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유우키.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두고 있는 그는 한손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으며,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 상하의를 차려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복 차림 그 자체였다. 물론 그렇다고 상의의 단추를 다 잠근 것은 절대로 아니었으며, 모두 풀어둔 상태였다. 아무튼 근처 마트에 가서 요리에 쓸 식재료들을 산 그는 카와자토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뭘 만들면 좋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요리를 떠올리는 도중, 갑자기 옆의 오르막길에서 뭔가가 굴러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라?"
이내 그 굴러오던것이 제 발 앞에서 바로 멈췄고, 그는 그것을 허리를 굽힌 후에 집어들었다. 이것은 껌? 왜 껌이 여기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는 살며시 고개를 위로 올렸다. 저 앞에서 달려오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처음 본 유우키는 키가 정말로 크다고 생각했다. 일본인 남성의 평균 키 따위는 한참 초월한 거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자연히 자신의 키에 비해서 얼마나 큰지를 떠올렸다. 어림잡아 10cm는 큰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이어 살며시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조금 부스스한 느낌이 들면서도 불그스름한 것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그의 눈에 비쳤다. 그러면서도 중성적인 느낌이 드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우키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는 껌을 내밀었다.
"이거, 당신의 껌인가요?"
싱긋. 사람 좋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만약 자신의 껌이 맞다면 바로 가져갈 수 있도록, 그는 손을 그 자리에 가만히 고정시키고 껌을 잘 볼 수 있도록 좀 더 앞으로 가져갔다.
데굴 데굴 굴러가던 껌이 멈춘다. 그제서야 껌만 보고있던 그의 시선이 저절로 껌과 닿은 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올라가 눈앞의 사내에게 닿았다. 정장을 보고 성인인가 싶었지만. 뭔가 앳된 느낌이 보여 내 또래려나? 하고 생각을 바꿨다가도. 하지만 동안일수도 있는데... 까지 생각한다.
물론 그건 별 중요한건 아니고.
"아, 감사합니다."
어쨌건 껌도 주워준데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반말을 찍찍 할 정도로 그는 예의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설령 상대가 나보다 어렸다고 해도 초면에는 예의있게 굴어야하지 않겠는가. 사내 덕분에 더 뛸 필요도 없이 껌이 멈췄기에. 그는 숨을 고르며 사내에게 다가가 머쓱하게 웃은뒤 껌을 받아들었다.
"네모난게 잘도 굴러가네요."
뭔가 사례라도 하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뭐 별게 있겠는가. 그저 껌을 꺼내다가 슬쩍 내밀어서 혹시 하나 드실래요? 하고 어색하게 말할 뿐이었다.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어라, 근데..."
어째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그는 동급생이면 모를까, 후배들까지 기억하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강당 같은데서 오가며 볼 일은 더러 있어서일까. 묘하게 사내를 완전히 처음 본 느낌이 들지 않아 호기심이 떠오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아야카미고 다니시지 않아요?"
사실 이 사람이 고등학생이라면 90% 확률로 앚긴 할거다. 여기 고등학교가 거기밖에 없으니.
"네모난 것이라고 해도 경사가 있으니까요. 아마 세모난 것도 데굴데굴 굴러가지 않을까요?"
물론 동그란 것보다는 좀 덜 굴러가겠지만, 그럼에도 경사가 있으면 굴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꼬옥 쥐면서 그는 자신에게 권하는 껌을 바라봤다. 어쩔까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하나만 받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조심스럽게 껌을 하나 받았다. 물론 바로 씹진 않으며, 그는 그 껌을 일단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껌을 씹으면서 걸어다니는 것은 명가를 모시는 시라카와 가문의 이로서 그다지 기품이 없는 행동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껌은 나중에 자신의 방에 갔을 때 조용히 씹지 않았을까?
"네?"
그 와중, 상대에서 '어라' 라는 말이 나오자 유우키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야카미고에 대한 이야기. 유우키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야카미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당신도 그런가요? 후훗. 그렇다면 고등학생이라고 봐도 괜찮을까요? 이곳의 고등학교는 거기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물론 상대가 고등학생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졸업생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나이. 그리고 굳이 그 학교를 지칭해서 물어보는 것에서 그는 같은 학교. 더 나아가 비슷한 또래가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아니면 사과하면 될 일이었기에 그는 과감하게 그렇게 물어보며 꾸벅 인사했다.
"그와는 별개로 저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저는 초면이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만난 적이 있다면 실례가 될지도 모릅니다만, 알려주시지 않겠나요?"
