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어장은 < 붉은 바다를 위해 > 어장의 2기격 커뮤 입니다. ※ 본 어장은 [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 기반으로, 해당 작품을 감상하지 않았을 시 러닝이 불가능합니다. ※ 본 어장은 러닝 중 / 엔딩 이후 연공 행위를 일체 금지하고 있습니다. ※ 당신의 캐릭터가 진행 도중 사망 및 부상당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상할 정도로 대피소로 가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영문도 모르는 새 경찰의 손에 이끌려 대피소로 내려가 하염없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이 잦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그나마 대피소로 가는 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입사 첫날부터 사이렌이 울려서 고대하던 직장에 출근도 못하게 되는 일은 사양이니까요.
사도로부터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날이 계속되던 2015년 09월 01일, 합격 통보를 받은 신입 직원 여러분들은 기쁜 마음을 먹고 처음으로 연구소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건물들과 거대한 정화시설, 갈까마귀가 까악거리고 그리운 바다내음이 맡아지는 곳. 탁 트인 푸른 바다가 펼쳐진 수문 . 하지만 무엇보다 직원들을 격하게 반겨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거대한 멸균 시설이었습니다. 열로 지지겠다는 듯이 수차례나 끝없이 계속 되는 정화욕, 정화욕, 정화욕! 간신히 모든 멸균 과정을 끝내고서야 사원증을 쥐고 들어선 Visitor Center의 소강당. 여느 대학의 세미나실과도 같은 수많은 하얀 좌석들이 자리잡은 곳의 강단 위에는, 행정직 직원의 제복을 입은 짧은 샤기컷 머리의 직원이 마이크를 잡고 서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사업행정본부 인사총무과 소속 선임 행정원 스즈키 미카입니다. 연구소장님께서는 급한 일정이 있으셔서 금일 오리엔테이션 교육에 나오지 못하게 되셨기에, 부득이하게 제가 대신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합격 발표와 함께 앞서 공지되었던 오리엔테이션 교육이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모든 직원 분들은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
대체 왜 연구소장이 아니라 일개 선임 행정원이 나와서 소개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별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연구소장님은 급한 일정이 있으셔서 이번 오리엔테이션 교육에 나오지 못하셨기에 제가 대신 나오게 되었습니다' 라는 설명처럼, 단순 일정 문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소장급 위치는 매우 바쁜 자리이니까요. 한낱 신입 따위의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나올 사람이 아니다. 이말인 거겠죠?
신입 연구원 여러분들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곧,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9월 1일. 대학교로 치자면 가을학기가 시작될 즈음. 자전축이 기울며 '가을'이란 단어도 무색해졌지만, 본질이야 달라졌겠는가. 쏜살같았던 멸균을 마치고 도착한 강당. 낯선 얼굴, 생경한 장소, 약간 들뜬 분위기. 마치 새학기를 맞이한 학교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스즈키 씨의 정중한 어투에 답해 주는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요우는 대답하는 대신, 한 손에 쥔 사원증을 내려다보았다. 해양바이오본부 복원연구실─신입 연구원 코후쿠 요우幸福 遥. 그는 부서명이나 이름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고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대여섯장은 될법한 두꺼운 프린트들이 모두에게 나눠지고 난 뒤에야 시작된 오리엔테이션 내용은 특별할 것은 없었습니다. 해양 연구소 구역에 대한, 간단하면서도 좀더 세부적인 설명이 시작되었다는 것 외엔 정말로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해양 생태계 연구 기관의 구역은 총 10개의 멸균 구역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저희들은 간단히 말해서 이 구역들을 레벨 OO라 칭하고 있습니다. 각기 레벨 1부터 레벨 10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방문객들은 레벨 3 구역까지밖에 진입이 어렵지만 저희들은 레벨 10까지 진입이 가능하지요. 자격을 갖춘다면 말입니다. " "나눠드린 프린트의 맨 첫번째 장을 읽어 보시겠어요? "
프린트의 맨 첫장을 살펴보시면, 꽤나 빼곡하게 레벨 별 멸균 구역이 적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이 분량....상당히 길군요. 정말 빼곡해서 읽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적혀 있기는 하군요.
