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나 들었고 어린동생에게나 불렀던 자장가를 목정 가 삼남에게 부른건 어째서였을지? 아마도 그 노래를 부르고들을때의 분위기를 기억해서이리라. 하루일과를 모두마쳐서 잠들기만하면 되는 고요한시간. 그러면서도 어린마음에 혼자가 되는거같아 불안하고 안타까운 시간. 그때의 자장가는 혼자가 아니라고 잠들고나서도 곁에서 지켜주리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듣다보면 안심하고 잠들수있었고 그걸 이해할만큼 자란뒤에는 희에게 부르곤했다. 지금 그앞에서 부른것도 과히 다르진않았다. 아픈사람이 마음놓고 푹 잘수있었으면했다. 설마 노래부르다 졸진않을테니 졸음을 쫓기위함이기도했지만
그러나 목정 가 삼남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였나보다. 감았던눈을 살며시뜨고 올려다보는시선에 얼굴이 화끈달아올랐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그시선을 피해 고개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그의 말마따나 아픈사람이라도 어린아이는 아닐진대. 언짢아할만도 한 상황이라 달리 할말이 없었다. 차라리 가만있었더라면 그가 고요함속에서 잠들었을까? 낭패감에 제발치만 내려다보다 뒤따른 말에 멍해졌다. 곧이어 당혹감이나 민망함과는 딴판으로 부드러운감정이 밀려들었다. 언제부터였더라? 자장가를 부르자 어린애 재우는거같다며 희가 새초롬한 반응을 보였던게? 기특함반 허전함반으로 미안하다 사과했더니 듣기싫다는건 아니라며 무릎맡에 다가붙는게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지금 목정 가 삼남의 반응이 딱 그짝이라 저도모르게 웃어버릴뻔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고향의 노래냐는 물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이 함구하든 안하든 목정 가 삼남이 내고향쯤은 얼마든지 알아낼수있는 자임을 안다만 그래도 숨기고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거기있는 가족을 끌고올수도 죽일수도 있는 권력자이므로. 지금이야 별뜻없이 묻는것일테고 아픈와중에도 호의적인태도이다만 첫날만해도 가족을 들먹이질않았던가. 사람마음이란 언제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법이다. 하여 고향이나 가족얘기는 최대한 피하는방향으로 말을 골랐다.
"누가언제 만든 가락인지는 모르옵니다만 노랫말은 옛 문인이 지은 시라 들었사옵니다."
표정이 굳어보이진않을지? 꺼림칙해하는 티가 나지는말아야 할텐데. 정말로 어정쩡하다. 운명을 감당하느라 허덕이는 약한존재이기는 마찬가지임을 알아도 실은 타인을 염려하고 위하려는 온기어린사람이라 느껴도 경계심이 가시진않는다. 호의는 아무때고 거두어질수있으나 이사람이 목정가의 사람임은 변치않으니까. 더욱이 피의 저주와 그 해주법을 생각하면 ... . 암담하다. 이제와 이사람을 원망하고 증오하는건 무리다. 그러나 서로의입지와 상관없이 신뢰하는것또한 불가능하다.
현실이 그런이상 피하는게 상책이련만 마침 목정가 삼남도 다시 권하건만 잠들지못하고 열도 잘 떨어지지않으리라는 체념적인태도에 오기가 솟고말았다.
"차도를 보이시는걸 확인하면 바로 물러가겠사옵니다. 소인이 쉬길바라시오면 속히 쾌차하시옵소서."
순전히 억지였으나 지껄이다보니 그가 나을때까지 밤이고낮이고 버티는게 희망처럼 느껴지기도했다. 원수가문의 일원을 미워하기도 위하기도 불가능한삶. 그렇다고 자진했다간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칠 위험이있다. 하지만 죽으리라곤 상상도 안되게 멀쩡히 일에 전념하다 스러지는 모양새면 가족까지 봉변을당하는일은 없지않을까. 내감정을 이기지못해서든 들켜서 겁박을 당해서든 해주법을 누설해버릴일도 없고. 심지도 신체도 약해빠진 주제에 끝까지 버틸지가 관건이지만 어쩌면 그게 스스로 선택할수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괴로운지 후련한지 모를 결론을 안은채 유화는 목정 가 삼남의 이마에놓았던 물수건을 헹궈서는 다시얹었고 목청도 가다듬었다.
그새 또 변덕이 도져서 조금 수정해서 답레 다시올렸어!(긁적) 아깽이의 츤츤스러운 귀여움에 반응하는 서술이없는게 다시보니 많이 아쉬워서말야X9 그래도 답레내용이 바뀌는게 더 잇기편할거같으면 편히 말해줘~(붕붕) 주말된지 얼마나됐다고 벌써 연휴가 끝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눈물) 아무튼 해피홀리데이야!! 맛난거 먹고 푹쉬어XD
딱히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송구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도 자신의 반응이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것이었다는 깨닫고선 약간 멋쩍은 기분이 들긴했으나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자장가를 들었으나 잠이 쉽사리 오지 않기는 했지만 부드러운 선율이 아픈 몸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자장가에 집중하게 되니 다른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고 보면 될까. 하지만 애가 아니라고 해놓고 다시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으니 한번으로 족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연은 답했다.
" 이곳에도 어린 아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자장가가 하나 있지. "
수도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줄때 가장 먼저 알려주며 불러주는 것이기도 했다. 허나 연은 그것을 들은지도 오래 되었기에 대충의 음만 알고 있을뿐 가사까지 잘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장가를 듣지 않을 나이가 될때부터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니 말이다. 그러다가도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억 난다는 것은 어쩌면 신비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집사라면 알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노년의 집사에게 그것을 불러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 그게 쉽게 되었으면 이리 말하지는 않았겠지. "
아마도 내일까진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있어야할 것이니 말이다. 최대한 아프지 않게 몸 관리를 철저히 하고는 있었지만 병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피해지지는 않는 법. 기온이 바뀌는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오한이 들어 아프기 시작하고 더운 여름엔 더위를 먹어서 아프고 추운 겨울엔 추위에 시달려 1년에 4번은 꼭 아픈 시기가 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삶을 길게 지속하고 있으니 화의 말이 덧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딱히 더 말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여기 있고싶다는데 말리는게 더 이상한 일 같으니 말이다.
" 그리 하고싶다면. "
그러다 화가 계속 부르겠다고 하자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한번쯤은 더 듣고싶었는데 불러준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자존심은 지켜야겠는지 불러도 좋고 안불러도 상관 없다는 스탠스를 취해본다. 이마의 물수건이 바뀌고 조금 식어서 차갑던 수건이 다시금 따뜻해져 이마에 올라온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정성스럽게 간호를 받아본게 꽤 오래된 일인듯 싶었다. 집안의 시종들은 자신과 접촉하는 것을 꽤나 꺼려했으니 말이다.
" 네가 살던 곳이 약초가 유명하다고 했었지. "
분명 지난 밤에 연이 화에게 살던 곳에선 무엇이 유명하냐 물어본 대화의 일부였다. 약초로 그나마 유명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는 잠시 고민하는듯 뜸을 들였다가 화에게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얘기했다.
