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을 안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은 없다. 하물며 북부에서 자라고, 교우관계를 크게 쌓지 않은 아회의 입장에서는 경계심이 크게 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학당의 사람이라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지만, 만일 자신을 기억하는 사용인이나 죄 죽어 얼마 남지 않고 숨죽여 지내는 방계였다면 큰 곤욕을 치렀으리라. 어쩌면 대낮부터 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심하면 누군가 죽기라도 했겠지…… 일단 죽는 것은 아회가 아니겠지만.
"…그렇군요."
본 횟수로 치면 6번은 되었을 터인데. 그 생각을 접어두곤 지팡이로 시선을 옮겼다. 단안경 너머로 희미하게나마 지팡이가 보였으니, 이내 기묘한 주문과 함께 지팡이 끝에서 꽃이 피어나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참으로 신묘하구나, 도력이나 영력을 담아 부적을 태우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적당히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니 저런 것이 나온다니. 아회는 꽃잎이 손에 닿았을 적, 시선을 내리며 꽃잎을 더듬거리다 조심스럽게 꽃다발 속에 꽂아 넣었다.
"아, 감사합니다."
느릿한 반응과 함께 꽃다발의 매무새를 다듬어본다. 여름에 피는 꽃들을 고이 모셔둔 꽃다발이 행여나 망가질까,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럽다가도 능소화와 금잔화가 얼추 어여쁠 곳에 자리하자 이내 아쉬운 기색 없이 거두어진다.
"……덥습니다. 여름은 쥐약이지요…."
그럼에도 아회의 옷차림은 겨울용이니, 너울의 그림자가 아무리 태양을 가려준다 한들 열감은 가려주지 못하여 유달리 기력이 없었다. 구슬땀 질 정도로 덥지만 어찌하겠나, 금방 추워질 것을 아회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어딜 가길래 그리 입었느냐, 고향이라면 시원한 것을 사주었겠다…… 말만 들어도 과분한 처사에 아회는 느릿하게 입 벌렸다.
"겨울탑에, 잠시 들리려 했습니다."
MA의 진노를 산 죄인들의 후손이 존재하는 곳. 방금 전까지 꽃집 주인마저 북부는 신께 진노 받은 곳이니 가까이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곳이나 아회의 어조는 제법 덤덤했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라는 듯. 아니, 어차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죄인의 피 물려받은 사람이 어찌 그런 말에 일일이 화를 내거나 감정을 쏟겠는가. 부질없는 일이니 체념했을 뿐이다.
"잠시, 이것만 두고만 가면 된다지만… 그렇다고 여름 차림으로 갔다간 얼어 죽을 테니 말입니다……."
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무 씨 집안이라 하면 제사장 집안 사람들은 귀기 무 씨를 자연스럽게 떠올렸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당연스럽게도 북부였으니. 무 씨 성 가진 이후로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를 부정해봤자 큰 의미는 없을 테니, 익숙하게 수긍하기라도 했는지 제법 차분히 답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 또한 어떠한 편견은 없어 보였으니, 아회는 납득하듯 고개 끄덕일 적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손님이라면…."
그러고 보니 하 사감이 저번에 와서는 안 될 것이 왔노라 했었던가, 먹지 말라 핀잔 주던 목소리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것이 손님과 동일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마는, 동일한 존재라면 귀찮을 것이 분명했다. 꽃다발을 다시금 고쳐 안던 아회는 시선이 느껴지자 당신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할 말이 있는지 기다려주듯 고요하게 침묵하고는, 그 침묵을 조금 더 길게 끈다. 빨리 가야 하냐면…….
"그렇다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어떠한 방법인지요?"
빨리 간다면 좋겠지. 가는 길 더위에 지쳐 쓰러지거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변해서 돌아다니면 호환이라며 난동 부릴 사람들, 혹은 도중에 꽃다발을 망치는 등 여럿 변수가 있으니 그런 것을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면 당연히 환영이었다마는. 잠시 고개 끄덕이며 입 고이 다물다가도 골몰하던 것을 툭 뱉어버리기로 했다.
"……만일 동행하신다면, 같이 가보지 않겠습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래, 오늘의 자신은 이리도 제멋대로구나. 스스로의 입으로 뱉어놓고도 새삼 우스웠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우려다 사라진다. 하지만 언제까지 제멋대로에, 충동적이지 않은 날만 지새우며 살아오랴. 자신의 속사정을 알게 되는 사람이 가까운 존재가 아닌 생뚱맞은 사람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누군지 연도 별로 쌓이지 않은 자에게 속을 드러낸다니, 실로 불경한 생각이지만 하 사감과의 대화로 비롯해 결심이 선 이후로 생겨버린 자그마한 반항심은 가끔의 일탈은 필요한 법이라 자신을 은근슬쩍 종용하고 있었다.
"정 바쁘시다면, 거기까지만 데려다 주셔도 충분히 차고 넘칩디다. 돌아오는 것은 혼자 할 수도 있고……."
아회는 말꼬리를 흐리곤 입을 꾹 닫았다. 어차피 충동적으로 뱉은 것이니 큰 기대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이라.
자잘하게 보이는 반응들이 언뜻 인간 같으면서도 순간 순간 아니구나 싶을 때가 교차한다. 그 때마다 깨닫는다. 인간의 형상 하고 있어도 인간 아니구나. 생각하는 근원 다르니 보는 것도 하는 말도 다르구나. 그리 깨달으면서도 관심이 멀어졌던 적은 없었던 듯 하다. 보이지 않아도 종종 생각하게 되고 가장 멍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올리곤 했다. 한 번 품은 마음 쉬이 떨치지 못 하는 것. 저는 본디 그런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여태 한결같이.
가벼운 손장난에 그가 뭐하냐고 하니 슬그머니 손 치우고 아무 것도 안 한 척 했다. 딱히 숨길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삿된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 시침 뚝 떼고 들리는 얘기에 고개 끄덕이거나 그러냐는 듯 눈 깜빡였다.
