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바란다면 그간 가주님께 받아온 보화를 팔 것이고, 눈을 바란다면 뽑아야만 한다. 심장을 바치라 하면 바쳐야 하고, 영혼을 바란다면 죽음을 불사해야만 한다. 대가란 그런 것이고, 이 세상에서 이유 없는 호의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아회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듯 발을 지척에 디뎠다. 그리고 눈을 굴려 당신을 쳐다보았다. 어른을 믿으라고? 대다수의 인간들이 경멸하고 하대하는 삶에서 신뢰가 생길 수 있을까?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학당의 사람들도, 도사도, 땅신령과 영이, 하물며 자신까지 신뢰하지 않는다. 굳게 믿는 것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사실 뿐이지. 어떻게든 자신을 믿게 하려는 듯 지렁이 모양 젤리를 꺼낼 때부터 아회의 속내 한 구석은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초콜릿과 젤리를 품에 안게 된 아회는 천천히 얘기하라는 말에 경계심이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에서 적의는 드러나지 않으니.
"저, 저는."
한 호흡.
모르겠다. 모른다. 말하기 어려운 것일까? 말할 상대가 없었던 것 같다. 영이는 자신을 막으려 들었을 테니까, 아니, 사실은 영이도 믿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영이가 충성을 다한다 해도 그 뿌리는 제사장 가문이다. 제사장들은 끔찍한 존재다. 귀기 무 씨의 선조를 현혹해 그 충성심을 빌미로 MA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그리고 아회를 그 차갑고 혹독한 북부에서 태어나게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이 없다. 아예 이방인인 당신이라면, 괜찮을까? 말할 수 있을까? 아회는 침묵하다가 어색하게 젤리를 내려다 보았다. 오래 바라보아야 토룡을 닮은 젤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생겼다.
"……일전에, 말했던, 안배하신 것 때문에, 그러니까, 그, 그게…… 어째서."
뭐라고 해야만 할까. 더듬더듬, 지리멸렬하게 뱉는 말은 끝내 원망이 됐다.
"어째서 저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까."
무언가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삶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하지만 목구멍 밖으로 쉬이 나오지 못하니, 생각이 밀리고 서로 앞다투어 치고 나가려다 결국 결론만이 먼저 나온 탓이다. 아회는 고개를 다시금 숙였다. 당신을 보기엔 익숙하지 않았고, 내심 불편했다. 아니, 정정한다. 불안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제가 진정 불리던 별칭처럼 어떤 일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 잿더미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나간다고 하면 잡을까 경계했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잡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쫓아올 기색은- 일단 없어보이고.
그런데 조금 걸린다. 분명 낌새가 수상쩍었는데 저를 이리 쉽게 보낸다? 간다고 했는데 거듭 돌아가느냐고 묻는 것도 미심쩍다. 그 모두가 의도된 언행일지 모르나. 분명 그 의도들 외면하고 싶으나 지금 그냥 지나치면 안 되지 않을까 하고 감이 속삭인다. 조금만. 한 번만. 무엇 있나 한 번 보기나 하자고.
"간다니까 뭘 자꾸 물어. 젊어뵈는데 귀가 먹었나."
일부러 겉으로는 진짜 가는 척 그리 말 던져놓았다. 나오는 것도 얼추 담벼락 바깥까지는 나갔다. 그러다 악기점에서 안 보일 쯤 얼른 몸을 틀어 가까운 곳 근처에 숨었다. 난잡하게 잔해 쌓인 곳 뒤라던가. 숨어서 악기점 쪽에서 어떤 기척 나는지. 소리 들리는지. 조금 있어보려 했다.
무사히 졸업시키는 것을 바란다고? 실로 어려운 일이다……. 아회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만약 무사히 졸업하고 나면, 그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겠단 건가. 어쩌면 잘 된 일이다. 무사히 졸업하는 조건이 붙어 어렵지마는. 내리깐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운이 나빴다.
아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운이, 나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었나? 아니다. 선택하지 못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탓했을 뿐이다. 왜 하필 나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하필 축복이 아닌 저주 속에서 살아서, 하필 내 실수로 어머니를 잃어야만 해서, 하필 형님께 의지해서, 그렇개 눈을 잃어서, 하필 소중한 것을 가까이 해서…… 하필 신의 악의까지 받아야 하는 북부 사람이라서. 애초에 나는 이길 수도 없는 존재인데, 어쩌디가 이런 목표를 세워서.
"도망, 이요. 제가 안배할 곳에서 도망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괜찮은 걸까요."
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하고싶은 대로 살며 도망치는 것도 방법이겠지.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피해를 입는다. 놓아줄 사람이 아니다. 행복을 탐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받는다. 이번엔 누가 될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그렇게 되어서…….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를 모조리 불태우고 싶어서. 적룡이 선택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일찍이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고, 큰 죄책감을 느껴서.
"……."
아회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차고도 넘칩니다." 품 안에 있는 판 초콜릿과 젤리를 끌어안는 몸짓이 조심스럽다. 달콤한 냄새에 속이 간지러운지 울렁거리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대가 없는 호의가 존재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지, 아회는 눈을 감아버렸다.
