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도 뭐라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에 아회는 가늘게 떨던 몸까지 멈춰버렸다. 신도 뭐라 하지 않는다고. 지금까지 나는, 그리고 어머니는 그 존재에게 용서를 갈구하고자 그 발버둥을 쳤는데. 내가 운명의 굴레에 놓였을 때, 악의를 받았을 때, 그 사실에 지레 겁먹었는데. 결국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다가온 현실에 후련해야만 하거늘 허망함만이 온몸을 채운다. 아회는 한참을 침묵했다. 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다. 지금껏 해온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닌 듯하여 그저 허망했다. 그리고 후련하다. 무엇이 후련한지는 모르겠다마는. 죽지 않아도 돼. "……."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러니까 도망쳐버리자. 신께서는 내가 도망쳐도 신경 쓰지 않는대. 어머니께선 령도로 가자고 했지만, 사실은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도망치자 했던 거잖아. 내가 더 괴롭지 않게끔, 그 순수한 의미를 알고 있었잖아. 아회의 속내에서 작은 불씨가 타올랐다. 끔찍하되 행복한 일이로고. "……저는."
그러나 스스로 짓밟아 꺼야 함을 안다. 천성이란 재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새롭게 출발해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도 내재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회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 때문에 마른 입술을 자근 깨물어 축인다.
"미련이, 너무 많아서, 여기에는 인연도 있고. 그러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 사회로 넘어가면, 모두 잊을 테니까, 그건, 그건……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살아오던 의미를 부정하는 거니까. 지긋지긋한 곳을 모두 잊어버린다면 과연 나는 행복할까. 아니겠지. 증오심이 과연 불타지 않을까, 본능적으로 새로운 위험을 찾거나, 아니면 기껏 억누르고 막아오던 자아가 없으니 크게 불타오르는 위험이 되겠지. 기껏 제안해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이제 싫다.
"하지만, 사감님, 덕분에, 그러니까, 그게. 저."
더듬더듬 뱉는 말 뒤로 어딘가 후련한 감정이 입가를 맴돈다. 동시에 무언가 후두둑 떨어진다.
"마, 마음이 놓입니다. 적어도, 호, 혼자서, 두려워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눈물이다. 훌쩍이지는 않지만 고요히 방울져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학생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 사감님이라면 이번 대답만큼은 동의해주길 바란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커진다. 한 마디면 돼. 놓지 마. 제발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무시하지 말아줘. 혼자 못 버텨. 다른 사감처럼 간섭할 수 없다며, 인간의 삶이라며 무시하듯 하지 말았으면.
돌아보지 않아서.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현명했다고. 멀리서 들리는 질척한 소리 들으며 생각한다.허나 그 다음 순간. 훅 끼쳐오는 혈향에 눈 앞이 아찔해졌다. 요즘 피를 보지 않아 방심하고 있던 제 안에 푹 하고 가늘고 긴 가시가 꿰뚫린 양 섬뜩하기까지 했다. 곧 덜덜 떨리려는 입술 막으려 잇새에 단단히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굳은 양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저럴 생각이었던 것일까. 아님 제가 왔기 때문에 저런 것일까. 저 피의 주인은 필시 악기점 주인장이겠지. 그래놓고 제게 찾아보라 종용한 것인가? 정말로 찾으러 갔었다간 제가 저기에 있었을 지도.
혼란스러워지는 머릿속 일순 멈추게 한 것 있었다. 걸어오는 발소리. 그 기척!
아.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학당으로? 가다가 잡힐 위험 더 크지 않나. 그가 정말로 그 호랑이라면 도망치는 제 뒤 쫓는 것 쯤 한달음일 것인데. 의미가 있나? 역린. 역린은 여전히 떨고 있고 아니어도 저 앞에서 뽑아들 기세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어찌. 어째서 또 다시 이런 상황에.
으직.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입술 살점이 뜯겼으나 아픈 것도 몰랐다. 숨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숨 죽이는게 고작이었다.
아회는... 영 사감님 덕분에 귀기 무 씨를 멸문시키는 게 아니라 계승하기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대요~ 아무래도 적룡의 독기도 있지만 쌓아온 게 많으니까요, 응. 그게 가장 큰 미련 중 하나기도 하고... 그런데 이제 멘탈이 여기서 한 번 더 흔들리면 온건한 계승은 아닐 거라 생각이 드는데(사실 지금도 온건한 계승은 아닌데요... 무야옹 쟤가 지금 칼을 가는데요.. ) 이것도 맛있고(대체)
아마 온화랑도 조만간에 대화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형제의 머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것이 절대 온화가 선의로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부차적인 목표(하 사감이 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아마 하 사감이 나갈 수 있게끔 돕지 않을까 생각하구...