"처음 들어서 그래요. 그런 얘기. 수업에서 그런 것까지 가르쳐주진 않으니까요."
아니면 들었는데 졸아서 까먹었거나 한 걸 지도 모르지만. 제 기억에 없으니 안 배운 셈 치자.
"없는 사람 흉내는 뭐하러 낸담. ...혹시 그 사람도 사감인가?"
생각이 무심코 흘러나온 듯 혼잣말 중얼거리다가 머리카락 쓸어주는 손길에 양 볼 아주 희미하게 복숭아빛으로 물든다. 그 잠깐 조용해지기도 하고. 입 다문 김에 하 사감의 대답 들었다. 그가 신수이기에 제가 원하는 걸 말 해주지 않으면 잘 모른단다. 그야 그렇겠지만. 당연하겠지만.
"그...런 거를 내 입으로 말해달라니. 놀리는게 아니라서 더 못됐네요..."
뭘 원하는지나 하고 싶은 것을 직접 말하라니. 그랬다간 아까보다 더 부끄러워져서 당장 뛰쳐나가 방에 틀어박혀 사흘은 안 나올 지도 모른다. 와. 상상 만으로도 숨고 싶어라. 그러니 그건 잠시 뒤로 하고 다른 궁금한 것이나 대답해주기로 했다. 이건 덜 부끄러우니까.
"어쩌다 신경 쓰게 된 건지는- 저번에 얘기하긴 했잖아요. 역린 얻고부터 관심이 갔다고. 그렇긴 해요. 그 전까지는 그냥 귀찮은 사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당신이 뭐든 누구든 관심 전혀 없었어요. 헌데 그 날. 미쳐 날뛰는 당신 제압하러 갔을 때. 그 때 처음으로 당신을 제대로 봤어요. 정면으로 또렷하게. 눈 뒤집혀 죽이려 드는 모습이나 전혀 다른 두 머리 달고 인간 아닌 형상 한 모습이나. 이윽고 역린 빼앗기고 제압 당해 다시 이 모습으로 돌아와 무력하게 보이는 것까지. 쭉 보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꼈죠. 속에 그리 날뛰는 성정 품었으나 드러내어선 안 되는 것 같았거든."
조곤조곤 얘기 도중 이것도 역시 좀 부끄러웠는지 제 손으로 얼굴 감쌌다. 두어 번 문지르고 손 내렸을 적. 명백히 발그레해진 얼굴 있었다.
"동질감 다음은 호기심이었어요. 대체 당신은 무어길래 그런 모습 하고 여기서 성질도 억누른 채 이러고 있나. 올 때마다 늘 이것저것 물어봤었잖아요. 정말로 그냥 그것들이 궁금했을 뿐이었고 그리 건방지게 굴었던 것들도 어디까지 받아주나 하는 건방진 생각일 뿐이었어요. 모처럼의 기회니까 실컷 놀아나 보자. 보다시피 내가 몸집이 좀 크잖아요? 그래서 늘 안기만 했지 당신처럼 안길 수 있는 사람이 없기도 했거든요. 이 참에 나도 좀 앵겨보고 그러자. 그런데 매번 다 받아줬잖아요. 내가 기억 없을 때도. 그냥 역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도 마음이 안 생길 수가 없었어요. 몇 번이고 인간은 싫다느니 하는 소리 듣고 선 긋듯이 구는 것 봐도. 그래도 내치지 않으니까 좋았어. 어색하게나마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것도. 그저 좋더라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꿰여도 단단히 꿰였더란다. 스스로도 제 감정이 무서워 한 번 감췄어야 했을 만큼. 결국 감춘 것 부서져 드러나버려 지금에 이르렀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대강 그 즈음까지 얘기하고 온화 잠시 입 다물었다. 작게 달싹이는게 할 말 남은 듯 했으나 쉬이 못 하겠는 건지. 얼굴만 슬슬 붉어지더니 조금 지나서야 겨우 입 열어 말했다.
"그- 내가- 그 동안은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다니긴 했어도. 이런 마음 갖고 준 건 처음이에요. 사실 지금도 감정에 휩쓸릴까 무서운데 그것도 참아볼 만큼 당신이 좋은 거니까... 아무튼! 아무튼... 그... 내가 원하는게 뭐냐면. 인간들이 하는 애정 표현. 같은 거... 해줬으면 해요.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거. 말이랑 행동으로 보여달라구... 요..."
구체적으로 무슨 말과 행동을 해달라고는 못 하겠는지 점점 목소리 기어들어가더니 다시 얼굴 팍 가려버렸다. 가린 손 안에서 으아아아 하고 작게 앓는 소리도 났다. 달리 부르거나 하지 않으면 또 가린 채 얼굴 안 보여줄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신수들에 대한 것은 도깨비들이나 알고 있다던가. 자식인 신수조차 창제신의 성별은 모른다던가. 그런데 신에게 성별이란 개념이 있긴 한가? 애매한 신수도 있다는 걸 보면 별로 의미 안 두는 것 같은데.
그리고 또. 그가 흉내내는 자 역시 사감이며 천공섬의 주민이 아닌 그 바깥- 영 사감이 오는 곳이라던가. 도술 아닌 마법을 쓴다는 거긴 대체 어떤 곳일지. 영 사감과 동향이라면 그 묘한 지팡이를 쓰는 이라는 건가. 조금 궁금할 지도.
들어도 여전히 내용 아리송한 것. 몰랐다가 새로이 알게 된 것. 여러 얘기를 했지만 그 뒤에 얘기로 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그를 신경 쓰게 되었나부터 쭈뼛쭈뼛 털어놓은 제 마음에 부끄러워졌음이요 갑작스레 안아오는 그의 팔에 놀람 더해져버렸으니 말이다. 갑자기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강한 팔 힘에 크게 두근거린 것도 있었다. 지금껏 누구도 저를 이리 안아준 적 없었으니. 그런 복잡다망한 기분에 휩싸여 얼굴 가린 채 다시 앓는 소리 내었다. 아으아아아...
