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큰 바람이 일면 흔적도 없이 휩쓸려갈 것 같았다. 색채 옅은 피부빛과 머리카락, 눈동자, 얇은 몸의 선, 숙녀를 연상시키리만치 긴 속눈썹은 중성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덧없는 분위기를 더했다.
172cm의 키에 마른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 민소매나 반바지를 자주 입었다. 희디흰 피부였으나 생기라면 무릎이나 손가락처럼 몸의 말단부에 도는 붉은 기로 찾아볼 수 있었다.
피부는 유독 얇아 조심하지 않으면 생채기가 금세 생겼다. 겨울이면 입술이며 손등이 자주 트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늘 립밤이나 핸드크림을 소지하고 다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핏기도는 입술로 생사과를 깨물어 삼키면 묘하게도 불온한 장면을 보는 듯이 초대받지 않은 관객을 매료시켰다.
여름에 참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었다. 역으로 여름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작열하는 태양의 빛 아래서 한때의 흔적처럼 녹아버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무더위에 짜증내며 손으로 쥐고 펄럭이는 옷의 목덜미 밑으로 곧게 뻗은 쇄골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귀에는 늘 피어싱이 있었는데 내킬 때마다 달라졌다. 금보다는 은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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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밤중 놀이터에서 잘 발견되곤 했다. 미끄럼틀에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스마트폰 중독. 스마트폰은 늘 새로운 기종으로 구해서 가지고 다녔다.
면역력이 약했다.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도 잦았고 여름에도 감기에 걸려 뚱한 표정으로 마스크를 쓰고 등교하곤 했다.
립밤이나 핸드크림을 늘 가지고 다녔다. 보통 무향이었지만 더러 향기를 품고 있을 때도 있었다. 코튼, 프리지아, 체리.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집착하려 하는 이도 더러 있었으나 향기만 남기고 빠져나갈 줄을 알았다.
성격: 마이불친절페이스. 생긴 대로 한성깔 하며, 무심하거나, 데면데면하거나, 까칠하다. 그렇지만 인성이 박살난 건 아니라 어른에게는 나름 예절바르게 대하며, 틱틱대는 걸 받아주거나 치고받으면서 다가갈 수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굳이 내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좀더 물렁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꽤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도.
외모: 그 성격이 참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 하겠다. 두덩이 푹 파여 기미가 살짝 끼어서는 상대방을 쏘아보는 듯한 날카로운 이국적인 눈매와 초점이 또렷이 잡힌 금색 눈동자, 약간 찌푸려진 모습이 기본인 눈썹, 귀티가 묻어나는 콧날과 싸늘한 입매 등 이목구비만으로도 쉽게 넘보기 힘든 인상에, 184cm가 조금 안 되는 키와 넓은 어깨, 꾸준한 운동으로 쌓아올린 것이 분명한 슬림하고 단단한 근육질 체격까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상이다. 교복은 일단 가지런히 입고 다니나, 바지며 외투는 일반 기성 교복처럼 헐렁하지 않고 맵시있게 떨어지도록 손을 댄 듯하다. 셔츠나 넥타이를 빼먹거나 해서 선도부나 선생님에게 꼬투리잡힐 짓은 하지 않지만, 안에 받쳐입은 티셔츠나 벨트, 신발 등등에 G찌나 발렌시A가, G방시, 알렉산더맥Q 등 학생 신분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로고가 박혀있는 것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오히려 사복이 상당히 검박한 편인데, 눈에 띄는 장식 없는 대중적인 스포츠 브랜드의 스포티한 일상복들을 선호한다. 학교에서와 달리, 밖에서 아는 사람 마주치는 게 싫다고 일부러 눈에 잘 안 띄게 입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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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성깔 있는 생김새와 차림새에 실제로도 한성깔 하는지라 처음 보면 노는 무리, 그것도 리더격임직한 인물로 오해하기 쉬우나 전혀 아니다. 건들거리는 자세로 앉아서 모의고사 1~2등급권을 유지하는, 성적만 따지고 보면 모범생. 스킨은 양아치, 성적은 모범생, 마음가짐은 양아치 반 모범생 반인 이상한 혼종이다. - 전학온 이튿날, 양아치 셋이 현에게 접근해 같이 담배를 피러 가자고 했으나 단호히 거부했다가 싸움이 붙었다. 혼자서 셋을 때려눕혀 징계위원회가 열렸으나, 양아치들이 현에게 먼저 폭력을 시도한 정황과 '담배를 피러 가자길래 거부했더니 먼저 때렸다'는 현의 항변에 큰 징계 없이 훈계로 끝났다. 그 이후엔 양아치들 사이에서 재수없는 새X, 건드리면 안될 놈 등으로 경원시되고 있으며, 모범생들 사이에서도 양아치 무리만큼이나 무서운 애라는 인상이 남아 꺼림칙하게 여겨지고 있다. - 인간관계를 선호하지 않는 현은 이런 분위기를 오히려 반기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코드 맞는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 초등학생 저학년 시절 길을 잃고 삥까지 뜯겨 핸드폰도 지갑도 없이 개고생한 이후, 외삼촌의 격투기 체육관에 다니며 무에타이와 킥복싱을 배우고 있다. 선수로 데뷔해도 잘나갈 것이라는 삼촌의 평가가 있지만, 현에게 격투기는 체력관리 겸 타인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한 자구책 정도라서 그쪽 진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 흡연자. 민폐될 만한 곳에서는 함부로 피지 않는다. 종이담배도 피우곤 하지만, 불쾌한 냄새를 남기지 않는 전자담배 쪽을 더 선호한다. 착한 참치들은 이러시면 안됩니다. - 원동기장치자전거 면허를 갖고 있다. 내년이 되면 이종 소형 면허도 딸 생각이라고. -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말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국내 유수의 중견기업 맹호그룹의 CEO인 정천수의 다섯 남매 중 셋째. '용돈은 두둑이 줄 테니 너희 알아서 자라라'라는 방침의 방임주의적인 아버지와, 자식들이 어느 분야에서든 두각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냉정한 어머니의 태도 차이에서 오는 부조화 때문에 집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밖으로 도는 일이 잦다. 사실상 반쯤 가출상태로, 하릴없이 도시를 떠돌다 삼촌의 체육관이나 숙박업소에서 숙면을 해결하는 일이 대다수. 옷가지며 책들, 생필품 등은 이미 체육관의 자기 사물함에 다 옮겨놨다. - 이래저래 방황중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문무양도에 얼굴도 반반해 아쉬울 게 없는 삶이나, 마음 붙일 데가 없다. 돈을 알뜰하게 쓰는 듯싶다가도 명품에 뭉턱뭉턱 돈을 쓰는 것도 그 증상이리라. 타인은 지겨우나 혼자는 쓸쓸하고, 일단 공부는 성실히 하고 있는데 이게 어디 소용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되고는 있는데 미친 듯이 출세가도를 내달리는 형과 누나에 비교하자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집에 가고 싶은데 어머니와 가족들이 있는 그곳은 왜인지 집이라 여기지 못하겠고, 분명 어딘가 집이 있을 텐데 돌아가는 길을 오래전에 잃었다.
