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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겠다고 당시에는 그렇게 말했지만, 잊고 있던 것들이 있었다. 인첨공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은 둘째치더라도 저 밖에서 자신의 편지를 손꼽아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가족들을 혜성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딸이, 동생이 인첨공에서 노력하고 있는 줄 알고 있을텐데 그 당사자는 너무나 쉽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일에 선뜻 찾아가겠다 이야기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부실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나서야 혜성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무겁고,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이해하기도 전에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이 쏟아진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답을 내려보면 스스로에게 경멸하고 만다. 다 털어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털어내지 못한 건 자신 뿐일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혜성은 쉽게 부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 올려놓은 자신의 완장을 바라보며 눈물이 난 탓에 따끔거리는 눈가를 차가워진 자신의 손등으로 눌러내고 있던 혜성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하는 건 당연했다. 사람이 빠져나간 부실에 남은 거라곤, 눈에 익은 후배와 자신 뿐이었으니까.
바깥보다 과학 기술이 20년가량 발전했다는 인천 첨단 공업단지에 대한 소문은 누구나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인첨공에 발 들이는 순간 그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길가에 널린 호버 택시다. 바퀴 없이 일정 거리의 공중에 뜬 택시는 일반 사륜 차보다 빠르고, 승차감도 좋으며, 친환경적이고, 2학구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탄탄한 인공지능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시켰다. 그야말로 이동 수단의 혁명이었다. 때로는 인공지능을 믿지 못하는 불안감에 직접 운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호버 택시의 인공지능을 애용했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디에서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때때로 증거를 인멸하는 좋은 변명거리가 되기도 한다. 호버 택시를 탄다는 말은 일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야는 호버 택시를 타지 않았다. 스트레인지는 호버 택시의 안전 규정상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외곽의 스트레인지는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엇나가기 시작했는지 담배를 입에 물고 독한 연기에 눈물을 찍 흘리는 스킬아웃 학생, 그저 이런 불량한 분위기가 좋다느니 어서 도망가자느니 쑥덕거리는 괴짜들, 고철 안드로이드에서 쓸만한 부품을 뒤적거리는 갈 곳 없는 부랑자……. 희야는 그 틈새에 능숙하게 섞였다. 지나치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도 자신을 잠깐 보긴 했지만 금세 잊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개조한 생체이식 칩의 안면인식 저해 기능 덕분이다. 아무리 강렬한 인상을 가진 희야라고 해도, 재머가 켜진 이상 사람들이 알아볼 수는 없었다. 안면을 덮는 홀로그램과 함께 희야는 어지간한 스트레인지 사람들도 향하지 않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밤이라 걱정이라도 한 건지, 마지막 양심이 남은 누군가 거기로 들어갔다간 인첨공 내부에서 어디 아픈 사람의 일부가 되어 흩어질 거라 말했지만 희야는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알아요."
골목을 지날 때면 습격하려는 멍청이들이 있으나 희야가 손에 쥔 것을 보일 적이면 제각기 놀란 눈을 하며 길을 텄다. 개중에는 동경의 시선을 비추는 자도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빠져나가고, 으슥하다 못해 스트레인지 내부에서도 인적이 끊긴 곳에는 높다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이곳은 한때 스트레인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이 생긴 이후 주변은 자연스럽게 몰락하게 되었고, 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점점 낙후 되어가는 계열에 가세하더니, 결국 스트레인지의 일부에 삼켜지고 말았다. 먼지가 쌓인 폴리스라인은 끊겨있지만 이곳의 흉흉한 소문으로 인해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 세월이 지나 각종 자연 현상으로 인해 낡아 끊어졌을 것이다. 진작 사람의 발길이 끊겨버린 폐건물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당장 뭔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희야는 이 익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암부 '그림자'를 만난 이후에도 이 장소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렇지만 제법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계단을 내려갈 적 발에 이따금씩 채이던 쥐의 시체는 이미 다른 쥐가 뜯어먹은 지 오래고, 벌레는 자신이 얼려버린 탓에 이젠 없다. 미처 치우지 못한 흰색 테이프는 사람이 쓰러진 흔적을 그대로 본땄지만, 이건 치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복도를 지날 적이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소리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이야기를 나누고, 희망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끝내 복도의 끝에 도달할 적이면 이 거대한 문을 열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덥석 잡은 문은 여전히 경첩에 기름칠을 하지 못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고, 여는 것도 꽤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드로이드를 이곳에서 얼어붙게 만들었던 탓인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싸늘한 한기가 볼을 감쌌다. 희야는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전경을 훑었다.
