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 본디 북부에서 태동하여 세력권을 남쪽으로 넓힌 국가였기 때문에 국토의 많은 부분이 상당한 추위를 자랑했다. 한번 천도를 해서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왔음에도 여전히 이곳의 겨울은 매서웠고 겨울이 지나서도 밤에는 단단히 채비를 해야할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그렇게 길게 바깥에 있었으니 아플 수 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주변이 조용하여 혼자만 있는줄 알았는데 눈을 뜨니 옆에 화가 앉아있었다. 그렇지, 자신을 모시는 시녀이니 옆에 있어야만 할테다. 정신이 몽롱하여 자신이 어떤 말을 중얼거렸는지도 알지 못한채 그는 서류뭉치를 가르켰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에 연은 피식 웃고서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오늘 쉬게 되면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쉴 수 밖에 없다. 오늘 쉰다고 이 몸상태가 하루만에 낫지 않을테고. "
목정 가문은 그 위세만큼이나 방계 가문도 꽤나 있는 편이었고 제국의 무기들을 관리하고 있는 입장인만큼 수많은 공장이 그들의 소유였다. 물론 세세한 것들은 관리자들 선에서 결정되었지만 결국 본가의 승인이 필요한 것들도 충분히 많았고 그것들은 전부 연이 담당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제국의 총사령관이라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큰 형은 아버지의 부관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같은 입장이었다. 작은 형은 제국 내의 가문 소유 공장들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연에게 내정 관련된 것들이 몰리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들을 미루는 것이 힘든 입장이었다.
" 어차피 내가 죽으면 너한텐 좋은 일이 아니냐. "
자신이 죽으면 가문은 자연스럽게 혼란에 휩쌓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저주라는 것은 소유자가 죽으면 가문의 다른 이에게 갑작스럽게 옮겨가니 말이다. 그러면 또 저주를 옮길 누군가를 가문 내에서 색출해야하는데 큰 형과 작은 형의 아들들은 너무 어리므로 적임자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공녀에 대한 감시의 시선은 소홀해질테고 도망가는 것이 가능해질지도 몰랐다. 물론 일이 수습되고 나서 다시금 찾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턴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 무가의 삼남으로 태어나서 잔병치레나 하고 있으니 이것을 추하다하지 않으면 달리 어찌 표현하겠느냐. "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붓을 손에 든 그는 바로 옆에 있던 서류를 집어들어 책상에 두고 조금씩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감과 오한으로 인해 집중이 될리가 없었고 자꾸 흐릿해지는 시야 때문에 눈만 계속해서 비비고 있었다. 거기에 붓을 든 손도 조금씩 떨리고 있어 제대로 써내려가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업무를 보려는 그의 모습은 남이 본다면 안쓰러울 지경일테다. 허나 서류 하나를 간신히 처리한 그는 다시금 붓을 내려놓고선 한숨을 작게 내쉬고선 말했다.
" 이래서야 제대로 되질 않을테니 좀만 쉬었다 해야겠다 .. "
결국 자리에 다시 누운 그는 반쯤 뜬 눈으로 잠깐 화를 바라보았다가 눈을 감았다. 잠에 든줄 알았으나 조금씩 뒤척이는 것을 보면 그저 눈을 감고 누워있는 것 같았다.
오늘 쉰다고 낫지않는다. 생기라곤 없이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음성에 유화는 목정 가 삼남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꿇은채 침상에 앉은 그를 올려다보려니 새삼스럽지만 더없이 자연스럽게 제 처지가 또렷해졌다. 이 높이차가 도리어 우스울만큼 자신은 바닥의 바닥으로 떨어진 신분이며 목정 가 삼남의 소유물과 마찬가지라는 현실이. 그러면서도 그 격차가 역전적이라는 점도 실감이 났다. 오늘 쉬어봤자라는 까닭은 저주때문. 반면에 자신은 해주법을 알고서 구경하는 입장이므로. 지금 이 뭐라 말할수없는데도 절실하고 안타까운 기분은 그래서 드는것이리라.
"집무는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있을것이오나 스스로를 돌보시는것은 시기를 놓쳤다간 불가능해지옵니다. 바라옵건대 열이 내릴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주시옵소서."
고통에 겨운 사람을 차마 못보겠는 측은지심인지, 저주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야할 목정 가의 인간이 죽음이라는 탈출구를 찾게해줘선 안된다는 반발심인지는 모르겠다. 어느쪽이든 지금의 그는 쉬지않으면 안될 상태인것만은 명백하다. 그런 사리판단을 무참하게 만드는 한마디.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감각에 제 처지고 제게 허용된 처신이고 잊은채 분기(憤氣)에 찬 시선을 목정가 삼남에게로 올려붙였다.
저가 죽으면 나한텐 좋다니 그런 모욕이 어디있는가? 우리 유 가는 인명의 소중함을 안다. 사람을 무수히 해치고서 떵떵거리는 목정 가와는 다르다! 추한건 잔병치레가 아니라 숱한목숨을 해하는 잔학함이요 아랫사람을 박대하는 혹독함 아니겠는가! 그런 억하심정이 목끝까지 치밀었으나 억지로 삼키고 또 삼켰다. 나만 죽는다면 몇번이고 퍼붓겠으나 저 자가 첫날의 경고대로 내 가족을 해하려들면 끝장이기에. 이래서 저자의 눈에 띄고 기억되어선 안되는거였는데.
유화가 속이 터질지경이거나 말거나 목정가 삼남은 기어이 거동을 시작했다. 서류를 가져다주지 않으니 직접 책상머리에 앉으려는 모양이었다. 도로 엎어질듯 휘청이는 걸음. 부축하고자 일어선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가빠진 숨을 거듭 삼키고서야 열에 취해버리고도 고집스러운 그를 부축할수 있었다. 진땀이 밴 몸은 여전히 불덩이였고 오들오들 떨리고도 있었으며 얼핏 느껴지는 발딱이는 맥박조차 금세라도 멎을듯 위태위태하게 느껴졌다. 이몸으로 무슨일을 하겠다는건지?! 강제로라도 안정을 취하게할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충동마저 일었다. 지금의 목정 가 삼남이라면 뒷덜미를 가격만 해도 혼절할듯해서.
그러나 망상은 망상일뿐. 유화는 만류하는 말조차 보태지못한채 목정 가 삼남이 자리에 앉는것이나 거들었다. 그렇긴해도 방에 난로를 여럿 틀어놓은게 무색하게 추워하는 몸으로 일이 될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눈을 뜨고있기도 힘겨운듯 수시로 눈을 비볐고 붓을 쥘 기력도 없는지 손조차 바들거렸다. 책상의 서류를 몽땅 치워버릴까 절로 망설여졌으나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저지경으로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는 못하는것이 너무나도 처절하게 느껴져서.