"그. 으. 아니 잠깐만요..."
여즉 얼굴 가린 채 은근히 바뀐 그의 목소리와 직설적인 말들을 듣고만 있자니 심장은 미친듯이 뛰지 귀는 간지러워 죽겠지- 저를 취한다던가 못 나가게 하고 싶다던가 들었을 때는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머릿속은 또 어찌나 시끄러워지던지.
으 아 심장 난리치는 것 들키기 싫은데 아 그렇지만 이 정도로 안겼으면 분명히 들켰겠지 아니 들키고 자시고 다 알고 있는 거 아냐? 여의주 있으니까? 앗 그러면 더 부끄러워져서 그 그 얼굴 못 내놓게 되어버려?!
"어엄마아아..."
얼마나 안팍으로 정신이 없었으면 그런 앓는 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엄마 딸래미 큰일나요! 어떡해!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 까악 꺄악 질러대다가. 제 이름 부르는 목소리에 하으- 하고 이젠 거의 울 듯한 소리가 났다. 이... 이... 정도를 모르는 신수...!
"...못 됐어 정말..."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의 채근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얼굴 꽁꽁 감추고 있던 손 천천히 움직여 아래로 내렸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 이마부터 턱 끝까지 빈틈없이 붉어진데다 뒷머리 덮인 목덜미도 설핏 붉은 듯 싶다. 반쯤 내리다 멈춰서 머뭇거렸지만 곧 완전히 손 거두고 그 말로 못 할 표정 지은 얼굴 드러내었다. 얼굴 내놓고도 눈은 저 아래인가 옆인가 애먼 곳 보고 있었으나 두어 번 깜빡깜빡 하더니 살며시 하 사감 얼굴 향했다. 인간의 것 아닌 눈동자 보고 살짝 눈 흔들렸지만 다시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며 중얼거렸다.
"나. 그... 아프게 하면. 당분간 근처에 얼씬도 안 할... 거에요. 진짜. 그럴 거야..."
다시 얼굴 가리고픈 손으로 하 사감의 옷 꾹 쥐고서 입술 가벼이 깨물고 하 사감 바라보았다. 인간 같지 않은 그 눈을. 곧게 마주하고서.
그다음 말은 발음이 생경하여 플루 가루, 하고 다시금 되뇔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쓰던 물건이라니, 듣자 하니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는 신묘한 것이 그리도 많다고 하더라. 당장 아회가 즐겨읽던 책도 암시장에서 구해온 바깥의 이야기이니, 영 사감님은 그쪽 출신이신 걸까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그것보다 불과 가루만 있으면 된다니, 부적으로도 비슷하게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마는 다른 방법까지 있다 하니 신기함 감추지 못하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주머니에 빼앗겼다.
"……감사, 합니다."
실 용도는 벽난로에서 사용하는 것이라……. 학당에서 최근 다시 지피기 시작한 천덕꾸러기가 이젠 유용하게 쓰이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이 일었다. 자신의 제멋대로인 성정이요, 충동적으로 뱉어버린 말을 그리도 쉽게도 수락하는 모습에 맥이 풀려버린 탓이다. 이후 입가에 보기 드문 호선이 그려졌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아회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아."
불꽃이 일어나고 일렁인다. 가루를 한 주먹 쥐고 정확한 목적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했나, 그저 저 불꽃 속으로 사라져버리면, 덧없는 잿더미가 되어버릴 수 있다면. 불에 홀려버린 듯 잠시 침묵하던 아회는 마음을 다잡았다.
"추위를 막아주는 도술이 있습니다. 저는 추위를 크게 타지 아니하니 쓰시지요."
그리고 자신의 너울을 벗어주며 미리 언질 주기를, "미리 말씀 올리오니 그곳에서는 정숙하여야 합니다." 라 하였다. 이후 주머니 속에서 가루를 한 줌 쥐었다. 가루를 뿌리자 옥빛 불 일렁이고, 입을 벌렸다.
"북부, 귀기 무 씨 소유의 고드름 숲으로."
불길로 망설임 없이 걷는 모습엔 회한도, 미련도 없어 보인다. 이내 불길은 몸을 집어삼켰고, 흔적도 없이 그 덧없는 뒷모습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귀기 무 씨의 고드름 숲이라는 것은 말이 그들이 소유한 숲이지, 숲의 끝자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면 작은 동굴이 있었다. 이 또한 동굴이라기에도 애매한 것이 한때 쌓였던 눈이 얼음이 되어 얼어붙어 하나의 공간 이룬 것이었다. 그 안에서도 나무가 자라 얼어붙고, 제각기의 생태를 이루고 있으되 그 안까지 천장이 희미하게 갈라져 빛이 아롱아롱 든다. 아마 밤에는 달빛 새어 들어오고, 북부의 연일 이어지는 폭설도 한 수 양보하듯 엷은 눈만 깔아주리라.
"……."
그 장소는 온통 새하얀 곳과 달리 알록달록하니 그야말로 꽃으로 무성하였다. 학당에 입학한 이후 일 년에 네 번, 많으면 여섯에서 여덟, 각 계절의 꽃다발로 채워가던 것이 해를 지나며 쌓이고 쌓여, 차디찬 북부에서 자그마한 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회는 평온하게 그 중앙을 바라보다, 꽃다발을 쥔 채로 당신을 돌아보았다.
아회의 바로 앞. 햇빛이 부서져 그 조각을 내리고, 인위적인 봄에 둘러싸인 중앙에는 유리로 되어 그 안을 비추는 관이 있었다.
英사감은 너울을 어색하게 머리에 썼습니다. 그는 정숙해야 한다는 말에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습니다. 겨울탑이 꼭 정숙해야만 하는 장소였는지를 생각하던 그의 미간이 찌푸렸습니다.
