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다. 늘상 실패가 잦았던 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다시금 시도하려 하던 찰나였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도술에 열중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저 자가 인간 아니기에 발소리조차 없기 때문이었을까? 유현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지나칠 정도로 보통의 정도를 지킨 빠르기였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직감은 했지만 정말로 저 양반 버티고 있을 줄이야. 비교적 선명해진 상은 남자의 표정이며 눈길을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유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툭하면 절 먹겠다 말하는 자에게 어떤 태도 보여야 할지 조금 생각하는 것이다.
"연습을 도와준단 명목으로 제 고기를 요구한다거나 잡아먹으려 들지만 않는다면, 아니, 대가는 무엇이라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여하간 그리해 주신다면… 네. 기껍겠군요."
생각한 결과, 당장은 잡아먹지 않을 듯하니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정말 못 참을 정도였다면 자신이 눈치 못 채고 있었을 때 진작 잡아먹었겠지. 이 생각이 틀려 상대가 갑자기 돌변하게 된다면 그날로 죽는 것일 뿐이고. 어차피 이 세상은 험하게 생겨먹었으니 호들갑 떨어봤자 유난밖에 안 된다. 그는 쪼그려앉았던 몸 일으키고 상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줄 거냐는 양.
"배가 고픈지는 얼마나 됐나요? 혹시 당신은 영원히 허기에 괴로워할 운명이라거나, 인간을 주식으로 삼는 부류인가요? 절 쫓았던 이후로 아직 아무도 못 잡아 드셨나요? ……아, 이리 묻는다 해서 절 먹으라는 뜻은 물론 아니에요."
그리고 곧장 이것저것 따져 묻는다. 백룡은 본래 탐구열에 미친 족속들의 집합소다. 저 남자나 사감들 정체에 관해 의문 가진 지도 오래되었으며, 상대가 인간 아니며 저를 잡아먹겠다 날뛴 자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간에 수업을 빠져버린 주제에 징계도 받으러 가지 않고, 기숙사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문을 굳세게 걸어 잠근 뒤 목화를 재우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평소 같으면 호위라도 곁에 불러 담소라도 나누었겠으나 이제 호위는 곁에 없고 하염없는 침묵만 가득하다. 하 사감과의 대면에서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춘 사감과의 싸움에서 마주한 시선도 그러했고, 영 사감과의 대면에서 마주한 처지 또한 무감했으며, 용을 마주했을 때엔 기대하지 않기에 욕심도 내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앎이란 그러한 것이기에. 다만 앎이란 금세 번뇌에 빠지곤 하니 언제 또 흔들려 어리석게 경가의 노를 지어 도망치려 들다 다시금 너울에 휩쓸리겠지.
그러나 더는 두렵지 아니하였다. 굴러다니는 별사탕은 더 삼키지 않고, 이미 번쩍번쩍하게 닦은 지팡이를 기계처럼 멈추지 아니하며 닦기만 할 때였다. 아회는 느릿하게 입 벌려 중얼거렸다. "아둔한 것들." 비록 주체를 대지 아니하나 최근 있던 사건들로 추리하자면 단 하나로 직결되는 존재들이 있었다.
"……."
다만 샘솟던 것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시금 눈을 감는다. 불경한 생각은 해서도 아니 되는 법이요 행해서도 아니된다. 자신은 참아야 하는 존재고 외면해야 하는 존재이니 이는 방관하지 않으면 번뇌 이어지기 때문이라. 그러니 나는 행하지 아니하고 방관하리라…….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 돌리지도 않는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나지막이 들렸다 떨어지고, 목소리와 달리 익숙지 않은 밭은 기침과 말소리 멀어지며 발소리까지 들리지 않는 순간까지 침묵했다. 얌전히 돌아가니 세상 별 일이나 인간사에 신경 쏟아 무엇하나, 무시하면 되겠지. 한참을 그렇게 지팡이나 닦던 아회는 불현듯 손을 멈췄다.
"……하루도 가만 두질 않는군."
무시하면 될 것인데.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숙일 적 정돈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쏟아졌으나 한참을 그리 가만히 있다가도, 이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 지랄맞은 것이 한두 번이었나."
언제부터 자신이 그런 일에 주눅들고 살았다고 죄없는 것에게 침묵하고 자빠졌는지. 깊게 한숨 쉬며 자리에서 일어선 아회는 새것같은 지팡이를 짚었다. 긴 머리카락과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옷가지 주섬거리며 갖춰입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암실의 벽난로 타오르며 문 굳게 닫혔다.