안절부절못하고있느니 약이 다 달여졌는지나 보고와야겠다. 기척을 죽여 나가려는찰나 목정 가 삼남이 마침내 붓을 내려놓았다. 다행히도 무리임을 깨달았나보다. 한결 기꺼운 기분으로 그를 부축해 침상에 눕히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의원은 잘먹고 잘쉬면서 약을 복용해야 나아질거랬는데 이건 그 반대아닌가. 그나마 지금은 잠들었을까? 하여 유심히 살피니 그는 눈만 감았을뿐 누운자리가 불편하다는듯 이리뒤척 저리뒤척이다. 어찌해야 할지? 낮에 못잔 탓인지 머리가 통 안돌아간다. 식사를 않고 탕약을 먹었다간 속이 상하고말테니 미음이라도 먹여야하고 땀이 식을수록 오한이 심해질테니 옷도 갈아입혀야겠고 또.. 궁리할수록 뒤죽박죽이라 다 집어치우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이불을 그의 턱밑까지 끌어올린뒤 찬기운이 들 틈이 없도록 구석구석 꾹꾹 눌렀다.
"식사와 탕약을 가져오겠사옵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주방으로 나가보니 약탕기에서는 달여진 약 특유의 진하고 쌉싸릅한 향이 났고 미음도 보글보글 끓고있었다. 여전히 따가운시선에 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사과하지않을수 없었다. 탕약을 짜고 미음을 체에 거르는 마무리작업도 직접 하기로 했다. 그렇게 탕약과 미음을 준비하다 문득 과일바구니가 정확히는 거기있는 배가 눈에 들어왔다. 배를 먹으면 기침이 조금 잦아들수있음을 알아서였고 배의 단맛으로 그의 기력을 북돋을수있을까 싶어서였다. 탕약이 쓰니 배의 단맛으로 무마할수도 있을거같고. 부랴부랴 배껍질을 깎고 강판에 간뒤 그즙을 체에 걸러 건더기없는 배즙을 한잔 만들었다. 그러고나서 미음과 탕약의 온도를 확인해보니 적당히 식어있었다. 하여 준비한것을 모두 가지고 목정 가 삼남의 처소로 돌아가서는 그의 머리맡에 자리잡았다.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은 드시옵소서. 그래야 약기운을 견뎌내실수 있사옵니다."
목정 가 삼남이 스스로 먹고자한다면 일어나앉도록 부축해서는 상을 내어줄것이고 일어날기력이 없다면 상체를 보다 높이 누인다음 미음을 한술씩 입에 흘려넣고자 할것이며 식사를 마다한다면 다시한번 권할것이다. 만약 그가 저도모르게 잠들어버린뒤라면 양동이에 새로 미지근한 물을 떠와서는 그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기를 반복할것이다.
인명은 이해득실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연은 그 말을 듣고서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몇몇 정의로운 사람에게나 통용되는 법,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득실이 인명보다 더 위에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지금 자기 자신만 해도 가문 전체의 득을 위해서 혼자서 실을 떠안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분기탱천하여 자신에게 말하는 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채 얘기했다.
" 그렇다면 내가 유언을 남겨주지. 내가 죽거든 너를 다시 고향으로 되돌려보내주라고 말이다. "
그래도 네가 내 죽음을 원하지 않게 될까? 마치 그렇게 얘기하듯이 그는 담담하면서도 재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몸이 아파서 평소의 그런 것보단 좀 더 옅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의중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화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곧장 업무를 보기 위해 서류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라 간신히 하나를 다 본 그는 들었던 붓을 내려놓고서 다시금 침상에 몸을 뉘었다. 잠이라도 더 자기 위함일까 싶었지만 애초에 쉽사리 잠에 들수 있는 몸이 아니니 연신 뒤척이기만한다.
" 식사는 별로 생각이 없구나. "
그렇게 누워있으니 화가 식사와 탕약을 가져오는 소리가 들렸고 연은 화가 들어오자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선 미음을 손으로 살짝 밀어두고선 달여둔 탕약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온갖 약재가 섞여서 쓴맛이 강할텐데도 전혀 내색도 하지 않고 입가에 흘러내린 탕약을 손수건으로 닦아낸 그는 밀어둔 식사를 보고선 조금이라도 먹으라는 화의 말에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다시금 미음을 가지고와 조금씩 입으로 가져가 먹기 시작했다. 허나 정말 입맛이 없는지 몇술 뜨지도 않고 그릇을 내려놓은 연은 배즙을 반쯤 마시고선 침상에 몸을 다시 뉘였다.
" 그 탑은 나도 보고싶었던 것이니 딱히 네 탓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
간밤의 외출이 길었던 것을 얘기하는듯 했다. 밤의 추위는 강했고 다른 이들이면 모를까 연에게 그 추위는 꽤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광장까지 가서 등불탑을 보고 왔으니 탈이 나는 것은 당연했으나 보고싶다고 말한 화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듯 했다. 자신이 얘기한 것을 지킨 것뿐인데다 몸을 관리하지 못한 것도 그의 탓이니 다른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시종들의 곱지 않은 눈빛도 봤으니 말이다. 다만 자신이 그것을 직접 주의를 줄 수는 없으니 적어도 본인에겐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 몸이 이러니 조심을 해야함에도 간혹 욕심을 부리고 싶어질때가 있으니 말이다. "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그는 다시금 격한 기침을 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심하게 이어지던 기침은 간신히 진정되었고 숨을 몰아쉬던 연은 누워서는 숨쉬기가 불편한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선 침상의 바로 옆에 있던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약효가 서서히 도는 것인지 몸의 떨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일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어 붓을 다시 잡은 그는 문서로 손을 뻗으려다 그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문서와 붓을 둘 다 내려놓고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욕이 없다는 목정 가 삼남을 뒤로 한채 주방에서 이것저것 준비하는 동안에는 이래저래 심란했다. 한낮부터의 난리로 고생한 사용인들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그보다 더 께름칙한것은 농인지 조롱인지 혼미한정신에 나온 헛소린지 모를 발언이었다. 자기가 죽고나면 돌려보내주겠다니? 돌아갈수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애간장을 녹이는 희망이다. 허나 그때 그의 눈은 충혈된 흰자위와 시뻘건 눈동자는 지친기색이 역력한데도 호승심이 들어찬듯했다. 과연 저의가 무엇일지? 내가 자기의 죽음을 바라게끔 만들고프기라도 한가? 그래서 그자가 얻을게 뭐란말인가?
어쨌거나 상을 차려서 돌아가자 목정 가 삼남은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부축하여 앉히고는 베개를 등받이처럼 뒤에 받친다음 상을 내어주자 그는 다 귀찮다는듯 탕약만 들이켰다. 입가로 샌 방울도 끼어들지 말라는듯 제 손수건으로 훔쳐낸다. 심하게 앓다보면 입맛이 떨어질만은 하나 약만으로는 회복이 더딜터인데. 다시한번 권해보려는찰나 목정 가 삼남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더니 미음을 몇술 들고는 배즙도 절반쯤 마셨다. 안도감에 웃음이 올라왔다. 이만하면 됐다. 좀 더 먹어두는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입맛이 없을땐 식사가 오히려 힘겨울수도 있으니.