해성광역시 수도인 한경특별시와 인접해 있는 해성광역시는 이전부터 이상적인 입지로 인해 동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꼽히는 도시였으며, 아시아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에 따라 화려한 도심과 진보된 인프라, 각국에서 유입되는 문화와 사치품 등이 집약된 끝에 아시아의 상징적인 도시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각종 마천루들과 조명들과 전광판들이 화려하면서도 난잡하게 얽힌 미궁과 같은 야경은 몇 편의 명작의 배경이 되었으며, 부유함과 혼란함이 공존하는 지나치게 빨리 발달해버린, 화려하고도 공허한 21세기 현대 도시의 대표와도 같은 이미지로 굳어졌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나아온 발걸음들은, 결국 모두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귀결되는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지나치게 빨리 발달했으며 많은 것들이 드나드는 도시인 만큼 이런저런 사회적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그런 환경에 비해서도 치안은 좋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만 아시아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국내 평균 치안에 비하자면 이런저런 문제나 사건이 터지는 일이 잦기에 헬성이라는 불미스러운 멸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사립주성고등학교 학교의 설립연혁까지 설명하려면 지금의 도시며 학교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든 게 진지하고 암울했던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하니 젖혀둡시다. 현재는 주성교육장학재단법인의 관할 하에 있는 이 학교는 해성광역시에서 명문이라 일컬어질 만한 몇 학교들 중 한 곳이긴 하지만, 해성광역시 시내에 너무 인접한 탓에 해성의 화려한 혼돈의 기류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면학 분위기를 유지하며 건실한 학창생활을 유지하는 모범생들도 많으나, 젊음을 한껏 즐기는 하루살이 양아치들도 많습니다. 둘 다 하는 녀석들도 이따금 있습니다. 범생이들이나 평범한 학생들이 나쁜 물이 드는 경우가 가장 많은 학교이기도 합니다. 창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어도 해성 중심가의 야경이 한가득 펼쳐지니, 이상적인 면학 분위기라 할 수는 없습니다. 시설은 해성의 고등학교 중 최고라 할 만합니다. 여러 번의 재건축과 증개축과 유지보수를 거친 고급스러운 건물과 사시사철 쾌적한 온습도를 유지하는 고급 냉난방 시스템, 동아리나 취미활동을 위한 도서관이나 체육시설, 교내 편의점 등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남녀공학이나, 남학생 반과 여학생 반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학비는 비쌉니다만 다양한 장학금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 선생님의 안내에 잘 따른다면 웬만해서는 보통의 공립학교보다 조금 더 비싼 수준의 학비로 학교를 다닐 수 있습니다.
(이제...나메달아도되는거맞겠지)(줍수) 인천이랑 부산이랑 홍콩을 짬뽕했는데 맛있게 봐줘서 고마워.. 해성 야경은 대략 이런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어. >>3에 짤 첨부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다 88 다온주도 이내 청춘에 목마른 손 잡아주시고 예쁜 아이 데려와주셔서 정말 고맙소...
입학 전부터 시작하면 되려나?? 사실 다온이로는 사계절을 묘사해보고 싶은데 느긋하게 흘러가는 1:1이 될 것 같다보니 애매하다오 대충 사계절은 현실시간에 맞춰 묘사한 이후에 (가을이 두번 될 수도 가을부터 시작할 수도 있음)나중에 학년 올리고 싶으면 올리는 것도 괜찮을 법 하고?!?!
어쩌면 우리 운명의 만남인지도 모르겠소... 소 참치도 그랬소 사전 관계라던가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하셔도 좋소! (그러지 않고 초대면으로 시작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소)
사계절을 묘사하고 싶으면 봄부터 시작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현실 시간선이랑 스레 시간선을 굳이 일치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시작지점을 일치시키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가을부터 시작하고 정현이가 2학기 시작 며칠 후에 전학왔다고 하는 것도 좋아! 입학 전이라면 첫만남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해보고 싶은거야?
사실 놀이터에 자주 보인다기에 한밤중 아무도 없는 놀이터(아니면 시내 어느 외진 곳의 흡연부스라던가)에서 전자구름과자()중인 현이를 보고 다온이가 다가온다던가 하는 첫장면을 생각했어 거기에다 입학 전이 아니라 입학 후+정현이의 기타 란에 있는 사건이 터진 뒤라 다온이도 그 사건에 대한 썰을 듣고 현이에게 호기심이 생긴 뒤라고 해두고 이런 장면으로 시작하면 맛깔지지 않나 하는 망상을 한스푼 첨가👀 (물론 서순을 뒤집어서 현이가 흡연하는 모습을 먼저 봤다가 학기 시작하고 나서 그런 사건이 터지고, 징계위원회 치르고 나와서 언짢아보이는 현이를 다온이가 건드리는 것도 재밌겠소만)
( 이미지 출처 : https://www.pxfuel.com/ko/desktop-wallpaper-nvazk )
미궁- 해성광역시의 중심가 중 가장 번듯한 중심가를 이르는 말이다. 원래는 하나의 번듯한 지명으로서 좀더 고상한 한자를 쓰는 고상한 어원이 있었던 듯하지만, 지금에서는 발음만 같고 뜻도 한자도 다른 迷宮이라고 여겨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모두가 이 곳에서는 길을 잃고 미아가 되기 마련이다. 네온사인과 전광판, 콘크리트와 유리, 설계와 급조, 부와 빈이 얼기설기 뒤엉켜서 계획이라곤 없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도시를 일컫기에 그보다 좋은 낱말이 어디에 있을까.
그 미궁에서도 미궁의 외곽지, 그나마 이 도시에서 가장 번듯한 것들이 끝날락말락하는 어느 경계선- 아직 중심가의 소음이 채 다 흐려지지는 않는 그 어느 지점에서, 어느 소년이 무심히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경쟁이라도 하듯 하늘로 뻗어올라가는 마천루들의 실루엣이 뿜어내는 인공 은하수가 잠깐 소년의 눈에 걸린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는 이내 눈을 감고, 입에서 창백한 연기를 길게 후─ 하고 불어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계절은 지났다. 그리고 주변으로 훅 퍼져가는 톡 쏘는 매캐한 냄새와, 그의 손끝에서 명을 다할락 말락 끝을 향해 타들어가는 짧은 꽁초. 무엇보다 그가 서있는 곳은 흡연구역 간판이 붙어있는, 외따른 어느 난간의 옆이었다.
