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한 장 더 보기로 했습니다. 사진이 무언가 이상합니다. 머리에 피가 흐르는 붕대를 감은 英사감이 어색하게 웃고 있습니다. 흙먼지 가득한 상태로 손을 휘젓는 걸 보아, 찍지 말라고 했지만 찍힌 것 같습니다. XXXX.XX.XX로 적힌 날짜를 보니, 처음 본 사진이 찍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같습니다.
....... !!! 이 글자는 읽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이 때를 절대 잊지 마라.
"미안하다 할 필요는 없소. 내 타인에게 사과할 일 없듯 그쪽이 백 씨 가문의 자제라서 사과할 이유 없지."
나긋하게 얘기하며 목화 손으로 가볍게 간지럽힌다. 북부에 나쁜 사람만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라. 순수한 자. 나는 악인이란다. 네게 베푸는 것도 널 어린 나를 겹쳐보았던 욕심이자 위선이지. 속내의 얘기는 꺼내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아가, 가기 전에."
아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적 태웠다. 종이봉투 속으로 준비해준 간식이나 여타 사탕 같은 먹거리 순식간에 담기더니만 아회는 당신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 어떤 것도 그대 잘못이 아니야. 누군가 그대를 농질의 가문이라 몰아가며 욕한들 그 말에 휘둘릴 필요 없지. 내 그대에게 베푸는 온정이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희망고문이 될 수도 있겠으나 선택은 본인의 몫이오. 단, 하나는 기억하게. 주먹 하나면 평정되는 것이 적룡이야."
그러니 조심히 들어가거라. 다음에 또 보고. 상냥히 속삭여주며 배웅하려 했던가. 위선. 여전히 위선이다. ……너는 이 온정을 벗 삼아 악인의 삶 살지 않았으면 한다.
앞선 사진들이 흥미로웠기에 다음 것을 볼 때도 별 생각 없었다. 또 무슨 흥미로운 모습 담겨있나.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았다. 제 기분만큼 가벼운 정경은 아니었지만.
부상 당한 것이 분명한 영 사감과 흙먼지 날리는 주변. 그리고 아래 적힌 글씨. 저도 읽을 수 있는 글씨로 전쟁과 이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헌데 전쟁은 무엇이며 이 때는 언제인가? 단박에 이 사진은 영 사감의 중요한 부분일 거란 감이 왔지만. 동시에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있었다. 하여 문이 열리고 영 사감 들어와도 딱히 시치미 떼거나 하지 않고 사진을 든 채 인기척 나는 쪽 보았다.
"미안하실 것 없소. 나도 가만 있던 건 아니었으니."
사진첩 펼쳐놓은 그대로 그 사진 들고서 온화 말했다. 뭔가 안고 있는 영 사감이 제가 무엇 하고 있었는지 깨닫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시선 마주치면. 손가락 사이로 사진 들어 보이며 담담하게 물었다.
"이보시게. 영 사감님. 아까 했던 말 중에 가르칠 수 없는 시기 있었다 하셨지요? 그것이 여기 적힌 전쟁과 관련 있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은. 거기서 무엇 하신 거요?"
멋대로 보았다고 당장 쫓겨날 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금이 아니면 물을 기회 없을 것 같으니. 내쫓는대도 좀 버텨보잔 각오 속으로 하며 영 사감의 대답 기다렸다.
다른 사감이었으면 이런 유도리는 없었을 텐데. 전에도 든 생각이지만 영 사감은 학생에게 너무 무르다. 저번에도 굳이 기다렸다가 약을 주질 않나. 이번에도 그렇고. 그리고 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뭔가 생각나긴 했지만. 일단 영 사감이 왔으니 사진을 좀 더 보기로 한다. 제가 본 것을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라 하길래 새삼 놀란 눈으로 사진과 영 사감 번갈아본다. 그러니까 대충 열서넛 쯤이겠지? 우와- 이렇게 봐도 도저히 같은 사람 안 같다. 분명 닮았으니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이해는 되지만. 우와.