"잘 하셨사옵니다."
상을 물리고서 갈아입힐 옷가지와 식은땀을 닦을 마른수건을 다시 준비해야겠다. 머리로는 동선을 계획하고 몸으로는 이불을 그의 턱밑까지 끌어올리던중 그만 울컥해버렸다. 방한책이 허술한걸 생각못하고 지체했다는 후회. 찬바람을 몸으로 막아보겠답시고 동동거렸으나 소용없었다는 무력감. 애꿎은 사용인들을 고생시키고말았다는 미안함. 목정 가 인간을 잘못돌봤다간 죄를 받는 신세에 대한 자괴감. 그런저런 감정이 자책할 필요없다는 위로로 북받쳐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만한 외출을 '욕심'이라 일컫는 목정 가 삼남의 처지가, 맥없이 헛헛한 웃음소리가 측은.. .
그때 목정가 삼남이 숨도 못 쉬고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행여 기도가 가래로 막힐세라 그를 옆으로 눕히고는 등을 두드렸다 쓸어내렸다를 반복했다. 그치기는 할지 의원을 도로 불러야할지 조마조마해질 지경에 이르고서야 기침이 잦아들어갔다. 그러고도 들숨과 날숨이 턱턱 걸리며 그르렁거리는 숨결은 듣기에도 위중하고 일으켜달라는 지시는 그 숨소리보다도 미약했다. 고열과 식은땀으로 엉망진창인 몸을 부축해 일으키노라니 심란하다. 아랫사람이 제 죽음을 학수고대하길 바라는듯하다가도 아랫사람을 향한 동정이 담긴 위로를 하고, 죽어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바라는듯하다가도 악착같이 일하고자한다. 이 사람이 바라는게 뭘까. 기진해 벽에 기댄 그를 이불로 감싸다 혼란이 두서없이 말로 나와버렸다.
격한 기침을 이어가던 연은 이러다가 죽겠다고 생각이 들때쯤 기침이 잦아들자 아직 죽을때는 아닌가 싶어 헛웃음을 자아냈다. 허나 오래도록 이어진 기침 때문인지 목이 아파와서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채 이어져 터져나오는 잔기침을 옷소매로 입을 막아 잦아들기를 다시금 기다렸다. 물론 그 와중에 화의 질문을 듣기는 들었으나 대답해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기침이 멈춘 후에도 몇번이고 가래를 뱉어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연은 이윽고 침을 한번 삼키고선 입을 열었다.
" 단순한 변덕이라 생각해라. "
저택의 주인은 그렇게 성정이 예민하다더라, 라는게 이 수도 전체에 널리 퍼져있으니 갑작스레 변덕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다들 그러려니 할 것이었다. 물론 그 변덕이 아주 잠시만에 손바닥 뒤집히듯 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면 다들 인상을 찌푸리긴 하겠지만. 어쨌든 연은 화의 질문에 그렇게 짧은 답변을 내놓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코는 막히진 않아서 숨을 쉬는 것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 다행일까. 그래도 중간중간 나오는 기침 때문에 호흡이 틀어지는지 그가 내쉬는 숨은 여전히 거칠었다.
" 사람은 살아가는데 목적이 필요한 법이지. "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던간에 아주 자그마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법이니 말이다. 당장 내일 먹을 음식이 없어 걱정하는 사람도 결국 내일의 음식을 먹기 위한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정말 목적이 하나도 없다면 인간은 죽는다. 하물며 연에게도 가문의 저주를 홀로 견디며 다른 가문원들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목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아라에서 공녀 신분으로 건너온 그녀에게도 목적이 존재할까. 가족을 위한다기엔 살아가면서 영원히 보지 못할 가족일텐데 말이다.
" 원망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을 주는 목적이지. 역설적이게도. "
물론 그런 것을 모두 의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는 예민했고 그 성질을 다른 사람에게 잔뜩 풀어내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화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런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듯 했다. 하지만 원망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원망의 화살은 지나치게 날카롭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겨누는 것은 정말 위험했으니까. 어쨌든 그는 그랬다. 그렇기에 화에게 변덕스러운 태도를 계속 견지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대답이 되었을거라 생각한 연은 다시금 침상에 눕고서는 말했다.
" 잠시 잠을 자야겠구나 ... "
탕약에 포함되어있던 수면 성분이 슬슬 도는듯 했다. 아플땐 차라리 잠드는 것이 나으니까. 물론 약을 써도 깊게 잠들지 못하는 연이니 아마 두어시진 내에는 분명 다시 일어날테지만 말이다.
>>215 희망이 보인다해도 확실하지 않으면 붙잡지 않을꺼야! 희망을 가졌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때 그 비참함을 느끼고 싶어하진 않으니까 말이야 ... 이미 힘든데 그렇게까지 더 힘들고 싶어하지도 않고! 나름 비관적인 성격은 거기서 비롯 되었을꺼야!
>>216 연이는 상당히 엄중하게 보호 받는 입장이라 그런 음식이 들어오기 꽤 힘들지만 공을 들인다면 어떻게든 가능할테니까 :3 ... 유화가 그렇게 중독 되어서 쓰러지면 자기네 의원 또 불러서 어떻게든 돌보려고 하지 않을까?! 연이에게 독을 쓴다면 상당히 강력할테니 말이야.
한번 걷잡을수없이 터진 기침이 잦아드는가싶더니 되살아났다. 강물이 아무리 흘러도 그치지않는것처럼. 힘에 부친듯한 헐떡임이며 쿨럭거림이 듣기에도 괴로웠다. 정말로 의원을 도로 불러야지않을지? 헌데 의원이라고 당장 멎게할 수가 있는지? 하릴없이 이불위를 쓸어내렸다 두드렸다하려니 다행히도 기침은 가라앉기시작했다. 목이 터지지는않았는지? 숨을 못쉬는건 아닌가 살피다 목정 가 삼남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목청을 고르는것에 제실책을 깨달았다. 타구(唾具)와 마실물부터 챙길것을.
허둥지둥 타구와 데운물을 가져다놓는데 그가 숨을 삼키기무섭게 대꾸를 했다. 제대로 숨쉴틈도 없었을터인데도 어찌 다 듣고있었는지?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성정이라 이건가? 아무리그래도 내가 저의 죽음을 기대하길 유도하더니 대뜸 위로라는 호의를 베푼건 대관절 어디서 기저한변화인지 통모르겠다. 여느사람이라면 이유가뭐든 호의를 보이고픈 이로부터 미움받기를 원치는않을터인데.
