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할말이 없었다. 탑을 본뜬 먹거리, 이름이 등불탑빵이랬던가? 빵이라는건 어떤음식인지 잘모르겠다. 과자라기엔 바삭하거나 딱딱하지않고 떡이라기엔 쫄깃하거나 탱탱하지않으니. 아무튼 그 먹거리를 사고말겠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기다리면서도 아주 감질이 났는데 영문모르고 마냥 앉아있으면서는 오죽이나 지루했겠는가. 움직이면서도 오싹하게 추운와중이니 목정 가 삼남이 역정을 내도 하등 이상할것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유를 잔에 채우고 등불탑빵을 하나 더 접시에 얹어도 그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않고 그저 우유만 마셨다. 반가워해야할지 불안해해야할지 헷갈렸다. 평소같으면 저 자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만한 실수를 연거푸 저지르고있는것 같은데 어찌 이리도 잠잠하담?
당사자한테 물을수없을 질문이라 속으로만 곱씹다가 그가 일어서며 하는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상민(常民)이나 우리집안처럼 영락한가문 사람들은 일상에 쫓기다 더러 먹으면서 돌아다니기도 한다만 목정가는 좋든싫든 이 제국에서 어엿한 대갓댁일진대. 그런가문의 장성한 자제가 나다니면서 음식을 먹기도하나? 의외로 행동거지에 소탈한면이 있.. .
'?!'
놀람이 채 가시기도전에 또다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연봉의를 왜 또? 유화야 여태 인파의 틈바구니에 있었던덕에 밤공기를 정통으로 맞지는않았다만 그는 아닌데. 추워도 저가 더 춥고 탈이 나도 저가 더 나겠으며 그랬다간 경을 친다고도 얘기했는데. 하지만 돌려주고자 매듭을 풀던중 또다른 이변에 굳고말았다. 목정가 삼남이 등불탑빵을 한입 먹자마자 남은 하나를 유화에게 내어준것이다. 저에게는 윗전의 심부름으로 아랫사람이 사온 음식인데 나눠먹는다? 이 무슨상황인가? 더구나 연봉의가 답답하다니?? 이건 흡사 ... 희나 부모님께 무언가를 양보하지 않을수없는 상황에 행여라도 걱정을 끼치지않도록 이런저런 핑계를 댔던게 떠올랐다. 물론 목정 가 삼남이 나를 가족으로 볼 이유는 전혀없으니 비슷한구석이라곤 없다. 허나 부모님이 아닌 사람에게서 이런식으로 양보받은적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필이면 하고많은 사람중에 목정가 삼남이?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넋놓은사이 그는 앞서나갔으니 낭패다! 유화는 등불탑빵을 욱여넣고는 늘어놨던 짐을 부랴부랴 챙겼다. 상황이 이러니 무슨맛인지도 모르겠고 빠뜨린거없이 챙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탁상에 잠시 뒀던 돈주머니를 본 순간 비로소 머리가 돌아갔다.
"저, 저! 거스름돈이옵니다!!"
바구니를 팔에 건채로 앞질러가서는 두손에 받들어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시녀인이상 원래도 그를 똑바로쳐다보는게 불경(不敬)인 처지이다만 그걸 떠나서도 지금은 도저히 바로보질못하겠다. 그판국에 등불탑빵의 맛이 늦게나마 입에 선연해지는건 어째서일까? 따뜻하고 달달하고 폭신했다. 무엇보다 사람으로 대접받은 기분이었다. 그 상대가 목정 가 삼남이라는게 허무맹랑하고 그에 감지덕지하는게 미친거같지만 지금으로선 부정하려야 부정할수가 없다. 결국 유화는 돈주머니를 내민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비록 지금은 저택에 자의적으로 유폐된듯한 삶을 살고 있는 연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도 목정 가의 일원, 거기에 가주의 삼남이라는 위치에 있었다. 변해버린 그의 외모는 시민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화제였지만 목정 가문에 그런 사람이 꼭 한명씩 있었다는건 이젠 다들 알고 있는지라 그렇게 개의치는 않는듯 했다. 실제로 그가 등불탑을 보러 모습을 드러냈을때도 몇몇 사람들이 수군대기는 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던것처럼 말이다.