어쩌면 이자식 하 사감 자리를 위임할 방법이 생기면 자기가 하겠노라 할지도...🤦♀️ 아무튼!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긴 했답니다. 아회 기준으로요. 가문을 잇는다니... 남 입장에선 드디어 미쳤나 싶어도 본인 기준으로는 지금 가장 최선의 선택인 무언가...
적어도 지금 멘탈 상황처럼 다 포기할래... 그냥 목 내어줄래... 절하고 그대로 모가지 뎅강 당할래... 혼사로 팔려갈래...가 아니니까...🤦♀️ 저는 분명 비설에 써두기도 했고요... 아회가 절대 정상은 아니라고...😏
거듭되는 친절이 익숙하지 않다. 차가운 북부에 익숙해진 나머지 형식적인 온정인 것을 알면서도 뜨겁다고 느껴, 살이 따끔거리는 것 같다. 미적지근한 온도인데, 그저 학생이니까 걱정하는 것인데, 졸업하면 마주할 리가 없는데 그깟 학생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대해주는 걸까. 속절없이 무너지고,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으, 윽."
그리고 듣게 되었을 때는 다시금 눈물이 뚝뚝 쏟아졌다. 손등으로 훔쳐도 그치지 않는다. 복주머니를 받았을 때는 세상 보물이라도 되는 듯 소중하게 쥔다. 어떻게 쓰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니 나중에 여쭤보는 것이 좋겠디. 훌쩍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뚝뚝 떨어지는 꼴이 영락없는 그 나이의 학생이었다. 치기어린 생각으로는 우는 자신이 추하다고 느껴지나, 한편으로는 후련했고, 자신이 참 잔인하노라 생각했다.
"……."
그래, 당연하지. 가문의 멸문지화가 아닌 계승을 선택하는 자신이 어찌 잔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흐름이 아니다. 선택이다. 선택할 수 없던 괴로운 삶에서, 온전히 내가 해내는 선택. 이 정도면 발전이 아닐까. 스스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훔친다. 이어지는 친절. 아회는 이 친절을 일단 신뢰하기로 했다.
"그게……."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비빈다. 또르르 눈물 흐르던 눈을 크게 깜빡이며 옆을 본다.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참 봐야 하거니와 봐도 제대로 얼굴을 기억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하나라도 기억해보고자 함이다. 이내 아회는 어색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찾아가겠노란 대답이자, 당신의 제안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문득 그런 생각 들었다. 아니. 그 때의 기분 들었다. 제 운명 뒤집히던 그 날. 목숨의 위협 앞에 두고 들었던 긴장과 공포와 의미불명의 희열-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저 너머에서 피냄새 흘리는 궁기는 제 언니와 같지 않다. 저 목소리도 필시 진심이 아닐 것이다. 진심이더라도 언제 손바닥 뒤집듯 바뀔 지 모른다. 궁기로 인해 일어난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빌어먹을 그 모든 사태의 원흉이 뭐라고? 경계하지 말라고?
"거 참. 지나가던 개도 듣고 귀 털어버릴 말일세."
한순간 어이없어서 긴장도 공포심도 느슨해졌다. 덕분에 몸 꽁꽁 싸맨 듯 하던 것 풀렸다. 어이가 없어도 바닥까지 싹 털릴 정도로 없다. 그 기세 탓일까. 숨었던 자리에서 성큼 나가 다시 궁기 앞에 모습 드러내었다. 이후 무슨 일을 당하던 할 말은 해야겠으니.
"누구 마음대로 내 가치가 있니 없니를 논하시나. 허? 아주 대단한 인물 납셨어. 내 대가리 위에 서 있는 양 아주 거만하게도 씨부리시던데. 허 참. 내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하겠구만."
다시 마주한 궁기가 어떤 꼴 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눈에 들지 않았다. 그 모습 살피기보다 당장 목까지 차오른 말 먼저 해야 속이 시원할 듯 했다.
"뭘 하고 싶은 건지 몰라도 하려면 주변에 폐나 끼치지 말던가. 여기저기 다 쑤시지 않으면 못 할 일인가? 댁이 재주 없어 안 되는 일이라 생각은 안 해봤나? 분수 모르고 나돌아재끼는 애ㅅ끼랑 다를게 뭐야. 나이 얼근히 처먹었으면 정도라는 걸 알라고."
일단 급한 말들 우루루 쏟아내고. 당당히 서서 제 팔짱 끼고 궁기 빤히 보았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던가.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