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후리소데를 입고서 머리를 올려 묶은 차림의 자신이 손거울 속에 서있었다. 익숙해야 할 텐데 이리 격식을 차려 입어본 적이 오래라 오히려 더 거울속의 차려입은 자신이 낯설어 가만히 이를 들여다 보다가 손거울을 접어 넣는다.
하얀 눈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하얀 하늘 아래서 삼삼오오 모여 지나가는 행인들을 살짝 비켜 길거리에 선 린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가만히 서 주변을 바라보다 아닌 척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려입었던 마지막 기억이 지금도 민망해지는 그 의뢰 때라 일부러 검은 색 옷을 고르지 않고 왔지만 흰 색의 옷이 제게 어울리는 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친우로서 가는 거니까, 긴장하는 것도 이상해'
어쩌다 같이 일본에 오게 되어 새해를 나게 되었고 한국에서도 이런 저런 문화 행사에 관심이 많아보이던 그는 일본의 새해 행사에 꽤 관심을 보였다. 그러니까, 친구이자 일본인으로서 축제를 소개하는 것 그 뿐이다.
눈이 내린다. 한 때 몇 년 전 일분에서 맞이한 봄의 벚꽃을 쥐려 하듯 손을 뻗었다. 눈송이가 그대로 손바닥에 앉아 녹아내리는 것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한 순간에, 몇 년 전에 길드원들이 사색에 빠진 저를 불렀음을 알아챘을 때처럼 새침하게 반가운 미소가 퍼지려 했다. 그러나 그 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자신은 과거의 속이 다 보이는 부끄러움 대신에 은은하게 반가운 기색을 보이는 반가의 영애 같은 차분한 미소를 그려내었다.
그래도 어쩌면 주저하는 듯한 눈빛과 입꼬리에서 조금은 수줍음이 드러났을지 그녀는 모른다. 그는 중요한 부분에서는 둔하니까 드러내도 모를테다.
"괜찮아요." 상냥하게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말을 건네며 자신은 괜찮다 말한다. 늦게 온 것을 질책할 마음도 없지만 그보다도 그의 차림 때문에 신경이 그 쪽으로 쏠려 있었다. 제법 격식을 갖추려 애썼던 것처럼 보이는 전톡 복식 차림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입어본 사람처럼 오비를 어설프게 맨 괴리가 귀엽기도 하지만 유쾌한 감정을 불렀다.
"허리띠만 약간 올려 묶으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엉성하게 메인 부분을 다시 풀고 묶는다. 그저 잘 어울린다 멋있다. 칭찬해주어도 좋을텐데 굳이 답을 끝맺지 않은 심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린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제가 설렜다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3
웃으면 안된다, 웃으면 안... 엉거주춤하게 굳어서 양 팔을 어색하게 들어올리고 제가 다 묶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에 참았던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심술맞은 장난기가 동해 그를 놀릴까 일부러 천천히 느긋하게 고칠까 하다가 뻣뻣하게 석상처럼 굳은 모습에 여유롭게 메다가도 적당한 선에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안되는데.' 역시나 두고 두고 괴롭혀야지 수지가 맞지 않을까 알렌이 안다면 기겁할 생각을 하면서 마무리로 단정히 옷깃을 정리했다. "자, 다 되었어요."
평소 바보 용사라며 부르지만 사실 그의 호전적인 본래 모습을 모른다면 평소 말투나 행동거지, 무구까지 용사보다는 기사에 가깝기는 했다. 그 모습에 맞게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다 예상치 못한 여성의 어프로치에 굳어버린 것도 마치 평소의 모습과 겹쳐보여 오늘은 바보 기사라고 부를까 생각을 하고 만다. 아무렇지 않게 굳은 그의 옆으로 돌아 팔을 잡고 살며시 이끌어 저를 보라는 듯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웃는다.
"또 제가 무서웠는지 이리 굳어 계시는데 괜찮으신지요." 단순히 제가 오비를 묶은 것으로 이렇게 뻣뻣하게 굴지는 않을텐데, 흐음.
"그래도 먼 타국까지 오게 되었으니 구경해야 하지 않을까요?" 잡은 팔을 부드럽게 당기며 가까이 서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발을 천천히 내딛어 걸어가자 말한다. 저 멀리 붉은 기둥과 그 틈으로 하얀 눈으로 둘러쌓인 신사가 보인다. //5
"무서워서가 아니라면요?" 많이 부끄러웠구나, 하며 속으로만 웃고 지나갈 것을 굳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물어 자신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군다. 제 질문이 그를 몰아세우고 있음을 반쯤은 짐작하지만 어차피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부터 지금까지 린은 단 한번도 그에게 마냥 친절했던 적이 없었다.
"사실 저는 알렌군이 저를 못 이겨 맞추어 주는게 아닐까 그리 생각할 때가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좀 많이 서글플 것 같단 말이죠." 내가 그러하듯 당신도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나요? 귀까지 붉어지기 일보 직전인 얼굴에서는 예전의 거리낌 보다는 미묘한 당혹과 부끄러움이 엿보였다. 그 얼굴을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보다가 생긋 웃고서는 다시 앞을 바라본다.
물은 바와 전혀 다르게 알렌이 자신을 더 이상 꺼리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그가 자신을 괜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혹은 이성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짐작만으로 만족할만큼 린은 소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 생각에도 꽤 얄미운 욕심쟁이였다.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어 알렌에게는 어쩌면 다행히도 금방 신사에 도달한다. 사람들이 앞에 즐비하게 서서 손을 맞대고 합장하고서 고개를 살며시 숙이고 있었다. //7
"다행이네요." 눈 내리는 풍광을 바라보며 살며시 눈을 내리고 답한다. 간질간질한 마음에 못 이겨 정말 좋다 말하는 그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짐이 덜 무거웠다면 자신도 좋다며 금방이라도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용기가 있어 무모할지라도 솔직해질 수 있었더라면.
"앞으로도 이리 어울려 다닐 수 있을테니까요." 정말 좋습니다. 이 한 마디가 위안이 되면서도 친한 친우로서 곤혹스러워 말하는 것이 아닐까 괜히 의심하고 마는 자신이 밉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못 잊을 사람이 있었으니 오만하게 그의 손을 잡아주며 제가 그가 현실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잡을 벗이 되어주겠다 말하는 순간에도 망설임과 더한,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한 욕심이 개입하고 있었다.
"하츠모우데(初詣)라고 해요." 새해를 맞아 신사에 참배하며 무병식재와 평안무사등을 기원하는 전통 행사에요. 라 덧붙이며 이어 설명한다.
"다른 분들처럼 손을 맞대고 합장하며 고개를 숙여 새해동안의 축복과 바램을 속으로 빌면 되요." 알렌이 린을 알아가듯 린도 알렌을 꽤 아마도 예전보다는 잘 안다 확신한다. 예를 들어 확고한 내용과 다르게 답의 끝을 흐린 그가 묘하게 어두워 보인다던가. 주로 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속으로 앓으며 자기비하를 할 때 보이는 모습이다.
"오늘 불꽃놀이가 있대요." 모르는 척, 다시 시치미를 떼며 먹거리를 파는 광장에서 저녁에 불꽃놀이를 한다 말한다.
"설마 오랜만에 고향에 온 저를 놔두고 그 전에 돌아가지 않을거라 믿어요." 그가 또 어떤 생각으로 속을 끓이는 지는 물을 수 없지만 제가 약속했듯 그저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며 기다려 줄 수는 있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