제국 시민들에게 제국 제일의 가문을 묻는다면 백이면 백 황가를 답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가는 가문을 묻는다면 의견은 분분하겠으나 목정(木楨), 양천(凉川), 천야(千野) 가문을 얘기할 것이다. 제국을 건국할때 각각 무기, 수로, 식량을 담당했던 세 가문은 이젠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연에게 청탁을 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물론 대부분 낮에 찾아오기에 연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밤에 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연이 거절하는 일이 많아서 그가 청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하고 싶은 것인지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그에게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주고 가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엔 일절 관심이 없는지라 항상 창고에 먼지가 수북하도록 쌓아두기만 했고 종종 시종들에게 청소하라는 명목으로 너무 비싼 것이 아니라면 조금씩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 네가 갖고 있다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쓰도록 해라. "
거스름돈 뿐만이 아니라 가져온 돈이 남아있었기에 꽤 많은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였지만 연은 화를 흘끗 바라보고선 덤덤히 얘기하고선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다른 시종들은 비록 그의 가문에 소속되어있으나 정기적으로 돈을 받아가고 있었지만 화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집사에게 귀띔으로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녀의 신분으로 제국에 온 그녀에게 대놓고 무언가를 주는 것은 조금 껄끄러웠기에 이렇게라도 챙겨주려는 것이었다.
" 너는 궁금하겠지. 내가 왜 이렇게 너에게 잘 해주는지. "
사실 그에게는 다른 시종들과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 아니, 지금까지의 시종들은 제국의 시민들이고 그 중에서는 하급 귀족들의 자녀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화는 오히려 다른 시종들보다 더욱 밑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신경 써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택에선 다른 시종들과 별 차이 없는 대우를 해주고 있었지만 이렇게 할 수 있을때 조금씩 챙겨주려고 하고 있었다.
" 그건 ... "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길 건너편에서 위병들이 우르르 뛰어와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당연하게도 대비가 되어있지 않던 연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비틀거렸고 근처 벽을 짚어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성을 내지를 준비가 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위병들은 이미 멀찍이 뛰어가고 있었기에 목 끝까지 올라온 그의 고성은 목표를 잃은채 입 안에서 맴돌다가 한숨과 함께 쑥 내려가버렸다.
" 가자. "
아무래도 기분이 갑자기 안좋아진게 분명했다. 냉기가 풀풀 풍기는게 평소 신경질적인 그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듯 했다. 아무래도 그가 하려던 말을 다시 물어보면 분명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이지 요상한 상황이었다. 그가 아무렇지않다는듯 지나쳐가도 어떻다할 반응을 할수가 없었다. 이 돈을 다 준다고? 적은 금액이 아닌데? 유화가 혼란해있거나 말거나 밤바람은 매섭게도 불어댄다. 낭패다. 옷을 껴입어도 모자랄판에 연봉의를 날 줘버렸으니. 궁여지책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종종거렸다. 그렇게라도 가로막으면 목정가 삼남이 조금은 바람을 덜맞을까하여. 짐을 든채로 촐싹거리니 몸은 그럭저럭 더워지는데 귀와 코와 손은 아릿하게 시리다.
그런데 그가 불쑥 엉뚱한말이자 어떤의미로는 유화의 속내를 들여다본것같은 말을 던졌다. 궁금한정도가 아니라 불가사의하다. 시녀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공녀한테 친절을 베풀어봤자 윗전인 목정가자제가 득볼건 없지않은가. 피의 저주에 대해 알아냈다면 또 모르나 그럴리는 만무하다. 만에하나 알아냈다면 이럴시간에 저주를 풀라고 겁박하고도 남았겠지. 그런데도 핑계까지 대가며 연봉의를 넘겨주고 음식을 나눠먹기도하고 돈도 줬다. 대관절 연유가 무엇이란말인가?
들어나보자는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본순간 느닷없이 병사들이 몰려왔다.
"!!"
순식간이었다. 목정 가 삼남이 밀쳐져 휘청인것도 유화가 바구니를 팽개치고 그를 붙든것도. 주위가 식별될만큼 정신이 돌아왔을땐 그를 끌어안다시피 한채 벽에 기댄뒤였다. 상황을 모르고서 보면 목정 가 삼남이 유화를 벽으로 밀어붙인것같은 모양새일것이다. 유화는 질겁하며 옆걸음질을 했다.
"송구하옵니다!"
거리를 벌리고서야 허리를 굽힐수 있었다. 그는 언짢은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사람이 오는지가는지 보지도않고 내빼버린 병사들때문일지 목정 가 삼남의 행차를 알려 병사들의 돌격을 막기는커녕 제대로 부축하지도못한 유화때문일지는 알수없었다. 그리고 어느쪽이든 나동그라진 바구니는 내용물이 엉망진창일게 확실했다. 그가 노기(怒氣)를 폭발시키지않고 짜증스러운 한숨만으로 넘어가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또 터무니없게나마 안심되는 구석이 더 있었다. 목정가 삼남이 앙심을 품고 제 권력을 남용하여 병사들에게 보복하지말란법이 없었는데 이만하게 넘어갔으니. 기세등등한 목정가답지않게 어떤면에선 아랫사람의 과실에 관대하기도 한걸까?