"선객이 있었네."
먼지가 쌓였지만 여전히 이곳만큼은 웅장하다. 거미줄이 켜켜이 쌓였지만 신소재로 된 둥그렇고 우아한 기둥과 대리석으로 되었지만 먼지가 굴러다니는 바닥, 홀로그램의 기동이 멈춰 캄캄하고 이곳저곳 금이 갔지만 인공 태양이 뜰 적이면 이 장소에서 화려하게 비산하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높다란 계단과 그 위에 놓인 제단, 그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까지. 계단 밑에는 목과 팔다리가 부자연스럽게 뒤틀린 안드로이드가 여전히 얼음 속에 갇혀있고, 그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남성이 고개를 돌려 이젠 희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왜 여기에 있어."
희야의 협소한 인간관계 중 안티스킬에 속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강력 범죄를 수사하는 남성 대원이다. 나이는 젊은 편에 속하나 모종의 사건에서 지대한 공을 세워 특수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작은 팀의 반장으로 승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제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고 있다. 그렇지만 희야는 저 남자가 누군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늘 선글라스를 끼고, 장갑을 손에 끼고 있기 때문이다. 표정을 와락 구긴 것이 어두운 공간에서도 떼놓지 않는 선글라스 너머로도 눈에 확실히 담겼다.
"그쪽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여자는 어디 갔지?"
희야는 그를 향해 걸어가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늘 희야를 향해 따뜻한 말을 하는 여성 하나를 곁에 두고 다녔다. 파트너라고는 했지만 두 사람은 영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하나의 아이로 두고 얘기하는 모습에 그저 두고 볼 뿐이었던 여자가 없으니 어딘가 어색하다. 희야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는지 남성은 희야가 스쳐 지나가 계단을 오르자 뒤를 따르며 답했다.
"……4학구 치안 유지 때문에 잠시 파견 나갔는데, 그것보다 너 진짜 여기에 왜 있는지 말해."
희야는 계단에 온전히 오를 때까지 답을 하지 않았다. 이내 제단 가장자리에 능숙하게 걸터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무릎이 올라선 쪽으로 팔꿈치를 괴고, 이내 손에 턱을 괸 희야의 자세는 아래를 시시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희야가 있겠다는데 뭐가 문제죠?" "폴리스 라인이 있으면 들어가지 말라는 거 몰라?" "끊겼잖아. 그쪽은 왜 여기 있는데?"
희야는 위에서 주변을 훑었다. 계단 아래의 전경이 확실하게 눈에 담긴다. 만일 제단에서 내려와 계단에서 몸을 기울이면 대략 5m 남짓한 아래에서 얼어붙은 저 안드로이드 꼴이 날 수도 있겠다. 희야는 주변을 모조리 훑은 뒤에야 시선을 돌려 남성을 쳐다봤다. 어둡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것 같은 원반 같은 눈동자를 마주한 남성은 불쾌감을 느꼈는지 선글라스 너머로 시선을 피했다.
"……이곳에서 신호가 잡혀서." "아, 그런가요?"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 "희야가 신경 쓸 일이에요? 아, 그래. 어디 있냐 물어볼까?" "알려줄 리가 없지." "왜, 희야를 안 믿어서?" "기밀이라서. 새끼야."
