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목적 잃은 난선처럼 그저 부유하는 것만 같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서 있나 의문이 들다가도, 어디선가 흘러오는 비릿한 향에 고개 느릿이 돌아간다. 아, 저편에 피가 낭자하다. 참을 수 없이 그리운 맥동이, 끝없이 끼얹어서라도 느끼고픈 온기가. 정신 나간 이 답지 않은 차분한 걸음 그리로 향한다. 쓰러진 자 앞에 이르러 그는 온화에게 손을 뻗었다. 온건한 손길이 아니었다. 피 멎고 쏟아내길 반복하는 그 자리를 손으로 헤집으려 들었을 테다.
저번 천부에서 마주쳤을 적엔 품에 안아도 도망도 안 치더니 오늘은 미꾸라지 마냥 잘도 피하는구나! 마음 같아선 소리 내어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입 열고 배에 힘 주는 순간 위아래로 피 뿜을 것이다. 아이고 답답해! 분해! 이럴 때 역정 나는 것 보니 저도 어쩔 수 없는 적룡인가보다. 옆구리 화끈거려도 일단 뭐든 조져야겠으니.
"꼬리값치고 너무 비싼. 아흐! 아이고 거 살살 좀 하소!"
저 찌른 후 정신 돌아온 아회가 옆구리에 부적 붙여줄 적 그리 호들갑 떨었으나 마냥 호들갑 만도 아니었다. 실제로 꽤나 아팠고. 그래도 부적 붙일 때마다 들썩이면서도 피하지는 않아 곧 옆구리 출혈 멈춘다. 그래봐야 이미 피투성이지만은. 적어도 지혈은 되었으니 조금 운신 괜찮을-
"잌!"
갑작스럽게 흔들리는 땅에 이번엔 몸 주체 못 하고 자빠졌다. 털석 엉덩방아 찧는 정도였지만 이미 너덜한 제 몸에 가해지는 충격으로는 엄청났다. 정수리까지 치솟는 고통에 숨도 못 쉬고 자빠져있다가. 드득. 흙바닥 긁는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일어설 적엔 뿌드득 소리 났다. 이를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턱에 힘줄 서 있었다.
"물비린내 나는 X끼... 비늘 바르듯 살점 바르고 인두로 살살 지져버릴까...!"
무슨 짐승에게서나 날 법한 목 긁는 소리와 함께 온화 기어코 그것 뽑았다. 검집 벗겨지며 역린의 서슬퍼런 날이 드러난 것이다. 여태 헛손질 했듯 또 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 온화 눈은 실핏줄 슬슬 터지며 벌갰다. 되든 안 되든 일단 갈겨보겠다는 의미다. 그 결심 떨어지자마자 어디서 나온 힘인지 세차게 달려 역린으로 인어 꿰뚫으려 했다. 그 목 한 중간을.
개여시. 그 순간부터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끝도 없이 자신이 늘 이 세상의 일부이자 언제이든 죽을 수 있는, 아무런 재능이 없는 범인임을 인지하게 됐다. 그 사실만큼은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넘어갈 수 있고, 두 번은 재고하게 되며, 세 번은 의심하게 되고.
끝내 오늘, 그 참아오던 잿더미를 누군가 발로 걷어찼으니 바로 당신이다.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가길 바란다고? 본인이 강제로 끌고가면서 들어가길 바란다 논한다는 것인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입을 벌려 노래를 부르더니 학당 사람들을 맘대로 홀리는 것이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아니, 아니다. 땅이 아프다고 하였던 목화의 말을 다시금 상기하니 잘 알 것 같았다. 저것이 나를 방해하고, 넘어뜨릴 것이며, 불태울 것이다. 고작 저딴 것 때문에 내가. 부적을 붙이며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아회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누가 누구의 친구라고?"
숨기고 있던 오만함에 불이 붙는다. 검에 묻은 피 휙 털어내지도 않고, 간도 보지 않으며 그대로 칼 앞으로 쭉 뻗었다.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면 목이나 입을 찢어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그렇게 되면 비명 또한 노래가 될 수 있다. 지금 해야할 것은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 것이지 아니한가. 하여 다리를 노렸다. 다리를 거세게 베어 무릎 꿇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여.
