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조차 없다. 어디에도 발 들일 곳이 없었다. 열심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는데, 막상 자신은 한 뼘도 못 되는 길이의 얇은 실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 끊어질 것이고, 결국엔 추락하여 아래에 돋아난 가시와 깨진 유리 조각에 찔려버릴 텐데. 그 사실을 깨닫자 비참함이 몸을 덮었으나 울지도 못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증오심을 표출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대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이대로 자멸하길 바라는 걸까. 그대로 형님 앞에서 쓰러지는 통쾌한 복수가 아니라 쓸쓸하게 홀로 부서지길 바라는 걸까……. 해저 깊숙한 곳에서 그렇세 죽어가라는 것인가.
"……."
인기척이 느껴진다. 자리를 피하고 싶지만 달리 갈 곳도 없다. 아회는 발치에 보이는 뭉개진 무언가를 보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하필이면 학당의 사람이다. 아회는 입술을 벌리다 꽉 깨물었다. 무언가 얘기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뭔가 뱉으려고 해도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소중한 자를 두고 왔습니다, 결정할 준비를 하러 갑니다, 아무래도 제 삶이 제 것이 이닌 것 같습니다, 왜 나를 혼자 두질 않는 거야.
"으윽."
말을 하지도 못하고 목 너머로 북받쳐 오르는 소리가 흘렀다. 참아야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추태를 보일 수 없는데! 간절한 소망과는 다르게 흑, 하고 다시금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되어버린다. 아회는 그대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어떻게든 눈물을 삼켜보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목 졸린 신음같은 울음소리는 서러워졌고, 숨을 삼킬 때마다 몸이 크게 들썩였다.
잔잔하게 한숨 자듯 쉬면 좋았겠지만- 아직 한창 돌아다닐 시간이니 바깥 시끌시끌하여 제 바람 이루지 못 했다. 그렇지 않아도 딱히 잘 생각은 없었으니.
조금 더 이불 속에서 뒹굴다 부스스 일어난다. 기지개 한 번 개운하게 켜 주고 벗어던진 옷 차례로 다시 주워입었다. 마지막으로 두루마기 걸칠 적. 소매에서 박하 가지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반쪽짜리 영약도 손수건에 고이 감싸 그 옆에 놓고. 휙 돌아 나가려다 퍼프스캔의 둥지에 손 뻗었다.
"이- 놈시키! 내가 왔다 가는데도 잠만 자! 으이?"
낄낄. 웃으면서 자고 있는 퍼프스캔을 사정없이 쓰다듬었다. 괜히 잠 깨워놓고 또 다녀오겠다며 놀리는 성미 참 얄밉기도 하다.
"잘 놀고 있어라. 여기저기 쑤시진 말고-"
이번에도 퍼프스캔- 보드리 방에 남겨두고 홀로 나섰다. 다른 의뢰 뭐가 있었던가. 다시금 게시판 앞으로 슬렁슬렁. 설렁설렁.
적룡 기숙사에서 잿더미라 불리던 존재고, 무 씨 집안에서는 유령이라 불렸으며, 형제에게는 무엇보다 쓸모있는 존재, 자신의 측근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랭한 사람이란 평을 받았던 아회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기엔 눈앞의 청년은 서러운 감정을 삼키는 보통의 사람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닥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기엔 아직 성인도 채 되지 못한 청년.
왜 하필 나지. 왜 나는 이렇게 유약하지.
손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아회는 눈에 선명하게 보일 만큼 몸을 크게 떨었다. 마치 공격 받을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러나 천천히 어깨를 두드릴 때, 아회의 몸이 멈췄다. 손길 하나가 기폭제가 됐다. 설움이 북받친다. 아회는 둑이 무너지듯 하염없이 울었다. 허어엉, 서럽게 목 놓아 우는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아회는 온전히 남은 감정을 삼킬 수 있었다. 슬픔을 억지로 밀어내고, 꾸역꾸역 눈물을 목구멍 속으로 삼켜냈다.
"……."
감정이 점차 삼킬 수 있을 만큼 줄어들 때, 아회는 재빨리 눈물을 그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한 살이 찢어저 붉은 피가 흐르니 영 좋지 못한 버릇이었다. 그리고 쉽게 유추할 수 있을 버릇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회는 아마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이런 방법으로 눈물을 재빨리 그쳐야만 했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이 우는 꼴을 보면 호되게 혼을 낼까, 그리고 울음으로 약점을 유추할까 두려워 하며.
