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에 불을 붙이니 머잖아 연기가 입에서 새어 나온다. 희뿌연 연기는 냄새만 맡아도 독하다. 학창 시절부터 상념을 가라앉히고자 독한 것만 골라 피웠기 때문이다. 긴 일직선의 연기를 내뱉을 적, 무언가 닿는 감각에 그는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익숙한 온기와 향이 느껴진다. 그는 달리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어떤 향을 품고 있는지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끝없는 열망과 삶을 잇고자 하는 의지를 품게 만들며, 무한한 영감을 주는 존재.
"마노."
당신이다. 그는 고개를 든다. 당신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눈이 부시다. "나도 보고 싶었단다, 아가." 비어있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이제 제법 되었다 자부할 수 있으나, 당신의 눈물은 여전히 그칠 기미가 없기 때문이다. 불 붙여 줄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평소의 흐름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는 입에 문 담배를 까딱였다. 당신이 어떤 말을 할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떤 말로 자신을 놀라게 할까?
"응?"
그는 잠시 잘못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정확히는 당신이 그 말을 뱉을 줄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어지는 얘기에서야 그는 온전한 뜻을 알아챌 수 있었고, 결국 마른 웃음을 한 번 뱉어내고야 만다. 세상에, 당신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그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으로 당신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려 했다.
"하하, 오랜만에 듣는 얘기군."
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던 당신이 떠오른 탓이다. 그 당시에는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담배 한 번, 사탕 한 번으로 넘어가리라 믿었던 만남은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는 어딘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가, 그렇지만 담배 덕분에 우리가 만났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싫을까?"
그도 간만에 입에 댄 것이었으니 나름의 고집이겠다. 끔찍하게 짓던 예전보다는 그나마 나아진 미소가 얼굴에 감돈다.
아가,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호칭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앞에 붙여 찬미한다 해도 결국 그 끝은 두 글자로 귀결됐다. 아마 그가 늙어 죽는 날에도 이 두 글자의 단어는 입에서 떨어지지 않겠지! 눈물을 닦아주던 그는 엄지로 부드럽게 눈물을 훔치고,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을 보듯 당신을 눈에 담았다.
"그렇군, 할미와 칼 교수가 그랬단 말이지?"
할미는 그럴만한 사람이니 그렇다 치지만, 아무래도 칼 교수는 그를 순전히 놀려먹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학생 때 뻔뻔하게 굴었던 것이 기점이었나? 어느 순간부터인지 두 사람은 보기만 해도 서로의 속을 신나게 긁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이가 됐다. 속 시꺼먼 둘에게 딱 맞는 관계라지만 라이벌이나 앙숙과는 조금 달랐다. ……비슷한 결의 남편을 둔 사람들의 내적 친밀감이 시꺼먼 속내와 잘 어우런 탓이다.
"그래, 나쁘지."
그는 입에 문 담배를 느릿하게 까딱이며 동의하듯 특유의 딱딱한 발음을 뱉었다. 나쁘지,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끌어내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나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그는 비어있는 한 손으로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능숙히 끼우더니 고개를 돌렸다. 짙은 연기를 일직선으로 뱉는 것이 익숙하다.
"……놀랍군."
놀라운 일이다. 그는 담배를 쥐지 않고 뺨을 쓰다듬던 손을 떼어, 당신의 손을 가볍게 그러쥐려 들었다. 깍지를 끼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뺨에 느릿하게 당신의 손등을 비비려 들었다.
"이런 발칙한 말은 어디에서 배웠나?"
토라진 모습까지 완벽하지! 그의 눈이 심히 좋다는 듯 휘었다. 아름답다. 그야말로 걸작이다. 조금 더 건드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치솟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끝이 천천히 타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서 까딱였다.
"그렇다면 아가, 지금 어떻게 해야 내가 이 불 붙인 애물단지를 손에서 떼어낼 수 있다 보는가? 방법이 있을 텐데."
무엇을 할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던 탓인지, 그는 당신이 무슨 행동을 해도 얌전히 따라주었다. 당신의 행동은 늘 예상을 벗어났고, 오차에서 오는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은 오만불손한 그도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소리다. 그 사실을 상기할 적이면 이따금 그동안 있던 일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제 이전처럼 불쾌하거나 답답한 기색은 없었다. 그는 당신을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다 이내 천천히 담배 낀 손을 들어 미간을 짚었다.
"……하."
여전히 당신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손가락 끝을 깨물기가 무섭게 그의 능글맞던 미소에 금이 갔다. 덮어낸 미간 사이로 독한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어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인내심을 천천히 긁어 내리기 시작한다. 그저 심술 한 번 부려볼까 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이 등골을 오싹하게 휘감는다. 그는 다시금 속으로 생각했다. 미치겠다. 오로지 당신만이 그를 이렇게 뒤집을 수 있다.
"아가."
그는 미간에서 손을 뗀다. 간만의 휴식이자 달콤한 위안이 지금은 손가락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비집고 차지한 불청객 같았다. 결국 그는 담배를 비벼 끄지도 못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리듯 던질 수밖에 없었다. 불이 날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보호 마법 덕분에 재 그을린 자국만 남을 테지.