' ..... '
분명, 고향에서도 정숙해야 하는 장소는. 상념에 잠겼던 英사감이 몸을 돌려, 아회가 읊는 말을 뒤로 한 채 불의 위에 섰습니다.
' .... 확실히, 춥군. 현궁과는 비교도 못하겠어. '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한 英사감이 잠시, 관을 보더니 굳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무언가 떠올린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쉬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고향이아니야 ' 미, 미안하다. ' 이건그들의시신이아니야 英사감은 관에서 시선을 돌린 채, 자신의 두 손을 겹쳐 포갰습니다. 절대로아니야 ' 아무래도, 여기 자주 오는 것 같아 보이니 지름길을 만들어주마. 이야기... 라도 나누고 있도록. ' 매캐한냄새피비린내비명소리가귀를 英사감이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슬쩍 물러섰습니다.
344 자캐는_뷔페에서_몇_접시까지_먹을_수_있는가 음... 많이 먹으면 2접시 정도? 진짜 최고로 힘쓴다면 2.5접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마저도 접시 듬성듬성 채우고 배 많이 안 차는 음식으로 채워서 잰 거지만요~ . 522 자캐는_소중한_사람에게_자신이_처음이길_바라는가_마지막이길_바라는가 으음...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첫 기억이 의미있다면 그 이후의 관계가 망쳐진다 해도 사람은 대부분 '처음'에 대해 미련을 갖기 마련이죠. 좋았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고,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간의 정으로 참고 넘어가기도 하고... 그런 얍삽한 마음가짐이라 처음이길 바라는 쪽이에요👀
116 자캐의_학창시절_성적 성적은 좋은 편이에요! 체술 빼고...👀 숙제나 공부를 따분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고("공부가 왜 싫죠?") 대상이 사람일 때만큼은 아니라도 무언갈 탐구하고 알아내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라서요. 공부를 성실하게 하는 편이랍니다. 그렇지만 모범생...이냐고 하면 조금 애매해요. 평소에 성실하게 잘 하다가도 간혹 흥미 스위치 켜지면 이상한 사고를 친다거나 노빠꾸로 수업 쨀 때도 있어서...🤦🏻♀️
답레는... 혹시 오후 중에 이어도... 더ㅣㄹ까요... 오늘 약을 바꿨더니 졸릴 수도 있다더니만, 지금 딱 그 상황이어서....🥲 글을 몇 단락 쓰다가 졸고 ㅁ도 졸고 하니 글 매무새도 그리 곱지 못하고... 계속 내용도 중구난방해지고... 졸려요... 그만 졸고 싶은데 졸리고 막 졸리는데 큰일인데 일닺은 다들 안녕히 주무세요 졸다깨다 깜짝 놀라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이게 맞나....🫠🫠🫠🫠🛌🫠🫠🫠🫠🫠
세상에 캡틴이 한명 한명 병에 담아간다! 으아아 난 들어가지 않을테야! (도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무슨 난리야 이 새벽에~!
유현이 진단! 오랜만이야~~ 오늘 진단은 무난무난 귀엽구나~ (흐뭇) 그런데 나... 가끔 유현이 보면 그거 생각나... 팝팀에픽?에서 나오는 에잇에잇(퍽퍽)화났어? 하는 그 짤... ㅋㅋㅋㅋㅋㅋ 노빠꾸로 땡땡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어슬렁대다 납치당한다~ 온화한테 습격당해~!
>>96 혼못죽이에요!! 같이 병에 들어갑시다!!!◠‿◠ ㅋ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떤 의미에서는 일부러 열받게 구는 면도 있으니까 틀린 캐해가 아니네요... ㅋㅋㅋㅋㅋ어떻게 이게 진짜지🤦🏻♀️ 아니 얘는 수업째기가 합?법?이라 그렇다 쳐도 온화도 수업 째면 어떡해요~!!!! 하지만 수업 째고 나왔을 때는 나름 목적이 따로 있는 상태라서 웬일로 도망치려고 할걸요~(런유현 on!)
아회주 안녕히 주무세요~ 아앗 왜 벌써 2시... 저도 자러 가볼게요. 모두 굿나잇이에요~😴
지금 잠깐도 못 기다리면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재차 들리는 채근에 불만의 가시 하나 삐죽 솟았지만 곧 가라앉았다. 채근은 한순간이었고 얼굴 드러내고 마주하니 보이는 건 저를 압도하는 그의 모습 뿐이었다.
"이미 그러는 중이거든요...!"
단지 눈동자 바뀐 것만으로 등줄기 서늘해지며 눈을 뗄 수 없는데 차츰 바뀌어가는- 전해지는 체온조차 서늘해지는 모습 보는 그 와중에 무슨 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여 모종의 각오 다진 듯 그의 옷 쥐며 아픈 건 싫다 하니 대뜸 큰 소리로 웃어서 저까지 어벙해졌지만.
"그으...런. 아니. 참을 수 있으면서 놀리기는-"
꼭 뭐라도 할 것처럼 굴어놓곤! 참는다니 너무하잖아! 세상에 이렇게 못된 신수 둘도 없을 거다!
차츰 비늘이 가라앉는 하 사감 보는 온화 얼굴에 슬그머니 불만 번진다. 손도 변했는지 세게 쥐어 억누르는 듯한 기척에 살짝 움츠러들면서도 입술 비죽 튀어나온다. 선을 지켜주려는 건 알겠지만. 그래 저 소중히 해주려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까지 오싹거리게 해놓고 아무 것도 안 하고 넘어가는 건 진짜 너무한 거다. 이유야 어찌됐든! 아무튼 그런 거다. 그러니 이후 온화 태도에 토라짐 보이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뭘 시험했다고 그래요! 자꾸 부끄럽게 해서 얼굴 가리게 하는 신수가 못됐지. 흥이네요! 본모습 안 궁금해 할 거에요. 보여줘도 안 볼 거야."