" 네가 서신을 보내거라. 약초를 구매하고 싶다고 말이다. "
공녀 출신으로 제국에 오게 되면 본디 살던 곳과의 연락은 철저하게 금해지고 있었다. 아직도 제국이 점령한 땅에서는 저항군이 있었기에 공녀들이 그들과 내통하여 수도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녀들 대부분이 유력 가문의 후첩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중요한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은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서 화가 직접 서신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서신이라면 어떤 검열도 피해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제국도 사람사는 세상이라는건지? 누가 그러라지않아도 아이들을 재울때면 으레부르는 노래가 있는모양이다. 목정 가 같은 세도가에도 전해지는모양이고. 그도 어릴적엔 그노래를 들었겠다. 희처럼 때로는 하품하고 눈비벼가며 더 놀고싶다 보채면서도 잘시간을 알리는 자장가에 어느새 누워버린적도 있지않았을까? 이곳의 자장가는 어떨지 좀은 호기심도 일었으나 구태여 그에게 묻진않았다.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던시절이면 저주를 뒤집어쓰기전 남부러울것없던 시절일터. 그시기를 상기시키는게 자칫 현재의 괴로움을 들쑤시게 될까봐서였다. 누구나 알만큼 두루퍼진 노래라면 언젠간 들어볼일도 있겠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하여 침묵을 지키려니 그는 여전히 체념적이다.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반응인지도 모른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니 누구보다 차도가 있기를 바랐을것이나 불치의저주로 번번이 좌절되었을테니. 희망이 깨질때마다 괴로워지느니 차라리 기대를 갖지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대도 인지상정. 해주하지도 못할거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게 오히려 주제넘은짓이리라. 하지만 그럴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덜 고통스러울수있는 수단을 동원해야지않을까. 당장 여기도 그가 햇빛에 화상을 입지않도록 암막을 쳐놓지않았는가. 그거야말로 쉽든말든 그에게 고통을 줄이기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방증일거다. 저주와 달리 감기는 개인차가 있을지언정 낫기는낫는 병이기도하고
일주일. 그동안은 어떻게든 견뎌내자. 좀전처럼 정신놓고 졸지말고 침식(寢食)에 연연하거나 몸을 아끼지도말자. 그가 나아지는것말곤 아무것도없는 사람처럼 미친듯이 버티다보면 어떤식으로든 끝이 날테니. 밤새도록이라도 그의 머리맡을 지킬작정으로 뻑뻑한눈을 꿈벅이던중 눈이 번쩍뜨였다. 무덤덤한가운데 어딘지 새침한말투. 앞서의 자장가가 싫진않았던걸까? 그렇긴해도 티내긴쑥스러웠고? 짐짓 점잔빼는 모습이 정감있게 느껴졌다. 잔뜩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선뜻 다가오지는못하고 경계태세로 지켜보는 고양이같달까?
그에 힘입어 같은노래를 되풀이했다. 별일이 없었다면 그가 잠들도록 계속했을것이다. 원래도 아이가 쿨쿨잘때까지 부르고 또부르는게 자장가이니. 그런데 그가 불쑥 고향얘기를 꺼냈다. 노랫소리가 나오다말고 목에서 꽉 막혔다. 여느산에나 널린것이라 얼버무렸건만 기억하고 있을줄이야. 뭐라 답해야좋을지 궁리해도 띵하고 멍하기만하다. 그도 모자라 더 놀라운말이 이어졌다. 우리마을에서 약초를? 시장만 나가도 갖가지약초를 파는 점포가 숱할텐데. 그것도 연통은 나더러 넣으라니? 공녀에게 그런연락은 금지된것 아니었나? 대관절 무슨생각인지?
이만하면 만류할근거로는 충분하겠지. 더 얘기해봤자 사족이고 긁어부스럼일거다. 허니 입을 다물어야하는데 못내 께름칙했다. 아라가 사람까지 공식적인공물로 바치는 속국이긴하나 제국치하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이들도 적지않다. 그런데도 굳이 나더러 고향과 연통하라는 연유는 무엇인가? 만일 그가 만류를 듣지않아 연통을 넣게되면? 마음같아선 연통이고뭐고 우리가족에게 기별부터 하고싶다. 목정 가나 제국에서 절대 찾지못할곳으로 피해달라고. 허나 그게 도리어 화근이되면? 가만있었다면 몰랐을 우리가족의 거처를 내스스로 알리는격이 되어버리면? 혼란한심정이 구역질처럼 올라왔다.
"더욱이 소인은 아라출신이옵니다. 연통을 넣는척 수도나 이 댁의 사정을 누설하리라는 염려는 아니되시옵니까?"
공녀가 되면 본국과의 연락을 일절 금하는것도 그런사태를 막기위함일진대 이사람은 어째서 이런얘기를 꺼냈는지? 나를 신뢰해서라면 무얼근거로 믿어버리는지? 줄곧 이곳에서 일해왔던 사용인에게도 신경이 곤두서있는 사람이 나를? 실로 대책없는 순진함아닌가. 아무리그래도 그정도로 어리숙할까? 그정도는 아니라면 일종의 함정수사일까? 우리가족은 물론 나아가 아라에 남은 반제국 인사를 잡아내려는?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생각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자 양무릎을 움키며 웅크렸다.
길어야 일주일. 차도가 좋다면 그러하겠지만 그가 일주일 안에 감기를 다 나아본 경험은 손에 꼽았다. 대부분은 2주 정도를 꼬박 앓아야 완치되었고 거기서 일주일은 더 요양해야 몸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나쁜 의도로 말하는 것은 아니니 대답하려다 말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화의 자장가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연이 꺼낸 말에 돌아온 화의 반응은 좀 의외의 것이라 그도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댇답했다.
" 근방의 약초는 다 써보았으나 효험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마침 네 고향이 약초로 좀 유명하다하니 그곳의 것이라면 다를게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 "
그가 이렇게 앓은 것만 십수년이 되어가니 제국의 내로라하는 약재는 모두 써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엔 차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약초들도 있었으나 다음에 아플때 또 써보면 저번에 보여주었던 효험은 다 어디가고 그에겐 어느 효능도 보여주질 못했다. 그래서 지금 그가 처방 받는 것들도 몸을 편안하게 해줄뿐 본질적으로 무언가 낫게 해주는 약은 아니었다. 그러다 마침 화가 지난 밤에 얘기했던 약초가 생각나서 제안을 한것 뿐이었다.
" 이제 수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자가 수도의 사정을 얘기하려면 얼마나 얘기할 수 있으며, 본가에도 가보지 않은 네가 이 가문의 사정 또한 많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
물론 화가 그런 얘기는 보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있었지만 만약의 경우에도 최악의 상황까진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보낼 수 있는 내용이라곤 자신에 대한 것이 전부이며 자신에게 변이 생긴다한들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인데 누군가 대신 죽여준다면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이 될테니 말이다.
" 그리고 제국은 강하다. 건국 이래로 수도는 적의 침입을 허용한 적이 없으니 허튼 짓은 못하겠지. "
유래없는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탄압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기술을 공유해주는등 유화 정책을 같이 펼치고 있었다. 특히나 현대의 황제는 온건파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강경파들은 불만을 내뱉으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제국의 유력 가문 중 하나인 목정 가문의 삼남이 피살이라도 당한다면 정책의 방향성은 순식간에 반전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무언가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게 연의 생각이었다.
" 네가 그날에 우리 가문에 오지 않고 황궁으로 갔다면 연통은 커녕 바깥 외출도 철저히 금지 당했겠지. 허나 지금은 네가 우리 가문의 시종이고 본가도 아닌 내 소속이니 그런 불문율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
순전히 자신의 호의니 받아들이던 아니던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친 그는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듯 다시 눈을 감았다. 화가 보내고 싶다면 자신의 인장을 찍어서 보낼 것이오 그러기 싫다면 그것 또한 그녀의 뜻이니 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약초쯤이야 집사에게 말하면 일주일 안으로 들여올 수 있는 것이고.
긁어부스럼이었다. 가만있었다면 안 샀을지도 모르는 의심을 자초했으니. 뻔히알고도 충동을 이기지못하다니 어째서? 해주법을 알고도 침묵한다는점에서 그에게 가장 큰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나를 믿어버린게 딱해서? 그게 실은 내 머리꼭대기에서 노는거면 어쩌게? 골이 지끈거렸다. 이 사람이 의심이많다면 거꾸로 꿍꿍이를 품고서는 못할질문이라 넘겨줄지? 반대로 그조차도 의심을 피하려는 수작이라고 더 의심할지?