그래도 밤공기보다 더 냉랭한 기색이긴 한지라 유화는 잠자코 내던졌던 바구니나 챙겨들고는 앞서처럼 바람이나 가로막으며 종종거렸다. 그때 문득 시야로 총총한 별과 달이 들어왔다. 햇빛의 탑이 빛을 발할때는 별이 뜬줄도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밤을 밝혀주는건 달과 별이다. 특히나 별은 기분탓인지도 모르나 추운날일수록 빛이 더 형형하다. 그 반짝임이 떨리는것처럼 보이기도해서 어릴적엔 별이 추워하는줄만 알았는데. 언젠가 희는 별이 주위를 따스하게 해주기위해 더 빛나는거라고 주장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나눴던 시절이 떠올라서일까?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왔다.
"등불탑에선 몰랐는데 별이 총총하옵니다. 저리 반짝이는건 추위에 떨어서이올까요? 주위를 따스히하기 위함이올까요?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으올까요?"
주책없이 명랑한어조에 가슴이 뜨끔했다. 목정가 삼남에게 이런 말투라니? 원수집안인걸 떠나서도 윗전으로 대하지않으면 안되는 상대이건만.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상황이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이 화를 바라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때 골목에서 위병들이 삽시간에 튀어나와 달려나갔고 그에 휘말린 연이 휘청이며 넘어지려한 순간 화가 그를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해주었다. 물론 그 관성으로 인해 연과 화는 같이 휘청이다 벽에 기대서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마치 그 모습은 연이 화를 벽으로 밀어붙인 모양이었다. 늦은 밤이라 주변에 행인이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 보았다면 망측하다며 눈을 살짝 가리고서 종종걸음으로 그들을 피해갔을지도 몰랐다.
" 아, "
그리고 연은 갑자기 가까워져버린 화의 얼굴을 보고선 당황한듯 잠깐 허둥대다 금방 벽에서 멀어지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허나 당황도 잠시 곧 이런 상황을 만든 위병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그들은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금세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치안이 좋다곤해도 범죄가 아예 일어나진 않으니까 말이다. 다만 분명 연이 그들과 부딪힐뻔한걸 봤을텐데도 사과 한마디 없이 가는 작태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아주 충분했다.
" 괜찮느냐. "
목정 가의 삼남으로 태어나서 정치를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의 눈치를 볼 일도 그렇게 많지도 않았던 그는 당연하게도 얼굴 표정에 그의 기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잔뜩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고성을 질러대며 잡아오라고 소리를 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는 화에게 괜찮은지 묻고서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위병들의 근무 시간은 정해져있으니 집사에게 말해둔다면 그 시간에 누가 근무를 했는지 단숨에 알 수 있어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런걸 알게 무엇이냐. "
아까였다면 화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줄 연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기분이 안좋아진 그에게 고운 대답을 듣기엔 어려워보였다. 그나마 화에게 성질을 내지 않는 것이 다행일까. 거기에 아랫것답지 않은 말투였기에 분명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그냥 넘어가기로한 모양이었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저택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저 멀리 저택의 시종들이 호롱불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연의 귀가가 늦는 것에 대해서 집사가 보낸 모양이었다.
" 내가 무언가 주었단 말은 하지 말거라. "
아까 먹었던 것이나 돈에 관한 얘기인듯 했다. 아무래도 화가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것은 본가에 즉각적으로 보고가 들어갈테고 그럼 귀찮은 일이 매우 많아질테니 말이다. 시종들은 빠른 걸음으로 연에게 다가와서 상태를 물었고 그는 상처가 난 손을 보여주며 시종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선 그대로 그 사이로 섞여들었다.
당황스러웠을터이다. 불쾌했을터이다. 길가다 난데없이 떠밀린것도 시녀가 달라붙어버린것도. 허둥지둥않고 잘 붙들었더라면 혹은 흔한 대갓집행차처럼 물렀거라 소리라도 치고다녔더라면 이꼴은 안됐을텐데. 허리 숙인채로 때늦은후회를 거듭하는데 믿기지않는 물음이 떨어졌다. 괜찮냐니? 이판국에 아랫사람의 상태부터 확인하는건가? 병사들이고 유화고 무엄하다며 있는대로 짜증을 부리는게 아니라?
