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드물게, 이 섬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두꺼운 구름 뒤로 해도 별도 숨어 어두컴컴한 날이었다고 할까. 마치 무슨 괴담이나 호러 소설의 도입부같은 그런 날이라고 할까. 쭈뼛거리면서 합숙소 지하, 백물어를 하기 위해 빌린 듯한 장소에 발을 들이며 생각했다. 이거, 공포영화 도입부 아니야?
"히얏, 아, 으, 히, 히히, 히로카미 트레이너?!"
그냥 인사에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어버렸다. 으으, 그치만, 분위기 무섭고... 왜, 왜 여기 왔을까.. 별을 보러 가는 것도 못하니까 뭔가 재밌는거 없나 하고 온거지만, 재미보다 공포가 더 크다니.. 게다가 어째서, 히로카미 트레이너랑 나뿐이지?? 다른 애들은? 다른 트레이너들은? 안 오는건가?!
"다, 다른 사람들은? 왜 아, 아직 안 오는... 으에엑..."
마주 앉은 히로카미 트레이너의 말에 시선을 돌린 곳은 향로와 초가 있는 곳. ....향보다 초가 밝으니까... 초에 불을 붙였다. 우우.. 분위기 완전 무서운데...
뭔가 유키무라의 대화법은 좀 어렵다. 극한의 N과 S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다이고처럼 둔한 건 아니지만 단세포 체육계이기 때문에 이런 비유를 들면 머리에서 깡통 굴러가는 소리가 나게 된다. 하여튼, 깡통을 굴려서 생각해보니 7~8착이라는 소리면 시궁창 아닌가 싶어 옷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렇게 구린가? 나 늘 이런 느낌으로 입는데.
지갑을 꺼내서 지폐 사정을 살핀다. 우와, 상당하네... 요즘 옷들 가격이 천정부지인데 이거로 되려나.
"1만 7천 850엔 안쪽이면 돼."
178,500원 안쪽으로 모자 상의 하의를 전부 맞출 수 있을 것인가? 유키무라 모모카는 이 챌린지를 성공하여 다음 스테이지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손에 땀이 쥐어지는 승부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일단 살펴보기 시작하는 유키무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스몰토크나 하기로 한다. 그리고 옷을 갖다대면 얌전히 대지고, 입고 오라 하면 얌전히 입고 오기로.
예민한 여자아이의 독심술이라는 거냐?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나? 좋아, 그러면 다이고의 다리털을 떠올려볼까... 봤냐? 와, 그걸 봤어?! 저질 ❤️ 남의 마음 엿보는 헨따이 ❤️ 죽어 ❤️ ...라고, 머릿속 만담을 좀 해본다. 덕분에 뜨끔한 얼굴은 좀 감춰졌다.
...그보다 이 녀석, 진짜 성가신데? 이 옥색머리도 그렇고 너 그거냐 그거? 월드이즈마인? 소노 이치, 이츠모토 치가우 카미카타니... 아무튼, 나는 듣기만해도 성가신 이야기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이고 정도 되는 둔감한 녀석이니 받아주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이고랑 이야기할 때는 레이니가 불쌍했는데, 레이니랑 이야기를 하다보면 다이고가 불쌍한 무한 인과응보 츠쿠요미의 굴레.
"...너 공주야?"
"의무적인 연락 하면 됐잖아? 의무는 다했다는 거 아냐. 너는 가만히 있고 걔만 발에 불나게 뛰어다니면 그게 머슴이지 남친이냐."
네, 저는 이래서 매번 혼활을 실패합니다. 성가신 거 귀찮거든요!
"너도 어디 아파보이는 건 아닌데 먼저 찾아 좀 가지 그래... 그... 그게 그거야? 연애의 밀당이라는 그거?"
히로카미 트레이너, 안 그래도 은근히 무서운 인상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진짜로 무섭단 말이지.....
살짝 물방울이 맺힌 당근쥬스를 받아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서 감사인사를 대신하고 들이킨 그것은, 기이하게도 차가웠다. 마치 방금이라도 냉장고에 있던 걸 꺼낸 것처럼... 목을 타고 내려가는 이 서늘한 느낌은 분명, 당근쥬스가 차가워서만은 아니겠지...
"에, 에우우... 시간 딱 맞춰서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온 걸까? 그보다 그 속삭이는 듯한 소리 너무 무서우니까 음량 조금만 키워주면 감사할 것 같아요. 라고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혼자 중얼거리듯 딱 맞춰서 온 거 아닌가-하고 말하다가, 멈췄다. 그, 그게 무슨. 아니, 그렇네. 백물어까진 못가도 괴담이니까, 초를 켜면 말해야 하는 건가.
"히이이익, 이, 이런 타이밍 맞춰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오오..."
말하면 되잖아요 말하면! 하필 천둥치는 타이밍에 그런 말이라니 심장이 죽어버리겠어! 작게 헛기침을 하는 걸로 목을 가다듬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괴담, 괴담이라고 해도 말이지...