침묵이 숨통을 죄는듯한 가운데 몸이나마 가누고자 애쓰는데 앞서와 별다를바없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픈몸이 좀처럼 차도가 없다보니 이국의 산간벽지에 난다는 약초에까지 혹했던모양이다. 반쯤 굽어졌던 등이 바로펴졌다. 이건 아직은 완전히 체념해버린게 아니라는, 즉 희망을 찾아내려는 의욕이있다는 의미일까? 제국각지의 약초로도 가라앉지않은 고통이 미골의 흔해빠진 약초로 호전되리라고는 기대하기어렵거니와 고통의근원이 피의 저주라면 더없이 기만적임을 통감하면서도 그 희망을위해서라도 승낙하고픈마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내 께름칙한답이 이어졌다. 물론 틀린말은 없어 들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졌으나 수도의 사정이나 목정가의 사정은 그렇다쳐도 그에 대해서는? 흉기는커녕 햇빛만닿아도 까딱했다간 사망할지도모른다는 점을, 그경우 목정가의 다른일원이 비슷한지경에 처하는 저주가있음을 누설하는건 충분히 가능하다. 그게 제국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기위해 목숨쯤은 초개같이 내던지는 독립투사들에겐 무의미한정보도 아닐것이다. 그런데도 자기일을 누설하고말고는 개의치않는듯한 태도라니 .. . 그러고보니 어제도 이 사람은 호위를 마다한채 저택을나섰다, 누군가 자길 죽여주기를 기다리기라도하는것처럼. 언제 삶을 포기해도 이상하지않은 상태인걸까. 쇳덩이라도 걸린듯 속이 갑갑해졌다. 자포자기하여 허허로운것보단 차라리 있는대로 성질부리고 사소한일에도 악착같이구는편이 보기나을것같다. 그런인간이라면 최소한 당장이라도 스러질까 불안하진않을테니.
그래서일까? 제국의 보안을 믿고 배짱부리는 티가 반가운것도 같다. 그가 죽기를 자초하고있는것만은 아닌거같아서. 그러나 실로 괴상한기분이다. 제국이 강성할수록 내조국이 독립할기약은 없어지건만.
그새 변절자가 된듯한 스스로에게 환멸이 치밀찰나 정신이 번쩍났다. 자기휘하이니 공녀에게 가해지는제약은 무시하겠다? 설마 고향에 연통을보내는것도 제재하지않겠다는 의미일까?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지친듯 눈감는 모습에 턱 걸렸다. 저 의중을 정확히는 알수없으나 아니 설령 함정수사라 할지라도 이런기회를 지레겁먹어 날리긴 너무나도애통하다. 서신은 그가 지시한대로만 쓰되 어떻게든 가족에게 숨으라고 알릴방도를 생각해내야 ... ! 머리가 웅웅울리고 속이 메슥거렸으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확실한건 희망이었다. 하여 유화는 순순히 고개를숙였다.
으윽 연휴도 끝나버렸네 ... 유화주는 연휴 잘 보냈을까?! 나는 하루종일 뒹굴거렸어~~ 안감에 쓴다는건 아직은 숨겨서 보낸다는 느낌이 강하네! 나 같아도 그렇게 할 것 같지만 ... 유화가 가져오는 약초는 제국과 같은 종류라도 약효가 다를수도 있으니 어느정도는 효험이 있지 않을까?!
헉 그럼 유화네 가족들은 잠적해버리는건가! 유화한테 말을 전할 길도 없어질텐데 그럼 어디로 가서 살게 되는지도 모르게 되잖아 8-8) 그래도 유화는 자나깨나 가족들 걱정뿐이구나 ... 연이한테 약효가 잘들면 주기적으로 서신을 보낼테니 유화도 주기적으로 연락을 할 수 있게 되니까 윈윈이지!
다음 일상은 가볍게 데이트 어떨까~? 몸이 아직 다 낫지는 않았으니 외출은 어렵고 후원을 같이 돌아다니는거지! 차도 같이 마시고 :3
확실히 첫만남에 한 얘기가 강렬하긴 하겠네 ...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아! 연이가 잘못했다!! (등짝) 홧김에 한 얘기에 가깝지만서도 ... 음음 확실히 그 부분은 연이나 유화나 비슷한것 같아. 나중엔 분명 서로를 의지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연이가 공녀랑 알콩달콩하면 가문에선 가만 안있을 것 같지만 ... 후후 그건 나중에 다갓한테 맡겨볼까!!
그 정도는 될거라고 생각해! 조금 골골대겠지만 그래도 눈이 오면 거닐고 싶은게 사람 마음이니까 말이야. 유화만 따라오라 그러고 천천히 돌아다니지 않을까? 선레는 써주면 나야 고맙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린다. 어느 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에 갇히는 꿈은 생각보다 그가 자주 꾸는 꿈이었다. 아니, 자주 라고 말하기엔 빈도는 낮으니 꾸준히라고 말하는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주변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머리를 길게 길러 풀어헤친 자신과 비슷한 '무언가'. 그것의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는 피에 젖어 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진득히 고여있었다. 아 또 그 꿈인가, 익숙해질법도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꿈.
" 네가 죽을때까지 따라다닐테니까. "
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이 그것이 말을 걸어왔다. 뒤돌아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것의 얼굴이 자신과 똑닮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그래왔을테고 앞으로도 그러할테니. 하지만 이 꿈을 꿀때마다 그는 그것이 뒤를 돌아보기 전에 깨어나고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성공해본적이 없는 그것.
" 그래서 언제 마시는거지? "
그것이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젖어버린 머리처럼 피칠갑을 하고 있는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진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도저히 자신의 목소리라고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것,
" 피를! 피를! " 눈을 뜬다. 아니, 눈을 뜨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아직까지도 꿈의 안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것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와있는 것은 아닐지 두려웠다. 허나 방 안의 호롱불이 타닥이는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은은한 불빛이 방을 비추어주고 있었고 그것에 맞추어 어렴풋이 주변의 것들이 보였다. 다행히도 꿈은 아닌가. 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곳은 기침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허나 그는 자신이 먼저 일어나도 누군가 오기 전까지 시종들을 부르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자신이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휴식도 짧아진다는 뜻이니. 그렇기에 그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자리를 잡고 앉아서 어제 읽다남은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감기의 여파가 남아있었지만 저번처럼 죽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 그래, 일어나있다. "
책을 조금 읽고 있으니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라에서 온 공녀 출신인 화, 라는 여성은 다른 공녀들과 다르게 특이하게도 자신의 저택에서 자신을 보살피고 있었다. 아버지의 배려라는 뜻이 있었지만 자신의 지랄맞은 성격을 다들 버티지 못하니 도망갈 수 없게 공녀 출신을 끌어들인 것이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그녀가 자신의 시종으로 온 뒤로는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심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동질감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출신, 고향, 성장과정 모든 것이 다른 그녀에게 어째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연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 해가 졌을테니 창문을 열어주거라. "
그가 기침하는 시각은 절기마다 달랐고 보통 동지에 가장 빠르고 하지에 가장 느렸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 사고를 대비하여 해가 지고나서 반시진 정도 뒤에 연을 깨우는 것이 저택의 규칙이었다. 그러므로 화가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해가 충분히 졌다는 것이겠지.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았으니 창문을 여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일텐데 그는 창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는듯한 표정과 함께.
돌아온답엔 가래소리가 그르렁섞였다. 그래도 거칠디거친 날숨이아니라 또렷한음성이니 그가 한결 나아진것만은 틀림없었다. 다행이다. 열이 내린걸 확인은했어도 자리를비우면서 내심 불안했는데. 이제 어지간하면 악화될일은 없지않을지? 그러나 기대감은 문을 열기무섭게 찌그러졌다. 그가 책상머리에서 책을 읽고있었다. 어제도 저러더니! 아직 더 쉬어야하는데!!
