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노릇이었다. 스스로를 나무라지않으려야 않을수가 없었다.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한들 목정가. 나라를 망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내 가문도 멸문시키다시피한 집안이고 저주를 홀로 뒤집어쓰고 그로인해 망가졌다한들 선조의 악행에 대해서는 일말의 뉘우침조차 없는 족속이다. 그집안의 시녀로 전락한주제에 조금 말이 통하는것도 같다고 좋게 여겨버리면 어쩌자는건지?
하지만 스스로를 다스리고 다스려도 목정 가 삼남이 인파속에서 햇빛의 탑으로 다가가는 모습이며 탑에서 나오는 빛을 잡기라도 할것처럼 손을 뻗는 모습에 도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햇살이, 따사로운온기가, 빛과 온기로 인해 채워지는 생기가 그러운걸까? 붉은눈에 어린 환한빛만큼이나 온화하고 어딘지 희망적인 구석마저 있던 표정이 빛은 여전한데도 씁쓸하게 굳어가는게 신경쓰였다. 가문의 위세가 아무리 드높을지라도 인간이고 육신과 정신의 고통도 아는 자. 햇빛 한번 못쬐고 늘상 암막속에 갇혀살면서 어찌 태양이 그립지않으랴? 누구라도 저 처지라면 도술보다 더 허황한 빛이라도 잡고픈게 인지상정이리라. 그래서 보기 시린것뿐.
동요하는 제마음이 싫어 외면하려니 대수롭지않다는투의 대꾸가 돌아왔다. 묘했다. 안도가 되는듯도 하고 훈훈해지는듯도 하다. 훈훈이라니 우스꽝스러운 노릇이나 그래도 뭐랄까? 어려운일이 아니란 말이 그정도는 타인에게 해줄수있다는 의미로 들렸달까? 고맙다는 반응이 익숙지않아 목정 가 삼남이 쑥스러워하는것처럼도 보인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유화로서는 평생 못할 진귀한 구경을 한것은 사실이다. 실은 가족들에게도 휘황찬란한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다. 부모님은 아마 아무말없이 덤덤한척하시면서도 눈을 떼지못하실거고 희라면 아마 놀란소리를 연발하며 저것 좀 보라며 여기저기 가리키겠지. 난 희가 무얼보고 그리 감탄하나 그 손가락을 눈으로 열심히 좇으면서도 못따라가고. 웃음이 눈물로 번질것같아 코를 훌쩍이고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제게는 진귀한구경이니 감사드리지 않을수가 없었사옵니다."
꼭 이런 구경거리가 아닐지라도 윗전의 사소한호의가 아랫사람에겐 크게와닿는 적지않다. 모르긴해도 목정 가 삼남은 사용인들과 그다지 교류가 없었음직한데 앞으로는 아랫사람에게 지금같은 호의를 보일만큼의 심적여유는 생겼으면 싶어졌다. 지금 저 자가 평온해보이고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그리되면 저택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들고 사용인들의 처지도 좀은 나아질테니.
애써 생각을 정리할때 목정가 삼남이 차를 마다하고는 돈을 내주었다. 평소 먹던걸 밖에서까지 먹긴싫다며. 그가 가리키는자리를 보니 곳곳에 탁상이며 의자가 있고 사람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앉았다. 가운데쯤에 모닥불도 있긴하다만 그인근은 이미 앉을자리가 없다. 난감하고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가 목정가랍시고 위세를 부리면 먼저앉은 사람이래봤자 버틸재간이 없을터라 난감한데 모닥불과 먼 자리는 비어있어봤자 춥기는 매한가지라 그가 배겨나질 못할테니 불안했다.
그런데 놀라운일이 벌어졌다. 목정 가 삼남이 누구에게 제신분을 밝히거나 하지않고 묵묵히 빈자리로 향한 것이었다. 목정 가라는 유세를 못부려 안달인줄만 알았는데 신분과 무관하게 도리를 지키기도 하는걸까? 아무튼 경멸스러운 원수가문의 위명덕에 편한자리를 차지하지않은건 다행스러우나 그의 몸상태에 소홀해질순없었다. 유화는 그가 앉으려는 자리에 바구니를 올려둔다음 물병이며 찻잔이며 계화떡이며 젓가락이며를 모조리 차려놓고 남아있던 손난로도 마저꺼냈다.
그렇게 노점상으로 향하긴했으나 뭘 골라야좋을지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군침도는 냄새는 진동하는데 사람들이 워낙 몰려있어 뭘 파는지 확인하기도 일이다. 일단 뜨끈한걸 찾자. 계화떡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차도 꽤나 식었을거고 이날씨엔 뜨끈한걸 먹어야 탈이 안날거다. 그러고 돌아보는데도 엉뚱하게도 땅콩엿이 눈에 띄어버리는건 어째서인지? 희가 달고 고소하다고 웃던것이며 어머니께서 이가 아파 다 못먹겠다며 쪼개주셨던것이며 그 뭉클하던맛이 떠올라 눈물이 북받쳤다.