프린트는 총 여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맨 앞이 접근 구역 레벨 설명지였고, 그 다음 장부터는 보직별 접근 가능 구역 설명이 적혀있는 페이지였습니다. 기타 구역은 편의시설 및 연구소 내 기타 시설들에 대한 자질구레한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크게 볼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맨 첫번째장에 적혀있는 내용은 방문객과 직원들의 보직별 접근 가능 범위가 적혀 있었습니다. 레벨1부터 레벨3까지는 Visitor Center, 소위 말하는 방문객 접근 가능 구역이기 때문에 우리같은 직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걸 잘 알려주듯, 스즈키의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가 강단에서부터 크게 들려왔습니다.
"정확히 레벨 4부터 레벨 6. " "일반 행정직이 직원 출입증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구역은 여기까지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구역보다 높은 레벨은 행정원들에겐 접근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
손으로 엑스 표시를 크게 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한 뒤, 스즈키는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일반 연구직의 경우에는 레벨 4부터 10까지 모두 진입이 가능합니다만, 여기까지 진입이 가능한 경우는 어느정도 직급이 올라간 분들에 한합니다. 여러분과 같은 신입의 경우에는 레벨 4부터 7까지만 진입이 가능하며, 그 위는 선임 연구원들이 동행하지 않는 한 접근이 제한되어 있으니 이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연구직 직원들이 접근 가능한 구역은 두 장을 빼곡하게 차지할 만큼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모두에게 열려있지 않은 곳에 대한 설명 역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다음장에 적혀있는 정화시설들의 경우 모든 구역이 레벨 10으로, 선임 연구원이 아닌 이상 절대 진입을 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설이기에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발전소의 경우 그나마 진입이 가능한 구역이 어느정도 있었습니다만, 이것도 일부 구역에 제한되어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구역이 신입들에게는 진입할수 없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쓸데없이 나돌아다니지 말고 업무에만 집중하라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특별 채용직의 경우 역시 레벨 4부터 레벨 7까지만 진입이 가능합니다. " "행정직과 달리 7단계 구역까지 진입할 수 있지만 그 뿐, 그보다 높은 등급의 구역은 접근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
특채직이나 행정직이나 다를 바 없다고 설명하고 있던 스즈키는, "단, " 이라고 강조해 말하며 돌연 이런 말을 덧붙이려 하였습니다.
"윤리감사실 소속 모든 직원분들은 예외로, 미야미즈 감사위원님의 허가하에 레벨 4부터 레벨 10까지 모든 구역의 출입이 가능합니다. 윤리감사실 소속 신입사원 여러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이건 또....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윤리감사실 소속 직원들만 예외로 하는 걸까요? '미야미즈 감사위원님' 의 허가란 말은 또 뭐고요?
스즈키의 말을 사실로 증명하듯, 실제로 첫 페이지부터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맨 아랫줄에 '단, 윤리감사실 소속 직원의 출입증의 경우 제한에 상관없이 모든 곳을 출입할 수 있습니다. ' 라고 말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윤리감사실 직원들은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연구소장 직속에 위치한 부서라고 해도 행정직도, 일반 특채직도, 신입 연구직 직원들도 가지 못하는 구역을 윤리감사실 소속 직원들은 입사 직후부터 자유롭게 드나들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요. 불공평하다는 말이 나올 법할 정도로 말입니다.
윤리감사실 직원들의 출입 가능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이후로도,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때까지 해 주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오리엔테이션' 인, 질의응답은 없는... 그저 설명'만'이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내일부터 여러분들이 배속된 곳에서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나눠드린 프린트에서도 설명되어 있겠지만, 연구직의 경우엔 401동과 403동, 행정직과 특별채용직 직원분들께선 402동에서 근무하시게 될 겁니다. " "그밖에도 많은 곳에서 업무를 보시게 되겠지만, 상세한 내용은 각자 부서의 선임 분들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
다소 불친절한 오리엔테이션 설명을 마치고, 스즈키는 강단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여러분께 이렇게 물으려 하였습니다.
