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가 정원산책은 종종 한다면 정원이 평소에도 말끔히 정돈되어있겠구나~ 난 연이가 방밖으로 나가는걸 기피해서 정원도 황량해졌을줄만 알았지뭐야?(민망) 으아~ 꽃단장도 해준다니 유화는 당황할지 어쩔지몰라도 나는 들뜬다아아아~ 연이나 유화나 설정상 미인들이라 고울거야 고울거야(김칫국)
앗! 처형된 직후에 먹는게 아니었구나~ 그럼 혈액을 다 제공한 사형수는 어떻게됐을까?(착석) 살아남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는대신 지속적으로 혈액을 제공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풀어주면 사형수가 처벌을 모면하는건 둘째치고 연이에 대해 떠벌리고다닐 위험이 있어서 곤란했을거같고.. .(곰곰)
하늘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잿빛 땅거미가 어둑하게 깔렸다. 달도 기와지붕위에 큼지막하게 걸터앉았다. 여기 올 무렵엔 분명 손톱끝같은 초승달이었을텐데 그새 동글동글 차오른 달. 저 달이 하늘로 치솟지않고 게으름피우고 싶어하는듯한건 내 심정이 그래서일까. 홀로 볕을 쬐고파 잠을 줄인다고 줄여도 아침이슬보다 빠르게 스러져버리는 낮시간을 아까워하며 유화는 요 며칠 그래왔던대로 목정 가 삼남이 마실 차와 입을 옷가지를 챙기러 움직였다.
이리된 연유는 모르겠다. 목정 가 삼남이 흡사 무슨 둔갑이라도 한것마냥 사람처럼 굴었던, 알고보니 이 저택의 사용인 다수가 목정가의 본가에 다녀왔다는 그날이후 목정가 삼남이 기침할시간에 맞추어 시중을 드는건 유화의 당연한 역할처럼 되어버렸다. 사용인을 총괄하는 노집사가 두말않는건 그러라는 암묵의 지시인지? 혼란스럽지만 군소리가 나오지않는건 그럴주제가 못되어서인지 어느새 이저택에 적응해서인지?
그렇게 심란하고 미묘해도 주방에 들어서면 감탄부터 나온다. 목정 가는 목정 가라는건지 집기부터 식재료까지 하나같이 최고급이고 뜨끈한물과 얼음도 언제든 준비되어있다. 이번에도 따뜻한 물에 꿀 한숟갈을 섞은다음 샛노랗게 말린 감국을 몇송이 담갔다. 감국 특유의 은은하고 싱그러운 향과 뜨끈한 김이 어우러져 훈훈하다. 의욕없이 손질했는지 꽃잎이 온전한 송이가 드물긴하지만 감국 자체는 누가봐도 최상품이다. 이토록 부유한 저택이라 사용인들의 처우도 의식주수준만 따지면 본가에서보다 호사스럽다. 배곯을 일도 숯불이 꺼질까 조마조마할 일도 없다. 사용인 하나하나가 숯을 채운 손난로를 들고다닐수 있을 정도니 할수만 있다면 내가 쓰는걸 가족들에게도 보내고플 지경이다.
그러나 감탄은 이내 한탄으로 돌아온다. 제국의 번영이 그러하듯 목정 가의 부(富) 역시 우리 유 가를 비롯한 수많은 목숨을 거름삼아 거둔 열매니까. 그걸 알면서도 볕에 바짝 말린 옷가지를 옷방에서 꺼내자마자 손난로로 데우고있으니 실로 우스운 노릇이지않은가? 내 나라와 내 선조들을 해하고 나 역시 시녀로 전락시킨 원흉에게. 그러다 또 오락가락한다.
너도 마찬가지겠구나.
그때만은 그가 인간같았다. 나와 다를바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것 같았다. 어느쪽이 진짜모습일까? 수많은 가문을 멸족시킨 내력마저 어제 먹은 음식과 다름없게 취급하는 인면수심? 일가붙이를 위해 스스로를 저주의 제물로 바치고 감내하는 희생양? 우스워졌다. 사람이 한가지 마음만 갖는것도 아니고. 이건 흡사 폭풍우치는 날씨와 맑게 갠 날씨 중 어느쪽이 진짜 날씨인지 따지는격이다. 제 가족에겐 끔찍한 자가 아랫것을 비롯한 타인에게는 다른의미로 끔찍해지지 말란법 있는가? 그걸 속속들이 안들 무슨 소용인가? 그래봤자 그자는 목정 가 삼남이고 언제든 날 가지고놀수있는 자이거늘. 그래도 다들 무사만 하다면... 그 일념을 곱씹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눈앞이 부얘진 탓일까? 부모님도 희도 얼굴이 흐릿하다. 목소리도 가물가물하다. 또렷한거라곤 꿀물을 받친 쟁반과 옷바구니의 감촉뿐이다. 습관이란건 며칠 안되어도 지독한것인지 그러고도 목정 가 삼남의 처소에는 이르렀다.
한심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을 꾹 감고 숨을 골랐다. 지금은 밤이다. 목정 가 삼남 말고도 보는눈이 많은 시각. 가족 생각한답시고 요란떨어봤자 협박당할 빌미나 제공할따름. 나는 물건이다. 이를 악물고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젯밤에 연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가 질때쯤에 기상해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낮동안 도착한 문서들을 하나씩 꼼꼼히 읽고선 가부를 결정해준뒤에 가볍게 목욕을 하고서 잠에 들었다. 남들과 다르게 밤에 활동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가끔 있는 일이라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곤 했다. 이렇게 산지도 꽤 되었으니 그의 입장에선 그렇게까지 불편하지 않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 내일은 가볍게 외출이라도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
해가 다시 뜰 시간이 되어 잠에 들 준비를 하는 연의 옆에서 노집사가 한 얘기였다. 연이 대문을 나서지 않은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바깥 공기라도 쐴 겸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다른 시종이 얘기했다면 자신의 몸이 어떤지 알고 그런 말을 하냐면서 노발대발 했겠지만 하필 그 말을 꺼낸 것이 노집사였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나가는 연이라고 하더라도 노집사에겐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러지 않는건 아니라서 화와 처음 만났을때는 집사고 뭐고 그런거 없이 막 해대기는 했지만 말이다.