"자꾸 그리 무리하시오면 감기가 더디게 나을것이옵니다.. ."
그에게서 책을 떼어놓고픈 마음에 꿀물과 죽과 탕약을 얹은 쟁반을 들이밀었다. 서류를 보는중이 아닌걸 다행삼아야 하나 싶다가도 답답하다. 서류를 보지않고있는건 당장 쫓기는일은 없다는 의미일텐데 왜 무리하지못해 안달인지?
남은동안 식탐은 이렇게 눌러야하나? 속으로 조소할찰나 뜻밖의지시가 떨어졌다. 이날씨에 창을열라니? 아직 감기도 안나았으면서. 아주 몸져눕고싶은거냐고 만류하려했으나 그를 돌아본순간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창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세상 고집스럽게느껴지면서도 서글퍼보였다. 햇빛의 탑으로 손을 뻗던때처럼 간절히바라도 손에 쥘수없는 무언가에 애태우는것도 같았다. 숨넘어가게 쿨럭거리며 괴로워하던 그가 자조처럼흘렸던 한탄이떠올랐다.
몸이 이러니 조심을 해야함에도 간혹 욕심을 부리고 싶어질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때 다짐했었다. 아픈사람에게 자그마한소망이 남아있다면 그걸 이룰방도를 찾겠노라고. 그에게 가장 간절할소망을 외면할작정이니 기만적인 헛짓거리에 불과하나 그래도.. .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그리 말하고는 대답은 듣지않고 옷방으로 향했다. 행여라도 그가 기다리지않고 제손으로 창을 열어버리면 눈보라에 직격당할테니 최대한 서둘러야했다. 일전에 외출했을때 외출복에 갖옷, 털토시까지는 챙겼으나 생각해보면 그걸론 부족했다. 귀와 머리를 시리지않게 감쌀 털모자도, 목에 바람이 들지않게 두를 목도리도 챙겼어야했다. 그것들을 더러는 옷바구니에 담고 팔에는 한팔에 끼고서 유화는 그의방으로 돌아갔다.
만약 유화가 옷을 준비하는사이 연이 혼자 창문을 열어버렸다면 유화는 돌아오자마자 기겁하며 창문부터 닫았을것이고 그러지않았다면 옷가지를 연에게 들이밀었을것이다. 그리고 어느쪽이든 창문을 여는대신 유화가 요구하는사항은 똑같을것이다.
아플때는 앉아있을 힘도 없어서 계속 누워있기만 했지만 이젠 기운도 조금 있으니 최대한 누워있는건 피하고 싶었다. 그가 비록 체질 때문에라도 밖으론 잘 못나가긴 했지만 근본적으론 무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힘들어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책을 읽고 있던 것인데 화가 들어와서 잔소리를 하니 시선을 살짝 옮겨 바라보고선 말했다. 영양 섭취도 꾸준히 하고 있고 휴식도 엄청나게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얼마나 더 해야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 어디 불편한 곳이 있느냐? "
책을 읽고 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겠으나 그가 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녀가 눈을 질끈 감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연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손을 뻗어서 화를 잡아주려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을 간병하느라 무리를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자신의 감기가 옮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기는 나을때쯤에 다른 사람들에게 잘 옮아가니 딱 지금 시기를 조심해야하기도 했고 말이다.
' 기다리라니? '
창문만 열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뭘 기다리라는거지? 연은 작은 의문과 함께 화를 바라보려 했으나 이미 그녀는 방을 나가고 있었다. 창문을 열라 그랬더니 아예 나가버리는 것은 무슨 경우인지 알 수가 없어 어안이 벙벙했던 연은 그저 화가 밖으로 향한 문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화가 들고 온 것들을 보자 그는 화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채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누가 보면 내 부인이라도 되는줄 알겠구나. "
그래도 창문을 열었을때 추위가 이만저만이 아닐테니 그녀가 옷들을 가져온 것은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해 연은 옷가지를 꺼내들었다. 근데 방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기만 할뿐인데 이렇게 입어버리면 이건 완전 외출할때의 복장이 아닌가. 분명 저번 등불탑을 보러갈때 연은 이것과 비슷하게 입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화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체질 때문에 최대한 활동을 자제하고 있을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가져온 옷들을 전부 갖춰입고서 창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한 그는 눈이 오는 것을 보고선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눈이 오니 후원이라도 둘러봐야겠구나. "
감기에 걸려서 아직까지도 기침을 콜록이는데 무슨 외출인가 싶겠지만 후원 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한듯 싶었다. 화가 같이 안가면 혼자서라도 나가겠다는 의지도 얼핏 보이는터라 말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얼핏보기엔 지시를 나몰라라하고 물러난모양새였으나 앉아있어도 괜찮지않냐는 말은 못내 뇌리를 맴돌았다. 우리집전체의 절반은 됨직한 널찍한방이고 사용인들이 주기적으로 환기도한다지만, 아무리그래도 며칠이고 옴짝달싹못하고 자리보전만 했으니 갑갑할만도하다. 낮에는 창밖을 바라보는것조차 못하기도하고. 더욱이 아픈것보다 갑갑한게 아쉽다면 그만큼 나아졌다는 의미이리라. 보다 거창하게해석하면 단순히 생존해있는것보다 살아있음을 실감할수있길 바라기에 갑갑함도 드는것아닐지?
머리를 어지럽히는건 그뿐만이아니었다. 잠시 주춤할찰나 흡사 부축해주려는것 같던 모습. 말투며 표정도 내게만 초점이 맞춰진듯했다. 고향에서도 그정도로 걱정들은적은 별로없었는데, 공녀신세라 내편이라곤 없는게 당연한 이곳에서, 그것도 내 윗전으로 정해진 이가 염려해줄줄이야. 웃기는일이다. 이래서야 무슨 간병인과 마음씨좋은 환자 같지않은가? 허나 되어서도 안되고 될수도없는 관계다. 피의저주를 함구하고있으면서 간병인은 무슨? 더욱이 그런분위기에 취하는건 가문과 조국에 대한 변절이다. 무엇보다, 공녀로 살지않고자하는걸 들키면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모른다. 유화는 앞서깨문자리에서 스며나오는 피를 빨아냈다. 내게 남은길은 가족이 위험해지지않게끔 생을 끝맺는것뿐임을 그렇게라도 되새겨야했다. 그러나 비릿한걸 거듭삼켜도 묘한울렁거림은 가라앉질않았다. 결국 어지럽도록 머리를 흔들고는 애써 방한용털옷가지를 챙기는데에 전념했다. 외출복에 갖옷에 털토시에 털모자에 목도리까지 챙기니 짐이 한가득이다.
그게 어이없었을까? 방으로 돌아가자 그가 픽 웃어버린다. 이곳의 사용인들은 한결같이 불벼락이 내릴 징조라며 그가 환한표정을 떠름해했는데, 지금의 웃음은 방심하지않을수없게 부드럽 ... 다고 느끼자마자 아연해졌다. 부인이라니 이 무슨.. .? 시녀로서는 주제넘다는 불쾌감보다 오히려 친근감같은게 느껴지는 농담조임에도 혼란스러웠다. 원래도 건강이나쁜데다 지금은 감기도 앓는중이라 노집사도, 의원도, 다른 시종들도 그를 위해서건 일하기편하길 바라서건 하나같이 걱정할텐데, 걱정을 표현한 사람이 그렇게도 없었던걸까? 한편으론 뜨끔하기도했다. 피의저주를 해주하는 첫단계가 혼인이었으므로. 그걸 알았다면 이리 가볍게 꺼낼리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래도 그가 순순히 옷을 갖춰입어 한숨돌린것도 잠시. 그는 제손으로 창문을 열고말았다. 찬바람을 맞자마자 콜록거리면서도 이제야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이래서야 화로를 피우는보람이 없겠다. 창문을 닫아도될지 물으려는 순간 얼이 나가버렸다. 그가 아예 후원까지 나가겠단다. 아직 다 낫지도않았는데 도로 앓아누우면 어쩌려고? 그러나 날리고쌓이며 밤을 하얗게밝히고있는 눈이 마음에들었을까? 그는 눈오는날 폴짝거리며 뛰쳐나가는 희만큼이나 들뜬 얼굴이었다. 한숨이나왔다. 저리기꺼워하니 차마 만류도못하겠다. 막막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신발보다 따뜻한 털장화와 우산을 부랴부랴 대령하는게 고작이었다.