소강당의 활기가 어떤 향수를 자극했던 것인지, 강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요우는 회상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일일이 되짚기 벅찰 정도로. 자다가, 산책하다가, 공중전화 걸다가 경찰에게 덥석 잡혀 끌려가곤 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쨍한 원색 경광등이 먼저. 귓청을 찢어놓을 듯한 사이렌이 그다음. 어떤 경찰은 강압적인 억류에도 순종적으로 임하는 그를 희한하게 보았지만, 대다수는 그에게 무관심했다. 전후 사정 따위 알려 줄 리도 만무했다. 언제나 그렇듯 일이 돌아가는 경위는 알 수 없었다.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대피소 구석에 기대앉아 무의식으로 침잠할 뿐이었다. 아니면 연로한 노인의 뒤죽박죽 기도에 동참하거나. 그리고, 요우는 그 사실에 별 불만이 있지도 않았다.
어느새 스즈키 씨의 설명은 마지막 장에 달했다. 다섯 번째 줄에서 여섯 번째 줄로, 여섯 번째 줄에서 일곱 번째 줄로⋯⋯ 넘어가고 있었건만. 요우가 보고 있는 페이지는 첫 장 레벨별 멸균 구역에 관한 깨알 글이었다. 그랬다. 양옆에 앉은 연구원들이 행정원의 안내에 따라 팔락팔락 바삐 프린트물을 넘기는 동안, 요우는 한 페이지도 채 넘기지 못했다. 주요 부분을 캐치하여 스피드하게 읽어 내는 남들과 달리, 융통성 없이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고 있었으니까.
'아니다.'
호수처럼 잔잔한 푸른 눈동자에 조명 불빛이 반사되었다. 동시에 깨달음이 천천히 찾아들었다.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건, Visitor Center 건물로 들어오고도 코끝에 여전히 맴도는 듯한 바다 비린내였다.
죽은 생명의 흔적. 붉은 바다에선 결코 맡을 수 없는 냄새.
'⋯⋯.'
요우는 공상에서 헤어나오며 흰 가운 소매를 걷었다. 궁금한 건 많다. 연구소장의 행방, 윤리감사실 특혜, 출입 제한이 주어지는 이유. 자신의 직업상 눈에 띄는 특수생물보관실1.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땐, 한 발 빠르게 오리엔테이션을 소화한 신입들이 질문 중이었기에 손 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의문을 해결해야 했다. 요우의 눈길이 프린트물 두 번째 장에 가 닿았다.
요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질의응답은 어느새 끝나 있었습니다. 특별히 질의응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특수생물보관실은 멸종된 해양 생태계의 생명체들을 복원 및 보존하고 있는, 이 해양 연구소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 복원연구실 ] 소속 연구원들이 앞으로 일하게 될 곳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질문이 더 이상 없으시다면, 이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긴 설명,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
다소 불친절한 오리엔테이션 설명을 마치고, 스즈키는 강단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여러분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첫 출근, 첫 업무. 숙소인 직원 단지에 짐을 풀고 여독을 풀고 나면, 내일부터 본격적인 여러분들의 업무가 시작될 것입니다. 어떤 업무가 시작되고 어떻게 일을 하게 될지는 여러분들 각자의 부서에 따라 아마 다르겠지 싶습니다. 다만.......뭐가 되었던 간에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프린트 마지막 장까지 정독을 마쳤다. 이쯤이면 질문할 수 있겠거니 손을 들어 올렸으나.
"아." 끝났다, 질의응답 시간⋯⋯.
스즈키 씨가 머리 숙여 인사하며 오리엔테이션을 마무리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졌다. 남들이 손뼉을 맞부딪칠 때 홀로 손 들고 있게 된 셈이었다. "왜요? 뭐가 궁금하세요?" 사교성 좋은 어느 신입연구원이 말 걸어온 건 그때였다. 요우는 겸연쩍어진 손을 거두며 미지근히 대꾸했다. "아닙니다. 스즈키 씨만 답해 주실 수 있는 질문이라⋯⋯."하고. 보아하니 다른 신입들끼린 벌써 인사가 오간 모양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 자유를 얻은 그들의 화제는 이러했다. "선임행정원님의 경어, 거리감 있지 않아요?" 그런가. 스즈키 씨의 경어엔, 되레 안정감을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온화한 연갈색 눈동자를 언급하며 두둔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따랐고, 그들 무리는 곧 소강당을 떠났다. 그렇게 다들 흩어질 무렵. 요우는 강단에 남아 있는 스즈키 씨를 응시하다가, 그의 목 부근과 자기 손에 들린 사원증을 번갈아 보았다.