그 부분은 조금 부끄러웠는지 유우키는 괜히 웃음소리를 내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공부를 잘해야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노력을 해도 성적은 딱 중간 정도였다. 그나마 낙제점을 받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솔직히 문제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을. 애초에 수학인데 왜 x니 y니, 루트니 숫자가 아닌 것이 더 많은지부터 유우키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가정을 배울 때는 그것만큼은 언제나 완벽했다는 것에 그는 스스로 만족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나가다가 말인가요? 그런가요? 하하. 죄송해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어서."
상대는 봤지만, 자신은 못 봤다. 그런 일은 매우 흔했지만, 그럼에도 조금 미안하다는 듯이 유우키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곧 들려오는 소개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3학년에 올라간다면 선배로군요. 키미카게 선배라고 부를게요. 아무튼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2학년에 올라갈 예정인 시라카와 유우키라고 해요.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어 그는 오른팔을 살며시 굽히면서 꾸벅 허리를 굽여 인사했다. 조금은 특이한 이 인사법조차도, 카와자토 가문을 모시면서 생긴 일종의 버릇이었다. 마치 집사가 귀인에게 인사하는 것 같은 동작을 보이던 유우키는 살며시 허리를 다시 폈다.
와 요즘은 술도 이렇게 캔에 담겨 나오는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그 때가.. 천구백..아무튼 그 쯤이었지. 저어기 미국에서 마셔봤었는데, 당시에는 따는데 따로 도구가 필요 했던가. 기술의 발전이란 대단하다 싶다. 어찌되었든 인간들에게 있어 술이란 친근하고 친숙한 물건이 되었으니 술의 신님도 좋아하지 않으려나-
"형님..."
어휴 이 형님을 어쩌면 좋아.. 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대로 드러내 보이고서는 곧 고개를 저으며 그냥 웃었다.
"아무튼! 들어갑시다!"
이후 이 너구리대장 린게츠. 현대식 내부에 시무룩한 청동의 신을 보다. 대체 21세기 단독주택에 뭘 바랐는지 모르겠다.
평균점 '유지'라니. 그것은 그가 이 2년동안 목표로 삼았던 경지였다. 마지막 시험기간에 중위권에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3학년때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이것이 그가 새학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기도 했으니까 말 다했다. 하지만, 묘하게 기품있는 사내의 모습에 그는 혹시 중위권으론 만족 못하는 귀한집 도련님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해 뭐라고 더 덧붙이지는 않는다.
"뭐, 저도 그냥 학교에서 본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정도였는데요. 그냥 이대로 가면 궁금하니까 물어본겁니다."
그는 죄송하다고 할 정도로 알고있는것도 아니라며, 손사레를 친뒤 씩 웃으며 이름은 꼭 기억해두겠다고 덧붙였다. 이런식으로 통성명까지 한 사람을 잊을 정도는 아니니까.
"분위기도 그렇고, 뭔가 특이하네요. 고풍.. 스럽다고 해야하나."
그 나름의 언어력을 동원해 칭찬해보려 했으나 실패. 저런 인사도 아는것이 없어서 그저 어정쩡하게 받을 뿐이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손에 들고있는 봉투나 시간을 생각하며 그는 사내, 아니 유우키를 보며 물었다.
시라카와 가문은 대대로 카와자토 가문을 모시는 가문. 물론 시라카와 가문은 절대로 명가는 아니었으나, 명가를 모시는 이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당연히 자신도 어느정도는 기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딱히 누군가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모두, 스스로 생각해서 해야겠다고 판단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옷깃을 살며시 손으로 정리했다. 이어 '의식'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건만, 유우키는 굳이 더 말을 꺼내거나 하진 않았다. 굳이 초면인 이 선배에게 자신의 가문이 다른 가문을 모시고 있으며, 자신 역시 누군가를 모시고 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거야말로 너무나 뜬금없는 TMI가 아니겠는가.
"아. 어디로 가는 중이긴 했어요. 요리를 만들어야 해서요."
대답하며 그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비닐봉지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 안에는 샐러드용 양배추, 오이, 참치, 고기, 두부, 그리고 기타 등등 다른 식재료가 가득했다. 특히 그 중에는 오이가 조금 더 많은 편이었다. 이어 그는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렸고 자연스럽게 비닐봉지 역시 아래로 내려갔다.
"시간을 뺏은 것은 아니에요. 원래 곤란하면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학교에서 만나게 되면... 저를 모르는 척, 지나가지 말고 불러주시겠어요? 후훗.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참으로 사소한 인연. 하지만 그 인연을 굳이 소홀하게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앞으로 알고 지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그렇게 제안했다. 물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의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