"요 쪼그만게 딱 내 취향인데. 아. 어. 아까 백호한테 늘 시달리는 사감이 리 사감이라 했잖소. 요 얼굴 퀭하니 그런갑다 했지. 거기 신수도 영 점잖지만은 않은가 보오."
킥킥 웃으며 사진 도로 내려놓는다. 가까이 온 영 사감이 사진첩 넘겨 다른 사진 보여주자 얼른 본다. 뭔가 수업인가? 약을 만드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봐도 연기 자욱해지는게 실패한 것 같다. 영 사감도 실수했다고 설명하길래 피식 웃었다.
"그렇구만- 뭐 누구나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는 하지요. 마지막이라. 그래도 그 분은 사감이 계속 기억할 테니 그것으로 괜찮지 않나 싶으이."
잊을 수 없음이 괴로움 될 때도 있지만. 추억 속 인물이라면 두고 두고 기억하는게 좋지 않겠는가. 더 보겠느냐 묻길래 냉큼 고개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래.
"여 다닐 적 벗은 없었소? 몰래 연심 품었던 이라던가- 한때 풋풋하게 놀았던 이라던가- 응?"
오. 다행히 대화의 흐름이 좋았는지 영 사감 웃으면서 서랍에서 무언가 꺼냈다. 다른 사집첩은 아니고. 기록장인가. 주술로 꽁꽁 닫아놓은 곳에서 꺼내는 것 보니 그만큼 소중하단 것이겠지. 괜히 호들갑 떨지 않고 얌전히 그 속에서 꺼낸 사진을 보았다. 조금 더 자란 영 사감과 한 여자아이. 더 가까이 오란 듯 팔을 당기는 모습에서 제가 하 사감 대할 때 생각이 나 살짝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얼굴이 근질거린달까. 그런 기분이라.
사진을 보며 영 사감의 얘기 듣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기척에 고개 돌려 시선으로 영 사감 쫓았다. 벽난로의 솥으로 간 영 사감이 마저 한 말은 그다지 좋지 못 한 첫사랑의 마무리였다. 허나 확인조차 못 해 본 감정이니 첫사랑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아마. 전쟁도 없고 형벌도 없었다면 이 둘은 다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친구로든. 연인으로든. 조용히 조심히 사진 내려놓으며 명랑하게 떠들었다.
"뵈는 것과 다르게 풋풋하셨구만. 그래. 이런 것 있으니 궁금하다 얘기해달라 조르지요. 음. 찔러보길 잘 했네."
가라앉은 목소리가 짤막하게 중얼거린 말은 구태여 사족 달지 않았다. 두 세상이 비슷하고 아니고를 생각할 수 있는 건 영 사감 뿐이니. 듣고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결국 여기도 저기도 같은 창제신의 손바닥 위이니. 다른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하겠지. 달리 말하자면 어딜 가나 다 사람 사는 세상이기도 하고.
솥을 휘젓던 영 사감은 그 안에 든 약을 병에 나눠 담았다. 그 중 하나를 제 앞에 두며 가져가라길래 군말 없이 집어들었다. 약효는 이미 써봐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다 혀 차는 소리에 키득. 웃어버렸지만.
"거 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고생도 많소. 리 사감마냥 퀭해지지 말고 몸 좀 잘 챙기시구려. 죽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것 아니고 피로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소. 내 본의 아니게 그 고생에 한 술 얹는 기분이라. 눈밑 꺼먼 것 보면 괜히 죄송스러워진단 말이오."
주절주절. 그런 얘기 하며 약병 챙겨 주머니에 넣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할 말 있는데 쉬이 하지 못 하고 말 고르듯. 제 뺨 긁적이기도 하며 흠- 작게 소리 내다가 별 것 아닌 듯 툭 하니 말한다.
"사감 덕을 이것저것 많이 받기만 하니 이리 말 하기 좀 민망하지만은. 내 부탁 하나 있는데 듣기라도 해주실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