애써 외면하다 뒤에서 누가 툭 치고지나가는 기척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얼른 골라야지. 감정을 추스르고 살피려니 신기한게 보였다. 무슨 틀에 허여멀거한 액체랑 팥을 넣더니 그 틀을 한참이고 닫아놓는게 아닌가. 그뒤에 틀을 열자 햇빛의 탑 모양을 꼭닮은 떡같기도 하고 과자같기도 한 음식이 나왔다. 그모양에 혹한게 유화만이 아닌지 줄은 한참이었다. 어쩐다? 목정 가 삼남이 괜찮을지 불안해 내다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기까지 나와서' 먹기에는 저만한것도 드물것같다. 결국 줄을 서서는 제 차례가 언제오나 하염없이 앞을 내다봤다 바로서길 반복했다. 그런끝에 받아든 봉투는 내용물이 찹쌀떡보다도 말랑하면서도 따끈따끈했다. 온기가 조금이나마 덜 빠져나가게끔 봉투를 품에 안은뒤 다른 노점에서 따끈한우유도 한병 사서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탑모양으로 만든게 있기에 사보았사옵니다. 떡인지 과자인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마는..."
접시에서 계화떡을 최대한 구석으로 밀어내고 남은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탑모양의 음식을 하나 얹었다. 목정 가 삼남이 차를 이미 마시던중이 아니라면 빈잔에 우유도 따를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도 진귀한 구경일테고 연에게도 마찬가지인 구경일 것이다. 한밤인데도 한낮처럼 빛날 수 있는 물건이라니 한시바삐 개발이 되어 널리 퍼진다면 제국의 거리는 한밤에도 휘황찬란하게 빛나게 되어 아름다우면서도 더욱 안전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는 시선을 돌렸다. 사실 너무 밝아서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자니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감사인사는 됐다는 말에도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표하는 화를 바라본 연은 화에게 돈을 쥐어주고선 봐두었던 자리로 향하였다. 모닥불이 멀어 걱정이 되었는지 화가 가져온 것들을 모두 차려놓는 것을 보고 연은 어서 가라며 손을 훠이훠이 저은 뒤에 등받이에 등을 대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엔 달이 밝게 떠있었고 수많은 별도 같이 빛나고 있었는데 유독 등불탑 근처에서는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등불탑의 빛이 워낙 밝다보니 별빛이 가려지는 것일까. 이대로 등불이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다면 별도 잘 보이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밤을 살아가는 연에게 달과 별이란 태양 대신 미약하게나마 빛을 뿌려주는 것들이었는데 더이상 잘 보이지 않게 된다면 분명 아쉬우리라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결국 받아들여야하는 일이 될 것이니 그는 조금이라도 더 별빛을 눈에 담아두기로 했다.
유독 밝게 빛나는 별들을 이으면 무언가 형상을 띄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별자리라고 하여 계절마다 달라지고 밤의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위치를 바꾸었기에 지금 시간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연은 귀족이니 회중시계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보단 밤하늘의 별로 시간을 알아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취미생활이라면 취미생활이리라. 허나 저택 안도 아니고 훤히 트인 광장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듯 했다. 손난로를 넣어두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기온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인듯 싶었다.
' 내일은 필시 앓아눕겠군. '
사실 진즉에 돌아갔어야했다. 아마 저택에선 돌아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소식이 없음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을터였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들을 찾기 위해서 시종들을 보낼 것이었다. 어딜 간다고 언질을 주지도 않았으니 찾는데 꽤나 애를 먹을테고 말이다. 그리고 평소 같았으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춥다는 이유로 들어갔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좀 더 바깥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화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이었다.
" 꽤나 늦었구나. "
그리고 화가 돌아온 것은 그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전부 보고나서 처음 것을 다시 보기 시작할때쯤이었다. 손난로도 많이 식어서 안고있는 주변이나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기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맞는듯 했다. 그는 화가 사온 것들을 바라보았는데, 따뜻한 우유와 떡인지 무엇인지 모를 무언가였다. 모양은 탑의 모양을 하고 있었기에 등불탑을 노리고 만든 것임에 분명했다. 일단 말없이 따뜻한 우유를 받아들어 몇모금 마신 그는 온기가 몸 안을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느긋하게 먹고싶으나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가면서 먹어야겠다. "
너무 늦으면 분명 집사가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저택을 향해 가기 전에 두르고 있던 연봉의를 풀어서 다시 화의 목에 둘러주었다. 아까보다 더 추워졌으니 그대로 가기엔 분명 무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선 접시에서 화가 사온 음식을 하나 입에 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뜨거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추운 날씨라 그런지 적당히 뜨거웠고 달달하기까지 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가끔 생각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접시에서 하나를 집어 화에게 건네어주며 말했다.
