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EEEE임이 분명해 보이는 점원이 겸연쩍어하며 다시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다른 손님을 다시 살갑게 맞이하러 가든 말든 린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안내해준 대로 슬립을 보고 있었다. 이건 노출이 좀 많고 이건 장식이 너무 현란하고 흠...
"라임양은 소녀와 동년배가 아니였는지요." 의아해하며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라임을 바라보던 린은 라임이 눈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알아챈다. 마치 막 열두살이었나 열세살이었나, 막 전에 속한 길드에 들어와서 저를 데려온 사람 뒤에 엉거주춤 서 있던 어린 저가 보였다.
"소녀는 잘 모르겠사와요. 라임양도 매우 귀여우신걸요." 자신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것 정도야 저를 복수를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하기에 자신을 엄격하게 평가하는 그녀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이를 대놓고 입으로 뱉으면 호감이 반감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있기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적당히 굴때가 많은 편이지만. 하지만 린이 보기에 긴 백발의 소녀도 종족 특성때문인지 꽤 귀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성숙하거나 어른스럽다기보다는 사랑스러운 인상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그렇다면 음, 여기 이 원피스를 걸쳐보시겠사온지요?" 자신이 보던 슬립을 잠시 내려놓고 잘 어울릴것 같다는 말과 함께 옆의 흰 원피스를 꺼내 라임에게 건낸다. //19
"유럽쪽 이름이네요. 축제를 다니다 알아내신 건가요." 전에 독일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즐기겠다 하셨던 것 같아서요. 라는 말 뒤로 마침 토고씨도 잠시 같은 장소에 방문하신 것 같다며 들은 정보를 전달한다.
"당연히 같은 적을 쫓고 있는 입장이니 마땅히 알려드려야지요. 게다가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입장상 절대로 그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가 없어요." 겉모습은 저보다 어린 중학생 정도이면서, 실제로도 살아간 햇수는 저보다 4년 모자라면서도 앳된 얼굴로 정곡을 찌르는 화법에 그녀는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 이래서 시윤군은 재미가 없다니까요. 그런 말을 농을 건네듯 가볍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와중에 상대가 맛있다는 듯이 마시는 마끼아또가 더 상대의 실제 나이를 부각시키는 것 같아서 조금 헛웃음이 나온다. 오히려 중학생이 마끼아또면 나름 성숙하다고 해야할까.
"...바티칸에 적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어요." 힘든것을 힘들다고 인정하고 남에게 말할수록 제 약한 마음을 자각하게 되어 부러 내뱉기 싫어진다. 어린시절과 같이 마냥 다른 이에게 기대고 싶은 어린 마음 또한 동시에 알아채게 되니 더더욱 제 상태를 숨기게 된다. 이마저 받아들여 성숙해 나가는 것이 길이겠지만 린은 아직 그러기에 너무 많은 것이 벅찼다.
하지만 단순한 사실은 어차피 전달해야 하기도 했으니 최대한 차분하게 있던 사실만을 전달하려 한다. //10
"흐음, 마카오에 이어 제주도와 바티칸 그리고 독일까지..." 정말 상대가 초월자가 아니랄까봐 스케일 한 번 크다고 한숨을 쉰다.
"진심으로 동의해요." 간단하게 역겹다는 듯 제 의견에 동조하는 답에 고개를 다시 한 번 살짝 끄덕인다.
"아이는 성장하는 법이니까요. 윤시윤 선생님."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짓궂은 눈빛으로 살짝 입꼬리만 올려 능청맞게 익숙해지셔요 라고 답한다. "마냥 귀여운 아이로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니까요." 그래도 그와의 대화로 그녀 자신이 배운 것이 많았던 터라 나름 어쩌면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무의식이 말한다. 잃는 것이 두려워 진심을 열기 싫어했는데, 어줍잖은 각오로 임하기엔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일들이 많았다. 사람도 시련도 그리고 다른 것들도.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는 아직 조사하고 있어요." 태연함의 가면이 걷히고 씁쓸한 눈빛의 찬 무표정만 남은 얼굴이 마침 끄적이던 메모장과 헌터챗을 켜 제가 상대한 '세례자'를 모자이크한 형태로 보여준다.