사실 무지무지 궁금하지만 그래서 본모습으로 못 나가게 할 지도 모른다는 말 들었을 때 솔깃했지만-! 얼굴에 철판 삭 깔고 아닌 척 관심 없는 척 흥! 하고 고개 삭 돌려버렸다. 옷 쥐고 있던 손 놓고 그의 팔이며 어깨 꾹꾹 눌러대며 안긴 것에서 빠져나가려고도 했다.
"걱정은 누가 무슨 걱정을 해요? 됐고 이거 놓아요! 나 방에 갈 거야. 가서 못된 신수 말구 착한 베개 안고 뒹굴뒹굴하다가 베개랑 잘 거야!"
누가 들으면 각방 선언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지만 별 일이라면 별 일일까. 여태껏 찾아 온 날은 꼭 그의 품에서 밤을 보내곤 했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안 그럴 거라는 양 투덜대며 그를 밀어대었으니. 잡을지 놓을지는 온전히 하 사감의 몫이었다.
서늘한 냉기가 천부에서 가져온 더위를 식혔다. 제아무리 푹푹 찌는 바깥의 무더운 날씨도 북부의 숨결 한 번에 꺼져버리고, 그 온기로도 모자랐던 것인지 싸늘한 북부의 손길은 체내의 온기를 탐내듯 옷 너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아회는 이 추위가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서리 내려앉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현궁이라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는 모르나 이곳보다는 덜 추운 듯하다. 꽃다발을 안고 평온히도 돌아봤을 적, 숨소리도 울릴 것 같은 공간에서 정적이 깨졌다. 추위에 떤다기엔 그 호흡이 거세고, 이 상황을 안타까워 하기에는 다른 과거를 회상하여 애처로이 눈물 흘리는 듯했다.
"……."
아회는 그런 당신을 한참이고 눈에 담았다. 누군가 운다면 어떻게 우는지 관찰하는 여타 백룡 기숙사의 사람과는 달리 그 울음 그치는 순간을 기다려주듯 다소곳한 태도와 곧은 시선이었다. 새삼 많은 울음과 함께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으나 여전히 위로하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이유로 우는지, 상황과 반응으로 보아 감히 짐작할 수 있으나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찌 우느냐 묻기엔 누군가의 상처를 후벼파고 그 속내를 강제로 드러내게끔 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여 잔잔히 입 벌렸다.
"……아무리 울음 뱉는다 한들 한철 지고 말 봄에게 많은 것을 담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삶이란 청천벽력처럼 찾아오는 것이요 한 번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 남겨진 자는 살아야 합니다. 비참한 생이 끝나는 것을 고대하며."
궤변이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던 자가 살아가는 자의 꺾임을 볼 적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너는 살아가라 뱉는 변명이니, 실로 이기적이고 추잡한 모순이다. 살아가고 싶을 적이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몇 번이고 되뇐 말을 타인에게 정 반대의 의미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전가하려 들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리로 된 관 안에는 한 여인이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누워 있었다. 북부의 추위에 그 살갗 하나 썩지 못하고 눈 감은 모습은 영원한 잠에 빠져든 듯 평온했다. 여인은 아회를 빼닮았다. 정확히는 아회가 빼닮게끔 태어났다. 흐린 청색이 섞인 아회보다는 명확한 색감을 가진 은색 머리카락은 부채꼴처럼 머리 위로 펼쳤고, 이목구비는 또렷했다. 당신을 등지고 아회는 그 곁으로 다가가더니, 천천히 꽃다발을 보여주듯 허리를 숙였다.
"어머니, 어느덧 여섯 번째 여름입니다. 이번에도 꽃이 무성하게도 피었습니다."
여인은 말이 없었다. 아회는 그 곁에 앉으며 여인을 한참이고 내려다 보았다. 고개를 숙여 관 근처에서 소근거리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나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울이 오고 봄이 올 것이다, 어머니께서 가장 바라 마지않던 봄이다…… 기대가 된다. ……길을 정해주신 신의 뜻이렵디다. 그런 단어만 언뜻 들릴 뿐이다. 아회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인사 드리셔도, 좋습니다. 북부인을 가까이하면 부정을 탄다는 건 허울 좋은 미신일 뿐이니 말입니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마는. 아회 평소보다 더욱 잔잔하니, 알려진 것보다 몇 배는 더 유순하고 온화한 태도 같기도 하였다.
그으게....!!!! 제가 이직에 성공! 이랄까 현재 실습으로 나간 곳이 있는데 이번에 같은 업계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3 그래서 오늘 그 회사 면접을 봤어요. 떨어지겠지~ 하고 봤는데 덜컥 합격해버렸네용........
지금 실습 중인 회사가 너무 좋은데 거긴 직원을 현재 뽑지 않고 있고.. 다른 회사도 아웃소싱을 끼고 면접 본 거라 아웃소싱 회사의 복지로 받아요. 근데 이게 그렇게 큰 메리트 있는 게 아닌지라.... 영 고민이어용... ':3 오늘 안에 답변 드려야 하는데.. 음믐므...
앗 나도 전에 비슷한 상황이었던 적 있는데! 나 같은 경우엔 임시직 유지/계약직 이직 이런 느낌이었어서 계약직 이직 쪽으로 넘어갔었어~ 나 때도 메리트 차이는 크게 없었는데 계약직 쪽이 경력도 되고 잘 나지 않는 자리에 딱 내가 하고 싶었던 자리기도 했었거든~ 업무적으로 편한거는 임시직 쪽이었지만 모처럼 자리가 생겼는데 해보고 싶은거 해야지 하고 골랐었지~ 캡틴도 잘 생각해보자구~
그럴 때면 늘 고민이지요, 응. 본인이 더 좋을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지만 그게 늘 어려운 일이죠... 특히 취업에 관련해서는 더욱이요!🤔 아무래도 제 의견을 이야기하기엔 캡틴께서 더 마음가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음~ 어렵네요.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시면서 내 마음이 시키는 건 뭘까, 내가 가진 걱정을 품어줄 곳은 어디일까 정할 수 있길 바라요. 의외로 이런 건 밥 든든하게 먹고 씻고 딱 쉬고자 세상 게으른 자세로 누웠을 때 음! 이게 역시 낫구나~ 하고 떠오르기도 하더라고요...😇
늘 하던 것과 달리 구는 저도 저지만. 이 신수도 만만찮다고 생각한다. 방금 전까지 압도하듯 소리 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갑게 구는 짐승마냥 목 울려댄다. 이 모습이 정녕 그 성질 더럽기로 이름난 하 사감이 맞는가 싶다. 아무도 모르고 상상도 못 하겠지. 그 하 사감이 이렇게 굴기도 한다는 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애초에 안 넘어올 줄 알았으니까 그랬던 거고!"
