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룡 기숙사에서 잿더미라 불리던 존재고, 무 씨 집안에서는 유령이라 불렸으며, 형제에게는 무엇보다 쓸모있는 존재, 자신의 측근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랭한 사람이란 평을 받았던 아회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기엔 눈앞의 청년은 서러운 감정을 삼키는 보통의 사람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닥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기엔 아직 성인도 채 되지 못한 청년.
왜 하필 나지. 왜 나는 이렇게 유약하지.
손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아회는 눈에 선명하게 보일 만큼 몸을 크게 떨었다. 마치 공격 받을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러나 천천히 어깨를 두드릴 때, 아회의 몸이 멈췄다. 손길 하나가 기폭제가 됐다. 설움이 북받친다. 아회는 둑이 무너지듯 하염없이 울었다. 허어엉, 서럽게 목 놓아 우는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아회는 온전히 남은 감정을 삼킬 수 있었다. 슬픔을 억지로 밀어내고, 꾸역꾸역 눈물을 목구멍 속으로 삼켜냈다.
"……."
감정이 점차 삼킬 수 있을 만큼 줄어들 때, 아회는 재빨리 눈물을 그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한 살이 찢어저 붉은 피가 흐르니 영 좋지 못한 버릇이었다. 그리고 쉽게 유추할 수 있을 버릇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회는 아마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이런 방법으로 눈물을 재빨리 그쳐야만 했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이 우는 꼴을 보면 호되게 혼을 낼까, 그리고 울음으로 약점을 유추할까 두려워 하며.
"……추, 추태를,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히 눈물을 보였다고 사과해야만 했겠지. 잠긴 목소리가 흘렀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회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원인 모를 불길함에 사로잡혀 그대로 우뚝 굳은 것처럼 서 있으니. 제가 안 가면 안에서 나오겠단 듯 인기척과 소리 들렸다. 무슨 소리지? 옷이 스치는 소리인가? 가벼운 걸음걸이인가? 정체 알 수 없으니 섣불리 나서지도 않는다. 천선 앞에서는 조용하던 역린이 드디어 소리를 내는 것 보아 일말의 타계책은 존재할 듯 했다.
안을 보아야 하는가. 이대로 기다릴 것인가.
굳은 채 고민하는 사이. 입에 문 담배는 이미 재로 변한 지 오래였다. 퉷! 연기 걸러내는 솜 아무렇게나 뱉어내고 한 손으로 조용히 역린 쥐었다. 긴장 슬며시 끌어올리며 한 발 뒤로 무른다. 섣부르게 등 보여선 안 될 것 같았다.
더 울어도 된다고? 어째서? 사람들은 아회가 울면 경을 쳤다. 네가 울 자격이 있느냐고, 울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찌 집안이 기울어지게 울 수 있느냐며 모진 말을 쏟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되어서야 그 하루 만큼은 목을 놓아 울 수 있었으나, 그 이후로 아회는 울지 않았다. 울더라도 입술을 앙다물어 피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쳐내고, 차디찬 눈밭에 얼굴을 묻어 붉어진 눈을 숨겼다. 조금 더 지나서는 아예 울지도 못하게 됐다. 눈을 잃은 뒤 얼굴 가리는 비단 너머로 눈물 흐르는 일은 일절 없었으니. 대신 입술을 깨무는 날이 조금 더 늘었다. 지금처럼.
아회는 씨근거리며 울음 때문에 쉬기 힘들던 숨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흰 손수건으로 눈가를 어떻게든 벅벅 닦아내려 들었고, 코 끝을 훔쳤다. 쪽빛 난초가 수놓아진 손수건은 불타 잿더미가 됐다. 울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한 오랜 버릇이 여기서 드러나고 말았다.
"어째서……?"
그런데 왜, 당신은 참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거지? 자신을 그냥 있는대로 보는 거지? 달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초콜릿이다. 아회는 아직은 가쁜 숨을 갈무리하던 것도 멈추고 초콜릿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을 치거나, 꾸짖거나, 약점을 캐려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초콜릿을 어색하게 받아듬과 동시에 고개를 들고 말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가와 코 끝은 새빨갰고, 산발이 되어버렸던 머리카락 몇 가닥은 이마에 달라붙었다.
"……."