그러나 그직후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눈앞이 번쩍하고 골이 띵했다. 잔기침에 섞여나온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모를소리. 저를 원망하기위해서라도 살라?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뻔했다. 어처구니없을만큼 반발심을 불러일으키는동시에 허탈감으로 압도하는 말이었다. 미골의 유화는 공녀가 되면서 이미죽었건만 숨붙이고있을 이유라곤 스스로 끝내서 밉보였다간 가족까지 해코지를 당할까봐뿐이건만 공녀로 두고서는 계속살란다. 그 어불성설이 기막히면서도 가슴은 무지근하고 저려왔다. 제몸 아프고괴로운거나 가시길바라도 모자랄 환자가 공녀하나 살고죽는걸 신경써 무엇한단말인가. 그래서 변덕이라는건가? 아니면 ... 혹여 자기일은 욕심이라며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있는가? 이 터무니없는 자를 내가 어찌 받아들여야하는가?
어지럽다. 맥이 격하게뛴다. 몸은 도로 드러눕는 목정 가 삼남을 거들고 이불로 감쌌으되 머리는 마냥 흐리멍텅했다. 가쁜숨소리도 제기척인지 그의 기척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그의 이마를 짚고서 열이 다 내리지않은것을 확인한순간 엉켰던실타래의 매듭을 막 푼것처럼 머릿속이 정리되기시작했다. 이사람이 죽기를 기원하며 버티진않으리라. 인명은 이해득실보다 귀하다고 배워놓고 실천하지않는다면 목정 가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게 아니라도 누군가의 죽음말고는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못하며 목숨을 부지한들 그게 덜 참혹한길일까? 무엇보다 죽기를 바랄만큼 증오하기엔 이사람이 너무나 약하다. 한번의 밤나들이조차 욕심이라 자조하고 제 마음씀씀이는 파괴적인방식으로말고는 드러내지도 못할만큼. 이사람이라고 이리 살고싶었겠는가? 내가 닥친상황에 대처하기 급급했듯 그도 어느정도는 그랬으리라. 허니.. . 유화는 물수건을 적신뒤 목정가 삼남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사실 연은 어째서 자신이 이 공녀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름의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확실하다고 얘기할 수 없을만큼 그도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물론 다른 시종들에게도 자그마한 배려 정도는 얼마든지 해주고 있었지만 화에게는 그 태도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저 멀리서 온 사람이라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렇기에 그는 화가 하는 말을 듣고서도 대꾸도 하지 않은채 그저 눈을 감고 누울 뿐이었다.
" 한 시진 이후에 깨워다오. "
추운 날씨인만큼 해가 빨리 떨어지니 한 시진 이후엔 캄캄한 밤이 되어있을거라 생각했다. 밤이 이 정도로 기니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원래 몸이 아프면 계속 졸린 법인데 약의 효과까지 겹치니 평소의 그와 다르게 얼마간은 어느정도 깊게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애시당초 얘기했던 한 시진은 커녕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깬 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플때도 잠을 제대로 못자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계속 눈을 감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을까하여 살짝 뒤척이던 연은 문득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 ... 간도 크구나. "
눈을 뜨고 화가 있던 쪽을 바라본 연은 피식 웃어보이고선 작게 속삭였다. 꾸벅꾸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졸고 있는 것일테다. 허나 아무도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적은 없었으니 그는 자신에게 하는 말도 그렇고 화는 분명 다른 시종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허나 자신이 낮부터 깨어있었기에 다른 시종들은 물론이고 화까지도 한창 잘 시간에 자신의 수발을 들었으니 피곤할 것이라 생각해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 낮부터 내 옆에 있었으니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
아마 다른 시종들은 돌아가면서 쉬고 있을텐데 화만 자신의 옆에서 계속 수발을 드는 것이 조금 불편한듯 했다. 다른 시종들도 충분히 자신을 모실 수 있고 옆에 너무 오래있다보면 옮을 수도 있으니 조심을 하는 것도 있었다. 또한 잠깐 졸고 있던 것이 마음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눈을 감은채 뒤척이며 등을 돌려 누웠다.
" 집사에게 말하면 다른 시종을 불러줄 것이다. "
혹여 말하기 불편하다면 집사에게 말하면 알아서 해결해줄테니 부담 가질 필요도 없을듯 했다.
열이 내렸나 확인하고자 목정 가 삼남의 이마를 짚은순간 기겁하고말았다. 잠든줄만 알았던 그가 눈을 말똥히 뜨고있었다. 게다가 간도 크다며 웃고있으니 낭패중의 낭패다. 화들짝 꿇어앉아 고개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정신이 덜 들었는지 자연스레 무릎꿇고 소인이라 칭하는게 착잡하다는 잡념이 앞서버렸다. 못할땐 못하는대로 익숙해져야만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게되고 할땐 하는대로 비굴하다고 자괴하게된다. 아무리그래도 환자를 앞에두고 자버린 주제에 딴데 정신팔면 어쩌자는건지? 얼마나 자버린 걸까? 암막때문에 늘상 어둑한방이라 가늠을 못하고있다가 뒤늦게 시계라는걸 곁눈질했다. 짧은바늘이 시간을 나타낸다고 했던듯한데 얼마 안움직였다. 저대로면 아마 반시진도 안지난 듯하다. 한시진뒤에 깨워달랬던게 무색하다. 탕약을 마시고도 이정도로 잠을 못이루다니. 그의 이마를 짚었던 손에 남은 열기가 께름칙하다. 열때문일까 아니면 저주때문일까?
곰곰생각하다 찔끔했다. 욕하든 신경질을 부리든 반응이 나와야하는데 여태잠잠하다. 그사실을 깨닫기무섭게 목정 가 삼남이 쉬어도좋다고 허락했다, 다른시종을 부를 방도까지 일러주면서. 그러나 선뜻 따를수가없었다. 낮부터 고생한건 다른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나는 이 사달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책임이 있다. 야밤의 산책에서 신문물 운운했던것도 문제지만 그에게는 산책조차 욕심으로 치부되도록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피의 저주라면 더더욱 그렇다. 좀전에 지껄인 소리들이 후회스러워졌다. 뭐가 아픈사람의 소망을 이룰방도를 찾아보면서 버틴다인가? 그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외면할거면서. 허나 선대어르신들께서 한이 맺히고맺힌끝에 거신 저주라면 내멋대로 개입해선 안된다. 이 무슨 어중띤태도인가? 이사람에게 타인을 배려하려는마음이 있음을 몰랐다면, 이 사람도 운명에 휘둘리고있는 약한사람임을 몰랐다면, 그랬더라면 이토록 위선으로 허우적대지는않았을까? 그런 모순을 통감하면서도 잠자코있지는 못했다.
"면전에서 졸아버렸으니 미덥지못할줄은 아오나 ... 아직 열이 높으시옵니다. 열이 내리실때까지는 예 있게 해주시옵소서. 다른시종들도 낮부터 일하기는 마찬가지이오니 소인이 특별히 더한것은 없사옵니다. 하옵고 땀을 적잖이 흘리셨사온데 젖은옷을 입고계시오면 푹 잠드시기 힘드실것이옵니다. 새옷을 준비해올리올까요? 아니면 목욕을 하시도록 더운물을 준비해올리올까요?"
