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금슬금 뭔가 꿉꿉하고, 낯이 익은 것 같으면서, 낯이 익지만 반갑지는 않은, 오히려 눈을 마주쳤음에도 눈을 돌리고 싶은, 그런 종류의 감정이 올라왔다... ...그것을 이름하야 「 트라우마 」라고 하겠다.
또 왔어, 그 벤치녀.........
내 몸은 오들오들 떨렸다. 저번 때의 기억이었다. 우악스러운 자태로 저 긴 벤치를 「 단 한 몸, 그래, 단 한 몸 」으로 점령하던 벤치녀, 망부석 작전을 시전하다가 정말로 망부석이 돼버린 「 어쩌다 보니 TS 」의 나. 벤치녀는 햇빛이 산등성이 너머로 뉘엿뉘엿 사라져갈 때까지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제 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꾸벅꾸벅 거리던 나는 마침내 비게 된 벤치를 차지하는 영광도 누리지 못한 채 벌레와 진드기가 기어다니는 봄밤의 풀밭 위에 몸을 뉘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다시는 겪기 싫은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네가 풀밭의 무시무시함을 알기나 해????!?!!
'당하고 있을까 보냐... 이번에도... 나, 나라고 해도 학습 능력은 있다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말해줄 속셈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쳐다보며, 팩트를 무자비하게 꽂아넣으며 이 자리는 내 자리임을 분명히 하고 서열정리까지 일사천리로 마칠 속셈이었다. 헷갈렸는데 가까이서 보니 요괴도 맞네. 요괴한테 지는 신????????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라고 모 너구리 요괴 앞에서 뭐만 하면 질질 짠 역사만 1천 년인 신이 생각했다...
자아, 도착했다. 심지어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요괴다. 후히히히히히 하면서 멍청한 웃음까지 흘리고 있는 채다. 이 정도면 눈 감고도 척척 해내지.
"야, 이봐."
의도적으로 깔아내린 목소리. 무섭다. 제법 화난 듯한 손길로 햇볕 쬐기에 여념이 없는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 역시 무섭다. 충분한 무서움으로 중무장한 채 벤치녀의 주의를 이쪽으로 끄는 데 성공한 나는 이쪽으로 돌려진 벤치녀의 새파란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고.
"......앜, 아, 앝, 아, 앗, 아, 그 저기 죄, 죄송한뎁, 뎁요 저도 살짝만 앉고 싶은데 한자리만 살짝빌려주시면 안될까여...? 두자리도 필요없어요 딱 한자리만... 아,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한자리도 필요없을 것 같은데... ㅎ헤헤..."
맞추지 못하는 시선. 뺨 긁적긁적.
...
설마 당신, 진중한 신 vs 요괴를 기대했는가? 이것이 진정한 신 vs 요괴 (절망편) 인 것이다..........!
situplay>1597032124>33 "엄밀히 말하면 나도 없진 않았거든- 내가 플라토닉 주의자라 그렇지."
솔직해지자면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었다. 단지 사방천지 돌아다니는 성격 때문에, 내 아내 될 존재든 자식 될 녀석이든 제대로 책임질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랬다. 잘 지내던 아버지가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다니 이야, 쓰레기인걸! 예전에 본 만화에서 그런 부친이 있던 것 같다... 아니 많았던 것 같은데. 대체로 주인공 아버지에게 방랑벽이든 뭐든 있더라만.
뾰로통하더니 금방 또 얼굴이 풀어진다. 쉽다고 생각하는 건 나쁘니까, 순수하다고 해두자. 이런 모습을 보면 생각보다 학교 생활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생각보다 사랑받는 애가 되지 않을까? 생긴 것도 귀여우니 오냐오냐 받을 수도 있겠다. 술법으로 만든 것이지만 일반적인 악세사리랑 다를 거 없으니 영감이 있다 해도 들킬 일은 없을 테고.. 적어도 악세사리로는. 신앙도 죽어가는 시대이니 영감이라고 멀쩡하려나-
"좀 됐을 걸? 그래도 요괴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 달라는 건 넌센스지-"
당장 몇 년도에 만났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백 정도는 넘지 않았을까? 얘는 몇 살이더라. 내 나이도 가끔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아는데 말이지. 강아지 머리핀을 살짝 끼워보는 모습에 슬슬 웃었다.