희야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어련하시겠어,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남성은 희야에게 비키라는 듯 손을 내젓더니, 이내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희야는 남성이 앉기가 무섭게 눈을 흘겼다.
"신성모독이다." "네가 앉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당연히 나는 문제가 없지요." "그래서 왜 왔는데."
아마 남성은 자신이 대답할 때까지 절대 이 제단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을 심산인 것 같다. 이런 찰거머리 같은 녀석이 뒤를 밟았으니까 다 조졌지. 희야는 질린다는 듯한 형식적인 반응을 보내고는 이 장소가 깨끗해지면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울지 가늠하는 듯한 남성에게 툭 던졌다.
"어이, 죽을 각오라고 알긴 하나?"
같은 저지먼트 동료 중 나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간에게 보였던 시건방진 말투였다. 남성은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금세 미간을 좁혔다. 저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마침 이곳에서 둘의 유치한 말다툼을 막아줄 여성도 없었다.
"갑자기?" "대답이나 하시지." "맹랑하긴, 우리 같은 안티스킬이야 늘 있는 일인데, 왜." "그러면 죽여본 적 있어?" "사살이라면…… 그래. 있지. 그건 또 왜." "종용한 적은?" "뭐? 없지." "죽어본 적은?" "없지, 왜, 갑자기 또 그 지랄이야? 이 맹랑한 애새끼야." "난 있어." "뭐라는 ㄱ- 에취!"
희야는 허리를 펴더니 괴던 팔을 뗐다. 이내 꼬았던 다리를 펴며 팔을 뒤로 기대고는, 체중을 실었다. 몸은 천천히 뒤로 기울더니, 이내 팔은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제단 위에 풀썩 눕게 됐다. 갑작스럽게 먼지가 피어오르자 남성은 고개를 돌려 재채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남성을 배려하지 않고 희야는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누가 죽음이니 뭐니 얘기할 때면 흥미부터 생기더라고. 저 인간들이 과연 죽음의 가치를 알까? 뭐, 아니까 얘기하겠다마는 동조하는 것들은 어떨까? 바깥 것들은?"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어이, 애새끼."
먼지가 묻은 것 같은 코 끝을 손등으로 훔치던 남성은 허리를 굽히더니 손으로 제단 끝을 부여잡아 몸을 지탱한 채 희야를 내려다봤다.
"그런 건 네가 더 이상 신경 쓸 게 아니잖냐." "이제 보니 얼굴 반반하다? 몇 살이야?" "개지랄 떨지 마라. 맹랑한 애새끼." "하하하-! 맹랑하다고 해줘서 이것 참, 고마운걸."
희야가 깔깔 웃자 남성은 표정을 다시금 와락 구겼다. 이래서 이 녀석을 대하는 게 싫었다. 이런 사람을 대할 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남을 아무렇지 않게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매체에서 본다면 감탄밖에 나오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다르다. 그 사람들은 대다수 자신이 무엇인지 명확히 고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이 맹랑한 고등학교 3학년이 무엇을 따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직감은 말을 해주고 있지만 확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 남성은 미간에 새긴 주름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너, 그거 네 말투 아닌 거 다 알아, 이 새끼야." "……어떻게 알았지?" "그야 내가 아는 맹랑한 애새끼는 말이다, 늘 희야는요~ 뭐 했는데요, 아~ 뭐였더라, 뭔가 아무튼 했지 뭔가요? 어라~? 같은 얄밉다 못해 주둥아리 손바닥으로 후려치고 싶은 말투를 쓰는데. 너, 지금 누굴 따라 하는 거냐."
가성까지 섞어가며 자신을 어색하게 따라 하는 모습에 희야는 눈을 반쯤 감았다. 지루하다는 듯,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표정 센서를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표정을 습득하는 과정처럼 얼굴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남성은 사람 같지 않은 눈동자와 함께 저런 표정을 짓자 돋기 시작하는 소름을 지우기 위해 무진 애썼다.
