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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 시간이 가까워지는 교내에서 마지막으로 부실에 들렀다 가려고 하던 중이었다. 지금쯤이면 서류 작업을 하는 부원도 다 돌아가 빈 부실이겠거니 하고 문을 딱 연 순간, 작은 등 하나가 보였다. 정확히는 엎드린 등이었다.
등의 주인은 검푸른 머리카락을 옆으로 늘어뜨리고 늘어진 듯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다가가보니 아 역시,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많이 바빴나? 하지만 요즘 바쁜 일은 없었던 걸로 기억했다. 그 순간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에 깨는 줄 알았으나 얼핏 드러난 눈가가 찡그려지는 걸 보고 혹시 악몽을 꾸는 걸까 했다.
직접 깨울까? 하지만 너무 오지랖 같은데. 딱 그렇게 고민한 순간 앓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에 손을 올려 흔들었다. 일어나라고, 곧 문 잠길 시간이라고, 그렇게 깨우자 찡그린 눈이 찡그린 채로 뜨였다. 눈 뜬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건 어깨에 올린 손을 쳐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길 대로 잠긴, 혹은 장시간 혹사시킨 듯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너는..."
사나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한 손으로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동시에 잠깐 드러난 얼굴은 평소의 창백함을 넘어 거의 잿빛이었다.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음에도 눈 밑은 새까맸고, 눈빛도 입술도 생기를 잃어 있었다. 저런 얼굴로 앓을 정도의 꿈을 꾼 것일까. 조심히 물어보자 돌아오는 건 날 선 대꾸 뿐이었다.
"어쩌라고. X 같은 오지랖 적당히 부려. 니가 알아서 뭘 할 수 있다고."
완전한 거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갑다 못 해 짓누르는 듯한 대응에 굳어있으니 그녀 만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부실을 나갔다. 걸음소리라고 하기에도 뭣한, 실내화의 밑창 끌리는 소리가 질질 울려 부실에서 복도로 이어졌다. 소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무렵, 한숨을 쉬고 본래 용건을 위해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복도 저 멀리에선 질질 끄는 발소리 대신 질척하게 토해내는 소리와 더는 서 있지도 못 해 주저앉는 작은 등 하나가 있었다.
“드··· 드럼이요?” “네, 드럼요. 밴드 하면 뒤에서 치는 그거요. 칼리 스틱을 다루는 데 중요한 스냅의 감각을 익히는 데도 좋고, 손발의 협응성도 길러주고, 근지구력 단련에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거든요. 다양한 방향에 대응하는 동체시력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요. 근지구력을 중점적으로 단련한다고 했잖아요? 몸이 팔을 오래 휘두르는 데에도 또 익숙해져야 하는데 줄넘기만 갖곤 한계가 있으니까.”
때아닌 전자드럼이 성운의 눈앞에 놓였다.
“···그, 그렇지만 이렇게 갑자기 하라고 하셔도.” “그야 당연히 쉬운 기초부터 시작하는 거죠. 자, 무엇부터 시작하면 되는지 잘 보세요. 기초 비트로 박자쪼개기부터 해봅시다. 지금부터 제가 들려주는 박자를 잘 기억해보세요.”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아, 이거 얼마 전에 한번 해봤던 게임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박자다, 하고 성운은 떠올렸다. 게임을 그렇게 즐겨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마침 초봄 할인행사로 할인폭이 꽤 커서 시험삼아 구매해본 게임 중에 로그라이크 FPS 게임이 있었는데, bgm의 박자에 맞춰 발사 및 재장전을 해야 하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그 게임에서 기관총을 얻어 사용해본 적이 있는데 딱 이 박자였다.
성운은, 오늘은 칼리스틱 대신 드럼스틱을 쥐고 하는 트레이닝에 성실히 임하기로 했다. 드럼이라, 박자에 맞춰서 소리를 내는 것, 꽤 괜찮은 경험일지도.
딱히 대가를 바라지 않은 듯한 선물, 리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분명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지만. 정말 아무런 대가도 돌려주지 않는다는 게 가능할까, 내가 뭔가를 해줄 때 그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준다면 그걸로 되는 것인가. 아니면 영영, 리라가 대가를 원할 때까지 이건 대가 없는 베풂이라고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 뿐인가. 그런 고민은 잠시 미뤄둔다, 어차피 고민이 길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많은 걸 생각하기엔 귀찮고, 뭔가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힘써 해결하고 싶지 않다.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럴까."
이제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도는 알 것이다. 어느새 소파에 푹 기대 앉은 리라의 모습을 보며 자리로 돌아온 랑이 소파 옆 탁자에 뚜껑 열린 비스킷 상자와 캔 밀크티를 내려놓았다.
"...그럴 줄 알았어, 어차피 다시 돌아오게 돼 있다고 내가 말했잖아."
리라의 헛소리(?)를 들으며 그 때 했던 반응을 떠올리곤 넌지시 덧붙인다. 적응이 빠른건지, 아니면 그런 척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분위기 자체는 꽤 부드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