"네? 아, 예... . 도..련님은.. ?"
혼란을 애써 누르며 살펴보니 목정 가 삼남의 손에 생채기가 났다. 그렇잖아도 추위로 얼어 벌건손에 핏물까지 비쳐 보기에도 아리다. 허겁지겁 그손을 붙들고 상처를 살폈다. 이물질이 섞여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번 말끔히 씻어낼수있으면 좋으련만 물은 없고, 찻물이라도 쓰고프나 바구니가 엎어진꼴로 보아 그것도 무리이지싶다. 아쉬운대로 손수건으로나마 상처를 훔쳤다. 최대한 통증이 덜하라고 조심하긴했으나 다친데가 건들리니 자극이 안갈수는 없으리라. 돌아가는 동안 찬바람이나 이물질이 들어가면 곤란한데. 손수건을 한번 턴뒤 비교적 말끔한부분으로 상처를 싸맸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돌아가시는대로 제대로 조치받으시옵소서."
그러고나서 땅에 널브러진 바구니의 덮개를 슬쩍 열었더니 당연히 차며 먹거리는 물론 여분손난로의 숯까지 다 엎어졌다. 불이라도 붙으면 더 낭패라 숯은 죄다 버린뒤 즈려밟아 불씨를 껐다. 그정도 난리통을 부렸으면 이제라도 얌전히 구는편이 나았으련만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불러일으킨 추억은 쓸데없는 소리를 새어나오게 했다. 아니나다를까 퉁명스러운 대꾸. 당연하다. 오히려 윗전을 다치게한 판국에 무슨 헛소리냐고 윽박지르지 않는게 괴이하다면 괴이하다. 아랫사람을 막 대하는데 익숙한 목정가 도련님 아니겠는가. 현실이 의식되자 좀은 정신이 드는것도 같다.
하여 입다물고 불어닥치는 바람이나 막아보려고 이리저리 옮겨가며 나아갔다. 그렇게 저택에 가까워가노라니 멀찍이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온게 보였다. 호롱불에 목정(木楨)이라는 글자가 장식된걸로 보아 저택의 시종들 같다. 아마도 주인을 마중나온거겠지. 이 추운날 한참을 돌아다닌것도 모자라 목정가 삼남에게 상처까지 입혔으니 곱게는 넘어가기는 힘들듯하다. 한숨이 나오려는걸 꾹 삼켰다. 매질? 감금해 굶기기? 내쫓기? 셋중에선 내쫓는게 제일 낫겠다. 아니 내쫓는건 아라의 가족들에게까지 해코지하지만 않는다면 사실상 선물이다. 쓸모가 없어서이든 말든 자유가 되는것아닌가.
겁먹지말자고 마음을 거듭 다잡을때 뜻밖에도 함구령(緘口令)이 떨어졌다.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의미자체는 이해할만했다. 편애받는것처럼 비치면 구설수도 생기고 이래저래 곤란해진다는 거겠지. 다만 불가해한것은 목정 가 삼남이 그런부분을 의식했다는 점이다. 이런사안이 불거질때 난감해지는건 아랫사람이지 윗사람이 아닌데도. 아랫것이기에 겪지않을수없는 알력을 다 염려해줄만큼 세심하고 사려깊은 성품이었나? 이 자가 걸핏하면 저택전체가 싸늘해지도록 신경질을 부려대던 목정 가 삼남이 맞나? 의심스러우면서도 뒤숭숭하던 마음은 한결 누그러들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질않아 고개만 끄덕였지만.
그렇게 형언할수없는 기분에 휩싸인채 유화는 시종들에게 에워싸여 돌아가는 목정가 삼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와우~~ 연이가 그정도로 마음을 열게되면 어떤모습을 보일지 벌써 기대된다!!(헤벌쭉) 인간관계는 한쪽만 잘한다고 나아지는게 아니다보니 유화가 아직은 뻣뻣한편인게 괜찮은지도 궁금하네:d(착석)
저런~ 무려 귀족살인 사건이야?!(덜덜) 가볍게 놀러나가느라 수행원을 안데려갔을까 아니면 수행원까지 여럿 죽었을까 후자면 진짜 대형사건인데..o.O?! 강도살인일지 독립을 도모하는 속국사람들의 무장테러일지 모르겠네! 어느쪽이건 사람 오는지가는지도 모르고 출동할만은 하다(버엉) 그래도 추궁은 하는구나~ 사정 모르는거 아니고 연이도 알고보면 말랑한 귀족님이니 질책만 하는 정도겠지?