***
유령과 같은 걸음은 평시와 같다. 잿더미의 유일한 장점은 무슨 일을 겪어도 같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 번 폭발해도, 그 이후 몇 번이고 찬물이 끼얹어져도 재는 재였다. 위태로움을 가릴 수 있는 방법을 알기에 늘 그렇듯이 초연함 유지하며 어느 한 곳에 도달한 아회는 손을 들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나다."
다만 잿더미라도 달라진 점이라면 당신에게 더 격식 차리지 않는단 점이요 이는 당신이 안을 들쑤셔 불티 본 탓이다. 시생이오, 문을 좀 열어주실 수 있겠소? 본디 그리 할말을 이리도 짧게 뱉고는 아회 덤덤하게 덧붙였다.
"화야, 내 나가기는 신수 탓에 글러먹었고 그냥 있기엔 난데없는 기침 소리에 잠 깨어버린지라 놀아달라 왔는데 혼자 재미보지 말고 문 좀 열어줄 수 있겠더니."
당신이 했던 언사 그대로 써먹으니 그 꼴 퍽 우습다만, 이 방법 아니면 문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이리 짓궂게 굴어버린다.
고작 복도 좀 걷고 계단 좀 오르내렸다고 숨이 차는 날 올 줄은 몰랐다. 아. 적어도 저번 수업 때 그리 뛰고 맞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보단 나았겠지. 덕분에 방 돌아오자마자 다시 침대에 엎어져야 했다. 푹신한 이불에 엎어지는 것 조차 뼈와 살 울려 괜히 눈물 핑 돌았다. 몸이 고달프면 마음도 쉬이 흐트러진다 하던가. 술도 다과도 다 꺼내놓았지만 먹을 기미 없이 그대로 침대에 다시 파고들려 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힐끔 눈만 들어 문 바라보았다. 제가 찾아갔을 때엔 숨소리도 안 들리더니. 안에 있긴 있었나 보다. 이번엔 제가 없는 척 아니면 자는 척 침묵할까 했지만. 더는 예의 차리지 않는 것. 제 말을 똑같이 돌려주는 것에 입 꾹 다물곤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알고 저러는 것이다. 정말 치사하지. 흘러내린 두루마기 휙 벗어 침대에 던져놓고 저벅저벅 걸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열 것이지만 괜히 그 앞에서 조금 뜸 들이다가 한 뼘 만큼만 열고 아회에게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치사하긴."
아. 다른 건 참아도 그 말은 했었어야 했나 보다. 그리 종알댄 후 방문 마저 열었다. 희미하게 경첩 맞물리는 소리 나며 열린 방에선 굳이 코를 세울 것도 없이 독한 약냄새와 진한 담배향이 진동했다. 그리고 아회의 예민한 코엔 선명히 느껴졌을 것이다. 짙은 두 향취 아래 숨겨진 비릿한 철내음을.
"내 기침으로 오라비 잠 깨웠다니 그것만큼 기쁜 소리도 없겠구려. 들어오소."
편히 들어올 만큼 문 열어주고 온화 앞서 안으로 슥 들어갔다. 창문은 열었으나 두터운 커튼 드리워 방 안 어둑하니 잘 뵈지 않겠지만. 바닥에 걸릴 것 없으니 걱정 말고 들어오라는 말 있었다. 휘적휘적 들어간 온화 앞서 차려둔 술상 앞에 턱 하니 앉으며 아회 향해 그런 말도 했다.
"대답 없길래 혼자 술잔 기울이던 중인데. 어찌. 오라비도 한잔 할 테요? 싫음 거 앉아서 안주거리나 먹든지."
아회가 예의 차리길 그만둔 만큼 온화 또한 방자하게 나갈 셈인지. 혹은 몸 아프고 정신머리 마땅치 않아서인지. 툭툭 내뱉듯 말하고 술 잔 두 개 소반에 올렸다. 한 손에 딱 들기 좋은 크기의 둥근 술잔은 어느 것도 아직 비어 있었다. 술병 역시 큼지막한 소주 됫병이 마개도 열리지 않은 채 옆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온화는 아회 보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기엔 별일 아닌 것 같던 일이 못내 거슬렸던 차다. 아니, 애초에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세상이 언젠 자신에게 이리 굴지 않았는지 괜히 유난 떨며 청승맞게 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럴수록 약점만 늘어날 뿐이다. 무너지는 것도 지금은 안 된다. 유령 같던 발걸음과 함께 문 두드릴 적에는, 이미 악착같이 무너지려는 자신을 속으로 채근하며 유예기간을 줘버린 지 오래였다.