"눈을 맞지는 말아주시옵소서. 몸이 젖으면 감기가 도로 심해지기십상이옵니다."
그러고 후원을 살펴보니 시녀 한사람이 쌓인눈을 이제막 쓸려는모양이었다. 눈이 얼기라도했다간 한발짝내딛기도 어려워질게뻔하니 가급적 불편을 줄이기위함이리라. 유화는 그 시녀에게 도련님이 후원에 드셨노라 알리면서 이쪽은 내가 쓸테니 다른일 보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시녀는 미덥지못하다는 티를 감추지않고 유화를 흘기다 저번처럼 사고치지말라고 신신당부하며 빗자루를 넘겨주었다. 그 빗자루로 그가 나아가려는 방향의 눈부터 쓸기시작했다.
"쌓인눈을 밟고나면 그자리가 미끄러워져 위험하오니 다니시는길은 치우겠사옵니다."
소복이쌓인 눈을 보면 밟고싶어지기도 한다는건 안다. 눈을 밟으면서 더없이 깨끗해보이는 미지의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듯한 기분을 느껴봤으니. 그러니 눈을 치우는건 흥을 깨는짓이래도 할말없으나.... 흥내려다 호되게 앓는것보다는 이편이 낫지않을까? 아직 눈이 그치지않은탓에 쓸어도 도로쌓여가는건 도리가없다만
저택의 후원은 소복히 쌓인 눈 덕분에 모든 것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후원에 쌓인 눈들은 대부분 소복하게 쌓여있는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눈이 올때는 쌓인 것을 쓸어내어도 다시금 쌓이기 마련이니 다음 날이나 되어서야 눈을 쓸어내곤 했지만 연이 외출한다는 기별이 전해졌는지 다른 시종이 눈을 치우기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가지런히 쌓여있는 눈은 보는 맛이 있어서 쓸어내는 것이 아까웠지만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미끄러울테고 연이 그것에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입장에선 큰 참사일테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연은 유화가 털장화를 준비해주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신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대로 우산을 들고서 문 밖으로 나왔다.
" 이제 슬슬 나아가고 있으니 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
그래도 모처럼 눈이 왔으니 나가서 맞아주는 것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몸이 다 나았을때 오는 눈을 맞으러 가는 것이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주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의 수명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단명했고 누군가는 평범한 사람들만큼 살아가기도 했다. 그러니 그도 언제 쇠약해져 죽어갈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가급적이면 하고 싶은 일을 그때그때 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독선적이란 이미지가 점점 더 쌓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 쓸어도 다시 쌓이는 것인데 무리할 필요는 없다. "
물론 쌓인 눈을 밟았다가 미끄러져 다치는 일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당장 저택의 시종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모시고 있는 유화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리가 없으니 쓸어내리는 것을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털장화를 신고서 후원에 첫발을 내딛자 아직 조금 쌓여있던 눈들이 그의 발 아래에 살짝 뭉치며 좋은 촉감을 선사해주는듯 했다. 충분한 두께는 아니라서 뽀드득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이런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외출이 될듯 했다. 가져온 우산을 펴서 왼손에 쥔채 천천히 걷기 시작한 연은 말없이 이따금 주변만 둘러보면서 눈이 쌓인 후원의 풍경을 즐기는듯 했다.
" 아라는 남쪽에 있다고 했었지. "
잠깐을 말없이 걷던 그는 주변에 있을 화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채 나지막히 물었다. 그녀가 자신이 그녀의 고향을 언급할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한채 눈을 보다보니 생각이 나서 물어보는 것에 가까웠다. 길을 걷다말고 허리를 굽혀서 눈을 한움큼 잡아서 손 안에 작게 뭉친 연은 뭉쳐진 눈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주변에 아무렇게나 툭 던져놓고서는 이어서 말을 걸었다.
" 제국은 북에 있어 눈이 자주 오곤하지. 더운 날보다 추운 날이 훨씬 오래 가는 곳이니까 말이야. 그곳도 여기처럼 눈이 오는가? 겨울엔 여기보다 더 따뜻한가? "
아라는 멀리 있어 집 밖으로 나가더라도 멀리 가지 못하는 그에겐 꽤나 흥미로운 장소인듯 싶었다. 화가 아라의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으니 말이다. 사실 제국의 수도에만 있어 다른 지방의 사람들을 잘 보지 못하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 눈구경은하시되 후원을 거닐지는마시라 권하는편이 나으리라여기면서도 말뿐. 유화는 서둘러 눈이나쓸었다. 한창 내리는중이라 쓸어봤자 도로쌓였으나 역으로 그랬기에 그사람보다 앞질러 눈을 치우고자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그가 발을 내딛기전에 치워내야한다는 일념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바라지도않았다. 그러다보니 문득 뭘해야겠다 의식하지않고도 몸이 저절로움직였다. 어쩐지 충만해지고 평온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감각을 깨닫기무섭게 눈이 자연스럽게쓸리지않고 손에 힘이들어갔다. 손아귀는 물론 팔과 등까지 불쑥 뻐근해졌다.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뒤로한채 후원을 천천히 거닐던 그는 치우지 않은 부분의 눈을 살짝 밟기도 하고 우산 바깥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눈을 손바닥에 쥐어보기도 하는등 눈 오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앞에서 눈을 치우고 있는 화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아라에서 넘겨진 공녀 신분으로 자신의 가문에 시종 신분으로 들어오게 된 그녀는 본디 고향에선 귀족 가문의 여식이었을 것이었다. 제국에선 어지간히 큰 죄를 짓지 않으면 신분 격하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녀의 처지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 이 정도론 괜찮다. 괜한 호들갑이구나. "
자신이 눈을 쥐는 것을 보고선 소스라치게 놀라 다가오는 것을 보고선 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한들 손으로 눈 잠깐 만지는 것 가지고 어떻게 될리가 없으니 말이다. 손수건으로 손에 남아있던 물기를 훔쳐낸 화에게 아라에도 눈이 내리는지 묻자 그녀는 내팽겨쳤던 빗자루를 다시 쥐며 말해주었다. 봄이 길고 겨울이 짧다고 했으니 혹독한 제국의 추위는 화에겐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걱정이라, 자신이 하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깨달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어버렸다. 사실 자신의 입장에선 화 또한 다른 시종들과 다를바 없는 신분일텐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상 팔려왔다는 신분이라는 것이 측은해서? 그렇다기엔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것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아니면 미모가 출중해서? 허나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생들을 보아도 그는 딱히 마음이 동하거나 그런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어째서일까.
"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된다. "
고향 얘기를 하다보니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화가 눈물을 흘렸다. 사실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있던게 오히려 대단할지도 모른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타향살이만으로도 힘들텐데 그녀의 신분은 사실상 패국에서 승전국으로 보내는 공물과 같으니 말이다. 연은 아직도 화와의 첫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레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던 모습은 꽤나 인상 깊었다. 그랬던 그녀도 결국엔 나약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지. 허나 그것에 대해서 그는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까지의 그녀가 잘 견뎌왔다는 뜻일테니까 말이다.