" 노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
다른 사람들 앞에선 집사라고 부르지만 둘이 있을때는 이렇게 집사를 높여 불러주곤 했다. 어쨌든 자신이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본가에서 일하던 사람이고 지금은 별채에 와있지만 본가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간만에 나가는 외출이지만 밤 시간이라 딱히 구경할 것은 없어서 잠깐 산보라도 하고 올까, 생각하며 그는 잠에 들었다.
중간에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드는 것을 반복하던 그는 어느새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주란 이런 몹쓸 증상을 동반하고 있었다. 잠을 쉽사리 들 수 없게 한다던지 이유 없이 몸을 아프게 한다던지. 이는 피를 먹으면 한동안은 해결이 되었지만 그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피만 섭취하고 있었으니 만성적인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은 그는 금방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답했다.
" 들어오거라. "
유 화, 아라 지역에서 공물과 함께 바쳐진 공녀였다. 아버지의 특별한 요청으로 황궁에 가기 전에 받아오게된 이 공녀는 분명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양갓집의 규수임에 분명했다. 다른 시종들과는 다르게 고귀한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 와서는 다를바 없는 시녀이니 별로 신경쓰지 않으려했지만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신경 쓰이고 있었다. 처음엔 어머니와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조금 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 오늘은 외출을 할 것이니 준비하거라. "
화가 가져온 차를 한모금 마신 그는 화에게 말했다. 평소 외출할땐 노집사와 함께 가곤 했지만 오늘은 자신을 모시는 시녀가 있으니 같이 나갈까했다. 그런데 화에게 외출할때 입을 옷이 있을리 없었기에 그는 종을 울려서 다른 시종을 불러냈다. 저번 악몽을 꾸고나서 마련한 작은 종은 다른 사용인들을 부르는데 사용되었다. 그의 부름에 금세 다른 사용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방으로 들어왔고 연은 들어온 자를 흘끗 바라보며 얘기했다.
" 외출할터이니 화에게 외출복을 입혀주고 가볍게 꾸며주어라. "
밤이라 할지라도 목정 가 삼남의 외출이었다. 같이 다니는 사람들도 어느정도 수준은 갖춰야하는게 맞다 생각했기에 한 말이었다.
별다를것 없는 하루이리라 예상했다. 목정 가 삼남에게 차와 옷을 전하는대로 물러나와 문앞에서 대기하다 이따금 가벼운 다과를 들이거나 지시사항을 이행하고 노집사를 비롯한 사용인이 찾아오거나 전갈을 보내면 알리고 새벽녘이 다가오면 목욕물을 데우는 반복적인 일상. 요 일주일간은 목정 가 삼남이 변덕을 부리지도 광기를 드러내지도 않아 평이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였다. 하여 방심해선 안된다고 스스로를 잡도리하면서도 오늘도 으레 그렇겠거니 풀어졌었나 보다.
하지만 차와 옷을 두고 뒷걸음질로 물러나려니 목정 가 삼남이 외출준비를 하란다. 옷시중을 하란 소린가? 상황이 얼른 파악되지않아 오도카니 있는데 그가 종을 흔들었다. 얼빠져있었다고 경이라도 치려는지? 긴장을 놓았다는 후회와 어째야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뒤섞였을때 다른 시녀가 지극히 공순한자세로 오도록 아무 대처를 못했다.
그런데 목정 가 삼남의 반응은 상상밖이었다. 시녀도 당황했는지 고개숙인채 굳었다가 내처 꾸벅이고는 유화를 잡아끌었다. 지체했다간 피차 좋을거없다고 닦달하는듯한 완력이었다. 그렇게 끌려나오기 무섭게 시녀에 의해 별채로 이끌렸다. 뒤이어 시녀는 유화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치수를 바로 파악한것처럼 옥색 창옷[氅衣]은 물론 노란꽃으로 장식된 연둣빛 옷섶이 돋보이는 담황빛 감견(坎肩, 조끼), 대나무 무늬가 수놓인 붉은 연봉의(莲蓬衣, 망토)를 차례대로 유화의 발치에 던졌다. 저고리와 바지위에 껴입으면 된다면서. 그제야 상황파악이 될것같았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의 도련님께서 출타하시는걸 뫼시려면 행색이 말쑥해야한다는 의미로군. 군소리않고 차려입자 이번엔 의자에 강제로 앉히다시피하더니 주먹만 한 꽃장식을 머리에 달면서 비녀를 꽂고는 귀에 귀걸이도 걸었다. 거기에 더해 눈을 감으라더니 화장까지 아주 거침없다. 혼이 쏙 빠진것만 같은데 눈을 감은 탓인지 목정 가 삼남에게 불린 이름이 귓전에 맴돈다.
