬 성운의 얼굴이, 호르르 달아오르는 걸 보았다. 그러더니 부끄러웠는지 툴툴대길래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히히! 강아지마냥 좋다고 부빌 땐 언제구."
후닥 욕실로 도망쳐버리는 뒷모습이 새삼 귀엽게 보여 또 웃어버리긴 했다.
금방 다녀오겠다더니 정말로 금방 나온 성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세수가 아니라 아예 머리를 감아버린 걸까? 머리를 털 때 물이 안 튀게 살짝 떨어졌다가, 성운이 손을 잡아오자 그대로 내어주고 같이 거실로 들어갔다.
잠 다 깼다고 했으니 다시 소파로 가서 앉을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운이 먼저 말했다. 눈물 범벅으로 두서없이 쏟아냈던 말들을 평소처럼 차분히 정리한 말이었다. 나 역시 그러려고 온 것이기도 해서, 잡은 손은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나 있지, 남에게 내 얘기 하는 거 너무 오랜만이라, 묻지 않으면 말해주기 어려워."
그래도 있지-
"네 말대로 오늘 전부를 말해주긴 어렵겠지만, 묻는 건 있는 그대로 대답해줄 수 있게 노력할게."
내가 성운에게 물을 건, 당장은 생각나는게 없기도 하니 오늘은 아마 오롯이 내 얘기만 하지 않을까 싶었다.
잡은 손을 톡톡 당겨 나를 보란 신호를 주었다. 돌아보면 생긋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잡은 손을 이끌어 소파로 가서 앉으려 했다. 성운 먼저 앉히고 나도 그 옆에 앉아 테이블에 놓은 편의점 봉투를 열어 탄산과 이온 음료수와 과자 몇 봉, 판초콜릿 여럿, 그리고 얼음컵 두 개까지 꺼내놓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부터 물어볼래? 한 번에 하나씩 아니어도 돼. 제일 궁금한 것부터 차례대로 알려줘."
그것이 휴가를 출발하기 전날이나 전전날쯤이었을 것이다. 방학 중이라고 해도, 저지먼트 부원이라면 이따금 저지먼트 부실에 들릴 일이 있었다. 방학 중 순찰 일정을 확인하거나, 순찰을 시작하거나 마감하러 부실에 들리거나, 뭔가 필요한 서류를 열람하거나 발급받는-정확히는 부실 컴퓨터에서 출력하는- 등 말이다. 아마 윤금 역시도 그런 일이 있어서 부실에 들렀겠지.
거기서 금이 본 것이 이상한 공책이었다. 보통이라면 금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고, 금에게 남의 공책을 허락도 없이 훑어보는 습관이 있지도 않았을 터이나, 우연히 펼쳐져 있던 어느 한 페이지에 스크랩되어 있던 사진들이 금의 시선의 초점 정가운데에 들어온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스크랩된 사진들이 금에게 대단히 익숙한, 스트레인지의 어느 특징적인 구조물을 찍은 사진이었다는 것도.
다행히도 그 공책에 스크랩된 그 사진은 우연히 그것을 찍었을 뿐이었고, 공책에 정리된 내용은 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거기에는 단정한 필체로, 스트레인지에 잠입하는 법 등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해서 정리한 것이 적혀있었다. 문제는, 거기 정리된 내용 태반이 스트레인지에 대해 수박 겉핥기로 아는 초짜의 뇌피셜이거나, 아예 스킬아웃 조직에서 어중이떠중이들 걸러내려고 흘린 역정보거나 하는, 아주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공책 내용대로 하면 한 시간만에 외지인에게 적대적인 스킬아웃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일 게 자명해보였다. 그나마 거기에 ‘확실하지 않은 정보. 부원 중에 스트레인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자.’라는 메모가 적혀있다는 점이었을까. 거기에는 부부장인 서한양 외에도, 현태오, 류애린, 유한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 윤금의 이름은 없었다.
금이 그 공책에서 신경을 끄고 다시 자신이 보려던 용무로 돌아갔을 때, 그 공책의 주인이 부실로 들어왔다. 서성운. 초여름 섬에서 휴가 보냈을 때에는 작은 토토로던 친구가, 못 보던 새 무슨 일이 있었나 원령공주의 모로가 되어 있는 이상한 동기였다. 성운은 윤금에게 가볍게 목례해보이고는, 부실을 가로질러 그 노트를 집어다 가방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모자를 줍고, 다시 자신의 앞으로 온 수경이. 볼 수는 없었지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충 능력을 썼겠거니 싶었던가? 그리고 그 반응은, 부러웠다...였지. 텔레포트 능력 부럽다.
"뭐, 워터파크에 파도풀만 있는건 아니니까!"
말끝을 흐려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수경이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워터슬라이드 종류가 보인다. 근데, 너무 크지 않나 저거. 수경이는 텔레포트가 있으니 언제든 탈출할 수 있어도 그는 능력을 쓰면 빠른 속도로 날아갈 뿐이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면 조금 쫄리긴 한데...