"흉내 내는 인위적인 인격을 알아서 무엇에 쓰려고?" "글쎄다. 적어도 지금 상황은 막겠지, 소름 돋으니까 하지 마라." "막지 마. 방어기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말 좀 들어보란 소리지. 나 미쳐버릴 것 같아. 이미 미친 새끼긴 한데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 나 미치겠다니까." "설명을 해라, 애새끼야." "아- 새끼, 아가리 존나 더럽네." "뭐?"
희야는 푸르스름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남성은 희야의 인간답지 않은 손에 시선을 둬야 할지, 아니면 덮어가린 얼굴 너머의 눈을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다 이내 손에 시선을 두기로 했다. 적어도 눈보다는 불쾌감이 덜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한다면 익숙한 곳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요? 그런데 불청객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평안을 방해하는 녀석이." "무슨 일인데." "대답해 줄까 보냐." "아, 지금 여기서 데 마레로 데려가달라고? 사정까지 낱낱이 설명하고?" "나 레벨 3이에요." "어쩌라고, 다시 그때처럼 제압해 줘?" "에어버스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던 새끼가." "적어도 너는 제압했지." "하아. 어쩌다 저딴 새끼에게 잡혀서 내 찬란하던 인생을 조졌대요?"
희야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남성은 저 반응이 인위적임을 알고 있지만 달리 말을 얹지 않았다.
"첫째, 샹그릴라를 만든 녀석들이, 그러니까, 암부가 나에 대해 알고 있어요." "뭐?" "너는 아가리 가볍지 않은 놈이니까 나랑 기밀을 공유해 줘야 해." "갑자기? 이 애새끼가. 확 퍼뜨린다?" "그러면 에어버스터가 터뜨린다."
저지먼트는 아이들 집단 아냐? 학생들에게 암부가 왜? 그렇지만 이 맹랑한 꼬맹이는 좀 다른 세상을 살았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남성은 일단 현재 상황에 대해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튼 뭐, 암부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시위 막고 여기에 동조할 자격이 없지 않냐고." "그 저격 사건 말이냐?" "응, 암부 짓이죠. 하, 뭐, 이해는 가요."
희야는 메마른 웃음을 뱉었다.
"하하, 뭐 그럴 법도 하지. 내 말 한마디에 다들 호버로 들이받고, 그 난동을 부리고 그랬는걸……. 그쪽과 퍼스트클래스에게 제압되기 전까지 말이야. 그런 수라장이 벌어졌는데 범죄자 녀석들이 나를 모르겠어요? 아는 게 당연하지. 그렇지만 말이죠, 신경 안 쓴단 말이에요. 어차피 알려지든 말든 난 더 이상 책임이 없어. 무죄잖아." "무죄가 방패는 아니지만 말이다." "닥치고 내 말 끝까지 들어요." "이 애새끼를 진짜 확." "여기까진 괜찮아…… 시위든 뭐든 다 괜찮아. 내가 무슨 짓을 했든지 이제 난 저지먼트고, 무죄고, 아무튼 그렇다고…… 그런데 갑자기 데 마레에 애새끼가 생겼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지먼트 중에 하나가 나한테 애새끼들을 맡기고 갔다고. 차일드 에러를……. 그리고 난데없이 다들 죽음을 각오해야 한대잖냐, 죽음을……."
희야의 목소리가 긁히는 것 같이 갈라졌다. "인간들이… 인간들이 이상해졌어……." 작은 짐승이 앓는 듯한 목소리에 남성은 금세 연관성을 찾을 수 있었다. 맹랑한 꼬맹이는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안다. 그리고 남성도 알고 있다. 어째서 이 꼬맹이가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지도 안다. 남성은 침묵을 지키다 무거운 입술을 뗐다.