"……추, 추태를,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히 눈물을 보였다고 사과해야만 했겠지. 잠긴 목소리가 흘렀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회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원인 모를 불길함에 사로잡혀 그대로 우뚝 굳은 것처럼 서 있으니. 제가 안 가면 안에서 나오겠단 듯 인기척과 소리 들렸다. 무슨 소리지? 옷이 스치는 소리인가? 가벼운 걸음걸이인가? 정체 알 수 없으니 섣불리 나서지도 않는다. 천선 앞에서는 조용하던 역린이 드디어 소리를 내는 것 보아 일말의 타계책은 존재할 듯 했다.
안을 보아야 하는가. 이대로 기다릴 것인가.
굳은 채 고민하는 사이. 입에 문 담배는 이미 재로 변한 지 오래였다. 퉷! 연기 걸러내는 솜 아무렇게나 뱉어내고 한 손으로 조용히 역린 쥐었다. 긴장 슬며시 끌어올리며 한 발 뒤로 무른다. 섣부르게 등 보여선 안 될 것 같았다.
더 울어도 된다고? 어째서? 사람들은 아회가 울면 경을 쳤다. 네가 울 자격이 있느냐고, 울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찌 집안이 기울어지게 울 수 있느냐며 모진 말을 쏟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되어서야 그 하루 만큼은 목을 놓아 울 수 있었으나, 그 이후로 아회는 울지 않았다. 울더라도 입술을 앙다물어 피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쳐내고, 차디찬 눈밭에 얼굴을 묻어 붉어진 눈을 숨겼다. 조금 더 지나서는 아예 울지도 못하게 됐다. 눈을 잃은 뒤 얼굴 가리는 비단 너머로 눈물 흐르는 일은 일절 없었으니. 대신 입술을 깨무는 날이 조금 더 늘었다. 지금처럼.
아회는 씨근거리며 울음 때문에 쉬기 힘들던 숨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흰 손수건으로 눈가를 어떻게든 벅벅 닦아내려 들었고, 코 끝을 훔쳤다. 쪽빛 난초가 수놓아진 손수건은 불타 잿더미가 됐다. 울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한 오랜 버릇이 여기서 드러나고 말았다.
"어째서……?"
그런데 왜, 당신은 참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거지? 자신을 그냥 있는대로 보는 거지? 달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초콜릿이다. 아회는 아직은 가쁜 숨을 갈무리하던 것도 멈추고 초콜릿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을 치거나, 꾸짖거나, 약점을 캐려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초콜릿을 어색하게 받아듬과 동시에 고개를 들고 말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가와 코 끝은 새빨갰고, 산발이 되어버렸던 머리카락 몇 가닥은 이마에 달라붙었다.
"……."
애가 애 다워야지. 아회는 단어를 잃었다.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침묵하다, 다시금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그러게, 왜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사는 걸까?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고, 거역해서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성과 감정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모두 내려놓고 싶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넘어가주지 않을까? 사람은 늘 어리석고, 아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버린 이 순간 만큼은 괜찮을 것이라 독단적으로 믿고 싶었다.
아회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렇지만.
"대가를, 바라시는지요."
지나치게 의심과 불안 속에 살아 쉬이 내려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방법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가야겠다고. 가야한다고.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해도 다리 굳은 양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사내에게 쉬이 등을 보여선 안 된다는 직감 들은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감 뿐일까. 허리춤의 역린 조용하다 못 해 떨고 있었다. 역린이 떠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은 그 누이 신수 마주쳤을 적. 그래. 그이보다 더 상위의 신수 혹은 존재 마주했을 적이다.
긴장한 저와 달리 사내는 몹시 편안하게 말하고 있었다. 매우 편안하게 역린 보고 용케 안 미쳤다느니. 경계하지 말라느니. 하면서 가면을 벗질 않나. 분명 웃는 얼굴인데 그 얼굴이 제 경계심을 더 끌어올린다. 마른 침 꿀꺽 삼키고. 나오지 않으려는 목소리 쥐어짜 입을 열었다.
"의뢰 보내놓고 자리에 없었으면 땡이지.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구만. 찾으러 다니는 건 내 할 일도 아니니 더 있을 것 없지."
근처 찾아보란 저 말도 어찌나 의심스럽게 들리던지. 앞서 여러 전조와 말들 있었다보니 저 사내 말과 의도 죄다 거스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 감도 그러라고 하고 있었고.
"댁이나 열심히 찾던가 기다리던가. 난 가련다."
더 말을 섞는 것도 위험할 것이다. 하여 서두르는 티 내지 않으려 신경 쓰며 휙 하니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악기점 벗어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