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발생하는 상황에 맡기는 것은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소 참치가 너무 큰 찐빠를 내거나 하지 않을지 심려되어..(심약햄스터) 버벅일 수 있소 소 참치도 실시간으로 버벅이고 있는관계로... 다온이라면 그 또한 자연스럽게 귀엽거나 하지 않을까 싶소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소 참치 햄스터손이나마 거들어드릴테니 염려마시오!! (즐거운 상황극을 이어가는 데에는 캐릭터들의 상호작용만큼이나 캐주들의 의사소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오)
텀이야 아무 소식 없이 2주 넘어가는 거 아니면야 개의치 않으니 상관없... 생초콜릿이면 더욱 그러하오. 생초콜릿은 중대문제다. 즐거운 디저트타임 되시기를 바라며 그러면 소 참치는 청소도 하고 저녁도 천천히 먹고오겠소
그리고 현이 다온에게 그런 불손한 꼬리표를 붙인 것은 그런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접근을 두고 붙인 것이 맞았다. 전지적 제삼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다온의 의도를 꿰뚫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몇 가지 단서는 있었기 때문이다. 왜인지 바락 화를 내는 게, 무슨 재미로 누군가한테 그렇게 구나 조금 이해될 것도 같다.
"뭔가 목적이 있어서 말을 걸었잖아? 너무 빨리 포기한다 싶어서."
날 갖고 재미를 보려면, 끈기가 있어야지. 어려운 노리갯감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빈말 구구절절 늘어놓는 건 싫지만, 내가 호기심이 동하면 빈말이 아니니까 상관없어."
뭘 말하고 싶고, 뭘 듣고 싶어서 굳이 내게 다가왔을까. 딱히 뭔가 얼굴에 칠하지도 않은 맨낯으로. 그래, 호기심이 동했다고 해두자. 그게 가장 객관적인 표현이지 싶다. 현은 다시금 입에 담배를 물고는, 한 모금 길게 빨았다가 뱉었다.
그게 다야?!?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사람이 다행이라는 단어를 이렇게도 얄궂게도 쓸 수 있었나 싶다.
"목적은 무슨..... 유명인이라고 불러주니까 진짜 셀럽이라도 된 것 같냐??"
상처 줄 거야. 발톱을 바짝 세우고 있지만 눈앞의 상대가 이깟 것에 상처받아 사릴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은 뻔한 듯하다. 어쩐지 앞서 의도를 파악당하고 있다는 점을 들켜 등골이 시리다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형세가 뒤바뀐 판국이다. 자신이 갖고 노는 것인지 갖고 놀아지는 것인지가 모호해지는 경계선에서 주도권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너... 멋대로구나."
결국 마음에 들면 옆에서 얼마든 지껄여도 상관없다는 소리렷다만 특별히 반가울 건 없었다.
"결국 네 장단에 맞춰 북 치고 장구 치라는 뜻이잖아. 누가 좋다고 거기 어울리겠냐?" "......"
당신의 앞에서 짝다리를 짚고 서 얇은 입술을 새하얘지도록 깨문다.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는 거지? 해 보자 이거야.
"나 정도니까 어울려주지 원..."
아량을 베푼다는 투로 털어놓듯 말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눈동자를 굴려 애꿎은 대공을 향한다. 아까 피우다 말았던 담배가 벌써 그립다.
"어이, 셀럽. 그래. 네가 궁금해서 온 건 맞아. 인정할게. 그런데 의자라도 내와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부턴 내가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네가 원하니까 여기에 있는 거야. 언제까지 사람을 세워둘 것이냐고 은연중에 비난하는 눈동자다.
셀럽이라도 된 것 같냐? 하고 던지는 소리에, 현의 안색이 잠깐 흐려졌다. 거기에 뭔가 긁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나라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 특히 이 해성광역시의 개발에 깊이 관여했기에, 해성시에서는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맹호그룹의 로고와 정현이라는 한 소년의 사이에 금을 죽 그어놓는 그 말이 그렇잖아도 심란한 현의 마음속에 복잡한 심경 하나를 더 얹어줬기 때문이다. 뭐라 괜시리 말을 꺼내기보단, 현은 어깨를 으쓱하는 편을 택했다.
"잘 아네."