한적해진 소강당을 거의 마지막 순서로 나섰다. 목에 맨 사원증의 흔들림에 맞춰진 걸음은 직원거주단지로 향했다. 길을 찾기 위해 굳이 프린트를 꺼내 볼 필요는 없었다. 기억했으니까. 제대로 기억한 이상, 좌측 해마는 망각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안내받은 시설들의 위치는 머릿속에 고스란히 자리잡힌 채였다. 그는 연구소의 기묘함을 곱씹으며 계속 걸었다. 사색은 짐을 풀 때까지도 계속될 예정이었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평소보다 천장이 낮다. 아침 햇살이 비껴드는 창은 동향. 집이 아니구나. 요우는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밤사이 이상한 꿈을 꿨다. 다사다난한 멸균 과정을 거쳐 오색 빛깔 바다에 도달하는 꿈을. 검지 끝에 검은 머리칼이 걸렸다. 그는 벽 너머로 옆방 사원이 씻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도 침대를 벗어나지 않고 가만 누워서. "어디였더라, 여기." 라며 바보 천치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참 좋은 세상이다. 바보 천치에게도 턱턱 phD를 내주는⋯⋯. 그는 너무 늦지 않게 일어나 사원증을 집어 들었다.
>>17 각자의 여독을 풀고 난 다음날, 어느덧 첫 출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연구직 직원들은 401동과 403동, 행정직 직원들과 특별채용직 직원들은 402동으로 출근할 때입니다. 과연 오늘은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가 보면 알게 되겠죠!
요우는 복원 연구실 사무실로 이동합니다!
복원연구실이 있는 층은 이상하게도 [ 관계자 외 출입금지 ] 라는 팻말이 붙은 연구실이 많이 보이는 층이었습니다. 추측컨대 중요 자원을 취급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복원연구실의 인상에 대해 설명하자면.....그렇습니다. 연구실의 정석 이라 할 수 있는 곳 되겠습니다. 여기저기 보이는 각종 최신식 현미경들이 늘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각자의 일에 너무 몰두중인 것인지, 사무실에 요우가 도착했음에도 큰 반응이 없습니다.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시겠습니까?
끼이익, 달칵. 등 뒤로 사무실 문이 닫혔다. 먼저 도착한 연구원들은 각자 서류를 넘기거나 현미경 배율 조절하기 바빠 보였다. 그 가운데, 요우는 사무실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멍 때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건 나름대로 일터에 적응하려는 시도였다. 움직이려면,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순순히 끄덕이곤 책상 앞에 앉았다. 부드러운 티슈로 접안 렌즈를 닦고 있으니 학부생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추천서 써 주신 분'의 사무실에 앉아 현미경을 닦았었지. 잡일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학계에 일찍 진출한 만큼 어딜 가나 연소자 취급 받았고, 자연스레 잡무는 늘 자신의 담당이 됐다.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관계자입니까?"
느릿느릿 닦다가 문득 질의했다. 앞뒤 없는 물음이었지만, [ 관계자 외 출입금지 ] 팻말이 붙은 연구실에 출입할 수 있느냐는 의미였다.
연구실 내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조와 수조, 그리고 수조로 가득합니다. 소형 생물들을 연구하고 있는 것인지 연구실에 놓인 대부분이 작은 수조들 입니다. 고작 특수연구실에 불과한 곳에 이 정도 수조로 가득하다면, 특수생물보관실은 어느 정도일지 장담하기 어렵겠습니다.