" 너도 먹어보거라. 그리고 연봉의는 네가 하고 가거라. 갖옷에 연봉의까지 하려니 답답하구나. "
아까처럼 연봉의를 다시 돌려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먼저 선수를 친 그는 천천히 저택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서 등불탑의 시연도 끝나려는지 탑을 둘러싸고 있던 등불이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달리 할말이 없었다. 탑을 본뜬 먹거리, 이름이 등불탑빵이랬던가? 빵이라는건 어떤음식인지 잘모르겠다. 과자라기엔 바삭하거나 딱딱하지않고 떡이라기엔 쫄깃하거나 탱탱하지않으니. 아무튼 그 먹거리를 사고말겠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기다리면서도 아주 감질이 났는데 영문모르고 마냥 앉아있으면서는 오죽이나 지루했겠는가. 움직이면서도 오싹하게 추운와중이니 목정 가 삼남이 역정을 내도 하등 이상할것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유를 잔에 채우고 등불탑빵을 하나 더 접시에 얹어도 그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않고 그저 우유만 마셨다. 반가워해야할지 불안해해야할지 헷갈렸다. 평소같으면 저 자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만한 실수를 연거푸 저지르고있는것 같은데 어찌 이리도 잠잠하담?
당사자한테 물을수없을 질문이라 속으로만 곱씹다가 그가 일어서며 하는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상민(常民)이나 우리집안처럼 영락한가문 사람들은 일상에 쫓기다 더러 먹으면서 돌아다니기도 한다만 목정가는 좋든싫든 이 제국에서 어엿한 대갓댁일진대. 그런가문의 장성한 자제가 나다니면서 음식을 먹기도하나? 의외로 행동거지에 소탈한면이 있.. .
'?!'
놀람이 채 가시기도전에 또다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연봉의를 왜 또? 유화야 여태 인파의 틈바구니에 있었던덕에 밤공기를 정통으로 맞지는않았다만 그는 아닌데. 추워도 저가 더 춥고 탈이 나도 저가 더 나겠으며 그랬다간 경을 친다고도 얘기했는데. 하지만 돌려주고자 매듭을 풀던중 또다른 이변에 굳고말았다. 목정가 삼남이 등불탑빵을 한입 먹자마자 남은 하나를 유화에게 내어준것이다. 저에게는 윗전의 심부름으로 아랫사람이 사온 음식인데 나눠먹는다? 이 무슨상황인가? 더구나 연봉의가 답답하다니?? 이건 흡사 ... 희나 부모님께 무언가를 양보하지 않을수없는 상황에 행여라도 걱정을 끼치지않도록 이런저런 핑계를 댔던게 떠올랐다. 물론 목정 가 삼남이 나를 가족으로 볼 이유는 전혀없으니 비슷한구석이라곤 없다. 허나 부모님이 아닌 사람에게서 이런식으로 양보받은적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필이면 하고많은 사람중에 목정가 삼남이?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넋놓은사이 그는 앞서나갔으니 낭패다! 유화는 등불탑빵을 욱여넣고는 늘어놨던 짐을 부랴부랴 챙겼다. 상황이 이러니 무슨맛인지도 모르겠고 빠뜨린거없이 챙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탁상에 잠시 뒀던 돈주머니를 본 순간 비로소 머리가 돌아갔다.
"저, 저! 거스름돈이옵니다!!"
바구니를 팔에 건채로 앞질러가서는 두손에 받들어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시녀인이상 원래도 그를 똑바로쳐다보는게 불경(不敬)인 처지이다만 그걸 떠나서도 지금은 도저히 바로보질못하겠다. 그판국에 등불탑빵의 맛이 늦게나마 입에 선연해지는건 어째서일까? 따뜻하고 달달하고 폭신했다. 무엇보다 사람으로 대접받은 기분이었다. 그 상대가 목정 가 삼남이라는게 허무맹랑하고 그에 감지덕지하는게 미친거같지만 지금으로선 부정하려야 부정할수가 없다. 결국 유화는 돈주머니를 내민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비록 지금은 저택에 자의적으로 유폐된듯한 삶을 살고 있는 연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도 목정 가의 일원, 거기에 가주의 삼남이라는 위치에 있었다. 변해버린 그의 외모는 시민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화제였지만 목정 가문에 그런 사람이 꼭 한명씩 있었다는건 이젠 다들 알고 있는지라 그렇게 개의치는 않는듯 했다. 실제로 그가 등불탑을 보러 모습을 드러냈을때도 몇몇 사람들이 수군대기는 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던것처럼 말이다.
제국 시민들에게 제국 제일의 가문을 묻는다면 백이면 백 황가를 답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가는 가문을 묻는다면 의견은 분분하겠으나 목정(木楨), 양천(凉川), 천야(千野) 가문을 얘기할 것이다. 제국을 건국할때 각각 무기, 수로, 식량을 담당했던 세 가문은 이젠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연에게 청탁을 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물론 대부분 낮에 찾아오기에 연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밤에 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연이 거절하는 일이 많아서 그가 청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하고 싶은 것인지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그에게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주고 가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엔 일절 관심이 없는지라 항상 창고에 먼지가 수북하도록 쌓아두기만 했고 종종 시종들에게 청소하라는 명목으로 너무 비싼 것이 아니라면 조금씩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 네가 갖고 있다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쓰도록 해라. "
거스름돈 뿐만이 아니라 가져온 돈이 남아있었기에 꽤 많은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였지만 연은 화를 흘끗 바라보고선 덤덤히 얘기하고선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다른 시종들은 비록 그의 가문에 소속되어있으나 정기적으로 돈을 받아가고 있었지만 화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집사에게 귀띔으로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녀의 신분으로 제국에 온 그녀에게 대놓고 무언가를 주는 것은 조금 껄끄러웠기에 이렇게라도 챙겨주려는 것이었다.