"—츠나지의 해변가를 걷다보면 작은 사당 하나를 볼 수 있어. 바다를 바라보듯 세워진 그 사당에서 무얼 모시고 있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고, 거의 무너지기 직전까지 삭아 있지만 걸려있는 금줄은 유난히 새것처럼 보일거야. 매년 금줄만큼은 일정 시기에 새롭게 갈거든. 뭐어, 금줄이라는건 보통, 성역과 일반 세계의 경계를 상징하는 줄이지. 신의 영역에 인간이 발을 들이지 마라, 뭐 그런 의미일까나. 어쨌든 중요한 건 그거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경계의 의미라는 거."
"하지만 그 사당의 금줄은, 반대방향으로 꼬여 있단 말이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어. 정말이지, 대체 무엇을 모시고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모신다'고 표현해도 좋은 걸까? 우리는 대체 그곳에 무엇을 가둬두고 있는 걸까." "...금줄을 새 것으로 바꿔다는 날이면, 늘 일기예보가 틀리곤 해. 바다의 날씨는 변덕스럽다지만 매년 그 날이 되면 이상할 정도로 풍랑은 거세고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지. 마치 오늘처럼 말이야." "언젠가 사당이 완전히 삭아서 무너지고, 금줄조차 달 수 없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아, 얘기하다보니 차분해졌다. 뭔가, 얘기하는 입장이 되면 괜찮은걸지도... 그렇게 잠시 안심한 채로 이야기를 마치고, 촛불을 들어서 불을 끈다. 하필 그 타이밍에 또 다시 천둥 소리가 크게 들려 무심코 움찔해버렸다. 그, 그러니까 아까부터 타이밍이 이상하다고?!
-... 웃고 있는 그녀. 딱 맞춰 온걸까요? 당신께서 본 그 시계가. 급박스럽게 느려졌다는 가능성은 제로일까요?
-갇혀있는 것들이 흐려지고 사라지려면 무언가가 필요하죠.. -인세의 인식이란 상당히 견고하니까요.. 훅 하고 초가 꺼지자, 그 자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위로 올라갑니다. 기이하리만치 꼿꼿이 천장까지 올라간 연기가 한순간 흩어지는 걸 바라보던 그녀가 미소를 짓습니다.
-초의 연기도 흠향에는 나쁘지 않지요. -그럼 저도 말해볼까요. 괴담이라고는 해도 기이한 이야기 또한 흠향하기엔 좋답니다. -뒷덜미에 서늘함이 흐르는 것처럼요. 속삭일 때마다 어딘가 서늘해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녀가 이야기를 말하려 합니다.
-진명..에 관하여일까요? -어디에서나 진명을 알게 되면 신이한 존재를 부릴 수 있다라는 전설이 있답니다. 끝없이 어두운 곳을 빠져나온 것들에게도 진명이 있었죠.....처벌이자 제약으로써 그들의 진명이 널리.. 그리고 흔한 이름으로 퍼졌기에 그들이 풀려난다면 그 진명을 지닌 이들에게 횡액이 닥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그녀가 속삭이면서 향을 피우고 향로에 꽂자. 향로에서 흐르는 연기가 바닥을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 같군요.
이상하게도 히로카미 트레이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늘한 기분이 든다. 이 자리의 분위기, 낮게 울리는 하늘, 어두운 지하... 뭐 그런 것들을 제쳐두고서도 말이다.. 으윽, 윽, 도망가고 싶어.... 근데 여기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저주받을거같아(?)
"...아, 아니 그거 진짜 무서우니까 그런 연출 그만하자 진심으로...."
향을 꽂으니 연기가 아래로 흐른다. ...어, 어째서지. 초를 껐을 때는 위로 갔는데... 거기에 흠향하는 존재들이 많다는 말까지 들으니 미쳐버릴 것 같다. 바닥을 기는 연기가, 꼭 그것들이 진짜로 주변에 있다고 말하는 느낌이라...
어쩌면 내 옆에도, 내 뒤에도 있을지도 모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어떻게 생겼을지조차 모르는데도 기어코 그걸 상상하고 마는 것이 인간이 지닌 상상력의 쓸데없는 성능이지. 으.. 진짜 무서워....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다. 차라리 유우가가 주변에서 습하습하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바닥을 기면서 저 연기를 습하습하 하고 있는 유우가... 으와 이건 이거대로 경악하다 못해 머리가 냉정해질 정도의 상상인데. 하지만 유우가 꼴?초니까 담배를 압수하면 저 연기라도 진공청소기마냥 빨아들이려고 할 것 같고... 아.. 그럴듯할지도...
좋아, 무서운게 좀 덜해졌다. 고마워 유우가(?)
".....아, 익숙해졌을지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 무서운 광경을 상상해버렸으니까, 역시 무서울지도. 그나저나 정말로, 다른 사람들 안 오는거야?
"...혹시 나만 너무 일찍 온 건가. 다른 사람들은? 부른 거 맞죠, 히로카미 트레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