이 소년은 비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이것도 환멸이 나는지, 감았던 눈을 뜨고 손끝에서 명을 다해가는 꽁초를 못마땅하게 힐끔 바라본다.
싸구려 빛으로 촘촘히 짜여진 도시 해성광역시, 불야성이 만들어낸 백야 아닌 백야에 지나치게 빨리 적응해버린 것은 역시 죄일까. 모조 보석 같은 네온사인을 바라보고 있자면 밤낮할 것 없이 두 눈이 뻐근했는데, 어느때부턴가 그런 신호도 없게 되었다. 마치 태양광 아래서 넓게 펼쳐진 초원과 산맥을 보고 있노라면 망막에 아무런 피로감도 들지 않는 것처럼. 마치 너따위의 존재에게는 이 정도의 피곤하고 비리비리하게 흩어지는 빛 정도가 어울리노라고 이르는 듯이. 어쨌거나 그 중심 거리에서는 여느 때처럼 젊은이들이 하하호호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청춘의 시기를 재지 않고 앞다투어 불태우던 그 날, 얼마 떨어진 외곽에서는 누군가가 뻔히 보이는 흡연구역 팻말을 무시하고서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또 어둠 속에서 상대 소년을 부감하듯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꼬아올린 다리를, 어둠속에서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나저러나 상대는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둠을 배경삼아 있었으니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
팔의 자세를 바꾸었더니, 뺨이 살짝 눌려왔다. 참 재미있지 그래. 남들이 담배를 피우러 가자고 하면 필요 이상으로 날뛰었다던 녀석이 스스로 제 폐를 불살라 버리는 걸 보면. 모범생인 줄 알았더니, 반대의 부류인지, 아니면 그것도 아닌 건지. 그 모순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모순은 짚고 넘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품에서 보랏빛이 도는 담배갑을 꺼내 그 안을 본 소년은 그 안에서 돗대를 꺼내고 빈 곽은 미련없이 바닥에 던진다. 이제 담배갑은 쥐가 파먹다 남은 무언가와 종이 뭉치들, 누군가 뱉고 간 풍선껌과 비오는 날의 흙이 묻은 장화 한 짝과 같은 처지가 되어 오래, 오래 누구도 눈여겨 보는 이 없이 이 풍경 안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미련없이 손을 툭툭 턴 소년은 그제야 꼰 다리를 푼다. 동시에 철판을 짚고 있던 팔에 조금 힘을 넣어 앞으로 박차고 나면, 신고 있던 단화의 굽을 더러운 거리와 마찰하며 따각따각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급할 것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는 듯 느긋하게 소년의 앞에 다가선 또다른 소년이다. 얇은 입술에 예쁘게 물려있는 담배 안에는 남몰래 포도향이 나는 캡슐이 들어있다. 아직 터트리진 않아서 무향에 가깝지만, 오히려 새로이 나타난 소년에게서 나는 어딘지 모를 향취가 아직은 담배의 향보다 진한 듯하다. 소년은 자기 소개를 하지도, 상대의 이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제가 문 담배의 끄트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블."
담배가 물려있기에 잇사이로 새는 발음. 올려다보는 눈에는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다. 그 위에는 속눈썹이 가지런히 얹혀있는데 그것을 감상하고 있으면 어느새 눈을 깜빡인 소년이 다시 요구해오는 것이다.
"불, 안 줘?"
잠깐 입을 비웠던 것은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기에 다시 담배를 물고서 가만히 상대를 응시한다. 진짜로 상대가 얌전히 불을 붙여줄 것이라 믿는 건지, 혹은 시험해보려는 느낌도 든다.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는 가운데 정답을 찾아내는 데에 익숙한 그라면 소년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
언제부터인가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마다 얼굴에 위선과 가식이 두껍게 발려 있어서, 사람인지 마네킹인지 분간이 안 가 불편하고 거북했다. 가족을 대하자니 아비는 오만을 어미는 고압을 바르고 있어 대하기 더 힘겨웠다. 그래서 그들을 피해 바깥으로 나왔는데, 여기는 저마다 허세와 치졸을 얼굴에 바르고 있다.
며칠 전 일 때문에 매캐한 담배연기가 더 거북하다. 오늘은 담배 기분 아니라고 거절했더니 얕잡아보는 거냐고 멱살을 잡혔고, 치겠다? 하고 반문했더니 눈 깔라고 주먹을 날려온다. 삼류 소설 건달도 이렇게 유치하게 시비는 안 걸겠다. 아래쪽 동네는 원래 이런가? 그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이럴 때 일방적인 피해자가 된 뒤 법의 손으로 정당한 금융보복을 해주는 것이 상식이나, 문득 이 아랫동네 상식은 이런가 싶어 로마 법 따라준다는 기분으로 끕을 맞춰 대응해줬다. 먼저 한 대 맞아준 것과, 두둑하게 따둔 성적이 도움이 되어 어른들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나마 어른들은 윗동네에서 배운 점잖은 상식이 통해 다행이다.
그러나 그래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얼굴에도 무언가 덕지덕지 발려있지 않은가. 어른들에게 가식떨고, 이게 상식입네 위선부리고, 치졸하게 운동한 가락 믿고 링 위에도 올라본 적 없을 잔챙이들을 때렸다. 다행히도 아퀴가 이래저래 편하게 굴러가서 일은 그 입맛에 맞게 돌아갔으나, 결국 나 또한 이런 사람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허세 아닌가. 소년은 자신의 얼굴 위에도 뭔가 엉망진창으로 발려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나 어떻게 해야 됐었더라. 나는 어떤 사람이더라. 뭐가 하고 싶어서, 어떻게 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더라... 담배 연기가 새삼 쓰지만, 그 역겨운 쓴맛을 씻어낼 게 마찬가지 쓴맛밖에 없다. 오늘은 담배 기분이다. 나쁜 방향으로.
옆에서 툭, 목소리가 치고 들어오는 게 그 때였다. 소년, 현은 힐끔 하고 말 걸어온 이를 곁눈질했다. 호박색 눈이 미궁의 원경을 담아 공허히 빛난다. 그냥 무시한다- 원래라면 현은 그렇게 반응했겠으나, 불, 안 줘? 하고 당연한 것을 달라는 듯 뻔뻔하게 물어오는 말이 생소하게 느껴져 현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기보다 반 뼘쯤 작을까, 야경의 빛을 머금은 머리를 한 녀석을. 초면이 아니라는 것까진 알겠으나 이름은 모르는 녀석이다. 뻔뻔함은 있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얼굴에 뭐가 발린 게 없는 것 같이 느껴져서, 현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손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거의 다 타들어가고 있는 꽁초를 쥔 손을 그 녀석에게로- 정확히는 그녀석이 물고 있는 담뱃대 끝에 내민다.