" 너는 궁금하겠지. 내가 왜 이렇게 너에게 잘 해주는지. "
사실 그에게는 다른 시종들과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 아니, 지금까지의 시종들은 제국의 시민들이고 그 중에서는 하급 귀족들의 자녀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화는 오히려 다른 시종들보다 더욱 밑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신경 써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택에선 다른 시종들과 별 차이 없는 대우를 해주고 있었지만 이렇게 할 수 있을때 조금씩 챙겨주려고 하고 있었다.
" 그건 ... "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길 건너편에서 위병들이 우르르 뛰어와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당연하게도 대비가 되어있지 않던 연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비틀거렸고 근처 벽을 짚어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성을 내지를 준비가 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위병들은 이미 멀찍이 뛰어가고 있었기에 목 끝까지 올라온 그의 고성은 목표를 잃은채 입 안에서 맴돌다가 한숨과 함께 쑥 내려가버렸다.
" 가자. "
아무래도 기분이 갑자기 안좋아진게 분명했다. 냉기가 풀풀 풍기는게 평소 신경질적인 그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듯 했다. 아무래도 그가 하려던 말을 다시 물어보면 분명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이지 요상한 상황이었다. 그가 아무렇지않다는듯 지나쳐가도 어떻다할 반응을 할수가 없었다. 이 돈을 다 준다고? 적은 금액이 아닌데? 유화가 혼란해있거나 말거나 밤바람은 매섭게도 불어댄다. 낭패다. 옷을 껴입어도 모자랄판에 연봉의를 날 줘버렸으니. 궁여지책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종종거렸다. 그렇게라도 가로막으면 목정가 삼남이 조금은 바람을 덜맞을까하여. 짐을 든채로 촐싹거리니 몸은 그럭저럭 더워지는데 귀와 코와 손은 아릿하게 시리다.
그런데 그가 불쑥 엉뚱한말이자 어떤의미로는 유화의 속내를 들여다본것같은 말을 던졌다. 궁금한정도가 아니라 불가사의하다. 시녀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공녀한테 친절을 베풀어봤자 윗전인 목정가자제가 득볼건 없지않은가. 피의 저주에 대해 알아냈다면 또 모르나 그럴리는 만무하다. 만에하나 알아냈다면 이럴시간에 저주를 풀라고 겁박하고도 남았겠지. 그런데도 핑계까지 대가며 연봉의를 넘겨주고 음식을 나눠먹기도하고 돈도 줬다. 대관절 연유가 무엇이란말인가?
들어나보자는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본순간 느닷없이 병사들이 몰려왔다.
"!!"
순식간이었다. 목정 가 삼남이 밀쳐져 휘청인것도 유화가 바구니를 팽개치고 그를 붙든것도. 주위가 식별될만큼 정신이 돌아왔을땐 그를 끌어안다시피 한채 벽에 기댄뒤였다. 상황을 모르고서 보면 목정 가 삼남이 유화를 벽으로 밀어붙인것같은 모양새일것이다. 유화는 질겁하며 옆걸음질을 했다.
"송구하옵니다!"
거리를 벌리고서야 허리를 굽힐수 있었다. 그는 언짢은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사람이 오는지가는지 보지도않고 내빼버린 병사들때문일지 목정 가 삼남의 행차를 알려 병사들의 돌격을 막기는커녕 제대로 부축하지도못한 유화때문일지는 알수없었다. 그리고 어느쪽이든 나동그라진 바구니는 내용물이 엉망진창일게 확실했다. 그가 노기(怒氣)를 폭발시키지않고 짜증스러운 한숨만으로 넘어가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또 터무니없게나마 안심되는 구석이 더 있었다. 목정가 삼남이 앙심을 품고 제 권력을 남용하여 병사들에게 보복하지말란법이 없었는데 이만하게 넘어갔으니. 기세등등한 목정가답지않게 어떤면에선 아랫사람의 과실에 관대하기도 한걸까?
그래도 밤공기보다 더 냉랭한 기색이긴 한지라 유화는 잠자코 내던졌던 바구니나 챙겨들고는 앞서처럼 바람이나 가로막으며 종종거렸다. 그때 문득 시야로 총총한 별과 달이 들어왔다. 햇빛의 탑이 빛을 발할때는 별이 뜬줄도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밤을 밝혀주는건 달과 별이다. 특히나 별은 기분탓인지도 모르나 추운날일수록 빛이 더 형형하다. 그 반짝임이 떨리는것처럼 보이기도해서 어릴적엔 별이 추워하는줄만 알았는데. 언젠가 희는 별이 주위를 따스하게 해주기위해 더 빛나는거라고 주장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나눴던 시절이 떠올라서일까?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왔다.