특수연구실로 발걸음을 내딛고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석상처럼. 심지어는, 사무실에서보다도 더 오랜 시간 동안. 혼자 남았기에 더더욱 오래 멈춰 있었던 것이다. 어떤 수조 안에 설치된 기계가 작동하면서 수면이 일렁거리자, 전등 빛을 받고 있는 안면도 희미하게 물결 치는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 많다."
이 많은 걸 혼자 확인하긴 무리였다. 무엇보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어쩌면 보관 중인 소형 생물 리스트가 컴퓨터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컴퓨터를 사용한 흔적임을 증명하듯, 키보드와 마우스가 잔뜩 흐트러져 있습니다. 모니터 한켠 구석진 곳에 [ PW : SCIENCE0913 ] 이라 적혀 있는 메모지가 붙어 있습니다. 암호를 입력하라는 듯, 모니터에는 다음과 같은 잠금 모드 화면이 떠 있습니다.
[ PASSWORD : ]
컴퓨터 책상 한켠에는 해양 연구소에서 흔히 볼수 있는 배포된 다이어리가 올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책갈피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는, 꽤나 사용한 흔적이 많이 있는 다이어리입니다. 그 밖에 컴퓨터가 있는 곳에서 딱히 눈에 띌 만한 것은 찾을 수 없습니다.
9월 13일. 현존하는 인간 누구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그날.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을 날을 비밀번호로 설정한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함일까.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그러 쥐었다. 이어 패스워드 입력창으로 커서를 가져가고는, 마우스에서 뗀 손을 키보드 위에 얹었다. 영문부터 천천히 입력해 나갔다. 느릿한 행동은 여기서도 여전히 진가를 발휘했다. 글자 하나라도 틀릴세라 하나하나 알파벳과 숫자를 대조했다.
문득 책상 한쪽에 놓인 다이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선임연구원님이 옆구리에 끼고 계셨던 다이어리도 비슷한 디자인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도 조만간⋯⋯.'
연구 중인 생물 목록이 컴퓨터에 없으면 저 다이어리를 잠깐 들춰 봐야겠다. 어느덧 패스워드도 '⋯⋯ 1⋯⋯ 3'으로 하여 입력이 끝났다. 꽤나 공들였으니 잘못 입력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요우는 확신을 담아 엔터키를 눌렀다. 찰칵,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났다.
역시 다이어리부터 확인했어야 했나. 텅 빈 바탕화면을 바라보며 난감함을 금하지 못했다. 요우는 소리 없이 침음했다. 어쩌면 이 연구소, 아날로그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과 성향이 잘 맞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드라이브 안에 파일이 있을 거란 생각은 떠올리지 못한 것이었다. 메모라도 확인해 보려 마우스 커서를 메모 아이콘으로 옮겼다.
보관 중인 생물 리스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으리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메모장에 담겨 있는 건, 어딘가 회의감 내지는 한탄이 느껴지는 물음표 찍힌 문장 하나뿐이었다.
’⋯⋯ 나는 왜 복원 분야를 택했더라.‘
그리고 메모를 읽은 순간, 위와 같은 질문이 뇌리를 스치듯 떠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해양 생물 복원은 운석 충돌 이래로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분야였다. 선생님께서 ”열정이라면 좋지만 네 집착은 과도하다.“ 하며 넌지시 꾸중하셨을 정도로.
’⋯⋯.‘
면접 당시 지원 동기에 관해 어렴풋이 늘어놓았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선, 자신이 뭐라고 중얼댔는지 따윈, 명확히는 생각나지 않았다. 시선은 자연스레 책갈피 포스트잇이 정성스럽게 붙어 있는 다이어리로 옮겨 갔다. 이어서 손끝도 다이어리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향했다. 컴퓨터 같은 기계장치보다 훨씬 익숙한 물건으로 말이다. 저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연구한 사람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Überm Sternenzelt Richtet Gott, wie wir gerichtet. 외국어로 논문을 읽어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기에 익혀 둔 독일어 실력이 빛을 발했다. 쉬운 단어만 늘어놓은 문장이지만 조합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소요됐다. 연구용 다이어리에 적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문장이기 때문이었다.