화(花)
무미건조하기는 여느때와 마찬가지였는데도 어쩌면 이리도 골을 울리는지. 그가 어머니의 함자 운운했던 탓일까? 목정 가 안주인의 이름은 모르겠고 알고싶지도 않다만 목정 가 삼남이 이름으로만 부르는건 안심되기도한다. 성과 이름을 합친 버들꽃이라는 의미의 호칭은 부모님과 이웃들에게 불렸던것이기에. 목정 가 안주인의 이름은 아마 화보다는 유화와 더 비슷한 모양이니 목정 가 삼남이 어머니의 함자를 입에 담을정도로 막나가는 자는 아님에 감사해야할까? 그리 느끼면서도 외자 이름은 어쩐지 묘한 울림을..
그때 별안간 등을 떠밀려 엎어질뻔했다. 여태 꾸며주던 시녀가 냉큼가라고 재촉이다. 윗전의 노여움을 사는게 어지간히도 무섭나보다. 주춤주춤 일어나 목정 가 삼남의 처소로 돌아가는데 집안이 너무나도 고요하다. 유화가 온뒤로 늘상 처소에만 박혀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출타한다면 분명코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일진대 어이해 채비하는 움직임이 없는지? 마차에 행차를 알리는 하인에 또 그의 성미를 생각하면 시중들 시녀도 나만으론 부족할텐데. 무엇보다 호위무사는 불렀을까? 저택에서야 누구도 허튼짓을 못하게끔 경비가 삼엄할터이나 밖은 그럴리 만무하다. 제국의 내부정세는 모르나 제국에 착취당하는 여러나라에서 무력시위로 목정 가의 자제를 노린대도 이상할것 없다. 당장 나부터가 저자를 죽이고 달아나... 비웃음이 구역질처럼 비집고올라왔다. 그런식으로 탈주해봤자 범인이 나인게 들통나면 제국에서 우리가족을 내버려둘리 만무하지않은가. 나와 전혀 무관한 이가 습격한대도 내게 죄를 뒤집어씌워 보복하지나않으면 다행이지. 어느덧 지붕을 뛰어넘은 둥근달이 어서 서편으로 떨어지길 바라며 유화는 목정 가 삼남의 방문을 두드렸다.
"채비하였사옵니다."
그러고 그쳐도 됐으련만 군소리를 덧붙이고 말았다.
"더 대동할 인원이 없사옵니까? 신변을 위하옵자면 호위는 필요하리라 사료되옵니다."
아무래도 께름칙했다. 저자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생긴다는게. 그랬다간 내가 뒤집어써서 우리가족이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게. 그래, 이건 저 자를 염려하는게 아니다. 목정 가의 일원이 어찌되든 알바아니다. 단지 내 가족을 위해서, 그뿐이다.
화를 꾸미라는 소리를 듣자 연의 앞에 서있던 두 시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른 시녀가 화를 끌고 나가다싶이했다. 우물쭈물거리다간 자신의 불호령이 떨어질테니 그런 것이겠지. 그런 반응에 잠시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는 다시금 종을 울려서 다른 시녀들을 불렀다. 이미 자신이 외출한다는 사실을 집사에게 들었을터라 그녀들은 양손에 한가득 옷가지와 소쿠리를 들고왔다. 아무리 저주로 비루해진 몸일지라도 그는 이 저택의 주인. 그러니 외출할때는 고급스러운 소재의 옷을 입고 흐트러진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내고선 초췌해진 얼굴을 약간의 화장으로 가리는 일을 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엄청난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 이만하면 됐다. "
평소 실내에서 입던 바지 저고리와는 다른 것으로 갈아입은 그는 시녀들이 들고있던 학창의를 몸에 걸쳤다. 흰색의 바지 저고리와는 다른 검은색의 학창의는 흔히 보기 힘든 색이었다. 그 위에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갖옷을 걸친 그는 몸이 무거워지는게 싫은지라 추위에 대비해 이것저것 더 입히려던 시녀들을 제지했다. 그 사이에 머리는 말끔이 빗어져 꽁지로 묶였고 수척하던 얼굴은 가까이서 보지만 않는다면 말끔해져 있었다. 시녀들을 보낸 그는 금방 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방 밖으로 나갔다.
" 꾸며놓으니까 썩 보기 좋구나. "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시선을 아주 잠깐 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간만에 입은 외출복이 익숙치 않은지 이리저리 돌아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그는 화의 말에 답했다.
" 여긴 제국의 수도이자 이 나라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도시 중에 하나다. 거기다 노릴거면 형님들을 노리지 구태여 날 노리진 않을 것이다. "
그러니까 호위는 딱히 필요 없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제국의 적이 많다고는 하나 수도까지 올 정도로 간이 큰 적들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리고 수도에 잠입한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다른 지역들보다 위병이 수배는 더 많이 배치 되어있는 곳이라 기회를 노리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어쩌다 기회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기회를 자기 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에게 쓰진 않을테니 결국 호위는 필요 없다는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 될지도 몰랐다.
" 가보자꾸나. "
그는 저택의 대문으로 향했다. 평소에 실내에서 생활을 주로 하는 사람의 발걸음 답지 않게 그 보폭이 꽤나 큰 편이었다. 시원시원하게 내딛는 그의 다리는 지금만 봐서는 시내를 순찰하는 위병들의 발걸음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대문과 그의 방 사이의 거리가 멈에도 불구하고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언질을 받은 것인지 문지기들의 신호와 함께 대문이 열렸고, 그는 화쪽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 어디 가고싶은 곳이 있느냐? "
원하는 곳이 있다면 자기가 안내해주겠단 뜻일테다. 그야 화는 저택 바깥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테니 말이다.