땅바닥 흔들려 주저앉았을 적. 바로 일어나지 못한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유현 때문이었다. 단단히 홀린 눈 하고 오더니 대뜸 옆구리 환부에 손가락 꽂았을 때엔 오늘이 기어코 죽는 날인가 싶었다. 기껏 붙인 부적 무색하게 뚫리자마자 유현의 손 잡아채어 내치려 했다. 얼마나 더 홀릴지 모르니 일단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더 빨리 멀어지기 위해 인어에게 달려들어 그 목 조지는가 했는데.
"허? 이런 TB!!!"
분명 목을 뚫어버리려 했건만 어째서 저 희멀건 쭉정이가 떠안느냔 말이다! 두고 두고 쓸모가 없구만. 저것부터 족쳤어야 했어!
라는 온갖 생각 담긴 눈이 보리 향했다가 다시 인어에게 향했다. 이번엔 참지 못 하고 벌린 입으로 또 한 웅큼 토해내고. 악에 받친 고함 내질렀다.
"거 잘 됐다! 아까부터 어슬렁어슬렁 거슬리던 참인데! 그래 내 다음엔 심장 찔러줄테니 그것도 넘겨보시지! 네놈이 뒤지던 저 쭉정이가 뒤지던 내 알 바냐! 비늘 발라버릴 물짐승 X끼야!!!!!!!"
피 섞인 발악 하며 재차 쥔 역린으로 인어의 목 다시 내려친다. 저것 물어뜯고 포식해버려라!!!!!!
또 다시, 어느 순간 모호하고 몽롱하던 의식이 별안간 명징해진다. 지난번 개여시 때와 유사한 듯 다른 기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피로 흥건하게 젖은 제 두 손이다. 그것을 확인하자 새까만 수륜 일시에 확장된다. 당혹인가? 혹은 그저 흥분했을 뿐? 무엇이 되었든 이 순간 그가 어떤 이유로든 크게 동요했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피의 주인 되는 자는 멀리에 있지도 않았다. 시선 끌어올리자 곧장 보이는 모습 올려다보며, 그는 응당 해야 할 것 아닌 다른 말부터 입에 올렸다. 아, 손끝으로 느꼈던 맥의 감각 아직껏 선명하다. "내가 이러는 동안,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 그 감각 더 생생히 느껴야 했는데……. 그리고 그는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확인했다. 습관처럼 옷자락 털려 하다 손이 지저분하니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조금 뒷전에 서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잠시 파악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은, 끼어들어도 혼잡해지기만 할 테니 일단은 가만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거기로 가려면 꼭 당신 노래 들어야 하나요? 맨정신으로는 가면 안 되나. 가기만 한다면 이리 서로들 다툴 필요 없지 않나요."
백룡 기숙사의 홀린 녀석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었다.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금술을 쓰든, 제사장 가문이든, 그것을 저 존재에게 쓰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죽을 녀석이면 죽을 것이고 살 것이면 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 불청객을 막아세우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검을 휘두를 적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이 공격을 피할 수 있게 잡아채지 않아도 공격은 빗나갔을 것이다. 검으로 베어 그 끝이 땅을 향한 자세 그대로 아회는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궁기 말이 맞네.
당신을 쳐다보는 눈이 온전히 뜨여 있었다. 궁기. 그 두 글자에 온몸이 굳은 밀랍인형처럼 혼란한 전시에 우두커니 서 당신만 쳐다보았다. 방금 궁기라 하였지. 빠졌던 조각이 들어맞는다. 저 존재가 인어다. 그리고 저 존재가 온 이유는 궁기의 명령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제가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 잘 알았다. 만일 이것이 독단적인 상황이라면 지금쯤 온 산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찾아 죽이려 들었을 테니.
"……."