‘별들의 천장에서 신이 우리가 심판하듯 심판하시리라.’ 그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 우리의 심판이 곧 신의 심판이란 뜻이지 않나⋯⋯.“
오만. 실로 오만이다⋯⋯. 왠지 모르게 고개를 드는 놀라움은, 지난 세월 외가 친척들과 지내며 종종 교회에 드나들었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신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부심 가져 본 적이 없는 탓도 있을 터였다. 찜찜한 문장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연구실 내 수조1부터 수조5 중 주목할 만한 생물에 관한 기록은 없는지 다이어리를 훑어 봅니다.
>>37 수조1 속 금붕어 비슷한 무언가의 모습에 특별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수조 속 어류들보다 높이 뜨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 보였습니다만, 별 거 아닐 겁니다. 그밖에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움직임이 지나칠 정도로 무겁고, 가라앉는 느낌이란 것 외엔..... 특별히 특징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금붕어 닮은 어류를 관찰하시겠습니까, 다른 곳을 관찰하시겠습니까? 지나치게 오래 자리를 비우고 있을 경우, 선임이 슬슬 요우를 찾으러 올 지도 모릅니다.
수조 앞에 멈춰 서곤 다이어리에 그려진 그림과 실제 생물을 번갈아 비교해 보았다. 분명 일 번 수조가 맞는 것 같은데, 어류의 움직임이 느리다. 물이 조금 탁한가. 그렇다기엔 수조와 연결된 기계는 무리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질 문제가 아니라면 단순한 질병일 수도 있을 텐데.
짧은 망설임. 요우는 다이어리에 포스트잇을 한 장 더 붙였다. 그 종이 위로 자신만의 관찰 결과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금붕어를 관찰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출입증까지 빌려 주셨는데⋯⋯. 선임을 곤란하게 만들어선 안 되겠지. 첫날부터 꾸중 들을 수도 없다. 원위치로 다이어리를 돌려놓았다. 이제는 복귀할 시간이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세컨드 임팩트가 남긴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도, 새로 배정받은 업무에 적응하기까지도. 허나 시간은 멈추지도 않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사람들은 지난한 여름에 적응했고, 선임에게 '느림보 거북이' 소리를 듣던 신입연구원에게도 연구소 생활은 차차 익숙해져 갔다.
솨아아, 요우는 세찬 물소리에 눈을 떴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 먼저 기상한 옆방 사원이 수도꼭지 튼 것이었다. 그 소리가 자명종 대신이란 건, 첫 출근 때부터 정해져 버린 루틴이었다. 요우 역시도 간단히 씻고 나와 옷을 걸치며 사원증을 집어 들었다. '아마네야의 사케동이다, 오늘은.' 마음속으로 점심 메뉴를 정하면서,
⋯⋯. 한편, 그렇게 텅 빈 요우의 개인실. 사원증을 놓여 있던 책상엔, [ Überm Sternenzelt Richtet Gott, wie wir gerichtet. ] 이라는 독일어를 자필로 옮겨 적은 포스트잇이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43 입사한지 2~3주가 지났습니다. 신입인 요우라 할지라도, 이제는 어느덧 업무에 적응하게 될 시기입니다. 평소와 같이 사무실로 출근한 요우, 컴퓨터를 킨다면 사내 메신저에 알림 하나가 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사수인 선임 연구원이 보낸 메시지입니다. 알림을 누르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출근했냐? ] [ 바로 내 자리로 와. 부탁할 게 있다. ]
시간을 보아 8시 정각에 보낸 메시지 같은데, 그렇다면 선임은 출근하자마자 바로 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소리가 됩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는.....모르겠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오늘의 업무를 시작해도 되겠지만, 선택은 요우의 몫입니다.
오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특무기관 쪽 일과 형식적인 보고서를 올리는 일의 경중을 따지자면, 전자가 우위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전자가, 훨씬 귀찮고 어려운 일이 될 터였다. 그럼에도 무슨 심경이었을까. 요우는 어제 세워 두웠던 금일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아마네야에서 사케동을 먹겠다는 점심 예정까지도. 순순히 대답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