(다온이 그것으로 불을 붙였다면)
자기 스스로도 자기답지 않다 싶은 호의를 상대가 받아들여 그걸로 불을 붙이면, 때마침 현의 손에 들려있던 꽁초는 마지막 끄트머리를 태우고 명을 다한다. 현은 필터만 남은 꽁초를 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흡연구역이 희귀한 요즘 세상에서, 골초들의 죄를 몇 없는 몸으로 짊어지고 있는 쓰레기통, 사실상 대형 재떨이는 힘겹게 새 손님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현은 새 담배를 꺼냈다. 모히또 향이 옅게 퍼진다. 입에 물고 캡슐을 터뜨리며, 라이터를 꺼내 꽁초 끝으로 가져간다. 라이터 버튼을 누르나 응당 들어와야 할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아- 가스가 다 됐구나. 현은 새 장초를 문 채로 이마를 구겼다.
>>17 "라이터 버튼을 누르나 응당 들어와야 할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뒤에 "몇 번을 더 딸깍여봐도 마찬가지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그걸 까먹고 마솝버튼을 누른 슬픈 아침
정답을 찾아내는 데에 익숙한-이라는 문장에 그만 내면묘사에 삘을 받아서 답레 앞쪽에 뭔가 긴게 4문단이 붙은 이 참치.. 실질적인 답레는 아래쪽 4문단이고, 위쪽 4문단은 사실상 현이가 성미와 달리 다온이에게 불을 내어준 데에는 이런 내막이 있습니다 하는 변명(?) 느낌이니 편하게 읽고 편한 분량으로 답레 써줘~
상대방이 내민 담배 꽁초의 불이 수월하게 옮겨붙도록 담배 끝을 빨면서도 소년의 붉은 시선은 꿋꿋이 상대방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곳저곳 훑듯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러면서도 내놓는 것은 여상한 침묵이었다. 가까스로 옮겨붙은 담뱃불에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 포도향이 섞인 연기를 흐리게 피워낸다. 불쾌한 첫 맛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섞어넣은 멘솔의 시원함이 감각을 희롱하도록 내버려둔다. 여기까지도 소년에게선 고맙다는 물론 가타부타 말도 나오는 게 없다. 상대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나 싶더니 쓰레기통에 던져넣는다. 그와 동시에 재밌다는 듯 소년의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뻔히 보이는 흡연구역 표시는 지키지 않고, 쓰레기통의 역할은 지켜? 다른 녀석들의 맞담은 거부하고 나는 또 괜찮아? 지켜볼수록 모순적인 녀석이다. 그래서 퍽 재미있다.
그래서 역사적인 첫 마디는 어떻게 건네 볼까. 이 모순을 지적해볼까. 그러면 화를 벌컥 낼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까. 주먹부터 날릴까. 아니면 엉뚱한 소리를 해 볼까. 날씨나 담배 얘기부터 던져볼까... 연기를 뱉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매몰되어 가던 중 상대방이 라이터를 딸깍이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빌려주던 이가 정작 제 담뱃불은 붙이지 못하고 있다니 이건 또 무슨 모순인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조금 키득거리고 말았다.
적당한 길이로 잘린 검지손가락의 손톱, 그 끝으로 상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그리고 자신의 담배를 왼손으로 능숙하게 붙잡고서 그 끝으로 당신을 향한다. 후-. 날숨을 뱉자 꽁초 끝의 불이 밝아지며 당신에게 선택지를 제시하는 듯하다.
그래서 맡겨놓은 불 찾아갈래? 소년은 그러면서도 전혀 발끝을 올리거나 하는 배려를 하지 않는다.
좀더 엄격히 평가하자면 이도저도 아니라는 말이 맞겠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커녕 자신이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지도 모르는 방랑자라고 생각하면, 꽤 어울리는 꼬락서니다. 공부는 잘하면서 장래같은 것은 생각해둔 바 없고, 지금도 정작 미궁으로 들어가지는 않으면서 미궁의 야경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직 다온이 즐길 만한 재미는 많이 남았다.
쯧 하고 혀를 차며 가스가 다 된 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넣던 소년은 다온의 손길에 다시 다온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차가운 얼굴이 창백한 날숨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휩싸인다. 그 바람에 현은 눈을 조금 찌푸렸다. 그 살짝 찌푸려진 눈을 원래대로 다시 뜨지 못하도록 막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막대 끝에 올라앉은 불잉걸을 다시 내미는 모습은 분명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배려라 할 만했으나. 좀더 아래 시점에서 흔들림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이 배려를 모종의 교활하게 잘 조율된 도발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현을 긁어보자는 다온의 의도는 꽤 성공을 거뒀다. 잠깐 다온을 쏘아보던 현은 입에 꽁초를 문 채로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현은 고개를 숙이는 동시에, 다온의 턱끝으로 손을 슥 뻗어왔다. 담배연기에 서늘히 식은 손끝이 자신의 턱에 닿는 것을 다온이 피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고개를 숙이면서 다온의 턱도 지긋이 밀어올릴 것이다. 고개 정도는 들라는 것처럼.
손이 다가온다. 턱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막지는 않았으나 눈빛은 일변한다. 자신이 어떤 상위의 신격이라도 된다는 듯 관망하며 여유부리던 것이, 상대에 의해 손을 댈 수 있는 존재로 순식간에 전락한 것이 자못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불이 옮겨붙는 걸 확인하자마자 상대의 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서 분한 듯 담배연기를 쓰게 한 모금 삼키지 않는가.
"손 대도 좋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그 때였다. 상대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기로 한 것은. 굳이 말하자면 조금 높은 축에 속할까. 그러나 갸날프다 말할 수는 없는 소년의 목소리에는 미궁의 밤 풍경과 포도향, 그리고 사춘기를 곱게 지낸 듯한 소년의 외모와 결코 뗄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개의 각도를 조금 틀어 상대를 뜯어보듯 올려다보는 모양이 사뭇 도발적이다.
예기치 못했던 탐탁찮은 돌발상황에 다온의 눈빛이 변하는데도 아무런 상관하지 않고, 소년은 표정에 변화 하나 없이 그냥 무덤덤히 그대로 담뱃불을 옮겨붙인다. 불잉걸이 포도향에서 모히또향으로 느릿하게 옮겨붙는다. 놔주려고 손을 떼려는 찰나에 턱이 먼저 손끝에서 빠져나갔으나, 그는 불 붙은 담배를 물고 자기 손끝을 한번 힐끔 눈짓하는 것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첫 모금을 길게 뿜어내는 것이다.