멋대로구나, 하는 일침에 대한 현의 대답이었다. 꽤 정확한 일침이다. 그래서 긍정했다. 거기에다 제멋대로인 주제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다-는 비난까지 더해졌으면 확실했겠다.
"어쩌면 합주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 구미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면 쓴 놈들과 억지로 어울리는 것도 싫지만, 혼자 떠돌기도 지겹던 참이다. 그런 의미에서 딱히 가식도 안 부리고 마음껏 성질 팩팩 부리는 이 하얀 머리의 아직 낯선 녀석은, 정현에게는 꽤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래서 변덕스레, 그는 이 다온이라는 녀석의 비위를 조금 맞춰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소한 생각을 하게 됐다.
"글쎄, 기분같아선 내줘도 괜찮겠지만, 없는 의자를 만들 수는 없는데."
그렇지만 이 주변에는 벤치는커녕 어디서 굴려올 페인트통 따위도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 마법과 같은 간드러지는 설정 따위는 없고, 그래서 없는 것을 어디서 뿅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신 정현은 거의 다 타들어간 꽁초를 그대로 아까처럼 저 옆의 쓰레기통에 휙 던져넣으며 말했다.
기꺼이 합주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보다 겸손한 반응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 달려드는 소년이었다. 구미를 맞추기보단 맞춰지는 데 목말라보이는 이런 태도가 오히려 어떻게 보이는 지는 모르고.
"그건 네가 지금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지. 안 그래?"
잘 되었다는 듯 전적으로 상대에게 맡겨버린다. 기분이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이도저도 아니고 제 내키는대로 하고싶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름 자신의 발언에 불편해보이기는 하는데 그렇다기엔 또 다음에 하는 말의 결이 다르다. 지저분한 철제 박스라도 어디서 주워오나 싶었는데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는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차, 대답이 너무 늦어져선 곤란하다.
"그러던가. 대신에 오래 걷지는 않을 거야."
쓰레기통으로 조신하게 굴러들어가는 담배꽁초를 어이가 없다는 듯 구경한다. 저런 모순은 언젠가 짚고 가야 할 문제다. 당신이 걷기 시작했다면 대접받듯 그 뒤에서 느긋하게 걸었겠지. 물론 당신의 속도가 아닌 제 속도대로다. 누가 앞에서 걷든 맞추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야 한다는 듯이.
"너 아까부터 말이야. 기분 나쁘면 왜 그렇다고 말을 안 하지?"
설렁설렁 걷는 척 하다가 그제야 던져보는 물음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알고싶어하였던 것일 터이다.
이 호기심 많고 뻔뻔하고 솔직한 녀석에게, 정현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일단 흘러가는 대로 둬보자고, 정현은 생각했다. 오래 걷지는 않겠다는 다온의 말에 정현은 대답했다.
"차 타면 그만이지."
정현은 흡연허가구역 팻말이 달린 난간을 등지고, 다온이 따라오나 한번 힐끔 보고는 골목을 가로질렀다. 블럭 하나만 걸으면 대로변이고, 미궁 근처에는 밤낮없이 차가 달리니 택시 잡는 데에는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다온의 질문이 등에 툭 꽂혔다. 정현은 다온을 돌아보았다. 기분나쁜데 말을 안 한다라-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되는 세상에 뭘 믿고 나 기분나쁩네 하는 말을 대놓고 하겠는가. 기분나쁘다는 표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정현이 아직 미숙하여 그런 티를 잘 감추지 못할 뿐이다.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
꽤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역시 대답은 재미없다. 이번엔 꽤나 솔직하게 대답해준 것 같은데 이 모양이다. 친밀도가 좀더 높으면 '기분나쁜 티도 안 내야 되는데 그것까진 아직 잘 안되네' 같은 말까지 들을 수 있겠으나, 오늘에서야 겨우 말 섞은 사이라 그것까진 힘들다. 좀더 재밌는 반응을 보려면, 정현이 반응을 보였던 키워드, 그러니까 셀럽이니 유명인이니 하는 소리를 직접 언급해보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어느샌가 둘의 발걸음은 대로변에까지 다다랐고, 정현은 대로변 보행로 모퉁이에 서서 차도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눈치빠른 수도권의 택시기사들이라, 손을 들 것도 없이 지금 택시 잡아야 됩네 하고 티만 내면 귀신같이 알고 달려온다. 저만치서 빈차 표시가 켜진 차가 반색을 하고 차선을 바꿔 다가온다.