문 앞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예민한 귀를 타고 들려온다. 아회는 얌전히 그 앞에서 기다리며 지팡이 위에 두 손을 모두 올렸다. 잠시간의 정적 뒤로 문이 한 뼘 정도 열렸을 때, 중얼거리는 당신의 소리에 아회는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었는데, 그런 의도로 한 번 고개를 까딱인다.
문이 열렸을 적, 아회는 자신의 감긴 눈을 희미하게 떴다. 남령초 태운 냄새는 익숙하지만 약 냄새와 비릿한 냄새는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각자의 생활이 있거니와 자신이 간섭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니. 다시 문 닫아버릴까 싶은 것도 한몫하였으리라.
"에잉, 만일 목화까지 깨었으면 경 치러 왔을 텐데 기쁘기는."
남의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형님의 방을 제외하면 육 년의 시간 동안 처음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아회는 이제 보니 몰골이 영 좋지 못했다. 머리도 묶지 못했고, 귀에는 난데없는 검은 술 달린 귀걸이 달려있으며, 눈 밑에 드리운 푸른 그늘과 더불어 옷차림까지 평소처럼 한복 차림이지 않았으니 소매 너르되 길고 허리춤 끈으로 동여매는 차림인지라 동방 어딘가의 복식 섞어둔 것만 같은 약식이었다. "실례하지." 어둑한 방이라지만 쉬이 들어서며 신발은 제대로 벗는다. 그제야 희미하던 눈 가늘게 뜬다. 술상 때문이다.
"……."
술. 입에 대본 적 일절 없고 예비함에 있어 의존과 흐트러짐을 경계하였기에 멀리하던 단어가 오늘은 퍽이나 가까이 다가온다. 아회는 잠시 가만히 서있더니만, 이내 자리에 털썩 앉으며 지팡이를 제 몸 옆으로 아무렇게나 내려두었다. 이 와중에도 한 가지 나은 점 있다면, 비록 격식 내려둔 언사였으나 앉는 자세만큼은 평소와 같이 예 차렸단 점이다.
"네 내가 술 마셔본 적 없음을 알면서도……. 그래, 한 잔 주려무나."
실로 의외다. 사건이라고 칭해도 좋다. 청렴하기로 소문나다 못해 무소유의 경지에 이른 것 아니냐는 천하의 무아회가 흔쾌히 대작하겠노라 하니 아마 내일 해는 서쪽에서 뜰 모양이다. 아회는 반쯤 눈을 뜨며 당신을 마주 봤다.
"……최근 기호품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고 말이오."
돌려 말하지만 뜻은 명료했다. 학당 일로 마음이 심란하다고. 서로 술잔 기울이며 대화하고 싶노라 청하는 목소리는 그제야 평온해졌다. 덤덤하지만 방금 전과 같이 어딘가 불온한 기색 없고, 평시와 다를 바 없이.
치사하다 하니 누가 할 소리냔 듯 고개 까딱이는 것이나 실없는 제 말에 실없는 소리로 대꾸하는 것이나. 전과 다른 것 조목조목 눈에 밟히니 그 날의 난리통이 새삼 대단했구나 싶다. 하기사 저도 마찬가지만은. 보이지 않게 눈 감았다 뜨며 한 손 들어 까딱 움직였다. 아회 방 안으로 들어오거든 그 뒤에 문 닫혔을 것이다. 끼익. 철컥.
"고 쪼매난 것 깨었으면 오지도 않았겠지. 아예 한 소란 내고 올 걸 그랬나?"
아회 보며 하는 말이었으나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 듯 혼자 낄낄대었다. 말 좀 했다고 그새 목이 풀려 웃음도 나오고 그런다. 언제는 뭐라도 넘겨야 소리 내고 그러더니. 십수년을 함께 한 제 몸뚱이인데도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목 재차 간질여지기 전에 웃음 그치고 방에 들어온 아회 보았다. 어둠에 눅은 눈은 굳이 좁혀 뜨지 않아도 아회 모습 온전히 담아내었다. 이제보니 평소와 다른 옷에 저- 귀에 단 것은 귀걸이인가? 어허. 별 일인 것은 저 뿐만이 아닌가 보다. 찬찬히 물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 것까지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까이 오니 눈밑까지 푸르스름한 것 보여 아이고. 보면 볼 수록 물어야 할 것이 늘면 늘었지 줄지를 않는다. 느슨히 이어진 대화에서 또한 그러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라 그러나. 한 번 해본 소리인데. 드시겠다면야 못 드릴 것 없지."
말투는 바뀌었어도 자리한 모습만큼은 변함이 없어 술 권해도 손도 대지 않을 듯 하더니. 선뜻 한 잔 달란다. 제가 그리도 기호품이라며 권할 적에는 학을 떼놓곤. 그래도 왜 그러는가 만큼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의미겠지. 그 잿더미이자 적룡에서도 현자라 불리는 아회조차 술 한 잔 걸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주변 소란하다는 것임을.