지금이랑 별 차이 없을 것 같긴한데 ... ㅋㅋㅋ 유화도 지금은 뻣뻣하지만 나중엔 말랑말랑해질거라 기대하고 있어! 근데 느낌이 나~중엔 연이가 잡혀살것 같기도 하네 ... (먼산)
수행원이 한명뿐이라 손쓸틈도 없이 죽이고 도망간거래~ 범인은 언제 잡힐지 모르고 ... 제국은 지금 한창 황금기라서 독립은 요원한 일이지 :3 나~중에 망국의 길에 들어서면 그때는 하나 같이 독립할지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거에 화가 나는거니까 질책만 하고 사과 받으면 뒤끝없이 넘어갈꺼야
겉의 태도는 별로 차이 없을 것 같은데 성질을 안낸다던가 은근 가까이 다가간다던가 하는 차이는 분명 생길꺼야! 후후 유화가 말랑해진 모습은 어떨지 너무 기대되는걸!!! 연이는 지금까지 자기한테 브레이크 걸어주던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분명 유화의 브레이크가 정말 잘 먹힐것! 거기에 좋아하던 사람도 없으니 화에게 다른 감정을 품는다면 분명 더 약해질거라구~
범인은 생각보다 금방 잡힐테니 이유는 어떻게든 밝혀지지 않을까? 사실 제국의 확장은 현재 시점에선 꽤 이전의 이야기라서 지금 시민들한텐 뭔가 억울한 일이기도 하겠지? 연이한텐 그렇게 혼나진 않겠지~ 그냥 경고만 주고 말테니까.
역시 연이 앓아눕는구나.. . 에긍 역시 너무 무리했어(눈물) 낮시간에 푹잤어야하는데 연이가 워낙 숙면을 못취해서 더 심해진건 아닌가 모르겠네...(먼눈) 아니면 아예 낮시간에 잠도 못잘만큼 앓는걸까?(오싹) 아무튼 유화랑 나갔다가 그렇게된거니 뒷감당도 유화가 해야 맞을거같아~☆ 노집사님이나 다른 사용인들한테 유화가 제법 혼났을거 같기도 하다:3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간, 제국의 수도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굉장히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미 주요 도시엔 철도가 깔려있기에 다른 도시에서 수도로 오거나 반대로 향하는 등의 사람들이 겹쳐 수도의 주거 인원보다 배는 많은 인원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이것이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한 제국의 수도라는 것을 면밀히 보여주는듯 했다. 하지만 그런 활기찬 분위기와는 반대로 인기척이 거의 없이 조용한 곳이 하나 있었는데 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목정 가문의 별채였다. 소수의 경비병만이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는 저택은 마치 거주하고 있는 인원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 쿨럭쿨럭 '
그렇게 고요한 저택의 가장 안쪽, 햇빛도 하나 들지않는 곳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창문은 존재하였지만 일부러 막아둔듯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은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서 내부를 밝히고 있었는데, 그곳에선 하얀 머리의 사내가 연신 기침을 해대며 누워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이자 목정 가문의 삼남, 목정 연은 힘겹게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하기위해 시선을 돌렸다. 평소라면 신시(申時)에나 눈을 떠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렸을 그는 자신이 미시(未時)에 눈을 떴다는 것을 깨달았다. 햇빛이 지기 전까진 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 그가 이런 시간에 일어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 ... 이럴것 같더라니만. "
온 몸에 열감이 가득한데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목도 다 쉬어버려 말도 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주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연은 오한 때문에 조금씩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고선 방에 달려있는 줄을 당겼다. 이 줄은 그들의 시종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있는 종을 울릴때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주로 그가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 시간에 그 종이 울리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다 시종들도 잠을 자고 있는 시간인지라 제대로 들을 사람이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 거기 아무도 없느냐 ... "
분명 누군가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소리쳐 불러보려고 했으나 이미 쉬어버린 목에서 제대로된 말소리가 나올리 만무했다. 그의 외침은 잔뜩 쉬어버려 모기의 날갯짓처럼 작아진채 입 밖으로 나왔고 당연하게도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평소처럼 해가 질때까지 기다려야하나 싶었다.