- 그러나 유화가 거듭 새기는 결심은 실상 모순되는 감정과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것. 목정가 삼남이 고통을 내비칠때마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밀려든다는 진실을 막으려는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
어쨌거나 대문이 열린 시점에 유화는 또다시 놀랄수밖에 없었다. 목정 가 삼남의 외출인데 탈것이라곤 없다. 애초에 탈것을 탈 생각도 없었다는듯 태연스럽게 나선다. 더구나 당연히 중요한 용무가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행선지를 정한것도 아닌듯하다. 순간순간 날카롭게 스치는 시린 밤공기가 황당함을 더하나 토를 달아 무엇하랴? 유화는 먹거리가 담긴 바구니를 손목으로 옮기고는 방한용품 바구니에서 손난로를 꺼내 목정 가 삼남에게 내밀었다.
"밤공기가 차옵니다."
하문한 말에 답할 궁리도 아니할수가 없었다. 아니 가고싶은 곳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향집부터 떠올랐다. 그러나 그곳은 이제 죽어서도 가기힘들 꿈. 홀로있을때 고향방향을 바라보는걸로 족해야만 하리라.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목정 가 삼남의 몸에 무리가 가지않고 그가 수틀려서 사나워지더라도 속히 돌아올수있는 정도로만 나가는게 속편할거다. 그렇다면....
제국의 수도에 관한 소문은 아라 전역에 퍼져있었다. 불을 붙이지않아도 몇달은 너끈히 주위를 밝힌다는 등불, 사람을 싣고 저절로 움직인다는 쇳덩어리, 먼데 떨어져있는 사람에게도 목소리를 바로바로 전한다는 상자 등등 제국의 수도는 귀신이 조화를 부린 물건이 도처에 깔려있다고. 그러한 술수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제국이 오늘날의 입지를 차지한건지 내눈으로 직접 봐두는것도 무의미하지만은 않을성 싶었다.
날이 쌀쌀한 요즘엔 몸이 좋지 않은 삼남을 위해서 저택은 항상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집안에서 계속 머무는데다 나간다고 해봤자 저택의 후원이나 안뜰 정도를 도는 정도였기에 그는 대문을 나서자마자 파고드는 한기에 생각보다 더욱 추운 날씨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녀들이 계속해서 옷을 입히려는 것을 무겁고 답답하다는 이유로 그만두게 했던 연은 그냥 입히게 놔둘껄, 하는 후회를 하면서 화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침 화가 자신에게 손난로를 내밀었고 냉큼 받아들었다. 자칫하면 몇날며칠은 앓아누울수도 있었고 이는 괜히 일이 밀려서 나중에 더 큰 고통을 초래하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었다.
" 신문물이라 ... 늦은 시간이라 보여줄만한건 별로 없겠지만 말이다. "
우월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를 정복했던 제국은 전쟁이 끝나고 군사 기술을 모두 일상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늘어난 영토를 쉽게 통치하고 기술력을 제공하여 정복한 지역의 민심을 잡기 위함이었다. 허나 모든 기술을 제공해주진 않았기에 제국의 본토였던 곳과 정복한 영토의 기술력 차이는 꽤나 심하게 나는 편이었다. 아라에서 온 화가 궁금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는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마침 오늘 등불탑이 시험 가동을 하는 날이니 그걸 보러 가면 될 것 같구나. "
제국은 이제 막 전기를 발견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을 끓여서 생기는 증기로 터빈을 돌리면 전기가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국의 과학자들은 터빈에서 나온 전기로 거리를 비추고 있던 기존의 가로등들을 교체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일정 시간이 되면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불을 붙여주어야했고 비라도 오는 날엔 전부 꺼져버려 길거리가 너무 어두워지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불편한 점도 분명 없어질터이니 제국의 과학 역량은 모두 전기에 쏟아부어지고 있었다.
" 내 여동생이 말하기론 내 키의 2배는 될법한 탑에 등이 잔뜩 켜져있다고 하더구나. 불도 안붙이고 말이다. "
그의 여동생은 이미 시집을 간 상태였지만 종종 그의 저택에 놀러와서 시간을 보내고 가곤 했다. 위의 두 형이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것처럼 그와 그의 여동생도 두살 터울인지라 어릴적부터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저주를 받아들이고나서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진 나머지 여동생에게 심한 말을 퍼부은 적도 있어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잘 지내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네가 살던 지역은 어떤게 유명하느냐? 태어나서 수도 바깥으로 나가본적이 단 한번도 없어 그런 부분은 잘 알지 못하니 말이다. "
적어도 제국의 영토는 증기 기관차가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비교적 수월했지만 몸이 약한데다 낮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연은 그런 혜택을 전부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문서에서 보이는 것들로만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뿐.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손님이 오면 이런 얘기는 꼭 듣는 편이었다.
으윽 밤낮이 바뀌어버렸따 .. 내일은 꼭 낮에 안자야겠어! 유화가 냉랭한건 정말 괜찮아! 아직 목정 가문에 대한 분노가 남아있을 시기니까 말이야. 고향에 가고 싶기도 할테고. 데이트 코스는 나중에 연이가 제대로 데려가 준대~~ 이번엔 집사가 나가라고해서 마지못해 나온거에 가까우니까 말이야! 후후 그땐 잔뜩 보여주러 다녀야지.
어두운탓에 잘못봤는지도 모르나 손난로를 받아드는 목정 가 삼남의 손끝이 푸르스름하게 변해있었다. 털옷을 걸쳤다고는 해도 바깥날씨가 그의 거처와는 딴판으로 쌀쌀하고 찬바람은 날카롭게까지 느껴지니 추위를 아니 타기는 어려우리라.
"잠시 기다려주시옵소서."
양손의 바구니를 내려놓으면서 우선 털토시를 꺼내들었다. 그런다음 손난로를 털토시 한가운데에 밀어넣고는 그의 손을 털토시 양쪽구멍에 하나씩 넣었다. 난로가 천천히 식도록하는 동시에 온기가 오롯이 그의 손에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리하면 손이 덜 시리실 것이옵니다."