이렇게 뜻을 거스르면 괘씸해하거나 아픈게 더 심해질까.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짚고넘어가지 않을수가없었다. 불면의 근본적인원인이 저주일지라도 잠자리를 편안하게 만들만한건 뭐든하고픈게 솔직한심정이었다.
애초에 한 시진 있다가 깨워달라고 했던건 본인이니 그 사이에 긴장이 풀려서 깜빡 잠들었다고한들 화에게 잘못은 없으니 말이다. 연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손을 작게 휘휘 흔들고선 쉬어도 좋다는 말과 함께 등을 보이고 누웠다. 이렇게 자세를 바꾸다보면 잠깐 편한 자세를 찾아서 잠깐이라도 잠에 들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깜빡 졸 정도로 피곤해보였기에 쉬라는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화는 열이 떨어질때까지 옆에 있겠다고 했다. 나름의 배려였지만 본인이 필요 없다고하니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목욕물을 준비해달라고 이르거라. "
땀을 계속 닦아내곤 있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거기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으면 이 오한도 조금이나마 사라질거라 생각이 들어 연은 목욕물을 준비하란 지시를 내리고선 누워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목욕 시중을 드는 시종들은 따로 있고 지금은 목욕을 하는 시간이 아니니 목욕물이 데워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소매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낸 그는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 누워있으니 머리가 더 아픈것 같구나. "
아마 온 몸이 아프니 머리까지도 아픈듯 했다. 어깨가 뻐근한지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고 조금씩 돌리면서도 다른 한 손으론 어깨를 주무르는 팔을 작게 두드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마저도 힘이 없으니 오래 하지는 못하였고 눕지도 못해 인상만 찌푸린채 침상에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약효 덕분인지 아까보단 상태가 괜찮았기에 이렇게 앉아있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행일까? 목정 가 삼남은 유화가 졸아버린것에 그다지 개의치않는 모양이었다. 속내가 어떨지는몰라도 그점때문에 다른사용인을 데려오라하진 않았으니 그렇게 간주해도 무방할듯하다. 어정쩡한 위선으로 점철된 자신의 근본적인문제가 풀리는건 아니지만 일단은 그걸로 족했다.
하여 바깥의시종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해달라 전하고 돌아와보니 목정 가 삼남은 도로 일어나앉아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있었다. 누워있으니 머리가 아프다면서. 그러더니 어깨를 주물러가며 팔을 두드리는것이 두통뿐만아니라 근육통도 상당한 모양이다. 몸살증상일까 저주의 여파일까. 거기까지는 알수없으나 그 모습을 보자 감기에 유효한 지압법이 떠올랐다. 정수리의 백회혈(百会穴)을 지압하면 두통을, 쇄골사이의 천돌혈(天突穴)을 지압하면 기침을, 뒷덜미한복판의 대추혈(大椎穴)을 지압하면 미열을 가라앉힐수 있다고했는데. 시종들이 목욕물을 데워주는동안 지압이라도 해봐야겠다. 의원의 처방만큼 효과를보지는 못하더라도 안하는것보단 낫길바라며. 유화는 목정 가 삼남에게로 다가섰다.
"잠시 지압을 해도 괜찮겠사옵니까?"
목정가 삼남이 받아들인다면 유화는 그의 머리를 감싸는한편 좌우엄지로는 백회혈을 지그시 누를것이다. 이어 그의 뒤통수부터 뒷덜미까지 손으로 쓸어내리듯이 내려가서는 대추혈을 지압하다가, 그의 쇄골을 따라 자기 양손을 움직여서는 천돌혈을 마사지하기를 거듭 되풀이할것이다. 또한 근육통도 내버려둘수없으니 목과 어깨사이의 뭉친 근육부터 어깨, 위팔, 아래팔도 번갈아 주무를것이다. 더러 제팔이 아프고 힘에 부쳐도 목정 가 삼남의 신열(身熱)이며 진땀에 절은몸이 워낙 즉각적으로 느껴지니 차마 멈출엄두를 못내고 계속하리라. 받아들이지않는다면 목정 가 삼남이 추위를 덜느낄수있도록 화로를 가까이로 옮기거나 그의 어깨에 이불을 걸치는한편 땀을 닦을 마른수건이나 목을 축일 더운물을 건넬것이고 그가 다보지못한 서류는 책상위로 옮겨 정돈해둘것이다.
어쨌거나 목욕물이 준비되었노라고 사용인이 고하러오면 목정 가 삼남이 나가는것까지 마저 도울것이다. 그리고 방이 비는 즉시 젖은이불을 치우고 새이불을 침상에 가져다놓되 이불을 데우기위해 아래에 손난로를 깔아둘것이다. 거기까지 하고나면 그가 목욕을 마치고 나온뒤를 염려하리라. 탕 안팎의 온도차이때문에 자칫했다간 오히려 오한이 심해질지도 모르니. 하여 유화는 그가 최대한 빨리 옷을 입을수있게끔 옷가지를 챙겨서는 욕탕바로앞에서 기다리고자할것이다. 옷가지사이에 손난로를 두어 옷을 데우면서말이다. 한편으로는 목욕을 마친직후 으레 느낄법한 갈증을 고려할것이다. 목정가 삼남이 하도 고열에 시달려 탈수가 우려되는 상황이라 더욱그럴것이다. 그러면 유화는 옷가지를 바구니에 챙겨넣고 뜨끈한 꿀물과 건더기를 걸러낸 배즙은 쟁반에 담아서는 욕탕으로 향하리라. 그는 오늘 제대로 먹질못했으니 단음료로라도 빈속을 채우고 기력을 회복하길바라면서
아프지 않을때도 여기저기 아픈 곳이 산재해있는 몸이니 아플때는 그것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아프면 자연스럽게 몸이 예민해지고 그렇다보니 평소에 아픈 것과 지금 아픈 것은 또 다르게 느껴져 심기가 더욱 불편했다. 그래서 이곳저곳 주무르고 두드리고 있으니 화의 말이 들려왔다. 다른 때였다면 자신의 몸을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했겠지만 땀을 닦아낸다거나 할때 이미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만졌으니 이제 와서 그런 승질을 부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부탁하마. "
그래도 내심 누군가 안마를 해주길 바라고 있던터라 그는 몸에 힘을 풀고 화에게 반쯤 몸을 맡겼다. 머리와 목, 어깨쪽을 같이 풀어주는 그녀의 손길에 아픈 와중에도 만족스러운지 약간의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런 표정인지는 모르는듯 했다. 헌데 누르는 압력이 꽤나 강한 것이 분명 손이 아플텐데 팔까지 주물러주는 것을 보자 그는 됐다고 말하려 했지만 화가 해주는 안마의 편안함 때문인지 손을 들던 것을 멈칫하고선 다시 내려놓았다.