"야." "…뭐." "……그거 트라우마 증세 같은데, 소장님께 말씀 안 드렸냐?"
남성 또한 저런 반응을 보인 적이 많다. 안티스킬 대원으로서 처음 사살을 경험했을 때, 그리고 이 맹랑한 애새끼를 제압한 이후로도 줄곧 이런 반응을 겪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희야는 달랐다. 희야는 푸르스름한 손가락 틈새로 빼끔 시선을 내비쳤다. 홉뜬 눈동자는 창백한 달을 그대로 담은 것 같기도 하고, 태양을 온전히 담은 것 같기도 했다. 남성은 피조물을 관망하는 듯한 제3의 존재가 내비치는 시선을 애써 마주했다.
"아니, 이건 그저 시련일 뿐이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희야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표정을 바꿨다. 명령을 입력 받은 안드로이드처럼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은은하다 못해 명화 속에 나오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빼닮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음, 희야가 방금 그렇게 프로그래밍 했다고 하면 믿어줄래요?" "……데 마레로 간다." "어라-? 이러면 안 되는데. 어어, 이거 납치야, 이거 납치야-" "개소리 마라, 애새끼." "아, 진짜 싫어요! 집에 보내줘요!" "집이 데 마레 아니냐?" "희야 사는 곳 따로 있거든요?! 누굴 연구실에서 숙식 해결하는 생물학과 대학원생으로 알아!!" "어디 사는데." "알려줄까 보냐!" "그럼 진짜 데 마레로 간다." "아! 아!! 3학구! 3학구!"
남성은 결국 희야가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메더니, 그대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게 또 재밌다는 듯 깔깔 웃는 소리가 예배당을 울렸다. 경첩 바르지 않은 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등지고 닫혔다.
"코피 흘린 건 다친 것도 아니예요~ 뼈 하나는 부러져야 어디 가서 다쳤다고 할 수 있죠. 오히려 싸게 먹혀서 좋았지. 코피 한 번 흘리고 세 명의 생명을 구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두동강 내버리고 싶은 녀석들이지만요."
사실 저번에 세 무리의 수장격으로 보이는 녀석이 손가락으로 빔을 쏘기 직전에 염동력으로 손을 하늘이 아니고, 옆의 동료로 향하게 만들까 말까 고민을 했던 한양이었다.
"EMP가 있다면 좋죠. 녀석들이 쓰는 이상한 핸드폰도 방해할 수 있고. 근데 어떻게 넣는 건가요? 저는 EMP 하면 미사일 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 테이저건 개념의 emp인가."
EMP가 전자기기를 무력화시키는 것임은 알지만 자세하게 알지는 못 했다. 애초에 한양은 군사지식에 능통하지도 않고, 그 세부분야도 CQC, 개인화기, 시가전 전술만 잘 알고 있을 뿐이었다. CQC야.. 한양의 비능력 분야 중에서 제일 관련이 깊으니깐..
"그렇다면 믿을게요. 그렇게 각오하니깐 믿어야지."
이어서 정하는 그 동안의 속풀이를 하려고 하는 듯, 다른 질문을 꺼내려고 했다. 역시 예상대로 생각이 복잡한 건 맞긴 맞구나..라고 생각했다.
"네. 말해봐요."
한양은 타이핑을 하던 문서를 저장해서 끄고, 정하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부담감이요?"
그러니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본인이 충분히 그 값을 해야 된다는 압박감.. 과연 본인이 이런 힘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라는 속뜻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거 저는 과거형이 아니예요. 지금도 느끼고 있어요. 부부장이 되어서 느끼기 시작했죠. 작년까지는 그런 거 안 느꼈어. 사실 레벨보다는 직책에서 오는 부담감이 더 컸죠. 내가 어버버대면 애들 다 뒤진다, 잘못 판단하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스트레스가 없다면 거짓말이죠."