"...전에는 사람이었던 존재에요. 침입자로부터 '세례'라는 특별한 의식을 받아 변형되었어요." //12
"돌려주기가 능숙하게 되었는데. 다만 경험상 말하자면, 꼭 차갑고 냉정해야 어른스러운 것도 아니야. 요 근래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보이지만."
여유 있는 모습에 다소 픽 하고 웃었다. 하기사, 나도 변하는 마당에 상대도 바뀌어가는 것이겠지. 그 부분에 있어 내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아마 좋은 일일 터이다. 나 스스로가 깨달음을 위해 고민해본 주제인 만큼, 그런대로 얘기할 수 있다. '어른스럽다' 라는 것은 의식하는 순간 이미 어른스럽지 않다는 것을. 일부러 차갑고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 다소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라면 길게 훈계하지 않아도 어련히 짐작하고 있으리라.
"이건....."
좀 더 보고는, 완전히 인상을 찡그린다.
"정말.......역겹군."
끔찍한 꼴은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유별리 강한 불쾌감이 남는 것은,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민간인을 변질시켜 도시 내부에서 괴물로 변이하여 날뛰게 한다는 수법이라는. 그야말로....인간을 가장 모독스럽게 다루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평가해주셔서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물론 저는 언제나 좋은 학생으로 남고자 노력하고 있지만요." "이단 심문을 여러차례 받게 되다보니 반면교사 삼아 융통성이 생겼다가 해야할까. 시윤군도 짐작하시겠지만 그 곳의 사제들은 완고하기라면 철벽도 저리가라에요."
중간에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께름칙한 만남도 있었다. 형식은 고전적인 이단 심문과 다를 게 하나 없었지만 그 이후의 문답이 상당히 신경쓰였다. 그를 통해 묘하게 남은 어느 기술의 흔적도 심상찮기 짝이 없었다.
"헌데, 그 사제들도 방비를 하지 못했으니 과연 범인 홀로 감행할 수 있는 일일지...제가 모시는 어린 왕께서는 뒷배에 저희가 쫓는 흔적이 있다 확언하셨어요." 그리고 자신은 이를 막아내던 중 그 여파로 떨어진 낙석을 부수는 대신 적을 쳐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게 막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만일 차가운 계산 없이 그저 지금은 없는 사람들의 앞을 막아섰다면, 그런 미련스러운 가정이 머리 한 쪽을 맴맴 돈다. 원래라면 생각하지도 않았을 가정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은뒤로 묘하게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네, 그 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없을거에요." "범인의 이름은 마누엘 카스티요. 그 별칭은 미친 성자라 강철씨께서 최초 세례자 목격자인 사제님께 들으셨다 전하셨어요." //14
종교를 믿는 자라는 범주에 자신도 포함되지만 모르는 척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넘어간다. 시럽의 달달한 맛과 커피의 씁쓸한 향이 동시에 어울려 그 중간의 미묘하게 알싸한 맛을 남기고 넘어간다.
"시윤군께서는 그 로보스라는 분을 계속 추적해주세요. 게다가 시윤군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에브나양이 현재 바티칸에 들어온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에브나는 신의 아이라는 신분상 종교 문제가 깊숙하게 얽힌 지금이면 더욱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만류하고서 상대의 추리를 곰곰히 듣고서 답한다.