어차피 잔도 둘 놓았겠다 달리 준비할 것 없었다. 손바닥만한 팔각 소반 위에 풀어놓은 다과 꾸러미 조금 더 넓게 펼쳐놓고. 제 옆의 됫병 덥석 잡아 끌어와 뚜껑 열었다. 이익. 하고 뚜껑 돌릴 적 작게 소리 내었으나 못 열지는 않았다. 병에 들은 술 평소 향취 좋은 물건 찾아다니던 것과 달리 무색 무취한 맑은 소주다. 그저 한없이 들이키고 정신 놓아버릴 수 있는 술이었다. 역시나 답지 않게 두 손으로 병 받쳐 아회의 잔과 제 잔 번갈아 술 따르고 다시 옆에 쿵 내려놓는다. 작게 숨 내쉰 온화 손 그저 늘어뜨린 채 말했다.
"나한테는 물이나 다름 없으나 오라비에겐 제법 독할 거요. 천천히 드시게. 거 앞에 입가심 할 것 있으니 것도 같이 들고."
서로 잔을 맞대는 것은 하지 않을 셈인지. 아회 잔 들어도 온화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청하다면 손을 움직였을 수도 있지만. 첫 잔 그리 내어두고서 역시나 느긋하게 대화의 물꼬 한 번 틀어보려 하였지.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 천하의 무아회가 술까지 자시게 되셨나? 내 그리 들쑤신 후에 누가 또 부지깽이 들고 들이닥치기라도 하였소?"
낄낄. 웃는 소리 만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박하였다. 저 헐렁한 차림으로 삐뚜름히 앉은 것도 그러하고 말이다.
학당에서 목숨을 부지할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남았을지를 되새기면 저도 모르게 속내 뒤틀리기 마련이다. 뒤틀릴수록 일탈을 바라게 되고, 일탈을 바랄수록 오히려 차분해진다. 그리고 끝내 내린 결론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만인이 알 터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당신의 모습 보아하니 딱 그렇다.
"너도 참. 허튼 소리를."
대답 바란 것 아니었어도 툭 대꾸하곤 이전처럼 웃음뱉는 모습에 안도한다. 생각한 것보다 큰 부상은 아닌가, 혹은 참는 것인가, 글쎄. 알 수 없다. 정보는 부족하고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상이니. 자리에 앉자 긴 소매가 바닥으로 흐른다. 이를 가볍게 정리하던 아회는 손 다소곳이 모았다. 예 갖추는 모습과 달리 해 서쪽에서 뜰법한 발언 뒤로 상 차려지고 맑은 소리 들린다. 잔에 따르는 무색 무취의 액체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아회는 그제야 손을 들어 잔을 쥐었다.
"……고맙구나. 선뜻 잔 따라주어서."
거절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리 잔 따라주니 고마울 뿐이다. 다음 잔은 자신이 따르는 것이 맞겠구나 싶었으나 반 푼의 눈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든다. 또한 잔 맞대지 않길 바라는 것 같으니 얌전히 있는다. 지금은 분위기가 설익어 영 좋지 못하니, 무르익으면 자연스레 나올 것임을 알았기에 행하지 않는 점도 있다.
"……그래."
아회는 순순히 대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으나 누군가 부지깽이 들고 들이닥쳤음을 시인하니, 그날 크게 불 붙어버리고 졸업 전까지 오라비 노릇 하겠다는 약조가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입가에 잔을 가까이 가지다 댔을 적, 잠시 멈춘다. 아직 잔 마시지는 않는 탓은 도전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행위였을 터다. 아회는 심호흡을 하듯 한숨을 푹 쉬었다.
"……네 반려와 입씨름 한 판 붙었다. 그 이후로 춘 사감한테 듣도보도 못한 소리 듣고, 수업에서는 처음 보는 신수가 달라붙던지라 그 뺨 쳐올렸고."
와중에 당신의 반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인지, 하물며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안다는 듯 술술 이야기 뱉고는 술을 망설임없이 털어넣었다. 목으로 넘기기가 무섭게 비강을 타고 독한 증류주 내음 가득 느껴지며 속내로 독한 느낌 든다.
"으."
쓰다! 잠시 아회는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난생 처음 겪는 익숙하지 않은 맛이다. 다만 처음 술을 마신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각종 걱정이 너무 컸던 탓일까, 거부감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두 눈 온전히 뜨며 술잔 한 번, 당신 한 번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