하지만 오래 걷지 않게 하고 차를 태워주겠다는 건 생각보다 융숭한 대접이었다. 뭐, 이 녀석 그 정도 예의는 있는가보다, 하고 다시 봤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의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높여주는 발언이었으나, 그 다음 나오는 것은 또 다르다.
"... 그건 혹시 내가 그럴 필요를 못 느낄 만한 상대란 얘기냐?"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확인해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초면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다온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첫눈에 띄고 싶고, 대접받고 싶고, 일방적으로 사랑받고 싶다. 다행히 자신이 가진 썩 그럴듯한 외양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갈 곳에 대해 물론 기대랄까, 예상했던 바는 있었지만 녀석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더 괜찮은 곳에 데려가줄 것 같았다.
"좋은 곳으로 알아서 잘 모셔 봐."
붉은 초승달같은 눈웃음이 반짝인다. 차가 오는 동안 우아하게 서 있다가 택시가 오면 느긋하게 뒷자리의 상석을 택했을 것이다.
오래 걷지 않는 거리 내에서는 그럴듯한 데가 없어 보이니까. 미궁 근처라지만, 보잘것없는 변두리다. 미궁의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한미한 곳이다. 이런 데도 샅샅이 뒤져보면 숨은 보석 같은 가치있는 장소가 있겠으나, 샅샅이 뒤지려면 결국 오래 걸어야 하니 이 콧대높은 어린 왕자의 구미를 맞춰줄 수가 없다.
"네가 날 아직 길들이지 못했을 뿐이지. 그건 네가 얼마나 잘났냐와는 전혀 다른 문제고."
그리고 현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선을 긋는다. 그 선은 마냥 다온의 앞을 가로막는 선이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방향으로 다온을 이끄는 선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다온이 아직 흥미없는 방향으로 그어지는 선이기도 했다.
일단 현에게 첫눈에 다른 이들과는 퍽 다른 인상을 심어주는 데에는 성공했고, 대접은 지금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는 아직 불명확하다. 그것에 대해 뭐라 항의도 하기 전에, 택시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갓길에 멈춰섰다. 모범 간판이 달려있는 까만 택시다. 오른쪽 뒷좌석에 다온이 당연하다는 듯 들어가 앉자, 현은 트렁크 뒤로 빙 돌아 왼쪽 뒷좌석에 앉았다.
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다온의 것과는 달리 한 세대 뒤떨어진 기종이다. 딱히 자기 핸드폰에 신경을 안 쓰는지, 보호필름에 금이 쫙 가있다. 핸드폰에 뭔가를 톡톡톡 찍고는 기사에게 내밀어주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둔다. 윙, 하고 나지막한 엔진 소리와 함께 택시는 갓길을 떠나 미궁 외곽지의 한적한 도로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시선은 정현과 맞추는 대신 저 멀리 무심하게 흘려버리지만 상대의 대답은 제법 마음에 든 듯 싶다. 뒤엉킨 배관이나 꽉 찬 지 오래인 쓰레기통 같은 것들이 산재한 장소와 그럴듯한 곳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은하수만큼의 괴리감이 있었으니 말이다.
"글쎄?"
입술을 삐죽 내민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장면들과는 또 다른 방향이었던 탓이다. 마른 입술을 만지다 손을 떼고서 빙긋이 웃음을 품고 말한다.
"그런데 꼭 길들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 같다?"
길들인다는 표현이 퍽 재미있다. 너는 여우고, 나는 어린 왕자? 그러나 상대방은 여우라는 꼬리표가 붙기엔 꾀를 부리거나 그런 종류의 가벼움이 없어 보여 차라리 표범이나 호랑이가 맞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상석에 앉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굳이 자신이 발걸음을 길게 하는 편을 택했다. 호의적이긴 한데,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다온은 평한다.
"...하아~"
행선지도 안 알려주겠다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열심히 모셔보도록 내버려두기로 한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때 가서 실망을 뱉으면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상대방의 얼굴도 궁금하다. 지금처럼 가면을 쓴 듯한 무표정을 그 때도 유지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겠지만서도.
