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이거, 이거 봐라? 아주 공주님 납셨군. 뭔가 심기가 안 좋다. 그야 다이고는 정말로 몰랐던 거지만 이쪽은 자존심 하나로 강짜를 두고 있는 상황이니까. 다이고는 어떻게 손 써야할지 몰라서 조용히 있고, 레이니 왈츠는 뭘 하느라고 이야기를 안 해. 그렇게 시간은 계속 지나가. 그렇다고 맘고생을 안 하냐면 그것도 아니지.
나의 절대적인 호감도를 따지자면 다이고는 무조건 레이니의 위에 있고, 나는 팔을 안으로 굽히는 종자여서, 이거 조금 긁어볼까 하는 내 특유의 다혈질이 슬쩍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조금 경솔했긴 하다. 인정한다. 나는 레이니 왈츠의 마음고생은 알지 못하고 있었고, 내가 아끼는 동생이 골머리를 앓고 심력을 소모한단 게 정말로 꼬왔다.)
반쯤 농담이라고 해도 그거, 반은 진담이라는 거잖아?
"아아, 그러냐. 그럼 그렇게 자존심 계속 부려봐. 그러다가 헤어져도 할 말 없겠지."
내 쪽으로 이야기를 돌리려는 건 다이고 쯤 되니까 받아주는 거지, 거의 초면에 가까운 녀석에겐 어울려줄 이유가 없다. 나는 인터뷰는 바로 무시하고, 이제는 프린팅이 반들반들하게 닳아버린 도발키를 눌렀다.
"다이고한테 듣자하니 너, 뭔가 알 수 있는 물건을 전달받았다며? 근데 당장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지."
-그저 연출처럼 보이시나요? 후후 웃으며 그녀는 느릿하게 향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게도 피는 흘릴 수 없으니.. 라고 중얼거립니다. 메이사가 질문을 하자. 그녀가 살짝 자세를 고쳐앉으려 합니다. 담요로 덮여있던 무릎 아래가 좀 드러나네요. 발목 밑은 어두운 가구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요. 당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 모두를 초청했답니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속삭이듯 말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가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콰르릉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쏴악..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후두둑거리는 소리가 마치 창을 두드리는 노크소리 같네요.
-성격이 급하시기는요... 노크는 자제해달라고 그렇게나 말했었는데요.. -...메이사 양? 그리고. 번개가 비칠 때. 어둠 속에 감춰져있던 그녀의 발목이 그 빛을 받자 흐릿해지는 게 보였을까요?
피 대신 연기라는 뜻인가. 으악. 안돼. 유우가 효과가 10초도 안 지나서 끊겨버렸다. 이제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 다른 사람들 다 초대했는데 왜 안 오는거야!라고 따지려던 순간, 번개가 내리친다. 한순간 밝아진 방 안에서 눈에 띈 것은 이상할 정도로 흐릿한 히로카미 트레이너의 발목.
아니.
히로카미 트레이너가... 맞나?
처음보는 화사한 미소를 지은 '저것'은 히로카미 트레이너가 맞나? 맞다면 어째서 발목이 희미해지는건데? 아무리 연출을 한다고 해도 사람 발목이 잘린 것도 아니고 흐릿해진다고? 내, 내가 잘못본걸까? 후두둑 떨어지는 비는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 노크라는 말이 정말로 어울린다. 차라리 발목을 보지 않았다면 그 말에 기겁하면서 그만두라니까!하고 외칠 수 있었을텐데.
-...메이사 양?
"......"
극한의 공포는 말을 뺏어간다고 했던가. 소리가 나오지 않은 채로 입만 뻐끔대면서 떨리는 손으로 발목을 가리켰다. 내 발목이 아니라, 상대의 발목을.
결말 1-그것이 메이사를 잡아먹을 듯 다가올 때 기절했다가 눈을 뜨고 일어나보니 기숙사였고. 갈 시간의 알람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결말 2-메이사를 향해 그것이 깔깔깔 웃으면서 망가지듯 반쯤 녹아내리며 폴더가이스트현상 일으키며 메이사를 향해 다가가는데 물리!로 도망쳐나오니 다른 지하실에서 메이사를 찾아온 진짜 리카를 만나서 저 지하실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지하실로 갔지만.. 아까 피운 향의 연기가 메이사의 뒤에서 흐르고 있었다....
결말 3-퇴마주문을 눈 감고 외우다 보니 메이사 혼자만이 방 안에 앉아 있었고.. 곧 히토미미와 우마무스메들이 들어왔지만.. 초가 꺼진 흔적과 아직도 타고 있는 향은 존재를 증명하듯 남아 있었다..