애가 애 다워야지. 아회는 단어를 잃었다.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침묵하다, 다시금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그러게, 왜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사는 걸까?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고, 거역해서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성과 감정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모두 내려놓고 싶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넘어가주지 않을까? 사람은 늘 어리석고, 아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버린 이 순간 만큼은 괜찮을 것이라 독단적으로 믿고 싶었다.
아회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렇지만.
"대가를, 바라시는지요."
지나치게 의심과 불안 속에 살아 쉬이 내려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방법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가야겠다고. 가야한다고.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해도 다리 굳은 양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사내에게 쉬이 등을 보여선 안 된다는 직감 들은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감 뿐일까. 허리춤의 역린 조용하다 못 해 떨고 있었다. 역린이 떠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은 그 누이 신수 마주쳤을 적. 그래. 그이보다 더 상위의 신수 혹은 존재 마주했을 적이다.
긴장한 저와 달리 사내는 몹시 편안하게 말하고 있었다. 매우 편안하게 역린 보고 용케 안 미쳤다느니. 경계하지 말라느니. 하면서 가면을 벗질 않나. 분명 웃는 얼굴인데 그 얼굴이 제 경계심을 더 끌어올린다. 마른 침 꿀꺽 삼키고. 나오지 않으려는 목소리 쥐어짜 입을 열었다.
"의뢰 보내놓고 자리에 없었으면 땡이지.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구만. 찾으러 다니는 건 내 할 일도 아니니 더 있을 것 없지."
근처 찾아보란 저 말도 어찌나 의심스럽게 들리던지. 앞서 여러 전조와 말들 있었다보니 저 사내 말과 의도 죄다 거스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 감도 그러라고 하고 있었고.
"댁이나 열심히 찾던가 기다리던가. 난 가련다."
더 말을 섞는 것도 위험할 것이다. 하여 서두르는 티 내지 않으려 신경 쓰며 휙 하니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악기점 벗어나려 했다.
돈을 바란다면 그간 가주님께 받아온 보화를 팔 것이고, 눈을 바란다면 뽑아야만 한다. 심장을 바치라 하면 바쳐야 하고, 영혼을 바란다면 죽음을 불사해야만 한다. 대가란 그런 것이고, 이 세상에서 이유 없는 호의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아회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듯 발을 지척에 디뎠다. 그리고 눈을 굴려 당신을 쳐다보았다. 어른을 믿으라고? 대다수의 인간들이 경멸하고 하대하는 삶에서 신뢰가 생길 수 있을까?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학당의 사람들도, 도사도, 땅신령과 영이, 하물며 자신까지 신뢰하지 않는다. 굳게 믿는 것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사실 뿐이지. 어떻게든 자신을 믿게 하려는 듯 지렁이 모양 젤리를 꺼낼 때부터 아회의 속내 한 구석은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초콜릿과 젤리를 품에 안게 된 아회는 천천히 얘기하라는 말에 경계심이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에서 적의는 드러나지 않으니.
"저, 저는."
한 호흡.
모르겠다. 모른다. 말하기 어려운 것일까? 말할 상대가 없었던 것 같다. 영이는 자신을 막으려 들었을 테니까, 아니, 사실은 영이도 믿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영이가 충성을 다한다 해도 그 뿌리는 제사장 가문이다. 제사장들은 끔찍한 존재다. 귀기 무 씨의 선조를 현혹해 그 충성심을 빌미로 MA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그리고 아회를 그 차갑고 혹독한 북부에서 태어나게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이 없다. 아예 이방인인 당신이라면, 괜찮을까? 말할 수 있을까? 아회는 침묵하다가 어색하게 젤리를 내려다 보았다. 오래 바라보아야 토룡을 닮은 젤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생겼다.
"……일전에, 말했던, 안배하신 것 때문에, 그러니까, 그, 그게…… 어째서."
뭐라고 해야만 할까. 더듬더듬, 지리멸렬하게 뱉는 말은 끝내 원망이 됐다.
"어째서 저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까."
무언가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삶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하지만 목구멍 밖으로 쉬이 나오지 못하니, 생각이 밀리고 서로 앞다투어 치고 나가려다 결국 결론만이 먼저 나온 탓이다. 아회는 고개를 다시금 숙였다. 당신을 보기엔 익숙하지 않았고, 내심 불편했다. 아니, 정정한다. 불안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제가 진정 불리던 별칭처럼 어떤 일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 잿더미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나간다고 하면 잡을까 경계했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잡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쫓아올 기색은- 일단 없어보이고.