" 뒤로 돌아보거라. "
연은 황급히 뒤돌아버린 화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하려했다. 그녀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몸을 돌린다면 자신의 옷소매로 그저 말없이 눈가를 몇번 훔쳐주고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금 후원을 거닐었다. 물론 딱히 강제성을 띄지 않는지라 화가 조금 싫어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말아버릴테다. 그러다 화의 말에 동백꽃에 눈이 갔다. 이렇게 눈이 와도 동백꽃은 지지 않고 아름다운 발간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록 화려하게 피지는 않지만 새하얀 눈밭 사이에 고고하게 피어있는 모습은 마치 그녀의 모습과도 닮았다고 연은 생각했다.
" 그래서 제국의 국화이기도 하지. 겨울이 길게 지속되는 북부에서 저렇게 자태를 뽐낼 수 있으니. "
가로수로도 흔히 심어져있기도 했다. 사실 제국의 사람들이라면 길에 다니다보면 발에 치일 정도로 볼 수 있는게 동백꽃이니 별 감흥은 없을테지만 화의 말을 듣고 바라본 동백꽃은 새삼 달라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바빠서 좀 늦었다!! 미안해 8ㅁ8) 바쁘니까 글도 잘 안써져서 쓰는데도 한참 걸렸지 뭐야 ... (쮸글) 화가 눈물을 흘리길래 연이가 닦아주는 상황을 구상해봤는데 너무 부담스러우면 꼭 말해주기야! 답레를 다르게 가져올테니까! 첨부해준 이미지를 보고 답레에도 반영했다! 이미지를 보여줘서 구상하는데 좀 편했던 것 같아~ 고마워!
말이좋아 손바닥을닦는다지, 차가운손을 갖다댄셈인데, 추위에 찬게 닿아버려 오싹하진않았을지? 그래도 그가 차갑다고 타박하지는않았다. 그저 어처구니없다는듯, 딱하다는듯 고개를저으며 괜찮은데 호들갑이라고 한마디했을뿐. 하지만 땅에떨어진 눈을 쥐는것도 모자라 우산을타고 떨어지는 눈도 받으니 보기에는 조마조마하다. 고뿔도 아직 다 안떨어졌는데
"탈은 방심할수록 나기쉬운법이옵니다. 더욱이 아직 편찮으시지않사옵니까."
그렇긴해도 묘하다. 맨몸으로눈을맞거나 눈위에 드러눕지는않아도, 겉모습만보면 오히려 차분하고 관조적으로 운치를 즐기는듯해도, 눈만 왔다하면 신나서방방거리던 희와 어쩐지 닮아보인다. 눈에 정신이팔려 누가 알려줘도 제몸이 추운줄은 모를거 같아서일까?
그렇게 방심해버리는만큼 옆에서 더 잘챙기고 조심해야지만 사달이 안날텐데. 그러기는커녕 눈물이나 보이고앉았으니. 한심스러우면서도 주체가안된다. 그때 놀라지않아도된다는 말이 들려왔다. 들켰구나! 하긴 그렇게나 법석을 떨어버렸으니 모를리가
"..송.. . 송구하옵니다!"
코를훔치고 훌쩍임을 억지로죽이고서 어찌어찌 대꾸했으나 차마 돌아볼엄두는 안났다. 하던대로 눈이나 마저쓸면 좀은 자연스러워보일까? 하여 빗자루를 놀리는데 눈이 아직은 안얼었는데도 곱게 안쓸리고 턱턱 걸리는느낌이다. 짜증섞어 힘을 줄 찰나 그가 돌아보라며 유화의어깨를 짚었다.
"어디 불편하시옵....?"
뒤돌아본순간 벌어진일을 뭐라 표현해야할까. 갖옷에 감싸인손이 눈앞에 뻗어오는가싶더니 서늘하지만포근한털이 눈가에 부드럽게와닿았다. 그런감각이 또렷하면서도 꿈인듯 멍했다. 어찌된일일까.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기도전에 그는 아무렇지도않게 걸어나갔다. 눈을 치워둬야. ..!
허둥지둥 그를 앞질러쓸고서야 비로소 좀전의 상황이 정리되기시작했다. 눈물을 닦아주려던손길.. . 무심한척 지나쳤어도 그의미는 명백하다. 이사람은 여리고약하면서도 타인과 정을 나누길바라는 사람이다. 그게 아프다. 몰랐다면 원수집안의 일원이라 적대하고 날도 세울수 있었겠으나 알고서야 어찌그럴까? 어쩌면, 나와 마찬가지로, 영영 단절된시절을 그리며 가슴이 무너지고있을지도 모르는, 그러면서도 살아있음을 잠시잠깐이라도 실감하길바라며 안간힘을 다하고있는 사람임을 알고서야 어찌? 쓴웃음이 새어버릴것같아 입속의 상처부근을 잘근거렸다. 여전히 비릿한내가 퍼진다.
그러고 눈을쓰는데에 집중하려는데 그의 주의를돌려보고자 주워섬겼던 소리에 대답이돌아왔다. 제국의 국화. ... 추위에도 눈보라에도 강인한 동백꽃처럼 자국의위세도 스러지지않으리라는 선언일까. 동백꽃이 감탄스럽고 부러워질것같던 마음에 제국의 기세등등함으로 인한 분함이 섞여든다. 하지만 안다. 꽃은 꽃일뿐이고 이런 억하심정은 현실을 어쩌지못하는 무력함의 이면임을. 이번생이 뒤탈없이끝나고 또 다음생을맞는다면 풍파에흔들릴 일없게 저 동백꽃중 하나나 되었으면. 그리생각하니 꽃이 떨어져갈쯤에 한송이쯤 가져가고픈 충동도 인다.
그건그렇고 춥다. 그칠줄모르는 눈송이을 몰고 부딪쳐오는 한기에 오싹하고 몸이 움츠러든다. 이정도면 그 또한 아무렇지않을수만은 없을텐데 그가 눈구경을 그만둘기미는 안보인다. 어째야할까? 잠시궁리하다 일단 연못가의 정자까지 서둘러 눈을 쓸어냈다.
"날이 춥사온데 잠시 정자에서 구경하시는건 어떠시옵니까? 그러시는동안 다과를 준비하겠사옵니다."
눈바람을 맞으며 걷는것보다는 정자에서 눈을 보는게 조금은 낫지않을까. 그러면서 아쉬운대로 병풍이라도 둘러쳐 바람을 막고 화로를 갖다놓고 뜨끈한다과를 내놓으면 그가 어느정도는 몸을 녹일수있으리라 기대했다.
지금 이 모습을 연의 큰형님이 보았다면 필시 고성이 날아왔을 것이다. 가문의 위세를 그 누구보다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자칫하면 안좋은 소문이 날지도 모르는 이런 행동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소문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후원에서 있었던 일을 금세 누군가에게 몰래 털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연은 저택에서의 평판은 좋지 않았지만 적어도 다른 부분에서 구설수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성격 더러운 도련님이라고만 사람들이 알고 있을 뿐이었고 그런 수준의 귀족들은 수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 적어도 여기선 약해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 "
허나 연은 지금까지의 행동원칙을 깨고서 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잠깐의 망설임 끝에 자신이 결정내린 행동이었다. 그러고보면 화가 이 저택에 오고나서 그에게도 바뀐 것이 많았다. 예전보다 신경질이 좀 적어졌다던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조금은 늦어졌다던가 하는 것들이었는데 지금까진 그저 몸 상태가 평소보다 좀 좋은 시기라 그런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것이었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 동백꽃처럼 내리는 눈 사이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것이 좋으니. "
목정 가의 삼남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연은 저택에서 최약자의 위치에 있어야할 정도였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은 그나마 무가의 핏줄을 받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고 오랜 세월 저주에 시달려 피폐해진 정신력은 이미 상당히 마모되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장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나마 가문에서 저주의 영향력을 약화 시키는 법을 발견하여 더 오래 버틸 수 있을뿐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강하게 보이기 위해서 신경질을 더욱 부렸던 것도 있었다.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자신이 약해지면 자신을 노려 가문에 위협을 끼칠 세력은 더더욱 많아질테니. 그런 자신의 처지가 어쩌면 아라에서 공녀 신분으로 넘어와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화와 겹쳐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녀만 간신히 들을만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여준 것이었다.