" 다녀오마. "
그렇게 안마를 받고나니 때마침 시종 하나가 문앞에 와 목욕물이 준비되었다고 일렀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그는 화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일어나서 마중나온 시종에게 다가가 시종에게 의지하여 천천히 방을 나갔다. 평소엔 그렇게 멀지 않은 길이건만 오늘만큼은 걷는 속도가 느려서인지 그 복도마저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넓은 탕에 발끝부터 천천히 몸을 담구자 추웠던 몸이 금방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지만 하루종일 탕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 반시진 정도 들어가있던 연은 천천히 나와서 몸을 닦아내고선 새 옷을 입었다. 탕에 들어가있을땐 좋았지만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온도차에 그는 다시 한번 크게 오한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욕탕 앞에 서있는 화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따뜻한 꿀물을 보자 망설임 없이 꿀물이 담긴 잔을 들고서는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
연이 그런 말을 하자 그의 이동을 도와주고 있던 시종이 놀란듯이 그와 화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평소에 이런 말을 해주는 위인이 아닌 것을 알기에 더더욱 놀라운 일이겠지. 하지만 그런 시종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연은 욕탕에 갈때처럼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누운 그는 아까보다 더 따뜻한듯한 이부자리를 느끼고선 화에게 자신과 가까운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아지겠지. 다녀오겠다면서 시종의 부축을 받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맥도 못추고 까무러쳤던때에 비하면야 의식도 똑똑해졌고 의원의 조치대로 따르고도있으니. 그때까지는 힘내자고 졸린몸을 추스르며 방을 정리하고 새이불을 데우려니 손난로가 작아서 여러개를 동원해야하는게 못내아쉽다. 죽부인처럼 안고잘만한 크기의 난로가 있었다면좋았을걸. 그만한 법랑에 숯을 꽉 채워넣으면 표면이 너무뜨거워져서 안만든거려나? 아니면 그만한 법랑을 만들어서 숯을 가득채울만큼 넉넉한경우는 드물어서 못만든거려나? 만약 후자라면 여기 목정 가에서는 만들수있을법도 한데.
그런저런 싱거운생각과 함께 방정리를 마무리하고 이것저것 준비하여 욕탕앞에서 대기하려니 오래지않아 그가 나왔다. 욕탕의 훈기로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이 무색하게도 떨고있는지라 순간 흠칫했으나 그나마 꿀물을 제손으로 들이키기에 한시름놓았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꿀물을 좋아하는구나. 찬음료보다는 따끈한음료를 선호하는것도 같고. 그런생각이 스칠때 불쑥 미안해하는듯도하고 고마워하는듯도 한 어쩐지 수줍게까지느껴지는 한마디가 파고들었다. 그를 부축하던 시종도 놀란눈치다. 일순 멍해졌다가 황급히 챙겨왔던 짐을 한쪽구석에 놓았다. 그러고는 그를 부축하는 시종을 거들며 답했다.
"간병인의 고충이 크다한들 환자의 고통에 비하겠사옵니까. 더욱이 소인은 먼저오신분들을 거들었을뿐이옵니다."
어느정도는 진심, 어느정도는 처세였다. 아파서 제대로 먹지도쉬지도 못하면 오죽이나 괴롭겠는가? 더구나 나으리라는 기약조차 없는 고통이니 매순간순간 피가 마르는 기분이리라. 살아봤자 원수가문의 시녀요 죽었다간 가족이 무슨꼴을 당할지모르는 내 신세는 뭐 그리 대단하냐만 나는 그래도 내한몸은 스스로 가눌수있지 않은가. 그런 안타까움 못지않게 피의 저주에 대한 께름칙함도 짙었다. 나로서는 관여해선 안되는 영역이고 관여할 능력도 내겐 없다. 해주법(解呪法)을 알고있단걸 들켰다간 내가족이 볼모잡힐까 두렵기도하다. 그렇다해도 고통받는이를 모른척하는건 가책이 들지않을수없다, 당사자에게 치하를 들으니 더더욱. 하여 공순한시녀 행세라도해서 복잡한심경을 감추고싶었다.
바람대로 감추어졌을지는 알수없으나 목정 가 삼남의 처소로 돌아와서는 그가 누울때 걸리적거리지않게끔 이불속에 넣어뒀던 손난로부터 정리했다. 죽부인만큼 큰 난로가 없는건 여전히 아쉽지만 도로 침상에 들어간 그는 목욕하기전에 비하면 오한을 덜느끼는듯보였다. 열은 어느정도일지? 이마를 짚어 확인하려는데 그가 쉬거나 교대해도 괜찮단다. 정말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아픔이 조금만 가셔도 이처럼 타인에게 마음쓰려는 사람인가. 딱하고 미안해 짐짓외면하고서 그의 이마만 짚었다. 아직 열감이 남아있다. 유화는 물수건을 적셔 그의 이마에 올려놓은뒤 이불에 빈틈이 생기지않도록 폭폭 눌렀다.
"앞서 아뢰었듯 열이 내리시는걸 확인하면 물러가겠사옵니다. 마저 주무시옵소서. 그러신 연후에 새벽녘에 탕약을 더 드시오면 좀 더 나아지실것이옵니다."
그렇게 말을 맺고서는 바로 자장가를 불러버렸다. 어릴적 어머니께 들으며 잠들었고 자라서는 희에게 부르면서 재웠던 가사와 곡조를 고향에서와 마찬가지로 속삭이듯이.
/봄밤의 한 자락은 천금과도 같을지니/ /꽃 향기 그윽하고 달 그림자 짙어라/ /누각의 밝은 가락 아련히도 잦아드니/ /그네 멈춘 후원은 밤 고요히 깊어라/
저런! 몸은 좀 괜찮아?8ㅁ8 아픈데 출근까지 했으면 더힘들겠는데(눈물) 안그래도 주중현생은 빡센데 겨울치곤 따뜻하던날씨가 갑자기 훅추워져서 무리가 갔나봐X( 답레이어주면 나야 고맙지만 컨디션이 안올라오면 다른거생각말고 몸 나아지는것만 생각해(토닥) 건강이 최우선이야~!!
먼저 오신 분들을 거들었다니, 자신이 일어나고서부터 계속 옆에 있던건 분명 유화이지 다른 이가 아니었기에 연은 의문을 표하려 했다. 허나 뒤늦게 다른 시종도 같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헛기침만 한번 하고서는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탕에서 나와 한기가 도지던 몸은 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그 한기가 조금 가셔서 살만해진 느낌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연은 도로 침상에 누웠다. 목욕을 하는 사이에 침구들을 전부 바꾸었는지 감촉이 상당히 좋은듯 했다. 화의 손이 이마에 올라왔지만 연은 별로 연연하지 않은채 눈을 감고선 어떻게든 잠에 들 려고 하고 있었다.