정확히 말하자면 넘어와줬으면 하는 사심 갖고 그랬던 것이지만. 이건 비밀로 하기로 한다. 적어도 오늘은 비밀이다. 여기서 더 들춰졌다간 정말 못 버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정신 놓고 기절 해버릴 지도 모른다고!
아무튼 앞서 김샌 상황에 토라지기도 했고 여즉 놀려지기만 하는 것에 심통이 나 정말 제 방으로 가버리려고 했다. 그야 막상 가면 아쉽겠지만 저만 아쉬운게 아닐 거라 생각한 것도 있다. 저만 아쉬운게 아니라면- 그도 아쉽다면 그냥 보내지는 않겠지. 뭐라도 하겠지. 심통난 마음 한 겹 들춰보면 그런 기대 있었다. 기대하니까 실망한단 말도 있지만 반려 앞에서 그런 말은 무의미하다.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연심 따위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여 일말의 기대 품고 겉으로는 아주 벗어날 듯이 버둥거렸으니 참으로 감쪽같았다. 그가 팔 뻗어와 붙잡으려 할 때도 금방 제치고 나갈 것 같았으나. 가지 말란 말 하나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목 울리는 소리에 심통 어데갔는지 홀랑 넘어가 얌전해졌으니 그대로 그의 품에 갇혔을 것이다. 품에 안겨 아까만큼은 아니어도 두 볼에 홍조 은은히 띄우고서 표정 만은 여전히 부루퉁한 채 작게 꿍얼거렸다.
"놀렸다가 붙잡았다가- 인간 싫다는 신수가 인간 마음 들었다 놨다는 왜 이렇게 잘 한대요. 너무하네 정말."
너무할게 하나도 없지만 괜히 그런 소리 궁시렁거리며 꾸물꾸물 움직였다. 하 사감의 무릎에 늘 하듯 올라가 걸터앉고서 고개 슥 들어 눈 높이 맞추고 마주보려 했다.
"착하게 있어준다고. 당신이 말한 거에요? 잡혀주는 건 하루에 한 번 뿐이니까요. 명심하세요. 모옷된 낭군님."
온화 그리 말하고 그제야 히죽 웃었다. 평소와 같이 장난기 그득한 웃음 활짝 띄우고 바라보다가 얼마 안 되는 얼굴과 얼굴 사이 거리 좁히며 입맞춤 하려 했다. 답지 않게 수줍은 입맞춤이라 어색하고 서툴렀겠지만. 혹시나 혹여나 피했다면- 뒷일 감당 역시 그의 몫일 뿐인 것이다.
무뎌지면 안 되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의견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북부의 척박하고 메마른 감정과 세상의 시선은 무뎌지기를 종용했다. 당신의 말을 일부분 동의할 수 없었으나 인간이란 본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회는 그 부분에 대해서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다만 하나, 동의하는 것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도 상흔처럼 각인되는 기억. 희미해질 수 없고, 주기적으로 후벼파이는 그 기억이라면 아회 또한 품고 있으니.
"……저는 아버지를 닮은 부분이 거의 없어서요."
그나마 눈을 닮았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가주의 눈을 마주하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단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젠 그조차 닮지 못했다. 호수의 물 담았듯이 새파랗던 눈은 이제 잿더미만 남았고, 이젠 닮은 구석이라곤 가계 도술로 보여주는 모습뿐이다. 아회는 의미 없이 손을 들어 이젠 한쪽 눈만 희미하게 남아버린 시야의 눈가를 더듬었다. 여전히 자신이 보는 세상은 반 푼하고도 비 오는 날의 값어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잠시간의 침묵. 아회는 입을 잠시 다물더니, 어머니의 곁에 꽃다발을 고이 내려두며 그 매무새를 정리했다. 대답을 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이야기를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듯싶었으나, 막상 그 다물린 입술을 보면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뱉을지를 고르고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꽃다발을 정리한 손길이 거두어지고, 단어는 쉬이 흘렀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는 흔한 일이지요. 오늘 날씨가 좋다는 듯 평이한 어조였다. 생면부지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듯이 감정이라곤 불 꺼진 잿더미처럼 메말랐고,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 지나치게 덤덤했다. 무뎌짐을 넘어 체념해버렸으나 한때 아회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주체 못하고 눈물을 쏟던 날이 있었다. 급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찌 홀로 외로이 갔느냐며 울부짖었고, 차라리 자신을 데려가지 그랬냐며 원망한 적도 있었으나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감님께 무례를 끼쳤음에도 무언가를 받다니, 실로 과분한 은혜입니다……."
잔잔한 목소리 뒤로 아회는 감사를 표하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자주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라면 부적과 부채를 제외하고도 하나 있었다. 손에서 절대 떼놓고 다니지 않던 지팡이. 바닥에 고이 모셔둔 것은 불타 사라졌다가, 어느덧 푸른 불꽃과 함께 일렁이듯 나타나 손아귀에 안착했다. "이것이라면 될는지……." 묻는 어조는 질문에 가까웠다.
아. 그런 거였나. 여태 친근히 굴어주니 잠시 착각이 들었나 보다. 인간이 좋아지게 된 건 아닐까 하고. 그런데 얘기 들어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인 듯 했다. 제가 그 본능을 뚫고 반려가 되었다니.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정말 기적 아닌가 싶어 신기하고 한편으론 그의 마음 뒤집혀 아니게 되는 날 오는 것 아닌가 하는 작은 불안도 살짝 솟는다.