" 바람이 세지는구나. "
나올때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듯 했으나 지금은 눈이 대각으로 내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으나 아직도 자신은 환자, 그러니 정자에 앉아 바람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화는 자신이 바람을 피할 동안 이 바람을 전부 맞아야했고 그것을 보면서 편하게 정자에서 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녀가 온 곳은 겨울도 짧은 온화한 지역이라 했으니 버티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 이만 들어가자. 이 정도면 구경도 실컷 한 것 같구나. "
눈도 만져보았으니 이젠 들어가서 쉬는게 좋을듯 했다. 괜히 감기가 더 악화되면 자기도 고통스럽거니와 저택의 시종들도 하루종일 긴장을 하고 있어야하니 말이다. 연은 몸을 돌려서 후원의 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화는 눈을 쓸려고 연의 앞에 있었으니 그가 몸을 돌린다면 그의 뒷쪽으로 오게 될 것이었고 연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 내리는 눈은 쓸어봤자다. 교통이 중요한 곳이나 쓸어대는 것이지 이곳은 눈이 그친 뒤에 해도 된다. "
실제로 연이 후원으로 나가기 전엔 후원의 눈을 쓸어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하니 연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선 말을 이었다.
" 내 옆에서 같이 쓰고 가자꾸나. "
지금까지 눈을 맞았다면 분명 춥다고 느낄 것이니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후원을 보고 있는 시종들이 어찌 생각할진 알 수 없었지만.
눈을 웬만큼쓸면서 아연해졌던정신을 수습하고부터는 보는눈이 있었을지가 신경쓰였다. 저택의 사용인중에서도 제일밑바닥인 주제에 가주앞에서 눈물바람이었으니. 눈에띄었다면 나중에 대놓고 한소릴듣는것도 오히려다행일거다. 이리 처신이 엉망진창인건 침식을줄여서인지
정신차리자고 제볼을 툭툭치는데 바람소리처럼 가볍게스쳐가는, 허나 바람소리와는 확연히 다른속삭임이 들려왔다. 약한사람으로 보였다간 얕잡혀서 힘들어진다는, 그러니 동백꽃처럼 북풍한설에도 강인하게 살아내라는. 저말은 그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인지? 혹은, 정말이지 밑도끝도없는 망상이다만, 자신이 그리할테니 함께해보자는 제안인지? 터무니없는 발상에 그만 실소가 샐뻔한걸 가까스로 감추고 대답했다.
"유념하겠사옵니다."
한편으로는 생각이많아졌다. 목숨을 부지하는이상 그를 기망하거나 가문과 조국을 저버리거나이기에. 이렇게 만나지않았더라면, 만났긴해도 내가 유 가의 사람이 아니거나 그가 목정 가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하다못해 내가 피의저주에 관한 비술서를 몰랐더라면, 어차피 공녀로 전락해버린 신세 남은생은 병자간병이나 하겠노라고 받아들일수도 있었을텐데
잡념에 빗자루질이 느려진다. 화들짝 손을움직이려도 바람이 부딪쳐오는탓인지 온몸이오싹오싹시리다. 겨우겨우 정자까지 쓸어내고보니 연못도 눈이 쌓일락말락인게 표면이 얼었나보다. 이대로면 정자에 병풍을 둘러친대도 바람막이가 될지 모르겠다. 이런날 밖에서 졸아버리면 그대로 만사끝이겠지? 그런데도 나는. .. 어느새 곱은손에 입김을 불고앉았다. 이깟추위하나 못배겨내고있는것이다.
그래서 티가 나버렸을까? 지난번 외출로 호되게 앓은탓에 조심하고픈걸까? 그가 이리저리흩날리는 눈보라를주시하더니 바람이 세진다며 들어가잔다. 제 못남에 한숨이나오면서도 돌아서는 그를 뒤따르려니 한결 마음이놓인다. 그는 이런칼바람을 가능한한 안맞아야 그나마 몸이 덜축날테니.
그러는사이에도 눈은 쌓여만간다. 좀전에 쓸었던자리도 그새 솜털같은흰색채가 얕게덮였다. 그가 쓸어봤자라고 하는것도 당연지사였다. 앞질러쓸지 않았다면 산책하기불편했을텐데도 저리말하는건, 그 나름의 배려이고 염려일듯하다. 하여 고개를 숙여보였다.
바로그때, 유화는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의심하지않을수가 없었다. 공녀더러 한 우산을 쓰자고한건가? 이 저택의주인이자 제국에서 윗사람이 몇없을 공자가? 못자고 못먹어서 들리는 헛소리가 아니고서야! 그러나 그는 보란듯 자기옆을 가리키고있다. 사방을훑는 눈바람의 소리와 감촉도 그대로다.
그걸 의식하고서야 머리가 차근차근 돌아갔다. 얕보이지말라 했는데. 공녀와 나란히걷는게 남들눈에 띄면 그의체신이 깎이진않을지? 하지만 따르지않는다면 그 역시 체면상 곤란할거다. 보는눈이 어디있을지 모르는 야외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서 어리벙벙해있다가 빗자루를 한손에옮겨쥐고 빈손을내밀었다.
"하오시면 우산을 소인이 들겠사옵니다."
상전에게 우산을 씌워주는식이면 조금은 모양새가 나을듯해서였다. 실내에 들기까지 그에게 눈이 일절 닿지않게 하는데에 온신경을 기울이면 어떻게든되겠지.
자신이 나간다고 얘기만 하지 않았다면 시종들이 눈을 쓸 일도 없었을테니 유화가 손을 시려워하는 것을 본 연은 그냥 가만히 실내에 있었어야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해버렸다. 하지만 몸이 안좋다고해서 집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내리는 눈을 본 이상 가만히 있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눈을 쓸던 것이 화가 아니라 다른 시종이었더라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연은 그것에 대해선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화의 말에 그저 작게 웃어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그러는게 좋겠구나. "
자신이 옆에서 걸을 것을 권하자 놀라는 분위기가 느껴지고 곧 화가 자신이 우산을 들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한 손엔 우산, 한 손엔 빗자루를 들게 될테니 손이 시렵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 이상의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다른 이들이 보기엔 전혀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잠자코 자신이 들고 있던 우산을 화에게 건네준 연은 걸음을 좀 빨리하여 저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쓸면서 지나왔던 길은 다시 눈이 쌓여서 미끄러웠기에 자연스럽게 말없이 후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 고생했다. "
덕분에 금방 도착한 저택의 문 앞에선 다른 시종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연은 자연스럽게 팔을 들었고 그 시종은 빠르게 젖은 옷들을 벗겨내고선 실내에서 입는 옷을 입혀주었다. 말없이 진행되는 동작에선 군더더기 하나 없어 그녀가 이 저택에서 오랜 시간 일했음을 말해주고 있었고 허리를 조여주는 끈까지 매듭이 지어지자 그는 한걸음 앞으로 나가 뒤로 돌며 수고했단 말을 건네주었다. 이것이 화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옷을 담당한 시종에게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둘 다에게 한 말일지도 모른다. 연이 후원을 나오자 후원을 비추던 가로등들이 하나 둘씩 꺼져 컴컴한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 일어나자마자 움직였더니 배가 고프구나. "
그의 하루 일과는 이제야 시작인지라 아직 밥도 먹지 않은채 후원을 돌아다니다 온 것이었다. 밖에 있을땐 추워서 별 생각이 없었지만 안에 들어와서 몸이 따뜻해지니 시장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마 식사는 전부 준비가 되어있을테니 내어오기만 하면 될 일이라 그는 옷을 들고있던 시종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말하고선 화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 너는 따라오거라. "
그렇게 말하고선 뒤로 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향한 연은 벌써부터 머릿속에 서류 생각이 가득해졌다. 눈을 보는 것은 좋았으나 결국 그도 일을 해야하니 계속해서 여운에 잠겨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방 앞에 도착한 그는 자리에 들어가 앉아 어제 보다만 서류들을 집으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손의 방향을 달리하여 무언가를 꺼내 화의 앞에 두었다.