" 나는 그런걸 들을 정도로 어린아이가 아니다만. "
순간 들려온 화의 자장가에 그는 눈을 살짝 뜨고서 화를 바라보고선 말했다. 자장가라, 그도 어릴적엔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들곤 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르게 무척이나 온화하여 엄하신 아버지에게 혼나고 나면 남매들을 웃는 얼굴로 다독여주시던 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연에게 저주가 옮겨가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였고 결국 연이 저주에 잠식되어 고통에 시달리게되자 매일 같이 와서 돌봐주었다. 하지만 몸이 약했기에 그것이 무리가 되어 지금은 본가 바깥으로 함부로 나오지도 못하는 처지였고 그래서 연 또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 허나 나쁘지 않구나. 너의 고향에서 전해내려오는 것이냐? "
처음 들어보는 음율이었기에 화의 고향에서, 혹은 화의 어머니의 고향에서 전해내려오는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어째서인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을 그는 화에게 물었다. 자장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나빠하는듯한 말과는 달리 분위기는 아까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것이 신선하였기에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어찌 알 도리가 없었으나 평소보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은 확실한듯 했다.
"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고 열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괜한 고집 부리지말고 지금 가서 쉬거라. "
자신은 병자이고 옆에 있으면 분명 옮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건강한 상태라면 굳이 옮길 걱정을 하진 않았겠지만 지금의 화는 그가 보기엔 잠을 제대로 못잤기에 자칫하면 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릴때나 들었고 어린동생에게나 불렀던 자장가를 목정 가 삼남에게 부른건 어째서였을지? 아마도 그 노래를 부르고들을때의 분위기를 기억해서이리라. 하루일과를 모두마쳐서 잠들기만하면 되는 고요한시간. 그러면서도 어린마음에 혼자가 되는거같아 불안하고 안타까운 시간. 그때의 자장가는 혼자가 아니라고 잠들고나서도 곁에서 지켜주리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듣다보면 안심하고 잠들수있었고 그걸 이해할만큼 자란뒤에는 희에게 부르곤했다. 지금 그앞에서 부른것도 과히 다르진않았다. 아픈사람이 마음놓고 푹 잘수있었으면했다. 설마 노래부르다 졸진않을테니 졸음을 쫓기위함이기도했지만
그러나 목정 가 삼남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였나보다. 감았던눈을 살며시뜨고 올려다보는시선에 얼굴이 화끈달아올랐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그시선을 피해 고개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그의 말마따나 아픈사람이라도 어린아이는 아닐진대. 언짢아할만도 한 상황이라 달리 할말이 없었다. 차라리 가만있었더라면 그가 고요함속에서 잠들었을까? 낭패감에 제발치만 내려다보다 뒤따른 말에 멍해졌다. 곧이어 당혹감이나 민망함과는 딴판으로 부드러운감정이 밀려들었다. 언제부터였더라? 자장가를 부르자 어린애 재우는거같다며 희가 새초롬한 반응을 보였던게? 기특함반 허전함반으로 미안하다 사과했더니 듣기싫다는건 아니라며 무릎맡에 다가붙는게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지금 목정 가 삼남의 반응이 딱 그짝이라 저도모르게 웃어버릴뻔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고향의 노래냐는 물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이 함구하든 안하든 목정 가 삼남이 내고향쯤은 얼마든지 알아낼수있는 자임을 안다만 그래도 숨기고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거기있는 가족을 끌고올수도 죽일수도 있는 권력자이므로. 지금이야 별뜻없이 묻는것일테고 아픈와중에도 호의적인태도이다만 첫날만해도 가족을 들먹이질않았던가. 사람마음이란 언제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법이다. 하여 고향이나 가족얘기는 최대한 피하는방향으로 말을 골랐다.
"누가언제 만든 가락인지는 모르옵니다만 노랫말은 옛 문인이 지은 시라 들었사옵니다."
표정이 굳어보이진않을지? 꺼림칙해하는 티가 나지는말아야 할텐데. 정말로 어정쩡하다. 운명을 감당하느라 허덕이는 약한존재이기는 마찬가지임을 알아도 실은 타인을 염려하고 위하려는 온기어린사람이라 느껴도 경계심이 가시진않는다. 호의는 아무때고 거두어질수있으나 이사람이 목정가의 사람임은 변치않으니까. 더욱이 피의 저주와 그 해주법을 생각하면 ... . 암담하다. 이제와 이사람을 원망하고 증오하는건 무리다. 그러나 서로의입지와 상관없이 신뢰하는것또한 불가능하다.
현실이 그런이상 피하는게 상책이련만 마침 목정가 삼남도 다시 권하건만 잠들지못하고 열도 잘 떨어지지않으리라는 체념적인태도에 오기가 솟고말았다.
"차도를 보이시는걸 확인하면 바로 물러가겠사옵니다. 소인이 쉬길바라시오면 속히 쾌차하시옵소서."
순전히 억지였으나 지껄이다보니 그가 나을때까지 밤이고낮이고 버티는게 희망처럼 느껴지기도했다. 원수가문의 일원을 미워하기도 위하기도 불가능한삶. 그렇다고 자진했다간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칠 위험이있다. 하지만 죽으리라곤 상상도 안되게 멀쩡히 일에 전념하다 스러지는 모양새면 가족까지 봉변을당하는일은 없지않을까. 내감정을 이기지못해서든 들켜서 겁박을 당해서든 해주법을 누설해버릴일도 없고. 심지도 신체도 약해빠진 주제에 끝까지 버틸지가 관건이지만 어쩌면 그게 스스로 선택할수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괴로운지 후련한지 모를 결론을 안은채 유화는 목정 가 삼남의 이마에놓았던 물수건을 헹궈서는 다시얹었고 목청도 가다듬었다.
그새 또 변덕이 도져서 조금 수정해서 답레 다시올렸어!(긁적) 아깽이의 츤츤스러운 귀여움에 반응하는 서술이없는게 다시보니 많이 아쉬워서말야X9 그래도 답레내용이 바뀌는게 더 잇기편할거같으면 편히 말해줘~(붕붕) 주말된지 얼마나됐다고 벌써 연휴가 끝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눈물) 아무튼 해피홀리데이야!! 맛난거 먹고 푹쉬어XD
딱히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송구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도 자신의 반응이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것이었다는 깨닫고선 약간 멋쩍은 기분이 들긴했으나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자장가를 들었으나 잠이 쉽사리 오지 않기는 했지만 부드러운 선율이 아픈 몸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자장가에 집중하게 되니 다른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고 보면 될까. 하지만 애가 아니라고 해놓고 다시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으니 한번으로 족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연은 답했다.