그렇다해도 온몸에 부딪는 바람까지 막기는 역부족이다. 유화는 제 연봉의를 벗어 목정 가 삼남에게 두르고는 매듭지었다. 체격차이가 차이인지라 그에게는 작다만 토시만으로는 가려지지않는 부분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망토자락이 막아주길 바라며. 등골과 팔을 따라 오스스 소름이 돋는것 같았으나 목정 가 삼남이 탈나게 두느니 좀 춥고마는게 속편하다. 단둘이 나온 길인데 이 자에게 문제라도 생겼다간 후환이 두렵거니와 일이 어떻게돌아가든 이 자는 살아야하니까.
"갑갑하시더라도 참아주시옵소서."
망토자락을 한껏 당겨 여미고는 바구니를 도로 챙기자마자 어리벙벙해졌다. 그가 가는대로 따라가면서도 상황파악이 안됐다. 행선지를 아니정하고 나온것도 놀라운데 이토록 순순한 반응이라니? 이 자가 진정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않고 심기에 거슬리면 앞뒤 안가리고 악부터 쓰던 목정 가 삼남이 맞나? 이 정도면 예측할수 없기가 날씨보다도 더한것아닌가? 날씨도 동짓달에 삼복더위가 찾아오지는 않는법인데.
경악스러우면서도 등불탑이라는 것에는 호기심이 동했다. 그토록 큰탑에 잔뜩 단 등이 불을 안붙여도 켜진다니? 불씨없이도 한밤중에 빛나는것이라곤 달빛이나 별빛말고는 상상이 안되는데. 달과 은하수를 몰아넣기라도 한것같은 탑이든 진짜로 등불같은 불빛으로 촘촘한 탑이든 실재하리라고 믿기란 쉽지않다. 도깨비가 조화라도 부렸다면 또 모를까. 그도 직접 본건 아니라고 소문이란 전해지면서 과장되거나 와전되기도 하는법이니 실제로는 전혀 다른 물건일수도 있지않을까? 하지만 정말로 그가 말한대로의 탑이라면 제국의 강성함은 천지조화도 마음대로 할 정도라는것 아닐지? 호기심과 의심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가운데 해소되지않은 문제도 마음에 걸렸다. 벌써부터 추워하는 그가 그 탑까지 다녀와도 무탈할것인가?
"납시온다면 따르겠사옵니다만 존체를 먼저 돌보아주시옵소서."
목정 가 삼남의 몸뚱아리를 존체라 일컫는 스스로가 한심해 순간 추위도 잊히는듯했다. 그러나 감수해야한다, 저 자가 오래오래 살도록 진심전력을 다하자면.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지는않는지 입김에 주목하여 가늠하던 찰나 고향의 신문물에 관해 그가 물어왔다. 되짚어보니 대다수는 풍문으로만 들은것들이라 이렇다저렇다 말하기 어려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문물은 확실히 있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전혀 끌지않아도 수십수백명을 태우고 먼길을 오간다는 신이한 쇳덩어리나 사람이 하는 말을 전혀 엉뚱한곳까지 전할수있는 소리상자에 관해 들은적이 있사옵니다만... 제게 가장 신이했던 물건은 머리만 문질러도 불이 피어오르는 요술막대기였사옵니다."
그 자그마한 나무가 세상 어떤 부싯돌보다도 쉽고 빠르게 불을 피우는걸 직접 봤을때 어찌나 놀랐는지. 실수로 부엌의 불씨를 꺼뜨리더라도 그것만 있으면 끄떡없으니 탐나기 그지없었으나 그만큼 귀한물건이라 한번 구경한것도 운좋은 일이었다. 그랬기에 목정 가에서 그 귀한 막대기를 아무렇지않게 쓰고 사용인들의 손난로에도 숯을 채우는걸 처음봤을때는 그야말로 기겁을 했었다. 저렇게 흥청망청 써도 끄떡없을만큼 제국이 혹은 목정 가가 강성하다면.. 암담한 일이다.
연은 화가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분명 다른 이들이 이런 행동을 했다면 어딜 자신의 몸에 손을 대냐며 경을 쳤겠지만 화가 하는 행동에는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털토시에 손이 끼워지고 느껴지는 온기가 시렸던 손끝을 조금씩 뎁혀주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째 이 여자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자신이 유해지는가. 아무래도 날씨가 추워서 일일이 성질을 내기 귀찮아서 그런 것이라 결론을 지어버린 그는 어느새 자신에게 둘러져있는 연봉의를 보고선 손난로를 내려놓고 연봉의를 풀며 말했다.
" 내가 이렇게 두르고 있어봤자 네가 고뿔이라도 걸리면 나한테도 옮는건 시간 문제다. "
등불탑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갈만하긴 했지만 이런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비록 손난로를 들고 있다곤 하나 그것은 손과 그 주변에 한정될뿐 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하니 한기가 몸 곳곳에 파고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렇기에 그는 풀어낸 연봉의를 화에게 직접 둘러주고서는 손난로를 다시 집어들고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이런 몸뚱아리에 존체라니. 어울리지도 않는 말은 별로 듣고싶지 않구나. "
저주의 부작용으로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은 항상 그를 좀먹고 있었다. 뭐라도 하려고 하면 아파오고 잠에 제대로 들지 못하게 하는 이 몸은 그에겐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산다는 것이 지금의 그를 표현하기에 딱 걸맞은 수식어가 아닐까. 손난로가 있으니 처음 대문을 나섰을때보단 훨씬 추위를 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질문에 화가 조금 엉뚱한 것을 답하자 그는 살짝 웃어보였지만 딱히 지적은 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얘기해주었다.