"응. 귀여워 귀여워."
브이자로 손가락을 펼치면서 씨익 웃었다. 어울리는 거 같은데-? 아직 내 감각이 죽진 않은 모양이다.
situplay>1597032124>215 에전에, 오만한 사무라니 하나 골린다고 '너구리의 대접'을 해주었던 적이 있다. 다다미 깔린 넓은 방은 비단 이불 펼쳐있고 사시사철 온기로 훈훈하여 바람 들릴 걱정 없고, 뱃속이 허하다 싶으면 황금 상에 올려진 진미가 나와 입 또한 즐거우며, 심심하다 싶으면 아리따운 아가씨, 입 담 좋은 예인, 장기와 바둑의 명수가 나와 무료함을 달래주니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더라. 물론 제대로 된 건 아니다.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비위가 안 좋은 사람에게 썩 실례가 될 테니 넘겨두고. 그냥 도끼자루 썩게 두는 거였지 뭐. 실제로 잘 즐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성기가 훌쩍 지난 무렵이라, 이룬 것 하나 없고 놀아났다는 사실에 비명을 지르던 사무라이가 아직도 선하게 기억난다.
지금 이 일이 떠오른 것은 눈물 떨구는 형님은 자신이 만들었던 그곳 같은 걸 바란 게 아닌가 싶어서다. 아니 물론 내가 형님에게 그런 장난질은 치지 않을 거지만. 흐르는 눈물을 익숙하게 바라본 나는 형님이 눈을 슥슥 비비며 뭔가.. 어중간한 고개짓을 하는 걸 보았다.
"이거 술인데요."
물론 맥주다. 도수도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길거리에서 들이키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자자, 정신 차리고 일단 집에 갑시다- 멀지 않으니까 금방이에요- 돌아가서 남은 튀김이랑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도록 합시다-"
짝짝 두 번 박수를 치고 형님을 조심스럽게 잡고 집으로 향하려고 한다. 진짜 근처니까 금방 도착할 것이다. 썩 나쁘지 않은 2층 짜리 단독 주택으로 전통 가옥의 모습을 빌려왔으나 내부는 제대로 현대식인 곳이다.
굳이 이 자리를 고르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저번의 설욕을 위해서다. 복수, 그 하나만을 천명하고 아오아카가네노카미, 나는 이 자리에 있다!!!!!!!!!!
"아믓, 그게 아니라... 아노오... 그게... 그게..."
...라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 은연중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머리를 심하게 굴려보지만 아무것도 떠올리지도 못할 뿐이었다. 신님? 이라면서 의문사가 붙었을 때는 조금 울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응, 나 이 정도만 해도 기특한 것 같아. 이제 이 상황을 타개할 묘안 뿐인데...
혹시 그....신님도 저처럼 햇빛쬐기를 하시러...??
그새에 말을 더 걸자 커뮤증은 본능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몸을 움찔, 떨지만 그 와중에도 머리는 굴러가고 있다. 햇빛? 그리운 단어다... 이래 봬도 옛날옛적에는 낮아질 생각이라고는 못하던 드높은 청동기의 신, 온 제사를 주관하고 거의 신이라는 존재를 대표하다시피 했던 대신大神은 경외로운 양광陽光의 신격 또한 도맡고 있었으니 말이다. 눈을 부산스럽게 도록도록 돌리던 아오이는 가까스로 벤치녀와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져보았다. 그런데 시비처럼 들릴 수 있는.
"그... 그쪽은 왜... 햇빛쬐기를 하고 있는데...? 요....??"
묘하게 축축해 보여서... 그걸 말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일광욕처럼 보이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신성이 모처럼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했지만, 천 년간의 힉힉호무리 생활로 능지가 퇴화한 아오이는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