"등불탑에선 몰랐는데 별이 총총하옵니다. 저리 반짝이는건 추위에 떨어서이올까요? 주위를 따스히하기 위함이올까요?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으올까요?"
주책없이 명랑한어조에 가슴이 뜨끔했다. 목정가 삼남에게 이런 말투라니? 원수집안인걸 떠나서도 윗전으로 대하지않으면 안되는 상대이건만.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상황이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이 화를 바라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때 골목에서 위병들이 삽시간에 튀어나와 달려나갔고 그에 휘말린 연이 휘청이며 넘어지려한 순간 화가 그를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해주었다. 물론 그 관성으로 인해 연과 화는 같이 휘청이다 벽에 기대서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마치 그 모습은 연이 화를 벽으로 밀어붙인 모양이었다. 늦은 밤이라 주변에 행인이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 보았다면 망측하다며 눈을 살짝 가리고서 종종걸음으로 그들을 피해갔을지도 몰랐다.
" 아, "
그리고 연은 갑자기 가까워져버린 화의 얼굴을 보고선 당황한듯 잠깐 허둥대다 금방 벽에서 멀어지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허나 당황도 잠시 곧 이런 상황을 만든 위병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그들은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금세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치안이 좋다곤해도 범죄가 아예 일어나진 않으니까 말이다. 다만 분명 연이 그들과 부딪힐뻔한걸 봤을텐데도 사과 한마디 없이 가는 작태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아주 충분했다.
" 괜찮느냐. "
목정 가의 삼남으로 태어나서 정치를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의 눈치를 볼 일도 그렇게 많지도 않았던 그는 당연하게도 얼굴 표정에 그의 기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잔뜩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고성을 질러대며 잡아오라고 소리를 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는 화에게 괜찮은지 묻고서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위병들의 근무 시간은 정해져있으니 집사에게 말해둔다면 그 시간에 누가 근무를 했는지 단숨에 알 수 있어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런걸 알게 무엇이냐. "
아까였다면 화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줄 연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기분이 안좋아진 그에게 고운 대답을 듣기엔 어려워보였다. 그나마 화에게 성질을 내지 않는 것이 다행일까. 거기에 아랫것답지 않은 말투였기에 분명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그냥 넘어가기로한 모양이었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저택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저 멀리 저택의 시종들이 호롱불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연의 귀가가 늦는 것에 대해서 집사가 보낸 모양이었다.
" 내가 무언가 주었단 말은 하지 말거라. "
아까 먹었던 것이나 돈에 관한 얘기인듯 했다. 아무래도 화가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것은 본가에 즉각적으로 보고가 들어갈테고 그럼 귀찮은 일이 매우 많아질테니 말이다. 시종들은 빠른 걸음으로 연에게 다가와서 상태를 물었고 그는 상처가 난 손을 보여주며 시종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선 그대로 그 사이로 섞여들었다.
당황스러웠을터이다. 불쾌했을터이다. 길가다 난데없이 떠밀린것도 시녀가 달라붙어버린것도. 허둥지둥않고 잘 붙들었더라면 혹은 흔한 대갓집행차처럼 물렀거라 소리라도 치고다녔더라면 이꼴은 안됐을텐데. 허리 숙인채로 때늦은후회를 거듭하는데 믿기지않는 물음이 떨어졌다. 괜찮냐니? 이판국에 아랫사람의 상태부터 확인하는건가? 병사들이고 유화고 무엄하다며 있는대로 짜증을 부리는게 아니라?
"네? 아, 예... . 도..련님은.. ?"
혼란을 애써 누르며 살펴보니 목정 가 삼남의 손에 생채기가 났다. 그렇잖아도 추위로 얼어 벌건손에 핏물까지 비쳐 보기에도 아리다. 허겁지겁 그손을 붙들고 상처를 살폈다. 이물질이 섞여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번 말끔히 씻어낼수있으면 좋으련만 물은 없고, 찻물이라도 쓰고프나 바구니가 엎어진꼴로 보아 그것도 무리이지싶다. 아쉬운대로 손수건으로나마 상처를 훔쳤다. 최대한 통증이 덜하라고 조심하긴했으나 다친데가 건들리니 자극이 안갈수는 없으리라. 돌아가는 동안 찬바람이나 이물질이 들어가면 곤란한데. 손수건을 한번 턴뒤 비교적 말끔한부분으로 상처를 싸맸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돌아가시는대로 제대로 조치받으시옵소서."
그러고나서 땅에 널브러진 바구니의 덮개를 슬쩍 열었더니 당연히 차며 먹거리는 물론 여분손난로의 숯까지 다 엎어졌다. 불이라도 붙으면 더 낭패라 숯은 죄다 버린뒤 즈려밟아 불씨를 껐다. 그정도 난리통을 부렸으면 이제라도 얌전히 구는편이 나았으련만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불러일으킨 추억은 쓸데없는 소리를 새어나오게 했다. 아니나다를까 퉁명스러운 대꾸. 당연하다. 오히려 윗전을 다치게한 판국에 무슨 헛소리냐고 윽박지르지 않는게 괴이하다면 괴이하다. 아랫사람을 막 대하는데 익숙한 목정가 도련님 아니겠는가. 현실이 의식되자 좀은 정신이 드는것도 같다.