스트레칭을 하기엔 다소 좁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다리와 팔을 모아 쭉 뻗고 난 뒤에 다온은 핸드폰을 켜기 시작했다. 새로운 피드들이 연달아 올라가고 소년은 싸구려 도파민 안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다. 그새 못 본 것들이 새로 생겨나 있다. 그것들을 놓친다는 사실을 어느샌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
핸드폰을 건드리던 자세로 멈춰서 조금 불만을 품은 듯 상대를 바라본다. 연락처를 받아 놔? 말아? 적당히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서 물어봐 주면 편할 텐데 자신이 먼저 번호를 묻는 것은 또 자존심이 상한다. 멈추었던 손이 다시 움직인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차가 멈출 때까지 그 움직임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기사가 되돌려주는 핸드폰을 건네어받은 정현은, 뒷좌석 등받이에 등을 푹 뉘었다. 길들인다는 말을 원하기에는 이제 지긋지긋할 정도로 데였지만, 결국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떠오르는 말이 그것뿐이 되고 만다. 배우고 겪은 게 그것뿐이고, 그 끝은 하나같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적잖이 엇나간, 잘못 자라난 대인관이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에서 전혀 다른 낯빛으로 등장한 이 녀석은 길들인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그래서, 현은 그것을 호기심이라고 해두기로 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바깥의 풍경은 휘황찬란해지고, 차의 속도는 조금 둔해진다. 미궁 중심가다.
쓸데없이 눈이 부셔 못마땅하게 차 안으로 고개를 돌리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뭔가 부루퉁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다온과 눈이 마주쳤다. 정현은 다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마디 툭 던진다.
"돌아갈 때 전화번호 받아가."
그리고 그는 외투 안주머니를 뒤적인다. 기사에게 돌려받은 핸드폰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는데, 품에서 핸드폰 하나가 더 나온다. 다온의 것에 비해도 밀리지 않는, 사용한 흔적도 별로 없어보이는 고급품이다. 주인의 손길을 느낀 그것은 제 알아서 대기화면을 띄웠는데, 서너 개는 되는 SNS 앱에 제각기 수백 개씩의 피드가 쌓여있다.
"어느 쪽 전화번호를 줄지는 생각 좀 해볼게."
정현은 다온에게 두었던 시선을 떼고는, 안주머니에 2개의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점점, 주변의 불빛이 변한다. 아까의 불빛은 자신을 과시하려는 듯이 정신사납게 반짝였다면, 지금의 불빛은 마치 자신을 보는 이를 유혹하는 것처럼 적당한 밝기로 화사하다. 미궁을 지나가면 나오는 해안가 겸 관광지구인 미아동이었다. 어두워진 지는 한참 됐는데도, 제각기 자유분방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훤화하며 놀기를 그치지 않는다. 다온에게는 익숙한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택시는 거기에서 선뜻 멈추지 않고, 다른 곳으로 좀더 들어가 야트막한 언덕을 오른다. 주변 불빛들도 좀더 차분해지고, 무엇보다 보통의 보도블럭과는 다른 재질로 반듯이 정리된 타일들이며 화단이며 주변 광경에서 느껴지는 한 마디로 짚어말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여기가 좀더 부자 동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도 무리지어 떠들고 노는 이들은 많았으나, 그들의 몸에서 명품 로고가 차지하는 비율이 확 늘었다. 택시는 밤바다가 그대로 내다보이는 언덕 위의 완벽한 뷰를 점유하고 있는 한 세련된 건물 앞에 멈춰선다. 골든 아워즈라는 로고 옆에, 심볼 대신 내걸어둔 금빛 시계 좌우에 포크와 나이프가 도열해있는 간판을 보아 레스토랑인 것처럼 보인다. 택시는 주차장으로 천천히 굴러들어갔다.
대답을 듣고서 올린 시선이 도르륵, 허공을 굴러간다. 그게 그거 아닌가. 같은 말을 굳이 하기에는 모호했던 탓이다. 다온은 녀석이 변덕을 부리는 것 또한 호기심이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고 하는 이유도 같은 근본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중간에라도 이 신경을 건드리는 녀석은 모든 걸 파토내고 시간 낭비를 했다는 듯이 일어날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끝내는 건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한 일은 상상조차도 기분상한다는 듯이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험하는 것은 저여야 하는데 도로 받는다는 기분이 든다. 썩 좋지만은 않다.
"오."