"저깟 담배 따위가 너를 이길 것 같은가?"
자유로운 손으로 당신의 뺨을 쓸어주려 하며 눈을 마주했다. 그의 두 눈이 당신의 눈물의 궤적을 따라 구르다가도,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호박빛 눈동자로 온전히 이동한다. 미치겠다 벌써 세 번째 생각이지만. 담배에 포함된 타르가 이젠 생각에 치덕치덕 발려선 끓는 것 같다.
" 늘 나를 놀라게 만들고, 감탄하게 만들어."
귀하게 아끼다 못해 꽁꽁 숨기고 싶을 만큼. 혀 밑으로 숨긴 말을 뒤로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예정에 없던 반려동물이 생긴 이후. 늦잠 자는 날 없어졌다. 아침마다 보송보송한 털뭉치가 얼굴을 쓸어대니 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삐! 삐이!
"이잉... 이... 털뭉탱이가..."
퍼프스캔- 이라는 이 녀석. 늘 자기 전에 먹이며 물이며 그릇 가득 채워두건만. 그것들 남았음에도 꼭 아침에 저를 깨우려 난리친다. 일어나서 놀아달라 이거다. 얼굴 피하면 목과 어깨 사이를 파고들거나 옆구리 후비고 다니니 견딜 수가 없다. 결국 저 밤톨 만한 것 이기지 못 하고 비실비실 일어나 장난감으로 놀아주는 것이 근래 아침 일과였다.
"졸려 죽것는디... 이이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침대에 걸터앉아 일향에게 부탁하여 받은 장난감 여럿 중 하나 꺼내들었다. 유연하게 휘는 긴 막대 끝에 튼튼한 실을 적당히 잇고 그 끝엔 방울과 깃털 따위를 달아 마치 낚시대 같은 장난감 휘두르며 하품한다. 딸랑. 딸랑딸랑. 방울 장식 이리 뛰고 저리 뛸 때마다 삐! 삐! 하고 같이 뛰는 노란 녀석 졸린 눈으로 응시한다. 멍하니 장난감 흔들다가 한 번 손놀림을 바꿔 막대 끝으로 샛노란 털뭉치 통! 건드리니-
삐익!
자지러지며 둥글어져 바닥 구른다. 데구르르. 저어기 굴러간 노란 털뭉치 빤히 보고 있으면- 예고 없이 튀어올라 폴짝댄다. 그리 자지러져놓고 재밌나 보다. 헌데 그게 그렇게 재밌나. 저야 모른다. 저리 구니 놀아주는 거지. 일 각 정도 놀아주다 방울 넣은 대나무 공 굴려주고 일어섰다. 발치에서 딸랑대는 소리 피해 슬렁슬렁 씻으러 들어간다. 오늘은 간만에 본가. 아니. 공방에 갈 예정 있었다.
씻는 내내 욕실 문 밖에서 방울 소리 들려왔다. 간간히 어디 박았나 우는 소리도 들리고. 혼자 잘만 놀면서 제가 방에 있는 내내 놀아달라 치근대긴. 저렇게 놀다가도 다 씻고 나가면 발치 와서 굴러댈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뜨끈한 습기와 함께 나가니 통통통 무슨 공 튀기듯 온다. 아직 물기 남은 다리에 붙을까 요리조리 피하며 몸 닦고 머리 올리며 발끝으로 대나무 공 굴려주니 또 그쪽으로 쪼르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건지. 그냥 이러는 것도 다 놀아준다 여기는 건지.
아무튼 저 장난감에 관심 쏠린 동안 옷 입었다. 늘 입는 것 입을려다 입은 적 없는 적홍빛 치마 한 벌 꺼내 슥슥 둘렀다. 썰렁한 어깨가 아쉬워 연홍 두루마기 걸치니 제법 봐줄 만 한가. 옷 다 입었으니 경대 앞에 앉아 머리 빗질 하고 있자 발치가 또 간질간질 하다. 나갈 채비 하는 것 눈치 챘는지 노란 털뭉탱이 털 부비며 애교 부려댄다. 평소라면 다른 장난감이나 꺼내 휙 던져주었겠지만. 오늘은 녀석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여 괜히 장난감도 안 주고 못 본 척 굴며 제 준비만 신경 쓰니. 바닥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또 두고 저만 나갈까봐 저러는 거다. 앙증맞은 녀석. 끝까지 모른 척 하다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노란 털뭉탱이 들어 푹신한 둥지에 데려다놓는 것까지 능청스럽게 굴었다. 둥지에 내려져 오늘도 두고 가느냐는 불만 있어보이는 눈을 빤히 보다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그래. 너도 매일 방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어째. 오늘은 너도 나갈테여?"
삐!
알아들은 건지 어쩐 건지. 묻기 무섭게 폴짝대며 오는 녀석 받아 안아올렸다. 처음부터 데려갈 생각으로 미리 어깨에 두른 천 주머니에 쏙 넣자 명치깨에서 바르작거림 느껴진다. 툭툭. 얌전히 있으라 두드려주곤 방 나섰다. 굽 낮게 깔린 당혜가 영 어색했지만 학당 나설 쯤엔 본래 신던 것 마냥 익숙해졌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