하여 입다물고 불어닥치는 바람이나 막아보려고 이리저리 옮겨가며 나아갔다. 그렇게 저택에 가까워가노라니 멀찍이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온게 보였다. 호롱불에 목정(木楨)이라는 글자가 장식된걸로 보아 저택의 시종들 같다. 아마도 주인을 마중나온거겠지. 이 추운날 한참을 돌아다닌것도 모자라 목정가 삼남에게 상처까지 입혔으니 곱게는 넘어가기는 힘들듯하다. 한숨이 나오려는걸 꾹 삼켰다. 매질? 감금해 굶기기? 내쫓기? 셋중에선 내쫓는게 제일 낫겠다. 아니 내쫓는건 아라의 가족들에게까지 해코지하지만 않는다면 사실상 선물이다. 쓸모가 없어서이든 말든 자유가 되는것아닌가.
겁먹지말자고 마음을 거듭 다잡을때 뜻밖에도 함구령(緘口令)이 떨어졌다.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의미자체는 이해할만했다. 편애받는것처럼 비치면 구설수도 생기고 이래저래 곤란해진다는 거겠지. 다만 불가해한것은 목정 가 삼남이 그런부분을 의식했다는 점이다. 이런사안이 불거질때 난감해지는건 아랫사람이지 윗사람이 아닌데도. 아랫것이기에 겪지않을수없는 알력을 다 염려해줄만큼 세심하고 사려깊은 성품이었나? 이 자가 걸핏하면 저택전체가 싸늘해지도록 신경질을 부려대던 목정 가 삼남이 맞나? 의심스러우면서도 뒤숭숭하던 마음은 한결 누그러들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질않아 고개만 끄덕였지만.
그렇게 형언할수없는 기분에 휩싸인채 유화는 시종들에게 에워싸여 돌아가는 목정가 삼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와우~~ 연이가 그정도로 마음을 열게되면 어떤모습을 보일지 벌써 기대된다!!(헤벌쭉) 인간관계는 한쪽만 잘한다고 나아지는게 아니다보니 유화가 아직은 뻣뻣한편인게 괜찮은지도 궁금하네:d(착석)
저런~ 무려 귀족살인 사건이야?!(덜덜) 가볍게 놀러나가느라 수행원을 안데려갔을까 아니면 수행원까지 여럿 죽었을까 후자면 진짜 대형사건인데..o.O?! 강도살인일지 독립을 도모하는 속국사람들의 무장테러일지 모르겠네! 어느쪽이건 사람 오는지가는지도 모르고 출동할만은 하다(버엉) 그래도 추궁은 하는구나~ 사정 모르는거 아니고 연이도 알고보면 말랑한 귀족님이니 질책만 하는 정도겠지?
지금이랑 별 차이 없을 것 같긴한데 ... ㅋㅋㅋ 유화도 지금은 뻣뻣하지만 나중엔 말랑말랑해질거라 기대하고 있어! 근데 느낌이 나~중엔 연이가 잡혀살것 같기도 하네 ... (먼산)
수행원이 한명뿐이라 손쓸틈도 없이 죽이고 도망간거래~ 범인은 언제 잡힐지 모르고 ... 제국은 지금 한창 황금기라서 독립은 요원한 일이지 :3 나~중에 망국의 길에 들어서면 그때는 하나 같이 독립할지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거에 화가 나는거니까 질책만 하고 사과 받으면 뒤끝없이 넘어갈꺼야
겉의 태도는 별로 차이 없을 것 같은데 성질을 안낸다던가 은근 가까이 다가간다던가 하는 차이는 분명 생길꺼야! 후후 유화가 말랑해진 모습은 어떨지 너무 기대되는걸!!! 연이는 지금까지 자기한테 브레이크 걸어주던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분명 유화의 브레이크가 정말 잘 먹힐것! 거기에 좋아하던 사람도 없으니 화에게 다른 감정을 품는다면 분명 더 약해질거라구~
범인은 생각보다 금방 잡힐테니 이유는 어떻게든 밝혀지지 않을까? 사실 제국의 확장은 현재 시점에선 꽤 이전의 이야기라서 지금 시민들한텐 뭔가 억울한 일이기도 하겠지? 연이한텐 그렇게 혼나진 않겠지~ 그냥 경고만 주고 말테니까.