햇빛의 탑과 달리 자연스러운 따스함과 빛을 내리쬐는 진짜 태양이 쨍쨍한 낮, 유화는 전날밤 목정 가 삼남에게서 받은 돈주머니와 바지저고리를 챙겨서는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시장으로 향했다. 제 물건을 사봤자 다른 사용인들이 못보던 물건인데 어떻게 구했냐고 의심하면 난감했고, 도주할때를 대비해 두고픈 마음도 없지는않았으나 그랬다간 가족에게 화가 미치면 끝장이라 어림없었으며, 오롯이 집에 보낼수있으면 적지않게 도움이 되련마는 그럴수도 없으니, 목정가 삼남의 옷가지나 살 요량이었다. 그의 돈이니 그에게 쓰는게 알맞아 보였거니와 옷방에 수두룩빽빽한게 옷이니 한벌쯤 는다고 티나지야 않을성싶어서. 제국의 수도니 시장이 여럿 있을줄은 알았지만 놀라웠던건 그 시장이 모두 매일매일 장사를 한다는것이었다. 산아래 큰마을에서도 5일에 한번만 장이 열려서 날을 잘 기억하고있어야 했던 고향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목정 가 삼남의 바지저고리는 뭐가 달라도 다른것일지? 거기 쓴것과 똑같은 피륙값만 해도 있는돈을 몽땅 털어야할 판이었으니 침선가(針線家)에게 옷을 지어달라 청하기는 무리였다. 하릴없이 피륙이나 끊어 돌아왔으나 이걸로 옷을 지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한시가 아까운 낮시간을 쪼개는수밖에 없으니 돌아오는길이 터덜터덜 무겁기 한량없었다. 잠이라도 얼른 자고싶었다.
하여 그의 옷가지를 옷방에 돌려놓으려 서두르는데 목정 가 삼남의 방에서 무슨기척이 난듯했다. 해도 아직 쨍쨍한데 잘못 들었나? 하지만 지나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해 창을 확인했다. 행여라도 햇빛이 새어들어가기라도 했나 싶어서였다. 창은 암막으로 밀봉한것마냥 새까맸으나 수상쩍은 기척은 한층 또렷해졌다. 기침이 섞이고 쉬어터졌지만 분명 아랫사람을 부르는 소리다. 유화는 다급히 문을 열고들어갔다.
"찾아계시었사옵니까?"
허리숙여 인사하자마자 깜짝놀랐다. 호롱불로 어둑한 가운데에도 목정가 삼남의 파리한얼굴과 하얀머리칼은 진땀투성이였고 핏물이 흰자위까지 번지기라도 한것처럼 충혈된눈은 그렁그렁했다. 와들와들 떨리는몸도 주체가 안되는것 같은데 기침까지 숨이 넘어갈듯이 하니 실로 참혹한 몰골이었다. 일단 바로눕히기라도 해야겠다고 그를 부축하려는데 몸이 말그대로 불덩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추워하는건 옷이 땀에 절은탓일까. 이 정도면 탈수도 염려된다. 급한김에 들고있던 피륙을 그의 저고리 안에 밀어넣었다. 밖에서 거진식어 온기가 미미한 손난로도 같이.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주시옵소서. 물부터 가져오겠사옵니다."
그러고 뛰쳐나가서는 의원을 불러달라고 도련님이 편찮으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움직였다. 단잠을 깨우는건 딱한노릇이나 지금 적절히 조치하지못했다간 사달이 날게 뻔했으므로. 그러면서 부랴부랴 더운물이 가득담긴 주전자와 마른수건을 챙기고 양동이에 미지근한 물을 채워서는 그의 방으로 달음질하자마자 더운물부터 잔에 가득따라서는 그에게 내밀었다. 따끈한물이 기침으로 상한 목도 조금은 가라앉혀주길 바라며.
"일단 드시옵소서. 탈수가 오면 큰일이옵니다."
목정가 삼남이 물을 충분히 마신다면 유화는 그가 열이 내리고 오한을 덜느낄만한 방도를 총동원하리라. 우선은 젖은옷 대신 처음 방에 들어오고서 엉겁결에 팽개쳤던 바지저고리로 갈아입도록 돕는한편 맨몸의 땀은 마른수건으로 닦을것이다. 다음으로는 축축한 베개와 이부자리를 치우고 털담요와 손난로를 가져와서는 그를 바로눕히고서 덮어줄것이다. 그뒤에는 양동이의 미지근한 물로 수건을 적셔서는 담요밖으로 노출된 그의 얼굴을 닦길 반복할것이다.