그런데 조금 걸린다. 분명 낌새가 수상쩍었는데 저를 이리 쉽게 보낸다? 간다고 했는데 거듭 돌아가느냐고 묻는 것도 미심쩍다. 그 모두가 의도된 언행일지 모르나. 분명 그 의도들 외면하고 싶으나 지금 그냥 지나치면 안 되지 않을까 하고 감이 속삭인다. 조금만. 한 번만. 무엇 있나 한 번 보기나 하자고.
"간다니까 뭘 자꾸 물어. 젊어뵈는데 귀가 먹었나."
일부러 겉으로는 진짜 가는 척 그리 말 던져놓았다. 나오는 것도 얼추 담벼락 바깥까지는 나갔다. 그러다 악기점에서 안 보일 쯤 얼른 몸을 틀어 가까운 곳 근처에 숨었다. 난잡하게 잔해 쌓인 곳 뒤라던가. 숨어서 악기점 쪽에서 어떤 기척 나는지. 소리 들리는지. 조금 있어보려 했다.
무사히 졸업시키는 것을 바란다고? 실로 어려운 일이다……. 아회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만약 무사히 졸업하고 나면, 그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겠단 건가. 어쩌면 잘 된 일이다. 무사히 졸업하는 조건이 붙어 어렵지마는. 내리깐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운이 나빴다.
아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운이, 나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었나? 아니다. 선택하지 못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탓했을 뿐이다. 왜 하필 나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하필 축복이 아닌 저주 속에서 살아서, 하필 내 실수로 어머니를 잃어야만 해서, 하필 형님께 의지해서, 그렇개 눈을 잃어서, 하필 소중한 것을 가까이 해서…… 하필 신의 악의까지 받아야 하는 북부 사람이라서. 애초에 나는 이길 수도 없는 존재인데, 어쩌디가 이런 목표를 세워서.
"도망, 이요. 제가 안배할 곳에서 도망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괜찮은 걸까요."
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하고싶은 대로 살며 도망치는 것도 방법이겠지.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피해를 입는다. 놓아줄 사람이 아니다. 행복을 탐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받는다. 이번엔 누가 될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그렇게 되어서…….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를 모조리 불태우고 싶어서. 적룡이 선택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일찍이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고, 큰 죄책감을 느껴서.
"……."
아회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차고도 넘칩니다." 품 안에 있는 판 초콜릿과 젤리를 끌어안는 몸짓이 조심스럽다. 달콤한 냄새에 속이 간지러운지 울렁거리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대가 없는 호의가 존재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지, 아회는 눈을 감아버렸다.
"……저는 두렵습니다. 제 형제는 궁기라 불리는 사람이고, 그는 제가 도망치면 사, 사냥하며 가치를 재는 법을 일깨워줄 거라면서, 주변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아회는 입을 꾹 다문다. 다시금 눈이 뜨였다. 공포에 젖은 듯 눈 구르는 속도가 느렸다. 저지르고 말았다. 형님께서 들었으면 어쩌지. 신수의 보호까지 무시하는 존재인데, 상위의 격을 갖춘 존재와 가까운 자인데……. 새삼 억울하던 감정도 같이 치솟는지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울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안 들키겠지- 라고 생각 하긴 했으나. 솔직히 저 남자라면 이미 눈치 챘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역린이 덜덜 떠는 미지의 인물이다. 그런 존재가 이런 허접한 은신 눈치 못 챌까. 어쩌면 그냥 보내준 것도 이리 가지 않고 숨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 같다. 잠자코 몸 감추고 그런 생각 하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여기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쳇. 역시 알고 있었나.
명백히 저를 향한 말에 일순 숨 멎는다. 정말로 한 호흡 멈췄다. 동시에 소름이 쫙 끼치며 별의 별 생각 머리속을 헤집었다. 와글와글. 수많은 생각 대부분이 어서 여기 벗어나 도망가라는 것이었지만. 일부는 그런 것도 있다. 이미 들킨 것 그냥 더 있어보라는. 긴장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조금은 더 있어봄직 하지 않을까. 제 어리석은 생각이 제 몸 그 자리에 남아있게 했다.
그러나 일부 신중함은 있었기에. 들여다보진 않고 오직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척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