" 손 시려울테니 이걸 갖고 있거라. "
방에 있던 손난로는 시종들이 계속해서 바꿔주었기에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가 자리를 비우고 있을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손을 녹이기엔 충분히 따뜻했고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쐰 그녀의 손을 염려한 것이었다.
기분탓일까. 우산을들겠노라 자청하자 그의표정이 일순흐트러진것 같았다. 선뜻내키지않는듯한데 언짢다기보다는 난감해보인달지? 모를일이다. 좋든싫든 목정가는 이나라에서 손꼽히는대갓댁. 그만한댁의도련님이면 아랫것에게 우산들리는거야 밥을 수저로드는것만큼이나 당연지사일텐데. 설마 나온사이 상태가 나빠지기라도했을까? 시간이 멈춘듯 오만가지생각이 흘러나올때 그가 희미한미소와함께 승낙했다. 추위탓에 내가 예민했나보다. 그대로 우산부터 받아들려다 제몸에쌓인 눈때문에 멈칫했다. 나란히걷다보면 그가 이 눈에 닿아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여 빗자루를 옆구리에끼고 어깨며머리를 대강털어내고서야 우산을잡았다.
그런데 그의걸음이 나올때보다 빠르다. 그새 왔던길이 하얗게가려질듯말듯 눈에덮인터라 조마조마했다. 고작 수십보거리가 한참은 멀어보인다. 그가 자칫 실족이라도했다간 큰일인데, 그럴때 잘부축할수 있을지? 그의 어깨나등이 눈에 닿지않도록 우산의 위치나 각도를 조절하는한편 빗자루를 든팔은 여차하면 받칠수라도 있게끔 그의 등뒤로뻗어서 옆걸음을걸었다. 희가 감기걸린채로 눈을맞겠다고 다니는걸 따라다녔으면 딱 지금같았을까? 그런싱거운생각이 스쳤으나 그를 따라가기바빠 이내 털어버렸다.
그런끝에 도착하고나니 안도의한숨이 나오는동시에 팔이 후들거렸다. 살을에는 바람에 얼었던몸이 실내의 훈훈한공기를 맞아 더 그런지도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말이, 여기까지오는 잠깐사이에 바짝 긴장했음을 알고있다는것처럼 들려 묘했다. 그러나 감상에빠질 여유는없었다. 어느틈에왔는지 시종이 그가 실내에들자마자 젖은외출복부터 벗겼기때문이다. 그가 후원으로나가기 무섭게 실내복부터 준비했던건지? 이골이났다는듯 잽싼동작에 일순멍했다가 허둥지둥 마른수건으로 그의손발을 닦았다. 수건으로도 온기가 미미하게나마 전해져오니 다행이다. 체온이 많이 떨어지진않았나보다. 그래도 혹시몰라 입구안쪽에 놓인 화로를 그의발치로 옮겨놓은뒤, 바닥의 외출복은 시녀가 새옷을담아왔던 옷바구니에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옷가지를 담았을때 다시금 수고했다는말이 들려왔다. 어지간히드문일인지 그때껏 무표정하던 시종의얼굴이 벙벙하게 풀어졌다. 금세 머리숙여 표정을 가리긴했지만.
뒤따라 고개숙이려니 그가 출출하단다. 그러고보니 그가 기침하기전에 준비했던 꿀물과 죽과 탕약은 진즉에 다 식었겠다. 새로 차리거나 시종들이 이미 새식사를 차렸다면 내어와야지. 하여 뒷걸음질로 물러나려는데 뜻밖에도 그는 옷바구니를챙긴 시종에게 식사를 가져오라 지시하더니 유화더러는 따라오라 명했다. 멈칫 눈을 들자 그는 이미 처소로향했고 시종이 뭐하냐는듯 고갯짓으로 그뒤를 가리켰다. 오늘은 뭔가 영 얼떨떨하다.
그렇게 그의처소에 들어오니 확 노곤해졌다. 깜박 감았던눈을 부릅뜨며 유화는 머리를 재게 흔들었다. 속입술도 잘근거려 입 안쪽의상처를 자극하고서야 좀은 정신이들었다. 아픈티나 피곤한티가 나선 곤란하다. 멀쩡해보여야 끝나더라도 뒤탈이없다. 그러니. .. 어쩐지 흐린시야로 그새 책상머리에앉은 그의뒷모습이 들어온다. 저사람도 참 어지간하다. 찬바람을 잔뜩쐬어놓고 또 서류부터붙들다니. 책상옆에 가지런히개어진 담요를들어 그의 무릎과 어깨를 감싸려는데, 그가 제앞의 손난로를 유화쪽으로 밀어놓았다. 뒤이어 그가 까닭을밝히자 눈이홧홧해졌다. 그게 신경쓰였던가, 그래서 돌아올때 서두른거고? 입을뗐다간 울음이나올거같아 이악물고 그에게 담요부터둘렀다. 이사람을 어쩌면좋을까. 전혀 생각지못한 지점에서 세심하게 정을보이니. 유화는 빈손을 맞잡은채 머뭇거리다가 쭈뼛쭈뼛 손난로로 양손을 뻗었다. 그렇게 움킨손난로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고개숙였다.
후아 벌써 1월이 끝나가네! 좋은 밤이야~~ 이어줄까 했는데 많이 짧을 것 같아서 그냥 막레로 받을께! 아마도 연이는 유화한테 가서 쉬라고 하고선 계속 서류를 붙잡고 있지 않을까 싶어. 추운데 고생했으니까 말이야! 헉 유화 아프면 안되는데 8ㅁ8) 독살미수사태 그거 재밌을것 같은데 ... 범인이 사실 제국을 적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제국측의 누군가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야! 흥미가 돈다면 살짝 설정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D 그럼 유화가 앓아누워 있을때 연이가 계속 신경써주는걸로 마음이 좀 더 열리려나~~
헉 모야모야 동접이네! (엄지척) 권총에 협박 당해 마지못해 푸는 설정을 말해보자면 ... 목정 가문도 어쨌든 제국 3대 가문 중의 하나니까 휘하에 세력이 무지막지하단 말이지. 당연히 그 중에선 충성심을 너무 과하게 가진 이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연이가 공녀랑 가까이 지내는걸 보고선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독살을 시도해! 연이네 가문의 자세한 사정은 극비라서 대중들은 그냥 종종 특이하게 생긴 사람들이 태어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헉 자해모드 때려치는거 너무 좋은데 ... 유화 소듕해 8ㅁ8) 이것저것 꾸며주면 더 예쁠 것 같고~
헉 현생에 치이다니 안돼!! 현생은 정말 극혐이야 ... 8ㅁ8) 이를테면 이런거지. 정계에는 연줄이라는게 있으니까 목정 가문의 라인을 타고 있는 한 가문에서 벌인 짓이라고 해야할까? 잘보이려고 한 짓은 아니고 '위대하고 훌륭한 가문에 저런 이단아가 있다니 말도 안된다!' 라는 생각으로 일을 저지른거지. 왜 연이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있는지 전후 사정은 아무것도 모른채 말이야. 아마 목표는 둘 중 아무나 걸려라! 식이었을 수도 있고 :3
선레는 어떤 상황이 좋을까! 감기는 다 나았을 것 같고 날씨도 따뜻해지니까 바깥 나들이를 한번 더 다녀올까~? 아니면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어볼까? 연이가 화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던지 ... 화가 알려줄 수 있는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