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린이 둔탱이, 바보, 멍청이, 이 세 단어를 말하거나 독백한다면 완벽하게 둔감한 남자주인공과 츤데레 히로인의 정석을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뻔히 보이는 행동은 마츠시타 린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맑게 웃는 그 앞에서 마냥 좋다고 따라 웃는 것도 그녀의 심보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좋아한다고, 아니 좋아하는 것 같다거나 호감이 좀 있다하여 상대를 봐주는 그런 후한 타입이 되기엔 좀 많은 길을 걸어왔다.
바구니를 들어 조심스럽게 제 앞의 책상위에 올려두고 린은 가만히 앉아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앞길을 제가 주도적으로 가로막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스스로 택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더해서 마츠시타 린, 하야시시타 나시네는 그 출신부터가 기업가 집안의 영애이고 집안이 무너진 이후에도 오랜 세월을 이해타산을 따지며 살아왔다. 원하는 것은 이루어내야 하고 받아낼 것은 악착같이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 그녀였다.
그러니 그런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처음부터 당신에게 줄 것을 생각하고 왔는데, 당신은 얼떨결에 생각이 나서 그러신 건가요?" 뺨에 손을 얹고 그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눈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한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려 눈을 슬며시 내리깔고 처연하게 슬픈 듯한 눈을 연출한다.
"저는 우리가 그 정도로 내외하는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 그녀가 고백할 수 없다면 그가 자신을 신경쓰게 하면된다. 애초에 자신의 담화 스킬부터가 좋아함을 표현하지 말라였으니, 그리고 그가 제게 이런 골칫덩이같은 감정을 안겨주었으니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응당 그 업보를 치르게 하는게 수지에 맞았다.
자신이 입은 장비들의 내구도를 확인한 빈센트는 참혹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찬찬히 접었다. 왠지 이 상황에서 식인귀랑 마주쳤다가는.... 식인귀가 톡 치기만 해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이 다 찢어져서 잘 끝나도 거지꼴, 참혹하게 끝나면 "남들은 다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데 혼자서 팬티만 입고 날뛰는 미친 고인물룩의 빨간머리 빈센트" 꼬라지가 날 것이 뻔했으니. 더욱 끔찍한 것은, 고인물룩 마법사는 차라리 강하기라도 하지 빈센트는...
"...이건 괜찮을런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그 참혹한 내구도가 빈센트에게 아무데서나 주워온 츄리닝 차림을 강요했다. 이건 그렇게 외견상으로나 성능상으로나 좋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빈센트가 받아놨던 것들처럼 갑자기 파괴된다고 그렇게 슬플 건 아니었다. 빈센트는 그걸 입고 잠깐 머리 좀 식힐 겸 나돌아다니다가 누군가와 마주친다.
빈센트는 강산이 갖춰입은 장비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동료는 완전무장...까지는 아니어도 어디 가서 객사는 면할 수준의 장비를 갖춰 놨는데, 빈센트는 장비 내구도가 그게 뭔가. 어떻게든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마치 남 일을 애기하는 것처럼 최대한 유쾌해보이게 제 상황을 설명했다.
"장비 내구도 때문에 야단이 나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건 좋은데 장비가... 돌이켜보니 장비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수리할 방법을 알아보고 있던 차입니다." //3
...강산은 그 곳에 주둔해 있던 가디언의 호의로 장비 하나를 무료로 수리받을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 한다. 자신의 친구에게까지 상대가 그런 호의를 베풀어줄 것을 기대하긴 좀 그렇긴 했다. 마침 그 장비가 그 가디언의 모교와 연관된 장비이기도 했고.
그러니 그 대신....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빈센트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형님 이것 수리비에 보태 쓰십시오."
[주강산 님이 150,000GP를 송금하셨습니다.]
"원래 형님이 못 돌아오시면 대타로 오실 분에게 드리려던 돈인데...어쨌든 형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게 어딥니까."
강산은 인터넷 뱅킹으로 돈을 입금하고는 바보처럼 웃는다. 이러려고 우주해적 토끼들의 아지트를 헤집어 벌어놓은 돈이라, 이 정도는 아쉬울 것 없었다.
빈센트주는 15만 GP가 꽂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뜬다. 15만GP? 절대 작은 돈이 아니다. 특히 지금 같이 거지꼴 일보직전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빌려준다는 말도 없이 주는 돈이 뭔가 꺼림칙했지만, 그래서 당장 대안이 있느냐?하면 절대 아니오였기에 빈센트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정확히 십오 만 GP다.
"...하."
빈센트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감사를 표한다. 돌이켜보면 빈센트의 인생에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었던가?
"정말... 감사합니다. 강산 씨. 솔직한 말로 요즘은... 강산 씨가 제가 여태껏 만난 모든 이들 중에 제일 친절한 것 같습니다. 정말로요."
"이러려고 벌어놓은 돈이기도 하고요. 결국 제가 형님을 제주도까지 데려와서 의뢰와 별개로 게이트에 휘말리는 고생을 하게 되신 건데,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진 제가 챙겨야죠. 저희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만만찮기도 하잖습니까. 각자의 이익만을 챙길 때가 아닙니다. 협력이 필요할 땐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해요."
당장 파티의 장비가 부실하면 빈센트가 죽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적과의 대결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다른 파티원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상대가 전우이기 때문에 쾌척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다...라고 강산은 생각해본다. ...그것도 있지만 친구를 또 잃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몸이 회복되시면 장비 수리를 바로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나 몬스터, 혹은 빌런이 나올지 모르는 세상 아닙니까. 그나마 신 한국 본토는 홍왕 전하께서 계시니 낫지만 아무래도 여긴 섬이고...상황이 상황이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돈을 챙기더라도 반푼이라고 한 마디 얹던지, 아니면 그냥 그건 네 잘못이라고 선을 그었을 겁니다. 사실 그래도 할 말이 없는 건 제 쪽이고요."
장비 관리는... 그래. 기본이다. 자기 장비도 못 챙기는 정신머리로 동료 목숨은 어떻게 챙기냐고 질문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 이타심이 성직자 수준을 넘어 너무 극단적으로 가버린 나머지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남만 보이는 미친 놈이라면 모르겠지만, 빈센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이타심'을 논하기에는 좀 부족함이 심각하게 많은 인간이었으니까.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은 데에 쓸 것임을 다짐한다.
"약속하겠습니다. 이 돈은... 절대 강산 씨가 이야기한 목적 이외에 다른 거로 쓰일 일이 없을 겁니다. 어차피 그거 아니면 당장 쓸 일도..."
철퍽!
"..."
빈센트의 얼굴에 귤이 날아왔다. 딱히 데미지는 없었지만... 눈에 귤즙이 들어가서 눈이 시렸다. 대체 뭔 놈이 이랬나 살펴보니...
"잠 좀 자자! 이놈들아!"
귤나무 나무껍질에 무슨 할아버지 얼굴 같은 게 있었는데,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가지를 털어 귤을 던지고 있었다.
빈센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빈센트는 그 이상한 게이트를 돌면서 어쩌면 자신과 엮인 운명적인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탓에 자기가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게이트를 빠져나올 때가 되자, 빈센트는 그 운명이 어찌 됐건 어쨌든 빈센트가 사는 세계의 논리대로라면, 빈센트는 어쩌다가 빨려들어가서 어쩌다가 탈출하거나 죽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편히 쉬십쇼."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강산과 함께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좀 걷자마자 픽 웃는다.
"아무래도 이성적인 사람과 계속 함께 있어서 그런 걸까요?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먼저 공격을 받았는데도... 저 나무를 태워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냥 사과하고 갈 길 가고 말아야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