레벨도 레벨인데.. 그 이전에 부부장이었다. 직책에서 오는 책임감. 책임감으로 인해 어깨는 늘 무겁기 마련이었다. 없던 책임감도 만들어줄 정도니깐. 본인 역시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책임감이 생길 줄은 몰랐었다.
정하는 저번 시위에서 쓰러질 때..사실은 아무것도 안 해서 안심했고, 그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꼈다고 했다.
"정하양이 왜 안심을 느꼈는지 아세요? 그것도 상황이 다 잘 풀리니깐 안심을 느낀 거예요. 그거는 가진 힘이랑 상관이 없다고 봐요. 아, 그래. 잘 풀려도, 나는 잉여인간인가..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 근데 정하양이 느낀 감정, 그거 역겹고 이상한 거 절대 아니예요."
"내가 쓰러졌어도 그랬을 거야. 내가 쓰러져도 애들이 알아서 잘해줬구나. 안심된다. 그러니깐 거기에 역겹다는 둥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어요. 애초에 정하양이 그렇게 느낀 건데 뭘 어쩌라고. 그런 생각이 들거나 느껴지면, 그러면 그런거지..거기서 더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이어서 말을 이어갔다.
"잘하고 있으니깐 걱정하지 마세요. 정하양이 한 것이 없었던 건 저번 시위 때만 그랬으니깐요. 게다가 정하양이 그때 무력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요.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어떻게 항상 활약하고 다녀. 그런 걸로 따지면 우리 도움 없이도 은우가 항상 쓸어버리고 다녀야지. 안 그래요?
그리고 저지먼트 생활 길어요. 앞으로 많은 싸움도 있을 거구요. 그때 더 잘하세요. 3년이라는 관점으로 길게 보면 정하양이 그때 막 쓰러지고 기절한 거..그거 정말 새발의 피 수준도 안 되는 흠일 뿐이니깐요. 또 사람이 커리어에 흠이 없을 리가 없으니깐."
희야는 당신의 마니또였기 때문에 연락처에 적힌 레벨과 다르다는 점도, 그리고 현재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이제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물론 물어보지 않는 이상 끝까지 꼭꼭 숨길 생각이지마는. 흥청망청 쓰겠다는 점은 진심인지 이것저것 휙휙 주문해버리곤, 희야는 이어지는 주문에 당신을 흘긋 바라보더니 눈을 휘었다. 이 후배, 마음에 든다.
"자리 부탁할게요!"
희야는 당신이 자리를 찾는다 하자 잠시 고개를 돌려 걷는 방향을 쳐다본다. 그리고 계산을 끝마치려 했다.
"그러니까... 블루베리 치즈 케이크, 로투스 카라멜 크로플에 아이스크림 추가, 오레오 프라페, 과일 크로플에 요거트 아이스크림 추가, 메론소다 큰 사이즈, 생크림 롤케이크 한 조각 맞으시죠?" "네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카드 앞쪽에 대주세요."
희야는 소매 너머로 가느다란 손목을 드러내더니 카드 리더기에 댔다. 삑, 소리와 함께 결제가 완료되자 점장은 한 마디 뱉는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뇨." "준비되면 불러드릴게요."
벨은 따로 없나? 아, 칩 알림 서비스를 제공하는구나. 희야는 팔랑팔랑 당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히 웃었다. 저 멀리서 음료 준비를 위해 블렌더를 꺼내는 소리가 들려오고, 볕 잘 드는 자리를 찾은 당신을 보며 소매로 가려진 팔을 쫙 폈다.
"자리 너-무 멋져! 여로는 자리도 멋진 곳을 찾는구나-! 맞다, 우리 수상한 메뉴가 나오면 사진으로 증거부터 남겨요!"
"코피 흘린 건 다친 것도 아니예요~ 뼈 하나는 부러져야 어디 가서 다쳤다고 할 수 있죠. 오히려 싸게 먹혀서 좋았지. 코피 한 번 흘리고 세 명의 생명을 구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두동강 내버리고 싶은 녀석들이지만요."