다행히도 깨어있는 사람이 있었는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연의 몰골은 평소와 너무 다르게 잔뜩 흐트러진채였겠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도의 몸상태는 절대 아니었기에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러 온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라에서 온 공녀이자 그의 저택에서 시종으로 일하고 있는 화였다. 특별히 아버지가 힘을 써서 자신의 담당으로 넣어준 공녀의 얼굴을 본 그는 손을 살짝 뻗으며 말했다.
" 용케도 들었구나 ... "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말할 기운조차 없어서 어떻게든 기력을 쥐어짜내어 간신히 입 밖으로 목소리만 흘려낸 연은 결국 누워있던 침상에 쓰러지듯 다시 누웠다. 그의 모습을 본 화가 의원을 부르라고 소리치며 이것저것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의식할 수준은 아니었기에 몽롱해진 정신으로 그는 화가 해주는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몇몇은 의원을 부르러 달려나갔고 몇몇은 화를 도와서 연의 몸을 일으켜 몸을 닦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는 자신의 얼굴을 따뜻한 물로 닦아주는 화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의원이 와서 그의 상태를 진찰하고 있을때였다. 목정 가문에 소속되어 가문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원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 되었고 믿음직한 노년의 의원이 저택에 와서 연의 증상을 확인하고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어제 외출이 무리했던 것이 아니냐며 증상이 심하니 약을 꾸준히 먹이라는 말과 함께 의원은 떠났다. 말할 힘도 없어서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던 연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옅게 눈을 뜨며 말했다.
"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
남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지킬 여력이 없었다. 수면을 방해하는 저주는 그것에 맞춰서 그의 몸상태를 약화 시키는데 한몫하고 있었고 조금만 무리해도 크게 탈이 나는 몸을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내색을 안하기 위해서 예민한 모습을 보여주고 화를 내었던 것인데 그것마저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옅게 지으며 말했다.
" 이 또한 업보겠지. 동시에 내가 짊어지기로한 책임이겠지만. "
이렇게 아픈 것이 한두번이 아니긴 했지만 이럴때마다 익숙해지긴 힘들었다. 아픈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되는 일이 아닐까. 그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자 상체를 몇번 들썩이더니 바닥을 짚고선 간신히 침상에 앉을 수 있었다. 현기증이 올라왔지만 잠깐 앉아있으면 없어질테니 그는 서류 뭉치를 가르키며 말했다.
" 이렇게 누워있을 시간이 없다 ... 저것들을 좀 가져오거라. "
분명 무리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을텐데 일을 밀리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듯했다.
우와~ 이걸 이렇게 받아줬구나!(야광봉) 다른 시녀찬스 만세다! 쉽지않았을텐데 내가 미처 생각못했던 부분까지 자연스럽게 채워줘서 고마워~☆(꾸벅) 하나 궁금한게 답레에서 자다깨고 초과근무한 시녀들이 유화한테 곱지않은 반응 보였다고해도 될까?(갸웃) 안그래도 낮밤바뀐 생활에 까탈스러운 상전 모시느라 피곤한데 휴식시간도 빼앗기고 그렇게 앓아누운것도 유화랑 나가서고 더욱이 유화가 시녀들보다도 급이 낮은 공녀라 곱게보기 어려울수 있을거 같아서(먼눈)
그랬구나! 연이 어머니와 닮았다면 연이한테 어필할수있는 요소가 하나 더 있는거네:3~ 이렇게 유화는 날먹에 성공하고.. .(아님)
무슨 정신이었는지. 다른시녀들이 와주지않았다면 상황수습을 못했을것이다. 열이 더 오르지않도록 몸을 식힐 조치를 해야하지만 푹 젖은 몸과 옷을 내버려뒀다간 오한이 더 심해질터였으므로. 완전히 기진해 늘어져버린 저보다도 체격이 큰 목정 가 삼남을 혼자 어찌할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반작용도 따를수밖에 없었으니 그렇잖아도 고단한몸을 제대로 쉬이지도못한 시녀들의 눈치는 경황없는 와중에도 곱지를않았다. 특히나 지난밤 바깥바람을 지나치게 쐰 탓이라고 의원이 진단했을때는 방안이 고요했는데도 욕이 들린것만 같았다. 제국의 자유민이 아니라 속국에서 물건처럼 바쳐진 공녀라 안그래도 얕보던차일진데 이 사달까지 냈으니. 아니나 다를까 의원이 약처방을 지시한뒤 자리를 뜨자 시녀들은 너나할것없이 유화에게 눈을 흘기고는 나갔다. 그순간 분명히 느껴진건 목정가 삼남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우리가 아니라 너라는 그러니 역정을 듣든 불벼락을 맞든 니가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한숨이 나왔으나 어쩌겠는가. 저가 햇빛의 탑을 보자고 하는바람에 이지경이 된것이 맞지않은가. 그나마 닿자마자 섬뜩해지던 고열과 사시나무 떨리듯하던 오한은 가라앉아가니 천만다행이다. 의원이 처방도 해주었으니 이제 고비는 넘어갔겠지. 그런데도 왜이리 가슴이 아린지? 파리한 낯빛이며 고통에 겨운듯 찌푸려진 미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없이 닫힌 눈, 그리고 핏기라곤 없는 입술까지, 어디로보나 너무도 무방비해서일까? 당장 이자리에서 목을 조르거나 베개로 숨을 막아버려도 저항 한번 못할것 같아서?