" 이곳에 올땐 배와 마차를 이용했다고 했었지. 아라쪽으론 아직 철길이 깔리지 않아서 그랬던 모양이로군. 기관차라고 하는 것이 네가 말한대로 수십 수백명을 태우고 질주하지. 마차는 비교도 못할 속도로 말이다. "
그가 기거하고 있는 저택은 역과도 거리가 멀었고 주변에 철길도 없는 지역이었다. 기관차의 소음은 상당한 편이라 높으신 분들이 사는 지역 주변에는 철길이던 역이던 절대 깔리지 않았기에 평소엔 기관차가 달리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밤엔 기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야 하겠지만 그것이 기관차를 모른다면 그것이 기적의 소리라는 것도 알지 못할테니 말이다.
" 또한 네가 말한 상자는 저택에도 있다. 집사의 방에만 있어서 보지 못했겠지만. "
자신은 본가의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얘기를 나누지 않으니 그런 것들은 집사가 사용하는 방에 설치 되어있었다. 연은 저택의 이름뿐인 주인일뿐 실질적으로 저택을 관리하고 본가와 조율하는 것은 집사가 다 하고 있었기에 처음 그것이 설치될때 집사의 방에 설치했던 것이다.
" 다만 내가 질문한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답이구나. 나는 너가 살던 곳이 어떤 것으로 유명한지 물었는데. "
그래도 딱히 심기를 건드린건 아닌지 말투는 꽤나 온후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대화하는 일은 그에게 있어선 드문 일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언제 날뛸지 모르는 목정가 삼남의 성미를 생각하면 멋대로 손댄건 무모한 짓이었다. 어처구니없게 트집을 잡아가며 뻗댈지도 모른다 각오도 했었다. 그러나 유화의 무모함은 영문모를 결과로 돌아왔다. 손난로를 내려놓고 연봉의의 매듭을 푼것까지야 앞뒤없는 어깃장이려니 할수있으나 그뒤가 문제였다. 지금 이게 무슨상황인지 파악이 안됐다.
'?'
찬바람의 기세가 약해졌음을 의식하고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덕분에 메마르게 닿는 소리의 의미도 늦게나마 더듬어냈으나 그결과는 있는그대로 받아들여지지않는 것이었다. 말투는 무심해도 그내용과 그의 행동에 담긴것은 걱정, 더 나아가서는 배려라고밖에는 결론지을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목정 가의 인간이 저가 추운데도 아랫것이 고뿔걸릴 것부터 염려하고있다? 성치도 않은 몸이면서? 아니다. 이건 있을수없는 일이다. 숱한 목숨을 앗아간 선조들에게 아무 거리낌도 갖지아니하는 자가 가족도 일가친척도 아닌 아랫것을 더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손난로와 토시를 다시 착용하는 목정 가 삼남을 도로 연봉의로 싸맸다.
"소인이 고뿔에 걸려봤자 다른 소임을 맡으면 그만이오나 도..련님께오서 편찮으시오면 윗전을 잘못모신 소인은 물론이옵고 모두가 힘들어지옵니다. 부디 상량해 주시옵소서."
오기로 지껄인 소리였고 굴욕적인느낌 때문에 피하고팠던 도련님이란 존칭이 입에 턱 걸리기도했으나 뱉을수록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옷가지로 감싸주는것 따위 돌발행동에 불과하다. 그래봤자 아랫것은 더욱 경을 칠 따름아닌가. 배려라 착각한건 내가 이만한 추위조차 못배기게 나약해서일뿐이다. 백번 양보해 배려라 치더라도 애초에 내가 아랫것으로 전락한게 저더러 '도련님'이라는 존칭을 써야만하는 처지가 된게 어째서인가? 배려랍시고 베푸는건 병주고 약주는 우롱으로 보는편이 옳으리라.
하마터면 혼란스러워질뻔한 사고를 가다듬었으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자조적인 대꾸. 아랫것이기에 고를수밖에 없었던 높임표현이 해묵고 치유할길없는 상처를 자극해버린 모양이었다. 목정 가 삼남이 저주와 함께 오래오래 사는걸 지켜보기로 다짐한만큼 시원해야 마땅하건만 어찌 이리도 답답한지? 그도 모자라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진 것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결국 뭔가에 떠밀리기라도 한것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다른소릴 할수가 없었다. 건강이 나쁠수록 더 보중해야한다고도, 건강과는 별개로 일가를 책임져야할 입장이라고도. 언젠간 나아지시리라는 입에 발린 말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저주에 좀먹힐대로 좀먹힌 그는 희망을 바랄 기력조차 없어보였으므로. 또한 허투루라도 나아지고말고를 운운했다간 해주법을 곱씹게 될것만 같았으므로.
그나마 화제가 신문물로 바뀐것은 다행이었다. 더욱이 들을수록 신기하고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도 저절로 움직이는 쇳덩어리가 진짜로 존재하다니? 그것도 마차와 비교도 안되게 빠르다고? 쇳덩어리를 달리게해주는 철길이란것에 어떤 도술이라도 걸려있는걸까? 말소리를 멀리 전하는 상자도 목정가의 저택에 있다고? 그상자를 쓰면 내 말도 고향에 전해질까?
아니품으니만 못한 헛되고헛된 희망을 흩어버리려 애쓰는데 뒤이어 나온말이 겸연쩍었다. 고향에서 이름난 신문물을 물은게 아니었구나. 엉뚱하게 이해한게 어이없는 나머지 한순간 부드러운 감정마저 일었으나 그도 잠시. 고향을 생각할수록 그립고 쓰린 마음이 들끓었다. 그자체로도 문제였지만 어찌 답해야할지도 고민이었다. 자칫 가족얘기를 입에 담았다간 무슨 뒤탈이 생길지 두려웠기에.