사실 저번에 세 무리의 수장격으로 보이는 녀석이 손가락으로 빔을 쏘기 직전에 염동력으로 손을 하늘이 아니고, 옆의 동료로 향하게 만들까 말까 고민을 했던 한양이었다.
"EMP가 있다면 좋죠. 녀석들이 쓰는 이상한 핸드폰도 방해할 수 있고. 근데 어떻게 넣는 건가요? 저는 EMP 하면 미사일 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 테이저건 개념의 emp인가."
EMP가 전자기기를 무력화시키는 것임은 알지만 자세하게 알지는 못 했다. 애초에 한양은 군사지식에 능통하지도 않고, 그 세부분야도 CQC, 개인화기, 시가전 전술만 잘 알고 있을 뿐이었다. CQC야.. 한양의 비능력 분야 중에서 제일 관련이 깊으니깐..
"그렇다면 믿을게요. 그렇게 각오하니깐 믿어야지."
이어서 정하는 그 동안의 속풀이를 하려고 하는 듯, 다른 질문을 꺼내려고 했다. 역시 예상대로 생각이 복잡한 건 맞긴 맞구나..라고 생각했다.
"네. 말해봐요."
한양은 타이핑을 하던 문서를 저장해서 끄고, 정하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부담감이요?"
그러니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본인이 충분히 그 값을 해야 된다는 압박감.. 과연 본인이 이런 힘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라는 속뜻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거 저는 과거형이 아니예요. 지금도 느끼고 있어요. 부부장이 되어서 느끼기 시작했죠. 작년까지는 그런 거 안 느꼈어. 사실 레벨보다는 직책에서 오는 부담감이 더 컸죠. 내가 어버버대면 애들 다 뒤진다, 잘못 판단하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스트레스가 없다면 거짓말이죠."
레벨도 레벨인데.. 그 이전에 부부장이었다. 직책에서 오는 책임감. 책임감으로 인해 어깨는 늘 무겁기 마련이었다. 없던 책임감도 만들어줄 정도니깐. 본인 역시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책임감이 생길 줄은 몰랐었다.
정하는 저번 시위에서 쓰러질 때..사실은 아무것도 안 해서 안심했고, 그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꼈다고 했다.
"정하양이 왜 안심을 느꼈는지 아세요? 그것도 상황이 다 잘 풀리니깐 안심을 느낀 거예요. 그거는 가진 힘이랑 상관이 없다고 봐요. 아, 그래. 잘 풀려도, 나는 잉여인간인가..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 근데 정하양이 느낀 감정, 그거 역겹고 이상한 거 절대 아니예요."
"내가 쓰러졌어도 그랬을 거야. 내가 쓰러져도 애들이 알아서 잘해줬구나. 안심된다. 그러니깐 거기에 역겹다는 둥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어요. 애초에 정하양이 그렇게 느낀 건데 뭘 어쩌라고. 그런 생각이 들거나 느껴지면, 그러면 그런거지..거기서 더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리고 나는 오히려 정하양 기특하게 느껴져요. 무력화됨에도 안심했다는 건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어서 말을 이어갔다.
"잘하고 있으니깐 걱정하지 마세요. 정하양이 한 것이 없었던 건 저번 시위 때만 그랬으니깐요. 게다가 정하양이 그때 무력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요.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어떻게 항상 활약하고 다녀. 그런 걸로 따지면 우리 도움 없이도 은우가 항상 쓸어버리고 다녀야지. 안 그래요?
그리고 저지먼트 생활 길어요. 앞으로 많은 싸움도 있을 거구요. 그때 더 잘하세요. 3년이라는 관점으로 길게 보면 정하양이 그때 막 쓰러지고 기절한 거..그거 정말 새발의 피 수준도 안 되는 흠일 뿐이니깐요. 또 사람이 커리어에 흠이 없을 리가 없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