"당신 역린도 여의주도 다 내가 갖고 있는데 구분 안 되는게 더 이상하겠네요. 그 본능을 거스른 건. 음. 거의 기적이지 싶고."
손톱만한 불안이 언젠가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며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그의 말 받아 조잘거렸다. 그런데 저기 뒤에 살랑거리는게 뭐지? 그의 등 뒤에서 뭔가 살랑거려 어깨 너머로 보니 왠 꼬리가 있...다? 개과의 복슬복슬해 보이는 꼬리는 살랑살랑 흔들리더니 이내 온화에게 와 몸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이게 뱀인지 짐승의 꼬리인지. 갑작스런 꼬리의 출현에 놀라기도 잠깐. 제 귀에 쏙 박힌 단어 하나에 움찔 놀랐다.
부... 부부부 부인이라니! 아니. 아니... 물론 제가 먼저 낭군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부인이라니! 아 정말 이대로 계속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걸까...? 남은 하루 동안 심장도 머리도 잘 버텨줄까...? 제발 놀라 멈추지만 말아주어...
온화 머릿속에 한바탕 돌개바람 휘몰아치고 간 것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온화 은은하게 붉어진 얼굴로 얌전히 부끄러운 듯 고개 끄덕끄덕 했다. 잡힌 것도 그 호칭도 전혀 싫지 않았고. 놓아주지 않는 건 더더욱 바라던 바였으니까. 가만히 꼬리가 감기는 대로 몸을 맡기다가 간질여오자 못 참고 키득키득 웃으며 그에게 폭 앵겼다.
"아. 으- 나 간지럼에 약하단 말이에요- 안 돼- 옆구리 민감해..."
민감하다는 옆구리 더 건드리면 듣는 귀가 간지러워지는 소리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귀만 간지러운게 아니라 등골도 쭈뼛해지는- 그런 소리? 부끄러워 살짝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런 소리?
간지러워하면서도 몸에 휘감긴 꼬리 만지기도 하며 그리 대답했겠지.
"이게 무슨 용의 꼬리에요. 비늘 대신 요래 간지럽고 보들한 털 있는 용 얘기는 못 들어봤는 걸. 그렇지만. 응. 이대로 감겨 있어도 좋을 거 같은 꼬리긴 하네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좋아."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꼬리의 털 살살 쓸어주고 끝을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 들어올린다. 아프지 않게 들고서 꼬리 끝 톡톡 건들며 장난치다가 그 끝에도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려 했다. 그리고 고개 살짝 기울여 뺨에 꼬리 문질거리며 눈으로는 하 사감 보고 싱긋 눈 웃음 지었다. 제가 얼마나 이 꼬리를 당신의 일부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보란 듯이.
키(사마오코로)스가 드디어 kiss💋가 되는군요... 아름다운 사랑이어라...(팝콘을 꺼내요!)
목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아악 우리 목화 어떡해...!!!(아회: (돌아와도 지옥의 혹한에서 기어 올라온 사람 몰골 됨)) 이제 아회의 시그니처가 사라지는 거예요...(대체) ㅋㅋㅋㅋㅋㅋㅋㅋ분위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눈 가늘게 뜨고 살벌하게 뭔가 얘기하려고 토도도독 하는데 뿅! 사라지면... 형님도 잠깐 멈추고 눈 뜰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
스스로 사감 역할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니. 음. 어쩐지 동생들 어릴 적 혼자 무언가 해내고서 나 이제 이거 할 수 있어! 하고 뽐내던 것 생각난다. 그러니까 그가 그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는 건데. 이것도 티 내지 않고 혼자 만의 생각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아마 그 외의 누구에게도 말 못 하겠지만.
"역린이 다시 돌아가는 일 영영 없을지 혹은 있을지- 단언하기엔 이르지만 말이에요."
만약. 만약에 만약이라는 상황을 생각해두지 않을 수 없으니. 뒷말은 삼키고 그를 향해서는 농담하듯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이 있겠냐는 듯이.
"아. 앗- 잠깐- 간지럽다니까- 힛-"
간지럼에 약한 것은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것들 중 하나였다. 특히 옆구리는 민감도가 제일 높아서 손으로 쓸어도 크게 흠칫거리는데. 털 북슬한 꼬리로 감고 건드리니 반응이 오죽할까. 반응 부추기듯 더 건드려대는 통에 잠시 동안 웃고 반응하느라 정신이 쏙 빠지는 줄 알았다. 그 와중에 웃는 그를 보고 눈을 가늘게 흘기긴 했지만 간지럼에 반응할 때마다 더 안겼으면 안겼지 뒤로 빼진 않았으니 적어도 그의 장난에 토라지진 않았다는 의미겠다.
"그. 어. 당연하죠. 누구 반려인데. 내가."
한참 웃고 떠는 후에 이번엔 제가 하 사감의 꼬리 감싸들고 의미심장한- 앙큼한 행동을 하자 그것에 그가 귀엽다며 웃는다. 귀엽다는 말은 지금의 저와 영 안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했었는데. 반려가 해주니 간질간질해서 다른 의미로 못 견디겠다. 연이은 부인이란 호칭도 더해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입술이 겹쳐졌다. 그의 품에 안겨 그의 꼬리에 휘감긴 채 다소곳한 자세로 입맞춤에 호응하니 지금이 생시인지 꿈인지 모르겠다.
허나 지금이 꿈이라면 절대 깨지 말아라. 내 남은 시간 꿈만 꾸다 죽어도 좋으니. 지금에 잠겨 그대로 가라앉게 해주어.
입맞춤 끝나자 얕게 감았던 눈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것 그의 얼굴이요 미소이니 저도 같이 미소 짓게 된다. 수줍게 피어난 백일홍 같은 미소 띄우고서 고개 끄덕여 대답 대신했다. 절대. 제 발로 당신 곁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라. 속으로 다짐하며.