" 이곳에도 어린 아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자장가가 하나 있지. "
수도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줄때 가장 먼저 알려주며 불러주는 것이기도 했다. 허나 연은 그것을 들은지도 오래 되었기에 대충의 음만 알고 있을뿐 가사까지 잘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장가를 듣지 않을 나이가 될때부터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니 말이다. 그러다가도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억 난다는 것은 어쩌면 신비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집사라면 알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노년의 집사에게 그것을 불러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 그게 쉽게 되었으면 이리 말하지는 않았겠지. "
아마도 내일까진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있어야할 것이니 말이다. 최대한 아프지 않게 몸 관리를 철저히 하고는 있었지만 병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피해지지는 않는 법. 기온이 바뀌는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오한이 들어 아프기 시작하고 더운 여름엔 더위를 먹어서 아프고 추운 겨울엔 추위에 시달려 1년에 4번은 꼭 아픈 시기가 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삶을 길게 지속하고 있으니 화의 말이 덧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딱히 더 말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여기 있고싶다는데 말리는게 더 이상한 일 같으니 말이다.
" 그리 하고싶다면. "
그러다 화가 계속 부르겠다고 하자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한번쯤은 더 듣고싶었는데 불러준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자존심은 지켜야겠는지 불러도 좋고 안불러도 상관 없다는 스탠스를 취해본다. 이마의 물수건이 바뀌고 조금 식어서 차갑던 수건이 다시금 따뜻해져 이마에 올라온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정성스럽게 간호를 받아본게 꽤 오래된 일인듯 싶었다. 집안의 시종들은 자신과 접촉하는 것을 꽤나 꺼려했으니 말이다.
" 네가 살던 곳이 약초가 유명하다고 했었지. "
분명 지난 밤에 연이 화에게 살던 곳에선 무엇이 유명하냐 물어본 대화의 일부였다. 약초로 그나마 유명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는 잠시 고민하는듯 뜸을 들였다가 화에게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얘기했다.
" 네가 서신을 보내거라. 약초를 구매하고 싶다고 말이다. "
공녀 출신으로 제국에 오게 되면 본디 살던 곳과의 연락은 철저하게 금해지고 있었다. 아직도 제국이 점령한 땅에서는 저항군이 있었기에 공녀들이 그들과 내통하여 수도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녀들 대부분이 유력 가문의 후첩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중요한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은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서 화가 직접 서신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서신이라면 어떤 검열도 피해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제국도 사람사는 세상이라는건지? 누가 그러라지않아도 아이들을 재울때면 으레부르는 노래가 있는모양이다. 목정 가 같은 세도가에도 전해지는모양이고. 그도 어릴적엔 그노래를 들었겠다. 희처럼 때로는 하품하고 눈비벼가며 더 놀고싶다 보채면서도 잘시간을 알리는 자장가에 어느새 누워버린적도 있지않았을까? 이곳의 자장가는 어떨지 좀은 호기심도 일었으나 구태여 그에게 묻진않았다.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던시절이면 저주를 뒤집어쓰기전 남부러울것없던 시절일터. 그시기를 상기시키는게 자칫 현재의 괴로움을 들쑤시게 될까봐서였다. 누구나 알만큼 두루퍼진 노래라면 언젠간 들어볼일도 있겠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하여 침묵을 지키려니 그는 여전히 체념적이다.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반응인지도 모른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니 누구보다 차도가 있기를 바랐을것이나 불치의저주로 번번이 좌절되었을테니. 희망이 깨질때마다 괴로워지느니 차라리 기대를 갖지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대도 인지상정. 해주하지도 못할거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게 오히려 주제넘은짓이리라. 하지만 그럴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덜 고통스러울수있는 수단을 동원해야지않을까. 당장 여기도 그가 햇빛에 화상을 입지않도록 암막을 쳐놓지않았는가. 그거야말로 쉽든말든 그에게 고통을 줄이기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방증일거다. 저주와 달리 감기는 개인차가 있을지언정 낫기는낫는 병이기도하고
일주일. 그동안은 어떻게든 견뎌내자. 좀전처럼 정신놓고 졸지말고 침식(寢食)에 연연하거나 몸을 아끼지도말자. 그가 나아지는것말곤 아무것도없는 사람처럼 미친듯이 버티다보면 어떤식으로든 끝이 날테니. 밤새도록이라도 그의 머리맡을 지킬작정으로 뻑뻑한눈을 꿈벅이던중 눈이 번쩍뜨였다. 무덤덤한가운데 어딘지 새침한말투. 앞서의 자장가가 싫진않았던걸까? 그렇긴해도 티내긴쑥스러웠고? 짐짓 점잔빼는 모습이 정감있게 느껴졌다. 잔뜩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선뜻 다가오지는못하고 경계태세로 지켜보는 고양이같달까?
그에 힘입어 같은노래를 되풀이했다. 별일이 없었다면 그가 잠들도록 계속했을것이다. 원래도 아이가 쿨쿨잘때까지 부르고 또부르는게 자장가이니. 그런데 그가 불쑥 고향얘기를 꺼냈다. 노랫소리가 나오다말고 목에서 꽉 막혔다. 여느산에나 널린것이라 얼버무렸건만 기억하고 있을줄이야. 뭐라 답해야좋을지 궁리해도 띵하고 멍하기만하다. 그도 모자라 더 놀라운말이 이어졌다. 우리마을에서 약초를? 시장만 나가도 갖가지약초를 파는 점포가 숱할텐데. 그것도 연통은 나더러 넣으라니? 공녀에게 그런연락은 금지된것 아니었나? 대관절 무슨생각인지?
이만하면 만류할근거로는 충분하겠지. 더 얘기해봤자 사족이고 긁어부스럼일거다. 허니 입을 다물어야하는데 못내 께름칙했다. 아라가 사람까지 공식적인공물로 바치는 속국이긴하나 제국치하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이들도 적지않다. 그런데도 굳이 나더러 고향과 연통하라는 연유는 무엇인가? 만일 그가 만류를 듣지않아 연통을 넣게되면? 마음같아선 연통이고뭐고 우리가족에게 기별부터 하고싶다. 목정 가나 제국에서 절대 찾지못할곳으로 피해달라고. 허나 그게 도리어 화근이되면? 가만있었다면 몰랐을 우리가족의 거처를 내스스로 알리는격이 되어버리면? 혼란한심정이 구역질처럼 올라왔다.
"더욱이 소인은 아라출신이옵니다. 연통을 넣는척 수도나 이 댁의 사정을 누설하리라는 염려는 아니되시옵니까?"
공녀가 되면 본국과의 연락을 일절 금하는것도 그런사태를 막기위함일진대 이사람은 어째서 이런얘기를 꺼냈는지? 나를 신뢰해서라면 무얼근거로 믿어버리는지? 줄곧 이곳에서 일해왔던 사용인에게도 신경이 곤두서있는 사람이 나를? 실로 대책없는 순진함아닌가. 아무리그래도 그정도로 어리숙할까? 그정도는 아니라면 일종의 함정수사일까? 우리가족은 물론 나아가 아라에 남은 반제국 인사를 잡아내려는?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생각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자 양무릎을 움키며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