"대부분의 신은 신앙으로 그 세력을 유지해요. 신의 몰락과 부흥은 신도와 그 믿음의 크기로 이루어져요. 만일 그 것이 의도하는 것이 제 존재의 과시라면 그럴듯하지 않나요? 물론 제 추측일 뿐이지만요. 게다가 이미 바티칸은 그 것의 원신을 여러차례 봉인한 전적이 있어요. 하지만 완전히 괴멸시키는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 숙적이나 마찬가지인 바티칸을 무방비한 틈에 침공하여 태세를 꺾을 수만 있다면 큰 이득이 될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도 시윤의 말마따나 미심쩍은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윌른이라는 자의 경우도 그랬다면,..." "확실히 제가 본 문서에서도 최초로 관련하여 망념화 한 자도 무리에서 지내다 사태를 벌였다 해요. 아마 종교의 특성상 죽음에 대한 사람의 내재된 공포를 건드려 일을 벌이니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불완전한 삶과 그 불완전한 끝을 두려워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유혹에 흔들릴테니까요." //16
".....음. 지금 바티칸은 자기들 외의 신앙에 예민할 참이지. 에브나는 UGN의 인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괜한 오해는 피하고 싶군."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시민들의 위기 상황에 참가하지 못하는게 못내 찜찜하긴 했으나. 에브나는 존재 만으로도 강력한 신성을 가진 아이다. UGN 에게 제대로 신고 절차를 밟았으니 뒤가 캥길 만한 부분은 없지만. 난장판 속에서 어떤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고, 험악한 분위기속에서 굳이 오해를 풀어야 할 여지를 주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
"그렇다곤 해도, 다소 교환비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언급한대로 바티칸은 이미 교단을 몇차례 제압한 전적이 있어. 이번 건으로 제압 당하면 과시는 커녕 말마따나 그 신앙을 깎아먹는 행위가 되리라고 생각 되는데.....악명을 늘리는게 무의미하지는 않겠다마는, 그럼에도 바티칸을?"
에브나와 도라 어르신의 이야기를 겪으면서 신의 유지에 대해서는 다소 지식을 얻은 상태다. 그러니 린의 가설이 아주 일리가 없진 않다고는 생각한다만. 그럼에도, 굳이 저지당할 가능성이 큰 바티칸에 들이박는 것이 완전히 설명된다는 기분은 아니었다.
"하.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다. 불완전한 삶과 불완전한 끝이 두렵다고 괴물이 되어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장생을 택한다? 인간으로써 죽고 말지."
나는 다소 기가 차서 신랄한 말투로 그 무지한 자들을 비판한다.
"인간의 삶이란 불완전하고 덧없지. 그렇지만, 그러니까 거기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거야. 그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꾸겠다며 인간성도 버리고 주변에 피해를 끼치는건 어린 아이의 생떼에 불과해."
"다른 분들께 도움을 요청해서 많은 분들이 오셨으니 괜찮을거에요." 못내 찜찜하다는 듯 납득하는 시윤을 보고 뿌연 미소를 지으면서 버텨낼 수 있을거라 말한다.
"더군다나 전 세계 각지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한 지역에 사람이 몰리기 보다는 최대한 퍼져서 정보를 추적하는 게 더 좋을거에요." 현재 제주도에는 강산, 여선, 빈센트가, 바티칸에는 자신과 강철, 그리고 알렌이, 토고는 전력의 추가에 도움을 주기로 했고 태호는 지금 이동중인가 한 번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따져보니 이래저래 확실히 손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다시 커피를 들이마신다.
"...실은 개인적으로 추측이 가는 바는 있지만, 정말로 비논리적인 생각의 비약에 가까워서." 죽은 심장의 태아는 알렌을 주축으로 삼아 일종의 극을 벌이고 있다 앞의 상대가 말했었다. 게다가 알렌은 그 태아가 남긴 흔적을 가지고 있고 바티칸에서 천사를 만났으며 흔적으로 인한 영향이 상쇄되었다고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이 상황에서 알렌을 추적하여 조종하려 시도중인 흉측한 그 것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쩌면 알렌이 이 쪽으로 올 것을 미리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스스로의 나약한 마음에 져서 제 삶의 무게에 굴복해 버린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중인 시윤을 묘한 얼굴로 바라본다.
"시윤, 사람은 생각보다도 매우 나약한 존재에요." 평소에 쓰던 호칭도 빼고서 살짝 눈을 내리고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한다.
"물론 그럼에도 극복해 나가기에 우리가 인간이겠지만 대다수는 그러하지 못해요. 그렇다 하여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요."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