그때 옆에서 선명한 목소리에, 난간에 팔을 기대던 현의 시선이 다온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혀끝에 걸린 창백한 연기의 꼬리를 마저 내뱉어 털어내고 나서야, 현은 필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입술에서 담배를 떼어냈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입술은 말라 있었다. 따지듯 도발하듯 질문을 꺼내는 어조보다 질문의 내용이 참 당돌했다. 현의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그건 왜."
별걸 다 묻네, 하는 어조. 대답을 거부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전에 현은 대답도 거부도 아닌 걸 하나 더 내놨다.
사실 대답의 내용이 중요했던 건 아니다. 당신이 한 순간이라도 콜록거리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더라면 그런 질문을 던진 보람이 있었을 것이나 입을 놀린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런 낌새조차 없었으니 소년은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귀여운 구석은 없는 녀석이구나. 덩치는 커도 한 손 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오리 태엽 장난감처럼 제 입맛대로 다룰 수 있는 상대인가 싶었는데, 확연히 아니라는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칫-, 저도 모르게 혀를 찬다.
"사람이 참 다양한가 봐."
너스레를 떨고서, 당신을 응시하는 붉은 시선이 묘하게 이전보다 타오르는 듯하였다.
"그 중에서도 난, 만만해 보이고? 아니면 건드리고 싶게 생겼나?"
그런 얘기야 자주 듣지만. 따지고 보면 진짜 키스는 아니었다만... 맞도발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내면의 목소리와 짚고 넘어가고 싶어하는 두 목소리가 충돌해 소년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난간에 거꾸로 기대는 소년의 손끝에서는 담배가 시간을 연소시켜 긴장을 뱉어내며 조용히 타들어가고 있다.
"너 내 이름 모르지. 설 다온이야. 기억해 둬." "난 이런 거 두 번 말하기 싫어하니까."
자기소개라기보다는 경고의 소리 같다.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어깨가 들썩이는 모양이, 소리없이 웃는 듯하다.
꽁초 끝에서 나오는 연기가 잦아들더니 빨간 불꽃이 좀더 뚜렷해진다. 사람이 참 다양하다고 하는 소리는 기실 빈정상해 빈정대는 느낌이었으나, 말이야 맞는 말이다. 좀더 유순하고 다정한 녀석이 상대였다면 이쪽도 좀더 유순하게 숙여줄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마 같은 반일 녀석은(학기 초라 아직 같은 반에 누구누구가 있는지 다 모르겠다), 유순 같은 착한 단어와 거리가 멀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굳이 말하자면 앙큼 정도일까.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가 다온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드리고 싶게 생겼나? 하는 은근한 항의에, 현은 쓰라린 연기를 한번 길게 뱉었다. 그리고 입을 떼려 했으나, 먼저 자기소개를 해온 다온에게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입에서 꽁초를 떼고 자기 이름을 마주 대어주었다.
정현이라는 전학생이 어떤 난리를 피웠다더라 하는 소문은 가만히 있어도 귀에 들어올 만 한데다 그 자신도 흥미있게 들었으니 잊어버릴 리도 없다. 당연히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상황에 익숙한 소년은 지금의 불공정한 상황에 다소간의 불만은 있었으나 지금부터 당신이 자신의 이름을 틀리게 기억하거나 잊지만 않으면 될 일이라고 애써 위안한다. 너 어떻냐고, 거기에 은근히 대답을 기다리느라 담배를 쥔 손을 저만의 리듬에 맞추어 까딱이던 움직임이 멈춘 것은 모른 채.
"아, 그러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정말이지 찔러볼 구석 하나 없다. 기분이 상했다는 목소리를 숨길 길이 없다. 피우던 담배를 발 밑에 내던지고는 단화의 굽으로 밟아 이리저리 짓뭉갠다. 불씨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힘없이 꺼져간다.
"그럼 만난 김에 길게 떠들어나 볼까 했던 나는 자리를 피해 줄게. 조용하고 긴 밤 보내셔, 정 씨."
난간에서 무게를 떼자 조잡하게 붙어있던 이음매가 낡은 소리를 낸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서 손을 대충 흔들고 멀어져가려 한다. 빈정은 상했다만, 아직 궁금한 게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기분을 악화시킨다.
뜬금없는 타이틀에, 하, 하고 실소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유명인이라는 소리가 묘하게 탐탁찮았다. 물론 귀찮게 다가오는 일이 줄어든 건 좋고, 뒤에서 뭐라 떠들건 알 바 아니지만, 떠드는 소리가 있다는 자체가 묘하게 신경이 거슬린 탓이었다. 자기 줏대대로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은 없는데, 새삼스레 왜 그런 데에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자신이 이도저도 아닌 채로 길을 잃은 꼴이라는 게 괜히 실감되어, 심경이 더 복잡해졌다.
그래서 정현은, 포도나무에 뛰어오르려다가 신 포도일 거야! 하고 팩 뒤돌아가는 여우의 뒤통수에 때아닌 심술을 부려 한 마디 툭 던졌다.
"도망가게?"
짓궂게 한 마디 하고는, 문득 그제서야 인제사 두어 모금 빤 꽁초에 담뱃재가 길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재를 탁탁 털었다. 그리곤 한 마디 더 암상맞게 얹어준다.
자연발생하는 상황에 맡기는 것은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소 참치가 너무 큰 찐빠를 내거나 하지 않을지 심려되어..(심약햄스터) 버벅일 수 있소 소 참치도 실시간으로 버벅이고 있는관계로... 다온이라면 그 또한 자연스럽게 귀엽거나 하지 않을까 싶소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소 참치 햄스터손이나마 거들어드릴테니 염려마시오!! (즐거운 상황극을 이어가는 데에는 캐릭터들의 상호작용만큼이나 캐주들의 의사소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오)
텀이야 아무 소식 없이 2주 넘어가는 거 아니면야 개의치 않으니 상관없... 생초콜릿이면 더욱 그러하오. 생초콜릿은 중대문제다. 즐거운 디저트타임 되시기를 바라며 그러면 소 참치는 청소도 하고 저녁도 천천히 먹고오겠소
그리고 현이 다온에게 그런 불손한 꼬리표를 붙인 것은 그런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접근을 두고 붙인 것이 맞았다. 전지적 제삼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다온의 의도를 꿰뚫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몇 가지 단서는 있었기 때문이다. 왜인지 바락 화를 내는 게, 무슨 재미로 누군가한테 그렇게 구나 조금 이해될 것도 같다.
"뭔가 목적이 있어서 말을 걸었잖아? 너무 빨리 포기한다 싶어서."