그런데, 형님이 왜. 어째서? 이전부터 들었던 생각이었다. 10년 전 그렇게 떠나놓고서,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학당을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어째서 하필 이 순간이지? 어째서 자신에게 아량껏 자비를 베풀었지? 어째서? 바라지 않는 것을 왜 이제 와서 모조리 이루어주려 하고, 동시에 행하려 들지? 지팡이의 손잡이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숨을 후, 뱉었다. 잡념이다. 망념이고, 불필요한 찌꺼기에 불과하다. 보아라, 저 멍청한 존재를 통해 무엇을 해내려 한단 말인가? 자신의 형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을 사용하지 않는 존재가 친우니 무엇이니 지껄이는 저것에게 대체 무슨 쓸모를 찾았단 말인가. 아니다, 아니다……. 이지러지는 속내 뒤로 부정하던 감정과 긍정하던 감정이 서로 상충하더니 뇌리를 온전히 스쳤다.
"하, 하하……. 친구는 무슨, 지랄하네."
그 말을 끝으로 아회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얗게 물들었던 손에 힘이 빠지고,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방해되는 것을 치워야 한다. 아회는 잘 알고 있었다. 지킨다 해도, 자신이 다시금 지키지 못하고 공격할 것을 알았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비틀거리며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들어 검을 다시금 역수로 쥐었다. 이내 제 옆구리를 강하게 찔러박으려 했을 때 보인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하였다.
제 옆구리 후벼놓고도 태연하게 얼마나 그러고 있었냐 묻는 유현 향해 온화 던져준 대답이었다. 실은 그것보다 길지만 이 급박한 상황 속에 그것 어떻게 재고 있을까. 그러니 눈 깜빡할 순간이었다고. 대충 일갈하고 곧장 그 자리 등졌다. 더 급한 사안 코 앞에 닥쳤으니.
역린이 인어의 목 뚫고 곧장 잡아빼었으니 다시 소리 못 낼 것이다. 다음은 아예 떨어뜨려주마. 그리 마음 먹은 것도 잠시였다. 흐르는 피 보며 히죽 웃은 것 찰나. 인어의 품에서 떨어지는 인형의 목 보고 다시 이 갈았다. 빠드드득- 저러다 이 부서지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힘 들어갔으니 그 소리 또한 섬찟했다.
"이 짐승 X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온화 지척에 있었으니 아회 향해 하는 말들도 다 들렸다. 사감들 언급하는 것도 들었다. 벌겋게 터진 눈에서 금방이라도 피눈물 흐를 것 같다. 과히 힘 준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목에도 붉은 실자국 넘실넘실 번지며 어렴풋이 어느 문양 만들어낸다. 붉은 선으로 이루어진- 연꽃 닮은 문양을.
"내 오늘 네 목은 못 떼어도 그 혓바닥은 기필코 잘라주마. 당장 그 주둥이 벌려!!!"
이젠 고함과 동시에 피 뱉으며 역린 들었다. 높이 든 역린의 날에서 희디 흰 빛 반짝인다 싶더니. 인어의 잘도 나불거리는 입 향해 내리찍히려 한다. 혀 끊고 그 목도 뚫어버리리라!
목이 베이는 순간 끝인가 했더니, 조종하는 인간들 외의 다른 대책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금 멀쩡하게 목소리 내는 남자를 바라보며 제 턱 언저리 살살 두드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직접가면 더 좋겠다 말하는 상대의 말에 그는 조금 고민하다 이야기를 돌렸다.
"……이건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인데 말이죠. 당신, 령도에서 풍어가를 부르던 사람이었죠?"
제 발로 간다는 투의 말 꺼냈지만 진심일 리 없다. 그저 조금이라도 관심 돌리려 했을 뿐이지. 그래서 그는 주의를 끌 만한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그때 그 꿈 더 꾸었다면 저 자에 관해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이내 그는 또 틈을 노려 도술을 사용했다. 남자 발치의 흙이 뱀처럼 길게 솟아나 꿈틀거리더니, 남자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상대의 목구멍 안까지 흙으로 꽉 메워버리겠단 일념으로. 죽일 정도의 공격을 해 봤자 목숨줄 여럿 있는 듯하니 안 죽이되 입 다물게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