바라보기도 조마조마해 목정 가 삼남의 얼굴을 가리듯 물수건으로 닦는데 그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흠칫 손을 떼고보니 바로 감길듯 가느다란 실눈이지만 눈을 떴다. 뒤이어 소리보다 숨결에 가깝게 들리는 한탄. 그내용으로 보아 혼자인줄 착각한듯했다. 아랫사람이 있다 여겼다면 체통때문에라도 제행동이 추태란 소릴 구태여 입밖에 내진않았을테니. 혼잣말이 아니었음을 알게되면 싫어할까봐 자리에 없는척 숨죽이려니 충격적인 한탄이 이어졌다. 업보? 저자가 그런걸 의식하는 자였던가? 제선조가 멸문시킨 가문은 한둘이 아니란 소리도 낯빛하나 안바꾸고 하더니? 게다가 책임지기로 했다는건 또 무슨소리인가? 목정가 중 한사람에게만 돌고돈다는 저주를 저 스스로 떠안기라도 했단 의미인지? 어지러웠다. 혼자인줄 알고 하는소리면 저게 그 누구도 의식하지않은 본심이란 의미아닌가. 실은 목정 가의 만행을 인정하고 그 대가도 치르고자 하고있는건지? 모르겠다. 모를일이다. 물수건을 쥔 손이 미적지근한 물로 흥건하다.
그때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뻔했다. 목정 가 삼남이 몸을 움직인 탓이다. 제대로 가누어지지않아 흐느적거리는걸 빤히 보면서도 어쩐지 말릴엄두도 부축할엄두도 안 났다. 그가 기어이 일어나앉아서는 지시를 내리는데도 상황파악을 얼른 못하고 버벅거렸다. 내가 있는걸 알고있었나? 업보 운운하던 소린 나 들으란거고? 순간 유 가의 해주법에 대해 듣기라도 했나 의심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처럼 회유라기도 애매한 언급들은 번거로움에 비해 성공 가능성이 없다시피하다.
제 생각에 빠져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있다가 탁상의 서류뭉치를 돌아본끝에야 경악했다. 저몸으로 지금 어쩌겠다는건지?! 아뜩하고도 답답하여 그자리에 꿇어앉았다.
"미루지않고 일을 처결하는것도 중할것이오나 그보다는 실수없이 일을 처결하는것이 더욱 중할것이옵니다. 아직 미령하시어 집무를 시작하시기는 무리가 있사오니 오늘은 한숨 돌리시는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쓸데없는 참견임은 안다. 호되게 앓는 원인을 제공했으니 시녀주제에 웬잔말이냐고 분풀이를 할지도 모른다. 허나 유화는 꿇은무릎위로 두손을 포갠채 고집스레 목정 가 삼남을 바라보았다. 한식경전만 해도 당장 숨이 넘어갈것처럼 위태롭던 사람이 일부터 잡는데도 내버려둘수는 없었기에. 하여 혼잣말일지 아닐지 모를 소리에 대한 대꾸까지 보태어 늘어놓았다.
"아플때 약해지는것은 사람이라면 인지상정이오니 그것을 가리켜 추하다하는것은 온당치못하다 사료되옵니다. 하오니 스스로를 용납하기 어려우시더라도 일을 미루는게 께름칙하시더라도 눈앞의 일보다 존ㅊ.. 도련님의 안위를 돌보심이 더 중하다 생각해주시옵소서."
존체라는 말이 어울리지않는다던 자조적인 말이 떠올라 얼른 수정하면서 다시금 묘해졌다. 스스로의 안위를 돌보는게 중하단 소리가 저주에 침식될대로 침식된 이 사람에게 과연 어떤의미로 여겨질지? 의문이 또렷해질수록 착잡함도 짙어져갔고 목정가를 경멸해야할지 그를 안쓰러워해야할지 버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