날 갖고 재미를 보려면, 끈기가 있어야지. 어려운 노리갯감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빈말 구구절절 늘어놓는 건 싫지만, 내가 호기심이 동하면 빈말이 아니니까 상관없어."
뭘 말하고 싶고, 뭘 듣고 싶어서 굳이 내게 다가왔을까. 딱히 뭔가 얼굴에 칠하지도 않은 맨낯으로. 그래, 호기심이 동했다고 해두자. 그게 가장 객관적인 표현이지 싶다. 현은 다시금 입에 담배를 물고는, 한 모금 길게 빨았다가 뱉었다.
그게 다야?!?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사람이 다행이라는 단어를 이렇게도 얄궂게도 쓸 수 있었나 싶다.
"목적은 무슨..... 유명인이라고 불러주니까 진짜 셀럽이라도 된 것 같냐??"
상처 줄 거야. 발톱을 바짝 세우고 있지만 눈앞의 상대가 이깟 것에 상처받아 사릴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은 뻔한 듯하다. 어쩐지 앞서 의도를 파악당하고 있다는 점을 들켜 등골이 시리다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형세가 뒤바뀐 판국이다. 자신이 갖고 노는 것인지 갖고 놀아지는 것인지가 모호해지는 경계선에서 주도권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너... 멋대로구나."
결국 마음에 들면 옆에서 얼마든 지껄여도 상관없다는 소리렷다만 특별히 반가울 건 없었다.
"결국 네 장단에 맞춰 북 치고 장구 치라는 뜻이잖아. 누가 좋다고 거기 어울리겠냐?" "......"
당신의 앞에서 짝다리를 짚고 서 얇은 입술을 새하얘지도록 깨문다.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는 거지? 해 보자 이거야.
"나 정도니까 어울려주지 원..."
아량을 베푼다는 투로 털어놓듯 말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눈동자를 굴려 애꿎은 대공을 향한다. 아까 피우다 말았던 담배가 벌써 그립다.
"어이, 셀럽. 그래. 네가 궁금해서 온 건 맞아. 인정할게. 그런데 의자라도 내와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부턴 내가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네가 원하니까 여기에 있는 거야. 언제까지 사람을 세워둘 것이냐고 은연중에 비난하는 눈동자다.
셀럽이라도 된 것 같냐? 하고 던지는 소리에, 현의 안색이 잠깐 흐려졌다. 거기에 뭔가 긁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나라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 특히 이 해성광역시의 개발에 깊이 관여했기에, 해성시에서는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맹호그룹의 로고와 정현이라는 한 소년의 사이에 금을 죽 그어놓는 그 말이 그렇잖아도 심란한 현의 마음속에 복잡한 심경 하나를 더 얹어줬기 때문이다. 뭐라 괜시리 말을 꺼내기보단, 현은 어깨를 으쓱하는 편을 택했다.
"잘 아네."
멋대로구나, 하는 일침에 대한 현의 대답이었다. 꽤 정확한 일침이다. 그래서 긍정했다. 거기에다 제멋대로인 주제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다-는 비난까지 더해졌으면 확실했겠다.
"어쩌면 합주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 구미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면 쓴 놈들과 억지로 어울리는 것도 싫지만, 혼자 떠돌기도 지겹던 참이다. 그런 의미에서 딱히 가식도 안 부리고 마음껏 성질 팩팩 부리는 이 하얀 머리의 아직 낯선 녀석은, 정현에게는 꽤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래서 변덕스레, 그는 이 다온이라는 녀석의 비위를 조금 맞춰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소한 생각을 하게 됐다.
"글쎄, 기분같아선 내줘도 괜찮겠지만, 없는 의자를 만들 수는 없는데."
그렇지만 이 주변에는 벤치는커녕 어디서 굴려올 페인트통 따위도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 마법과 같은 간드러지는 설정 따위는 없고, 그래서 없는 것을 어디서 뿅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신 정현은 거의 다 타들어간 꽁초를 그대로 아까처럼 저 옆의 쓰레기통에 휙 던져넣으며 말했다.
기꺼이 합주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보다 겸손한 반응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 달려드는 소년이었다. 구미를 맞추기보단 맞춰지는 데 목말라보이는 이런 태도가 오히려 어떻게 보이는 지는 모르고.
"그건 네가 지금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지. 안 그래?"
잘 되었다는 듯 전적으로 상대에게 맡겨버린다. 기분이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이도저도 아니고 제 내키는대로 하고싶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름 자신의 발언에 불편해보이기는 하는데 그렇다기엔 또 다음에 하는 말의 결이 다르다. 지저분한 철제 박스라도 어디서 주워오나 싶었는데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는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차, 대답이 너무 늦어져선 곤란하다.
"그러던가. 대신에 오래 걷지는 않을 거야."
쓰레기통으로 조신하게 굴러들어가는 담배꽁초를 어이가 없다는 듯 구경한다. 저런 모순은 언젠가 짚고 가야 할 문제다. 당신이 걷기 시작했다면 대접받듯 그 뒤에서 느긋하게 걸었겠지. 물론 당신의 속도가 아닌 제 속도대로다. 누가 앞에서 걷든 맞추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야 한다는 듯이.
"너 아까부터 말이야. 기분 나쁘면 왜 그렇다고 말을 안 하지?"
설렁설렁 걷는 척 하다가 그제야 던져보는 물음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알고싶어하였던 것일 터이다.
이 호기심 많고 뻔뻔하고 솔직한 녀석에게, 정현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일단 흘러가는 대로 둬보자고, 정현은 생각했다. 오래 걷지는 않겠다는 다온의 말에 정현은 대답했다.
"차 타면 그만이지."
정현은 흡연허가구역 팻말이 달린 난간을 등지고, 다온이 따라오나 한번 힐끔 보고는 골목을 가로질렀다. 블럭 하나만 걸으면 대로변이고, 미궁 근처에는 밤낮없이 차가 달리니 택시 잡는 데에는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다온의 질문이 등에 툭 꽂혔다. 정현은 다온을 돌아보았다. 기분나쁜데 말을 안 한다라-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되는 세상에 뭘 믿고 나 기분나쁩네 하는 말을 대놓고 하겠는가. 기분나쁘다는 표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정현이 아직 미숙하여 그런 티를 잘 감추지 못할 뿐이다.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
꽤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역시 대답은 재미없다. 이번엔 꽤나 솔직하게 대답해준 것 같은데 이 모양이다. 친밀도가 좀더 높으면 '기분나쁜 티도 안 내야 되는데 그것까진 아직 잘 안되네' 같은 말까지 들을 수 있겠으나, 오늘에서야 겨우 말 섞은 사이라 그것까진 힘들다. 좀더 재밌는 반응을 보려면, 정현이 반응을 보였던 키워드, 그러니까 셀럽이니 유명인이니 하는 소리를 직접 언급해보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어느샌가 둘의 발걸음은 대로변에까지 다다랐고, 정현은 대로변 보행로 모퉁이에 서서 차도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눈치빠른 수도권의 택시기사들이라, 손을 들 것도 없이 지금 택시 잡아야 됩네 하고 티만 내면 귀신같이 알고 달려온다. 저만치서 빈차 표시가 켜진 차가 반색을 하고 차선을 바꿔 다가온다.