역시 연이 앓아눕는구나.. . 에긍 역시 너무 무리했어(눈물) 낮시간에 푹잤어야하는데 연이가 워낙 숙면을 못취해서 더 심해진건 아닌가 모르겠네...(먼눈) 아니면 아예 낮시간에 잠도 못잘만큼 앓는걸까?(오싹) 아무튼 유화랑 나갔다가 그렇게된거니 뒷감당도 유화가 해야 맞을거같아~☆ 노집사님이나 다른 사용인들한테 유화가 제법 혼났을거 같기도 하다:3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간, 제국의 수도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굉장히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미 주요 도시엔 철도가 깔려있기에 다른 도시에서 수도로 오거나 반대로 향하는 등의 사람들이 겹쳐 수도의 주거 인원보다 배는 많은 인원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이것이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한 제국의 수도라는 것을 면밀히 보여주는듯 했다. 하지만 그런 활기찬 분위기와는 반대로 인기척이 거의 없이 조용한 곳이 하나 있었는데 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목정 가문의 별채였다. 소수의 경비병만이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는 저택은 마치 거주하고 있는 인원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 쿨럭쿨럭 '
그렇게 고요한 저택의 가장 안쪽, 햇빛도 하나 들지않는 곳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창문은 존재하였지만 일부러 막아둔듯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은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서 내부를 밝히고 있었는데, 그곳에선 하얀 머리의 사내가 연신 기침을 해대며 누워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이자 목정 가문의 삼남, 목정 연은 힘겹게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하기위해 시선을 돌렸다. 평소라면 신시(申時)에나 눈을 떠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렸을 그는 자신이 미시(未時)에 눈을 떴다는 것을 깨달았다. 햇빛이 지기 전까진 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 그가 이런 시간에 일어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 ... 이럴것 같더라니만. "
온 몸에 열감이 가득한데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목도 다 쉬어버려 말도 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주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연은 오한 때문에 조금씩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고선 방에 달려있는 줄을 당겼다. 이 줄은 그들의 시종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있는 종을 울릴때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주로 그가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 시간에 그 종이 울리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다 시종들도 잠을 자고 있는 시간인지라 제대로 들을 사람이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 거기 아무도 없느냐 ... "
분명 누군가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소리쳐 불러보려고 했으나 이미 쉬어버린 목에서 제대로된 말소리가 나올리 만무했다. 그의 외침은 잔뜩 쉬어버려 모기의 날갯짓처럼 작아진채 입 밖으로 나왔고 당연하게도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평소처럼 해가 질때까지 기다려야하나 싶었다.
햇빛의 탑과 달리 자연스러운 따스함과 빛을 내리쬐는 진짜 태양이 쨍쨍한 낮, 유화는 전날밤 목정 가 삼남에게서 받은 돈주머니와 바지저고리를 챙겨서는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시장으로 향했다. 제 물건을 사봤자 다른 사용인들이 못보던 물건인데 어떻게 구했냐고 의심하면 난감했고, 도주할때를 대비해 두고픈 마음도 없지는않았으나 그랬다간 가족에게 화가 미치면 끝장이라 어림없었으며, 오롯이 집에 보낼수있으면 적지않게 도움이 되련마는 그럴수도 없으니, 목정가 삼남의 옷가지나 살 요량이었다. 그의 돈이니 그에게 쓰는게 알맞아 보였거니와 옷방에 수두룩빽빽한게 옷이니 한벌쯤 는다고 티나지야 않을성싶어서. 제국의 수도니 시장이 여럿 있을줄은 알았지만 놀라웠던건 그 시장이 모두 매일매일 장사를 한다는것이었다. 산아래 큰마을에서도 5일에 한번만 장이 열려서 날을 잘 기억하고있어야 했던 고향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목정 가 삼남의 바지저고리는 뭐가 달라도 다른것일지? 거기 쓴것과 똑같은 피륙값만 해도 있는돈을 몽땅 털어야할 판이었으니 침선가(針線家)에게 옷을 지어달라 청하기는 무리였다. 하릴없이 피륙이나 끊어 돌아왔으나 이걸로 옷을 지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한시가 아까운 낮시간을 쪼개는수밖에 없으니 돌아오는길이 터덜터덜 무겁기 한량없었다. 잠이라도 얼른 자고싶었다.
하여 그의 옷가지를 옷방에 돌려놓으려 서두르는데 목정 가 삼남의 방에서 무슨기척이 난듯했다. 해도 아직 쨍쨍한데 잘못 들었나? 하지만 지나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해 창을 확인했다. 행여라도 햇빛이 새어들어가기라도 했나 싶어서였다. 창은 암막으로 밀봉한것마냥 새까맸으나 수상쩍은 기척은 한층 또렷해졌다. 기침이 섞이고 쉬어터졌지만 분명 아랫사람을 부르는 소리다. 유화는 다급히 문을 열고들어갔다.
"찾아계시었사옵니까?"
허리숙여 인사하자마자 깜짝놀랐다. 호롱불로 어둑한 가운데에도 목정가 삼남의 파리한얼굴과 하얀머리칼은 진땀투성이였고 핏물이 흰자위까지 번지기라도 한것처럼 충혈된눈은 그렁그렁했다. 와들와들 떨리는몸도 주체가 안되는것 같은데 기침까지 숨이 넘어갈듯이 하니 실로 참혹한 몰골이었다. 일단 바로눕히기라도 해야겠다고 그를 부축하려는데 몸이 말그대로 불덩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추워하는건 옷이 땀에 절은탓일까. 이 정도면 탈수도 염려된다. 급한김에 들고있던 피륙을 그의 저고리 안에 밀어넣었다. 밖에서 거진식어 온기가 미미한 손난로도 같이.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주시옵소서. 물부터 가져오겠사옵니다."