여름이다. 해는 쨍쨍, 모래알은 반짝. 바다도 푸르고 놀기 좋은 남쪽의 섬. 이런 환경에서 특훈이라고 해도 말이지, 사실 놀기 좋은 환경이라 다들 적당히 훈련하고 열심히 노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게 틀림없지. 게다가 바다에서 하는 바베큐라던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간식이라던가, 바다의 집에서 파는 관광지 특유의 고칼로리 음식들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흥청망청 즐기다보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 눈 앞의 담당 트레이너를 보며,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유우가..."
동글동글해졌네. 뭐랄까. 배 주변이 특히. 옷을 새로 샀다고 하더니, 설마 살쪄서 가지고 온 옷이 하나도 안 맞게 되어버린건가. 우와, 그럼 엄청 찐 거 아니야? 빤히 보다가 일단 손을 뻗어서 손가락으로 배를 찔러본다. 누구 배? 당연히 유우가의 배다. 몰캉한 감촉이 그대로 전해지는 걸 보아하니, 쪘네 쪘어.
"잘도 이런 배로 수영복 입으려고 하네❤️ 말랑배❤️ 돼지❤️ 물에 들어가면 배만 둥둥 뜨겠어❤️"
퍼펙트 원더의 돌발바베큐에 합석하기도 하고, 아 여기 바다의 집이 안주가 제법이더라고 그래서 맥주도 좀 마시고 아 근데, 또 카레도 만들었잖아. 맛있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술이랑 담배 무한리필가능하단 점이 최고였거든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짠 바람을 쐬면서 시원한 맥주 한 캔, 그리고 속을 뜨끈~하게 덥혀주는 연기 한 번이면 이게 국밥이지 뭐가 국밥이냐?
K-국밥은 꺼 져 라 !
...뭐 그래서. 제 탄탄판판배의 거죽이 약간, 약간 두꺼워지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알아볼 정도인 거야?!
"........."
나 히다이 유우가, 그래도 운동선수였고 이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쪽팔리고 부끄럽고 자존심상하고 무엇보다 한참 어린애한테 배를 콕콕당하면서 말랑배라는 굴욕적인 서술을 당하는 게...
-본래 피는 생명을 보이는데 좋은 것이니까요... 후후 웃으며 메이사에게 잘 대해주려는 듯하지만. 메이사가 자신의 발목을 가리키는 듯하자.. 그녀 또한 내려다보려 합니다.
-저런... 그녀가 침통한 표정으로 발목을 내려다봅니다. 노크처럼 들리는 창에 부딪히는 빗소리 사이사이로 깔깔대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립니다. 들여보내줘맛있는거좀더피를신선한영원히여기를헤매게 그녀가 메이사를 빤히 바라봅니다. 그러고보니. 어딘가 어색했던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심장박동소리. 들렸나요? 그것을 만일 알아차린다면 그것이 입을 찢을 듯이 크게 벌려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각오하신 ㄱㅓㅇㅑ? 피리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목이 기괴하게 꺾입니다. 피리카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보라빛 머리카락의끄트머리에서 무언가 뚝뚝 떨어지며 바닥에 검붉은 자국을 남기고..
-이ㄹㅣ로 와 나 갈ㄱㅓㅇㅑ 쿵! 벽에 붙어있던 서랍장이 급작스럽게 엎어집니다. 어떤 외력도 없었음에도. 그것이 무릎 아래를 잃은 채 메이사를 향해 철벅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어옵니다.
아~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어 죽겠다, 담당 놀리기. 사바캔 이후로 처음인가. 그동안 나름대로 자제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풀려버린 것 같아. 매수각희의 봉인이. 굴욕을 가득담아 외치는 유우가를 보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재밌다~
"그래서, 진짜로 어떻게 된 거야 그 배."
탄탄판판배라고? 뭐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지만... 담당인 내 눈에는 사소한 변화도 금방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예전보다 좀 달라진 건 사실이고. ...어라, 이거 조금 위험한 생각이었나? 절대 입밖으로 내면 안 되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도 매번 혼활대실패 맞선파괴자 모쏠인데 살까지 찌면 이 불쌍한 트레이너는 정말로 혼기를 놓치게 되어버린다. 담당으로서 그냥 두고볼 수 없지.
"어쩔 수 없네. 유우가도 같이 수영할래? 물에서 놀면 칼로리 소모도 제법 된다고 하던데." "아~ 그치만 물에서 놀려면 수영복 입어야하는데, 그런 말랑통통배로 수영복 입으면 분명 웃기겠지❤️"
지,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 이거 밖에서 들린 건데?? 쫑긋 선 귀가 바들바들 떨리면서 창가 쪽을 향한다. 또렷하게 들리는 깔깔거리는 소리. 빗소리와 섞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정도의... 귀와 다르게 정면의 히로카미 트레이너에게 고정된 시선이 마구 흔들린다. 아니야. 저거 히로카미 트레이너가 아니야. 애초에 사람도 아니야. 사람이 저렇게, 목이 꺾어지면서 웃을 수 있을리가—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싫어!!!!"