하지만 오래 걷지 않게 하고 차를 태워주겠다는 건 생각보다 융숭한 대접이었다. 뭐, 이 녀석 그 정도 예의는 있는가보다, 하고 다시 봤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의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높여주는 발언이었으나, 그 다음 나오는 것은 또 다르다.
"... 그건 혹시 내가 그럴 필요를 못 느낄 만한 상대란 얘기냐?"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확인해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초면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다온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첫눈에 띄고 싶고, 대접받고 싶고, 일방적으로 사랑받고 싶다. 다행히 자신이 가진 썩 그럴듯한 외양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갈 곳에 대해 물론 기대랄까, 예상했던 바는 있었지만 녀석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더 괜찮은 곳에 데려가줄 것 같았다.
"좋은 곳으로 알아서 잘 모셔 봐."
붉은 초승달같은 눈웃음이 반짝인다. 차가 오는 동안 우아하게 서 있다가 택시가 오면 느긋하게 뒷자리의 상석을 택했을 것이다.
오래 걷지 않는 거리 내에서는 그럴듯한 데가 없어 보이니까. 미궁 근처라지만, 보잘것없는 변두리다. 미궁의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한미한 곳이다. 이런 데도 샅샅이 뒤져보면 숨은 보석 같은 가치있는 장소가 있겠으나, 샅샅이 뒤지려면 결국 오래 걸어야 하니 이 콧대높은 어린 왕자의 구미를 맞춰줄 수가 없다.
"네가 날 아직 길들이지 못했을 뿐이지. 그건 네가 얼마나 잘났냐와는 전혀 다른 문제고."
그리고 현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선을 긋는다. 그 선은 마냥 다온의 앞을 가로막는 선이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방향으로 다온을 이끄는 선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다온이 아직 흥미없는 방향으로 그어지는 선이기도 했다.
일단 현에게 첫눈에 다른 이들과는 퍽 다른 인상을 심어주는 데에는 성공했고, 대접은 지금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는 아직 불명확하다. 그것에 대해 뭐라 항의도 하기 전에, 택시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갓길에 멈춰섰다. 모범 간판이 달려있는 까만 택시다. 오른쪽 뒷좌석에 다온이 당연하다는 듯 들어가 앉자, 현은 트렁크 뒤로 빙 돌아 왼쪽 뒷좌석에 앉았다.
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다온의 것과는 달리 한 세대 뒤떨어진 기종이다. 딱히 자기 핸드폰에 신경을 안 쓰는지, 보호필름에 금이 쫙 가있다. 핸드폰에 뭔가를 톡톡톡 찍고는 기사에게 내밀어주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둔다. 윙, 하고 나지막한 엔진 소리와 함께 택시는 갓길을 떠나 미궁 외곽지의 한적한 도로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시선은 정현과 맞추는 대신 저 멀리 무심하게 흘려버리지만 상대의 대답은 제법 마음에 든 듯 싶다. 뒤엉킨 배관이나 꽉 찬 지 오래인 쓰레기통 같은 것들이 산재한 장소와 그럴듯한 곳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은하수만큼의 괴리감이 있었으니 말이다.
"글쎄?"
입술을 삐죽 내민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장면들과는 또 다른 방향이었던 탓이다. 마른 입술을 만지다 손을 떼고서 빙긋이 웃음을 품고 말한다.
"그런데 꼭 길들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 같다?"
길들인다는 표현이 퍽 재미있다. 너는 여우고, 나는 어린 왕자? 그러나 상대방은 여우라는 꼬리표가 붙기엔 꾀를 부리거나 그런 종류의 가벼움이 없어 보여 차라리 표범이나 호랑이가 맞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상석에 앉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굳이 자신이 발걸음을 길게 하는 편을 택했다. 호의적이긴 한데,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다온은 평한다.
"...하아~"
행선지도 안 알려주겠다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열심히 모셔보도록 내버려두기로 한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때 가서 실망을 뱉으면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상대방의 얼굴도 궁금하다. 지금처럼 가면을 쓴 듯한 무표정을 그 때도 유지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겠지만서도.
스트레칭을 하기엔 다소 좁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다리와 팔을 모아 쭉 뻗고 난 뒤에 다온은 핸드폰을 켜기 시작했다. 새로운 피드들이 연달아 올라가고 소년은 싸구려 도파민 안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다. 그새 못 본 것들이 새로 생겨나 있다. 그것들을 놓친다는 사실을 어느샌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
핸드폰을 건드리던 자세로 멈춰서 조금 불만을 품은 듯 상대를 바라본다. 연락처를 받아 놔? 말아? 적당히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서 물어봐 주면 편할 텐데 자신이 먼저 번호를 묻는 것은 또 자존심이 상한다. 멈추었던 손이 다시 움직인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차가 멈출 때까지 그 움직임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기사가 되돌려주는 핸드폰을 건네어받은 정현은, 뒷좌석 등받이에 등을 푹 뉘었다. 길들인다는 말을 원하기에는 이제 지긋지긋할 정도로 데였지만, 결국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떠오르는 말이 그것뿐이 되고 만다. 배우고 겪은 게 그것뿐이고, 그 끝은 하나같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적잖이 엇나간, 잘못 자라난 대인관이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에서 전혀 다른 낯빛으로 등장한 이 녀석은 길들인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그래서, 현은 그것을 호기심이라고 해두기로 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바깥의 풍경은 휘황찬란해지고, 차의 속도는 조금 둔해진다. 미궁 중심가다.
쓸데없이 눈이 부셔 못마땅하게 차 안으로 고개를 돌리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뭔가 부루퉁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다온과 눈이 마주쳤다. 정현은 다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마디 툭 던진다.
"돌아갈 때 전화번호 받아가."
그리고 그는 외투 안주머니를 뒤적인다. 기사에게 돌려받은 핸드폰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는데, 품에서 핸드폰 하나가 더 나온다. 다온의 것에 비해도 밀리지 않는, 사용한 흔적도 별로 없어보이는 고급품이다. 주인의 손길을 느낀 그것은 제 알아서 대기화면을 띄웠는데, 서너 개는 되는 SNS 앱에 제각기 수백 개씩의 피드가 쌓여있다.