"...흔하디흔한 산골마을이옵니다. 더러는 약초를 캐고 더러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더러는 행상(行商)을 상대로 이런저런 거래를 하는. 그나마 차를 우리기좋은 꽃이나 약초가 흔하옵니다만 그쯤이야 여느산에나 널리고널린 것이옵니다."
이만하면 거짓말은 아니다. 뺀거라곤 미골이라는 마을이름과 증조부께서 유랑민으로 전락한 십여명을 규합한끝에 일군 마을이라 유 가(柳 家) 마을로 알려졌다는것뿐. 그런 이력이 희를 볼모삼으려는 움직임에 일조한셈이라 마음만 먹으면 내 가족을 얼마든지 해칠수있는 자에게는 가능한한 감추고싶었다. 진즉에 유 가임을 꽁꽁 숨기고살았더라면. 이제와선 부질없는 공상이 속을 할퀴어댄다.
기껏 연봉의를 다시 둘러주었더니 손난로를 집어드는 사이에 다시금 그의 목에 연봉의가 둘러졌다. 아무래도 화의 입장에서는 그가 자신과 함께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려서 돌아온다면 다른 시종들이 경을 칠테니 그는 별 수 없이 연봉의를 잠자코 둘러맸다. 자신이 아플때마다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잘 알고 있으니 시종들이 그런 반응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파고드는 한기가 더욱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선 내일의 몸 상태는 꽤 괜찮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 됐다. 딱히 송구하라고 한 말은 아니니. "
이 역시 그녀의 입장에선 연에게 극존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니 딱히 트집은 잡지 않고 넘어갔다. 사실 그가 예민해지는 부분은 극히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하는 것이 많았고 오히려 이런 상황에선 별 상관없다는듯이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예전 집사의 손자가 저택으로 놀러왔다가 연을 마주치고선 괴물이라며 소스라치게 놀라고선 도망가버린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연은 집사에게 아이가 한 일이니 괘념치말라는 말을 남기고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던적도 있으니 말이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
화의 말에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긴듯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가 집중을 할때면 곧잘 나오는 이 행동은 턱에서 손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생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지금처럼 추운 날씨에선 턱을 만지고 있는 손이 금방 시려울테니 그의 생각 또한 금방 끝났다. 하지만 그가 생각에 잠겨 걷는동안 등불탑에 거의 도착했는지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한낮처럼 빛이 나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들 사이에 가려져 제대로된 모양은 보이지 않았기에 그는 화의 손을 잡아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 등불탑이라는 것은 오래 켜두긴 힘드니까 말이지. 금방 가지 않으면 꺼질수도 있다. "
말 그대로 시험 가동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정해두긴 하지만 안전을 이유로 그것보다 더 빨리 꺼질 수도 있는지라 최대한 빨리 가서 보는게 중요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연 또한 등불탑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걸음을 빨리하는 것도 있었다. 등불탑에 가까이 갈수록 많아지는 인파 사이를 지나서 그들은 이윽고 등불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처음 보는 것이라, 그 위용이 대단하긴 하구나. "
뼈대는 철골로 되어있는데다 가운데가 숭숭 비어있어 낮에 보면 분명 흉물처럼 보이겠지만 야밤에 등불을 모조리 켜둔 이 탑의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고 있었다. 수도에선 일부러 이것을 보려고 밤을 설치는 이도 있다했는데 그 이야기가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려주듯 주변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똑같았다.
연봉의는 그래서 얌전히 가지고 있기로 했다! 후후 답레는 항상 꼼꼼히 읽어야지~ 유화주가 열심히 써준 답레니까 말이야. 연이가 화의 손을 확 잡아버렸는데 혹시 불편하면 말해줘! 그 부분은 수정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3 항상 아깽이라고 불러주니까 정말 연이가 아깽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목정 가 삼남의 반응은 이래저래 의외였다. 하찮은 아랫것을 이토록이나 생각해줬건만 고마운줄도 모르고 감히 어디서 훈계냐며 윽박질러도 이상할것 없다 여겼고 아픈곳을 자극당한이상 어느가문의 뉘시냐 물었던 첫날처럼 막무가내로 난리칠만도 하다고 각오했었다. 그러나 그는 연봉의를 도로 매듭짓고 여미기까지 마냥 순순했고 유화의 애매모호한 사과도 대수롭지않게 넘겼다. 송구하단 소릴 들으려던게 아니라는 건 저주받은 자신에 대한 새삼스러운 체념일지? 혼란스러웠다. 추위에 머리가 굳기라도했는지 뾰족한 답이 안나왔다. 그런끝에 마을얘기도 무던히넘기고는 제턱을 쓸며 앞장서가는 목정가 삼남을 뒤따르면서는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선의를 지니고있다. 매사 체념적이고 패악질도 부리지만 타인의 입장도 헤아려보고자 시도할의향은 확실히 지니고있다. ... 저주만 아니었다면 썩 바람직한 인품의 소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목정 가의 일원에 대해 이런결론을 내리다니, 현실의 치욕을 버티게해준 원동력이 무너지는듯했다. 그의 저주를 풀수있을지도 모르는 입장이기에 더더욱.
무력감. 향할곳없는 원망. 밤보다 더 어두운 감정에 잠겨가던중 저멀리서 해가 뜨기시작한게 보였다. 아직 한밤중인줄 알았는데! 목정가 삼남은 햇빛을 받으면 안되지않나?! 놀라서 앞질러막으려다 그만 굳고말았다.