무릎 아래가 없는 그것이, 무언가를 뚝뚝 흘리며 자국을 남기면서 기어온다. 소름끼치는 철벅철벅하는 소리를 피해 반대방향으로, 문을 향해 달린다.
문, 문을 열어야하는데. 문이, 문.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지만, 어째선지 문이, 문이 열리지 않아?! 떨리는 손이 미끄러져서인지, 아니면 무언가가 막고 있는건지. 달각거리는 소리만 나는 문고리를 계속해서 잡아 열려고 하다가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으으으...!!! 결국 그냥, 발로 문이 열릴 때까지 걷어찬다. 쾅, 쾅, 크게 울리는 소리 너머로 점점, 철벅거리는 소리가, 기어오는 그것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싫어! 싫어!!!! 오지마!!!!!
우마무스메의 진심 999% 발차기를 맞은 문이 나가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오로지 달렸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서. 그러다가 도중에 발이 꼬여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통증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 도망, 도망가야해. 잡히면 분명 죽어버릴거야...!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다가, 앞에 보이는 인영에 기겁해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따라잡혔어!!! 죽는다!!!!!!!!!!!
왜 그렇게 수영을 싫어하는거야. ...아, 물 무서워하던가? 그건 몰랐는데... 물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수영을 강요할 수는 없지. 헉, 갸루삐네가 유우가 냄새난다고 한거, 물이 무서워서 못 씻어서 그런 거였을지도... 이제 이해가 가네. 대충 주워들은 것들과 지금 유우가의 모습을 보고, 혼자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군. 유우가는 물을 싫어한다. 한 편으로는 '니가 무슨 고양이냐'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어쨌든 존중은 해야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안 빠질걸~ 하고 놀리면서도 그냥 맞춰주기로 했다.
"흐음.... 뭐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그럼 가자~" "햇빛이 세니까 모자 쓰고 가자. 선크림은 발랐어? 이상한 태닝 자국 남기기 싫으면 꼼꼼히 바르라구."
약간의 잔소리를 곁들여서 하다보니, 뭔가 이상한데. 보통 담당 트레이너가 우마무스메한테 할 말 아닌가 이거? 우리 뭔가 관계가 역전된 느낌인 것 같은데. ...뭐 이건 이거대로 재밌으니까, 됐나.
아니, 이 아저씨. 아까부터 왜 이렇게 남의 연애에 이래라 저래라 못해서 안달이람? 슬슬 차오르기 시작하는 불쾌함에, 메롱이다, 하고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주고 달아나려는 계획을 새우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찰나, 들려오는 명백한 도발에 레이니・왈츠는 문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래서 다이고가 싫어.”
잠깐의 침묵 후, 나온 말은 고작 그것 뿐.
“진짜로, 싫어.”
겨우 덮어두었던, 그날의 숨막히던 침묵이 다시 떠올라서, 레이니는 입술을 꽉 깨문다. 해결되었다고, 믿고싶었다. 소소한 문답 몇 개와, 손에 들어온 자그마한 수첩으로.
“나,는... 다이고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니까, 궁금, 하다고, 말했... 었는,데.”
결국, 시라기 다이고가 자신에게 내어줄 수 있었던 건. 고작 수첩 하나까지가 끝이었을 뿐이다. 선은, 여전히 견고한 담벽으로, 굳게 그어져 있을 뿐이다. 아무런 죄 없는 히다이를 노려보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레이니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로, 수영복의 치맛단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이ㄹㅣ로 와 -같이. 영원ㅎㅣ 이 안개를 헤매며.. -■■■•\…노ㅁㅣ콘의 희생ㅈㅔ크!-÷△•☜…■■⊙△◎△◎□□⊙⊙◎◎◎■⊙⊙⊙⊙⊙⊙⊙⊙⊙⊙⊙⊙⊙⊙⊙⊙⊙⊙⊙⊙ 만일 메이사가 한번 뒤를 돌아봤다면 수많은 눈과 입이 박힌 듯한 그것이 메이사를 향해 철벅대는 듯한 미끈거리는 뭔가가 떨어지는 입을 벌리며 속삭이고 있는 걸 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문이 뻥하고 걷어차지고. 넘어진 메이사를 내려다보는 것은..
"메이사 양?" 메이사의 앞에 있는 것은 피리카었습니다. 밝은 계단 앞에서 메이사를 바라보는 피리카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요.. 의심가는 것을 살펴본다고 해도 정진정명 인간이겠지요.
"그쪽 지하실이 아니라 이쪽 지하실로 장소가 변경되었는데... 오지 않아서 좀 기다리다가 뭔가 소리가 들려서 와봤답니다." 그러니까. 메이사가 장소변경공지를 제대로 못 받았다는 게 원인이었지요.. 하지만 그 공지를 못 받은 게 메이사의 잘못은 아니지요. 전파를 살짝 어그러뜨린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