"어느 쪽 전화번호를 줄지는 생각 좀 해볼게."
정현은 다온에게 두었던 시선을 떼고는, 안주머니에 2개의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점점, 주변의 불빛이 변한다. 아까의 불빛은 자신을 과시하려는 듯이 정신사납게 반짝였다면, 지금의 불빛은 마치 자신을 보는 이를 유혹하는 것처럼 적당한 밝기로 화사하다. 미궁을 지나가면 나오는 해안가 겸 관광지구인 미아동이었다. 어두워진 지는 한참 됐는데도, 제각기 자유분방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훤화하며 놀기를 그치지 않는다. 다온에게는 익숙한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택시는 거기에서 선뜻 멈추지 않고, 다른 곳으로 좀더 들어가 야트막한 언덕을 오른다. 주변 불빛들도 좀더 차분해지고, 무엇보다 보통의 보도블럭과는 다른 재질로 반듯이 정리된 타일들이며 화단이며 주변 광경에서 느껴지는 한 마디로 짚어말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여기가 좀더 부자 동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도 무리지어 떠들고 노는 이들은 많았으나, 그들의 몸에서 명품 로고가 차지하는 비율이 확 늘었다. 택시는 밤바다가 그대로 내다보이는 언덕 위의 완벽한 뷰를 점유하고 있는 한 세련된 건물 앞에 멈춰선다. 골든 아워즈라는 로고 옆에, 심볼 대신 내걸어둔 금빛 시계 좌우에 포크와 나이프가 도열해있는 간판을 보아 레스토랑인 것처럼 보인다. 택시는 주차장으로 천천히 굴러들어갔다.
대답을 듣고서 올린 시선이 도르륵, 허공을 굴러간다. 그게 그거 아닌가. 같은 말을 굳이 하기에는 모호했던 탓이다. 다온은 녀석이 변덕을 부리는 것 또한 호기심이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고 하는 이유도 같은 근본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중간에라도 이 신경을 건드리는 녀석은 모든 걸 파토내고 시간 낭비를 했다는 듯이 일어날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끝내는 건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한 일은 상상조차도 기분상한다는 듯이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험하는 것은 저여야 하는데 도로 받는다는 기분이 든다. 썩 좋지만은 않다.
"오."
상대가 툭하니 던진 말에 짧은 소리를 뱉는 것이 알아서 잘 속을 헤아릴 줄 아는 데 대한 감탄과 같다. 하지만 다음으로 한 말은 기분에 불이라도 끼얹는 듯 하였다. 일부러 보이려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자신도 저 확인되지 않은 SNS의 알림 중 하나로 전락할 수 있다, 요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알고 이러는 건가. 모르고 이러는 건가. 상할대로 상한 자존심과 경계심이 최신형 핸드폰 뒤에서 반짝인다.
"그러던가."
팍 상한 목소리로 툴툴대며 다시 핸드폰에 시선을 가져다 박는다. 그러느라고 창밖의 풍경이 익숙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언덕을 오를 때 즈음에는 바깥을 흘끗 보았기 때문에 망정이지 스스로가 어디로 향하는지 전혀 단서를 잡지 못할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망스럽다면 모두 상대방의 책임으로 돌리면 될 뿐이라며 다온은 손톱으로 시트를 두어 번 두드리며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
택시가 주차장에 멈춘 뒤엔 그저 다리를 꼬고서 가만히 앉아있는다. 질릴 정도로 대접을 요구하는 태도다. 정현이 문을 열면 그제서야 몸을 들썩이는 것이다. 택시에서 겨우 내리면 길었다는 듯 기지개를 켠다.
그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여기에서 시험받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고.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선전포고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변덕스레 갖게 된 기대심을 다온에게 고스란히 내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자신의 손패 중 중요한 것을 아무 대가 없이 내보여주었으니까. 물론 그것이 좋은 행위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행동이라기에는 무신경하고 오만한 행동이다. 그렇지만 실망하기에도 지칠 대로 지친 맹수는 그런 것 따위 따질 여유 없이 그렇게 엄포를 놓는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아직 수많은 짐승들 중 하나이며, 너의 짐승이 아니라고. 오늘 시험받을 사람은 한 명이 아니라고.
그런 의미에서, 일단 첫 번째 시험은 통과한 듯싶다. 택시비 결제를 끝낸 정현은 택시 문을 얌전히 열어주었고, 택시 문을 열고 나선 주차장은- 적어도 지금 도착한 이 레스토랑이 다온의 높은 자존감에 그렇게 모자라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럭셔리 카들이며 슈퍼카들 예닐곱 대가 번쩍번쩍하니 도열해 있었고, 그 뒤로 보이는 레스토랑의 풍경도 주차장에 그런 차들이 들어찰 만한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으니까.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꼭대기의 완벽한 뷰는 물론, 이름난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익스테리어, 입구에 걸려있는 미슐랭 스타, 화려한 조명이 아늑하게 반짝이는 인테리어까지.
정현은 얄팍한 머니클립을 집어넣으며, 다온이 기지개를 키는 동안 그를 보고 있다가 식당 입구를 눈짓해보였다.
주차장에서 기지개를 켜는 동안 보일듯 말듯이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고 그와 동시에 다온은 주차장을 채운 차들과 레스토랑에서 부의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그 향은 살짝 생채기가 나버린 다온의 자존심을 엉성하게나마 채워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재력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던가- 다온은 표정을 숨길 줄을 알았기에 큰 미동은 없었지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분명 다음 순간 다온이 웃었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나쁘지 않네."
팔짱을 끼고 두어 번 무언가를 가늠하듯 손끝으로 저의 팔을 두드린다. 언뜻 레스토랑의 가치를 재는 것이라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데에 가 있다. 조명의 안온한 반짝임을 뒤로하여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이전의 후미진 곳에서 반사된 빛에 비친 낯과는 전혀 다른 풍경일진대, 공교롭게도 둘 모두 어색한 데 없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마치 두 세계를 모두 상대가 장악하기라도 하였단 듯이- 그 점을 흥미롭다고 소리없이 인정한 순간 다온의 손가락 움직임이 멈추었다.
말없이 식당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팔짱을 풀지 않은 자세가 누군가에게는 고압적으로,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방어적으로 보였으리라. 일정한 속도로 발자국 사이의 간격을 남기는 다온이었으나 상대가 앞서는지, 옆에서 걷는지, 뒤따라오는지는 살폈을 것이다. 너무 뒤처져 걷지만 않는다면 다온이 구태여 멈추어 서고서 무엇을 하냐며 눈치주는 일은 없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