'?!'
해가 뜨는걸 아는지모르는지 그는 태연하기만하다. 이럴때가 아니라고 말릴새도 없이 그의 걸음이 해에 더 가까워지기라도 하려는것처럼 빨라졌다. 그런채 이어지는말에야 유화는 가까스로 상황을 파악했다. 저너머의 빛이 해가 아니라 등불탑이라는 모양이다. 그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나아갈수록 사람들이 몰려드는게 역력했다.
한숨돌린셈이나 긴장감은 엉뚱한데로 커져갔다. 그에게 잡힌 손. 이런 어색한상황이라니? 철들면서부터는 희랑 함께 다닐때말고는 누구 손을 잡은적이 없으니 더 어색했다. 희의 손은 암만해도 내손아귀에 쏙 들어왔는데 그의 손은 .. 정반대다. 내손을 다 감싸고도 오히려 품이 남는것같다. 이와중에 따스한 기분이 드는건 대관절 어떻게 된건지? 추위에 너무 오래 노출돼서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그렇다기엔 지금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찬공기도 덜 들고 체온들도 전해져오는데.
얼빠진채 휘적휘적 따라갈수록 해같은것은 점점 가까워왔다. 아니 해와는 다르다. 해는 제빛을 은은한 주홍빛으로 퍼트리거나 너무 눈부셔 쳐다보기힘든 광채를 내는데 저 빛줄기는 해처럼 환할지언정 눈이 부시지는않다. 어쨌거나 그 진면목이 보이는 위치에 이르러서는 눈을 뗄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와는 다르다해도 이정도면 땅위에 해를 여럿 꽂았다해도 과언이 아닐것같다. 보면서도 못믿을 탑이고 세상 어떤 도술로도 구현못할것같은 탑이라 제국이 더욱 두려워졌다. 저런걸 만들수있다면 세상에 못할짓이 없을테니 내 조국의 미래는 어찌될까?
그때 평소의 무미건조한 태도는 간데없는 탄성이 들려왔다. 핏물처럼만 보이던 목정 가 삼남의 붉은눈동자에 빛의 탑이 환하고 따스한빛을 퍼트리고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닥친 부드럽고 안온한 기분에 유화는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사옵니다."
수도에 살면서도 이탑을 보는게 처음일만큼 외출을 삼가온 자가 이 추위에 나왔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신문물을 보고싶다고 했기때문에. 아무리 내 처지가 싫고 제국의 강성함이 암담해도 그점에는 감사하는게 도리이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싶었다.
그렇게 안일해졌다가 아차싶었다. 외출이라곤 않던 자가 한참을 걸었으니 갈증이든 허기든 생겼을법하다. 유화는 남은손으로 차가 담긴 물병을 꺼냈다. 차가 식지않았는지 물병엔 아직 온기가 어려있었다.
"갈하실터인데 목이라도 축이시옵소서. 시장하시오면 앉아서 요기할만한 곳을 찾아보겠사옵니다."
날씨와 그의 몸을 고려하면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편이 상책일듯하나 혹여라도 시장기가 심하면 돌아가는내내 참느니 챙겨온 계화떡부터 들게하는것도 방법이리라.
다행히도 연은 탑의 가동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등불탑의 주변은 마치 한낮이라도 된 것 마냥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서 가까이에선 정면으로 바라보기도 힘들것 같았다. 거기에 밝기만 한게 아니라 나름 예술이라도 추구했는지 등의 배치가 어느정도 의도적인 것 같았기에 멀리서 볼수록 더욱 아름다웠다. 허나 처음 보는 것엔 호기심이 동하는지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은 조금씩 탑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물론 뜨거워서 위험하다는 위병의 말에 그 전진도 멈추었지만 말이다.
연도 처음 보는 등불탑의 불빛은 낮의 그 따스한 햇빛만큼은 되지 못하지만 비스무리하게나마 그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듯 했다. 한낮의 햇빛을 만끽해보지 못한 것이 어찌나 오래 되었는지 이런 빛조차 그는 감격스러운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허나 결국 햇빛의 따사로움엔 미치지 못했기에 아쉬움만 가득히 남게 된다.
" 감사 인사는 됐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
옆에서 화의 감사 인사가 들려오자 그는 흘끗 쳐다보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기에 데리고 올 수 있는 일이었다. 집사에게 말을 해서 데려가게 할 수도 있을테고 시종들과 미리 날을 맞추어서 같이 구경 왔을수도 있는 일이니 굳이 자신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단지 지금 같이 외출을 했고 화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 마침 자신이 데려간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연 다른 시종들이 이런 말을 했을때 연이 들어주었을까, 에 대한 대답은 분명 미지수였다.
" 여기까지 나왔는데 평소에도 먹는 그런 음식은 됐다. "
등불탑의 시험 가동은 사람들에게도 행사로 통했는지 주변에 노점상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 중에선 화로를 두고 길거리 음식을 파는 사람들도 보였고 마침 그것들에 눈이 가있던 연은 화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하고선 고민이 되는지 턱을 만지작거리다 허리춤에 매여있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화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 저기 앉아있을테니 네가 먹고싶은걸로 사오거라. "
멀지 않은 곳에 긴 탁상이 군데군데 놓여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서 쉬고 있었기에 얘기한 것이었다. 추운 날씨에 밖에 나와있는건 그에게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기왕 나왔으니 즐길건 즐기자는 주의였다. 일이 많은 요즘엔 밖에 나올 기회도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옛날엔 이렇게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사먹는다는건 불가능했다던데 시간의 흐름이란 정말 무섭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봐놓았던 탁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