상대가 툭하니 던진 말에 짧은 소리를 뱉는 것이 알아서 잘 속을 헤아릴 줄 아는 데 대한 감탄과 같다. 하지만 다음으로 한 말은 기분에 불이라도 끼얹는 듯 하였다. 일부러 보이려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자신도 저 확인되지 않은 SNS의 알림 중 하나로 전락할 수 있다, 요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알고 이러는 건가. 모르고 이러는 건가. 상할대로 상한 자존심과 경계심이 최신형 핸드폰 뒤에서 반짝인다.
"그러던가."
팍 상한 목소리로 툴툴대며 다시 핸드폰에 시선을 가져다 박는다. 그러느라고 창밖의 풍경이 익숙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언덕을 오를 때 즈음에는 바깥을 흘끗 보았기 때문에 망정이지 스스로가 어디로 향하는지 전혀 단서를 잡지 못할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망스럽다면 모두 상대방의 책임으로 돌리면 될 뿐이라며 다온은 손톱으로 시트를 두어 번 두드리며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
택시가 주차장에 멈춘 뒤엔 그저 다리를 꼬고서 가만히 앉아있는다. 질릴 정도로 대접을 요구하는 태도다. 정현이 문을 열면 그제서야 몸을 들썩이는 것이다. 택시에서 겨우 내리면 길었다는 듯 기지개를 켠다.
그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여기에서 시험받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고.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선전포고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변덕스레 갖게 된 기대심을 다온에게 고스란히 내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자신의 손패 중 중요한 것을 아무 대가 없이 내보여주었으니까. 물론 그것이 좋은 행위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행동이라기에는 무신경하고 오만한 행동이다. 그렇지만 실망하기에도 지칠 대로 지친 맹수는 그런 것 따위 따질 여유 없이 그렇게 엄포를 놓는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아직 수많은 짐승들 중 하나이며, 너의 짐승이 아니라고. 오늘 시험받을 사람은 한 명이 아니라고.
그런 의미에서, 일단 첫 번째 시험은 통과한 듯싶다. 택시비 결제를 끝낸 정현은 택시 문을 얌전히 열어주었고, 택시 문을 열고 나선 주차장은- 적어도 지금 도착한 이 레스토랑이 다온의 높은 자존감에 그렇게 모자라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럭셔리 카들이며 슈퍼카들 예닐곱 대가 번쩍번쩍하니 도열해 있었고, 그 뒤로 보이는 레스토랑의 풍경도 주차장에 그런 차들이 들어찰 만한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으니까.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꼭대기의 완벽한 뷰는 물론, 이름난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익스테리어, 입구에 걸려있는 미슐랭 스타, 화려한 조명이 아늑하게 반짝이는 인테리어까지.
정현은 얄팍한 머니클립을 집어넣으며, 다온이 기지개를 키는 동안 그를 보고 있다가 식당 입구를 눈짓해보였다.
주차장에서 기지개를 켜는 동안 보일듯 말듯이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고 그와 동시에 다온은 주차장을 채운 차들과 레스토랑에서 부의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그 향은 살짝 생채기가 나버린 다온의 자존심을 엉성하게나마 채워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재력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던가- 다온은 표정을 숨길 줄을 알았기에 큰 미동은 없었지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분명 다음 순간 다온이 웃었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나쁘지 않네."
팔짱을 끼고 두어 번 무언가를 가늠하듯 손끝으로 저의 팔을 두드린다. 언뜻 레스토랑의 가치를 재는 것이라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데에 가 있다. 조명의 안온한 반짝임을 뒤로하여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이전의 후미진 곳에서 반사된 빛에 비친 낯과는 전혀 다른 풍경일진대, 공교롭게도 둘 모두 어색한 데 없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마치 두 세계를 모두 상대가 장악하기라도 하였단 듯이- 그 점을 흥미롭다고 소리없이 인정한 순간 다온의 손가락 움직임이 멈추었다.
말없이 식당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팔짱을 풀지 않은 자세가 누군가에게는 고압적으로,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방어적으로 보였으리라. 일정한 속도로 발자국 사이의 간격을 남기는 다온이었으나 상대가 앞서는지, 옆에서 걷는지, 뒤따라오는지는 살폈을 것이다. 너무 뒤처져 걷지만 않는다면 다온이 구태여 멈추어 서고서 무엇을 하냐며 눈치주는 일은 없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