"후배님이 타러가자고 한건데 타러가야지. 선배가 뺄 수는... 없지. 응."
두렵긴 한데, 막상 두려운걸 티내자니 그의 억지에 어울려준 후배가 처음 부탁한거에 부담주는 것 같고. 결국 어색하게나마 웃는 모습으로 수경을 바라보는 유한이었다.
"그럼 가볼까?"
어깨 으쓱하고, 걸어가야한다면 자길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서 갔을 것이다. 수경이가 편하게 텔레포트 시켜준다면 잡고 이동시켜 달라는 듯 손 내밀었을 것이고.
인첨공에 사연 한둘 없는 이 없겠지만, 유독 저지먼트나, 그의 옆에 있는 후배같은 경우에는 꽤 사연이 많은 듯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도움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저 이렇게 놀면서 조금이라도 기분 전환 시켜주는게 그의 할일이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던가.
"아- 뭔지 알지. 저런거 혼자 타면 어색하니까."
놀이공원에서 짝이 안 맞아서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탈 때의 어색함이란. 이해한다는 듯 고개 끄덕거린다. 도착하면 줄이 생각보다 길지만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기다림이 짧은건 아니라서,
"혹시 네 능력으로 코 앞까지만 몰래 이동하면-"
같은 양아치같은 발언도 농담삼아 했을지도? 인첨공이니까 그런식의 새치기는 금방 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리 기다리다보면 어느새 워터슬라이드 코앞까지 왔을 거고, 막상 튜브에 탈려니 그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린걸 그녀가 봤을수도 있을 것이다.
"후...후후... 기대되네.."
자신과 같이 탔을 수경이에게, 어쩌면 혼잣말일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떨리는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원래 비워져있어야 옳을 클라우드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폴더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자의 심장, 깊은 불신, 아름다운 유작……. 클라우드에 자리한 불청객만으로도 불안감이 드는 것이 사람 심리지만, 이런 제목까지 있다는 것을 평범한 사람이 알았더라먼 찜찜해서라도 읽지 않고 삭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속내를 들여다 보았다.
3학구 스트레인지의 상세한 지도는 어디에 어떤 스킬아웃이 있는지, 어느 경로에 지름길이 있는지 적혀있었거니와 장부는 절대 정상적인 것이 기록되지 않았다. 실탄, 총, 약물……. 안티스킬에게 넘기면 훌륭한 공적을 세워 당장 스카웃 제의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것이었으니.
[H: 2xxx.12.05, 담당 연구원 H. 새벽 2시 집도 완료.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소체 코드 '필리'의 뇌세척을 오늘도 성황리에 마무리. 후속 작업은 소체 임시 코드 '나비'에게 위임하기로 했으나 '나비'의 이상 반응으로 연구원 C에게 위임함. (잠시간의 정적) H: '나비'의 이상 반응이 정화 작업 이후 발현된 것 같은데, 조만간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녹취록의 내용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텍스트 파일은 전혀 상관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 아무리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뇌사자로 판명이 났다지만 한 시간 전에는 분명 숨을 쉬었다. 꿈을 꾸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수술실처럼 당신이 껍질만 남았을 때, 나는 당신의 가죽을 직접 꿰맬 사람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불 꺼진 병원을 돌아다녀도 사람이 없어 결국 직접 손을 대야만 했지만. 나는 당신을 꿰매며 깨달았다. 외로운 마지막을 배웅해 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과, 그 사실이 제법 참담하다는 것을.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나는 텅 빈 수술실에서 울었다. 안구도 적출되어 눈두덩이 움푹 파인 가죽이라고 해도, 당신의 감긴 눈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 어째서 평온하게 갔는가! 차라리 고통에 표정이라도 일그러뜨렸더라면, 그 사람들이 당신을 이 꼴로 만든 걸 미안해 하기라도 했을 텐데!
아니, 섬뜩한 내용이라면 모를까. 태오는 핸드폰이 울리자 손목을 두드렸다. 그리고 떠오르는 이미지와 나 코마야. 라는 단어를 보더니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입에 물었다. 실내에서는 흡연을 할 수 없으니 막대 과자라도 물고 싶었던 탓이다.
[음… 설마 내가 그런 어두운 곳까지 발을 담갔을까요.]> [그렇다고 설마 내가 남의 손목을 짓이겨서 중고 칩을 가져와 이식할 사람도 아닐 테고.]>
태오는 어느 날을 떠올렸다. 손목은 생각보다 잘 부러지지 않는다.
[예전에, 좋은 정보가 있으면 쓸어와서 비축했는데 그걸 찾은 것 같네요.]> [축하해요, 쓸 곳은 없겠지만.]> [이스터에그 맞아요.]>
실로 태평한 소리와 함께 태오는 막대 과자를 짓씹었다. 어떠한 마음의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다른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가령 별이 자리를 잡고자 거대한 꼬리와 함께 추락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