그러고 뛰쳐나가서는 의원을 불러달라고 도련님이 편찮으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움직였다. 단잠을 깨우는건 딱한노릇이나 지금 적절히 조치하지못했다간 사달이 날게 뻔했으므로. 그러면서 부랴부랴 더운물이 가득담긴 주전자와 마른수건을 챙기고 양동이에 미지근한 물을 채워서는 그의 방으로 달음질하자마자 더운물부터 잔에 가득따라서는 그에게 내밀었다. 따끈한물이 기침으로 상한 목도 조금은 가라앉혀주길 바라며.
"일단 드시옵소서. 탈수가 오면 큰일이옵니다."
목정가 삼남이 물을 충분히 마신다면 유화는 그가 열이 내리고 오한을 덜느낄만한 방도를 총동원하리라. 우선은 젖은옷 대신 처음 방에 들어오고서 엉겁결에 팽개쳤던 바지저고리로 갈아입도록 돕는한편 맨몸의 땀은 마른수건으로 닦을것이다. 다음으로는 축축한 베개와 이부자리를 치우고 털담요와 손난로를 가져와서는 그를 바로눕히고서 덮어줄것이다. 그뒤에는 양동이의 미지근한 물로 수건을 적셔서는 담요밖으로 노출된 그의 얼굴을 닦길 반복할것이다.
다행히도 깨어있는 사람이 있었는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연의 몰골은 평소와 너무 다르게 잔뜩 흐트러진채였겠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도의 몸상태는 절대 아니었기에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러 온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라에서 온 공녀이자 그의 저택에서 시종으로 일하고 있는 화였다. 특별히 아버지가 힘을 써서 자신의 담당으로 넣어준 공녀의 얼굴을 본 그는 손을 살짝 뻗으며 말했다.
" 용케도 들었구나 ... "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말할 기운조차 없어서 어떻게든 기력을 쥐어짜내어 간신히 입 밖으로 목소리만 흘려낸 연은 결국 누워있던 침상에 쓰러지듯 다시 누웠다. 그의 모습을 본 화가 의원을 부르라고 소리치며 이것저것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의식할 수준은 아니었기에 몽롱해진 정신으로 그는 화가 해주는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몇몇은 의원을 부르러 달려나갔고 몇몇은 화를 도와서 연의 몸을 일으켜 몸을 닦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는 자신의 얼굴을 따뜻한 물로 닦아주는 화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의원이 와서 그의 상태를 진찰하고 있을때였다. 목정 가문에 소속되어 가문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원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 되었고 믿음직한 노년의 의원이 저택에 와서 연의 증상을 확인하고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어제 외출이 무리했던 것이 아니냐며 증상이 심하니 약을 꾸준히 먹이라는 말과 함께 의원은 떠났다. 말할 힘도 없어서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던 연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옅게 눈을 뜨며 말했다.
"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
남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지킬 여력이 없었다. 수면을 방해하는 저주는 그것에 맞춰서 그의 몸상태를 약화 시키는데 한몫하고 있었고 조금만 무리해도 크게 탈이 나는 몸을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내색을 안하기 위해서 예민한 모습을 보여주고 화를 내었던 것인데 그것마저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옅게 지으며 말했다.
" 이 또한 업보겠지. 동시에 내가 짊어지기로한 책임이겠지만. "
이렇게 아픈 것이 한두번이 아니긴 했지만 이럴때마다 익숙해지긴 힘들었다. 아픈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되는 일이 아닐까. 그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자 상체를 몇번 들썩이더니 바닥을 짚고선 간신히 침상에 앉을 수 있었다. 현기증이 올라왔지만 잠깐 앉아있으면 없어질테니 그는 서류 뭉치를 가르키며 말했다.
" 이렇게 누워있을 시간이 없다 ... 저것들을 좀 가져오거라. "
분명 무리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을텐데 일을 밀리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듯했다.
우와~ 이걸 이렇게 받아줬구나!(야광봉) 다른 시녀찬스 만세다! 쉽지않았을텐데 내가 미처 생각못했던 부분까지 자연스럽게 채워줘서 고마워~☆(꾸벅) 하나 궁금한게 답레에서 자다깨고 초과근무한 시녀들이 유화한테 곱지않은 반응 보였다고해도 될까?(갸웃) 안그래도 낮밤바뀐 생활에 까탈스러운 상전 모시느라 피곤한데 휴식시간도 빼앗기고 그렇게 앓아누운것도 유화랑 나가서고 더욱이 유화가 시녀들보다도 급이 낮은 공녀라 곱게보기 어려울수 있을거 같아서(먼눈)
그랬구나! 연이 어머니와 닮았다면 연이한테 어필할수있는 요소가 하나 더 있는거네:3~ 이렇게 유화는 날먹에 성공하고..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