"……저는 두렵습니다. 제 형제는 궁기라 불리는 사람이고, 그는 제가 도망치면 사, 사냥하며 가치를 재는 법을 일깨워줄 거라면서, 주변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아회는 입을 꾹 다문다. 다시금 눈이 뜨였다. 공포에 젖은 듯 눈 구르는 속도가 느렸다. 저지르고 말았다. 형님께서 들었으면 어쩌지. 신수의 보호까지 무시하는 존재인데, 상위의 격을 갖춘 존재와 가까운 자인데……. 새삼 억울하던 감정도 같이 치솟는지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울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안 들키겠지- 라고 생각 하긴 했으나. 솔직히 저 남자라면 이미 눈치 챘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역린이 덜덜 떠는 미지의 인물이다. 그런 존재가 이런 허접한 은신 눈치 못 챌까. 어쩌면 그냥 보내준 것도 이리 가지 않고 숨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 같다. 잠자코 몸 감추고 그런 생각 하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여기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쳇. 역시 알고 있었나.
명백히 저를 향한 말에 일순 숨 멎는다. 정말로 한 호흡 멈췄다. 동시에 소름이 쫙 끼치며 별의 별 생각 머리속을 헤집었다. 와글와글. 수많은 생각 대부분이 어서 여기 벗어나 도망가라는 것이었지만. 일부는 그런 것도 있다. 이미 들킨 것 그냥 더 있어보라는. 긴장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조금은 더 있어봄직 하지 않을까. 제 어리석은 생각이 제 몸 그 자리에 남아있게 했다.
그러나 일부 신중함은 있었기에. 들여다보진 않고 오직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척에도.
도망쳐도 뭐라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에 아회는 가늘게 떨던 몸까지 멈춰버렸다. 신도 뭐라 하지 않는다고. 지금까지 나는, 그리고 어머니는 그 존재에게 용서를 갈구하고자 그 발버둥을 쳤는데. 내가 운명의 굴레에 놓였을 때, 악의를 받았을 때, 그 사실에 지레 겁먹었는데. 결국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다가온 현실에 후련해야만 하거늘 허망함만이 온몸을 채운다. 아회는 한참을 침묵했다. 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다. 지금껏 해온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닌 듯하여 그저 허망했다. 그리고 후련하다. 무엇이 후련한지는 모르겠다마는. 죽지 않아도 돼. "……."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러니까 도망쳐버리자. 신께서는 내가 도망쳐도 신경 쓰지 않는대. 어머니께선 령도로 가자고 했지만, 사실은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도망치자 했던 거잖아. 내가 더 괴롭지 않게끔, 그 순수한 의미를 알고 있었잖아. 아회의 속내에서 작은 불씨가 타올랐다. 끔찍하되 행복한 일이로고. "……저는."
그러나 스스로 짓밟아 꺼야 함을 안다. 천성이란 재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새롭게 출발해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도 내재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회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 때문에 마른 입술을 자근 깨물어 축인다.
"미련이, 너무 많아서, 여기에는 인연도 있고. 그러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 사회로 넘어가면, 모두 잊을 테니까, 그건, 그건……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살아오던 의미를 부정하는 거니까. 지긋지긋한 곳을 모두 잊어버린다면 과연 나는 행복할까. 아니겠지. 증오심이 과연 불타지 않을까, 본능적으로 새로운 위험을 찾거나, 아니면 기껏 억누르고 막아오던 자아가 없으니 크게 불타오르는 위험이 되겠지. 기껏 제안해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이제 싫다.
"하지만, 사감님, 덕분에, 그러니까, 그게. 저."
더듬더듬 뱉는 말 뒤로 어딘가 후련한 감정이 입가를 맴돈다. 동시에 무언가 후두둑 떨어진다.
"마, 마음이 놓입니다. 적어도, 호, 혼자서, 두려워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눈물이다. 훌쩍이지는 않지만 고요히 방울져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학생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 사감님이라면 이번 대답만큼은 동의해주길 바란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커진다. 한 마디면 돼. 놓지 마. 제발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무시하지 말아줘. 혼자 못 버텨. 다른 사감처럼 간섭할 수 없다며, 인간의 삶이라며 무시하듯 하지 말았으면.
돌아보지 않아서.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현명했다고. 멀리서 들리는 질척한 소리 들으며 생각한다.허나 그 다음 순간. 훅 끼쳐오는 혈향에 눈 앞이 아찔해졌다. 요즘 피를 보지 않아 방심하고 있던 제 안에 푹 하고 가늘고 긴 가시가 꿰뚫린 양 섬뜩하기까지 했다. 곧 덜덜 떨리려는 입술 막으려 잇새에 단단히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굳은 양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저럴 생각이었던 것일까. 아님 제가 왔기 때문에 저런 것일까. 저 피의 주인은 필시 악기점 주인장이겠지. 그래놓고 제게 찾아보라 종용한 것인가? 정말로 찾으러 갔었다간 제가 저기에 있었을 지도.
혼란스러워지는 머릿속 일순 멈추게 한 것 있었다. 걸어오는 발소리. 그 기척!
아.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학당으로? 가다가 잡힐 위험 더 크지 않나. 그가 정말로 그 호랑이라면 도망치는 제 뒤 쫓는 것 쯤 한달음일 것인데. 의미가 있나? 역린. 역린은 여전히 떨고 있고 아니어도 저 앞에서 뽑아들 기세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어찌. 어째서 또 다시 이런 상황에.
으직.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입술 살점이 뜯겼으나 아픈 것도 몰랐다. 숨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숨 죽이는게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