인간이란 존재는 허망한 법이다. 아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철 지날 봄처럼 덧없으며, 그 감정을 계속해서 가지고 사는 것보다는 가슴 한구석에 잘 묻어 하루라도 더 살아가는 것이 중하다고. 그리고 언젠가 자신에게도 들이닥칠 죽음을 기대한다고.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기엔 죽어가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기 전까지 추억을 쌓고 있고 그 명줄을 기대하게 된다는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루하루를 새롭게 예비하는 행위에 대해 의미를 품지 않았다. 어미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 있노라면 제 어미는 죽는 법을 배우지 못했단 점이다. 그리하였더라면 사는 법을 배웠을 텐데.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 있기 마련이거늘, 그 점을 모르고 죽었음엔 통탄하나 그 점까지 드러내기엔.
"어차피 사람은 죽으니 익숙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만년설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앞에서 포부를 드러내느니 차라리 그 속을 평생 동안 품고 홀로 가는 것이 낫다. 지팡이를 건넬 적, 아회는 서리 내려앉은 속눈썹이 다시금 위를 향하게끔 들어 올렸다. 탁한 은색 눈이 지팡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만질 때마다 그 장소로 보낸다면, 앞으로 지팡이를 건드리는 일이 가급적 없어야 한단 것인데. 과연 저대로 주문을 걸어도… 과연 괜찮을까. 아회는 생각보다 자신의 지팡이를 잘 건드리는 사람이었으니. 다행스럽게도 푸른빛이 감돌던 것은 찢어지지 않게끔 보호 주술이 걸린, 지팡이에 고이 묶인 비단이었다.
"학당으로 돌아가면, 요."
돌아가야 한다. 이곳에서 오늘도 얼어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살아가게 되면 무엇을 빌려드려야 할까. 아, 하나 있긴 하지, 잘 착용하지 않지만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생긴다면 이젠 어쩔 수 없이 착용하게 되겠구나. 아회는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평온히 눈 감은 제 어미를 쳐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덤덤했다.
"……하나 여쭐 것이 있습니다, 사감님."
어쩌면 못다 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있으나 기능을 잃은 눈이 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실례가 아니라면…… 사감님의 고향이란 곳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이곳과 별다를 것 없었는지요."
별다를 것 없이 끔찍한 삶이 가득했느냐, 아니면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느냐. 어느 의미이든 당신에게 질문하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만년설을 눈에 담던 英사감은 아회의 질문에 침묵했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그는 만년설을 만지기 위해 허리를 숙였습니다.
' 어느 쪽을 묻는지는 모르겠다만, [나]가 살던 고향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지. ' ' 그 곳에도 여기처럼 학생들이 마법사가 되기 위해 수업을 듣는다. 다른 점이라면, 그 배움터는 계절이 고정되어있다는 것 정도일까. 이 북부처럼 사시사철 겨울인 기숙사도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곳이 나뉜 느낌이고 사감들이..... 꽤나 개성이 넘친다. 이 곳의 사감들과는 다르게. 모두 다 인간은 맞고. '
그는 천천히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아마, 그 곳에서 많은 학생들이 꿈을 키웠을 거라 생각한다. '
수십, 수백에 가까운 시간을 더듬으며 말하던 英사감은 다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지팡이를 다시 품에 넣었습니다.
' 적어도 거긴 이 곳처럼 배움터가 하나만 존재하지 않아. [나]는 그 계절이 고정 된 곳에서 배웠고 범죄자들을 잡는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곳으로 건너왔지. ' 그 과정은 겁박에 가까웠습니다 궁금증은 풀렸나? 英사감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지금은 얼마나 재건되었는지 모르겠군. 언젠가 갈 수만 있다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지금이라도 황룡의 문은 열려 있으니 말이다. '
인간은 죽기 마련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듯하나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비 오듯 흐린 반 푼의 시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뭉개져있다. 가까이에 여러 번 가서 훑어야만 볼 수 있지만 그러기엔 겁이 난다. 혹시라도 숨을 쉬고 있을까, 그래서 자신의 다짐을 흐트러뜨릴까 싶어서. 대신 기억을 더듬어 떠올릴 적이면 이젠 희미하지만, 적어도 그 마지막 날 평온히 눈 감았던 모습만큼은 똑똑히 기억 한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여전히 어머니를 향하던 그 시선은 다시금 허리를 숙인 당신을 향했다.
"그렇군요. 실로…… 흥미롭습니다."
수업을 듣고, 배움터는 계절이 고정되어 있다. 사감은 개성이 있으며 모두 인간이되, 많은 학생이 꿈을 키운다. 듣기만 하면 평온함의 온상이지 아니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감들의 손아귀 탓에 하루하루 위험에 노출되다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며 대비해야 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물며 강제로 한 곳에서 지내오며 이 좁되 넓은 사회의 맛을 느낄 필요도 없어 보인다. 범죄자를 잡는 마법사, 라는 단락에서 아회는 새삼 류 가를 떠올렸다. 가문이 책임지지 않고 개인이 책임질 수 있구나 싶어, 그 아득한 자유에 대해 깊은 흥미가 생겨간다.
"……예.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군요."
하지만 시선을 마주하고 이 배움이 실로 헛된 일임을 깨닫는다. 황룡의 문이 열려있다는 이야기에 심장은 덜컹 뛰기 시작했으나 긍정적인 의미를 찾기 전 부정적인 온갖 생각이 발목을 잡고 깊은 밑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잠시 시선을 내리깔자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 깔린다. 어미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성하게 만든 봄도 아닌, 무릎 위 다소곳하게 지팡이 쥔 제 손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제안은 감사합니다."
달콤한 단어다. 새로운 세상, 지선이 되지 않겠느냔 제안과 같이 자신의 심장에 내리 박히는 단어가 또 있었던가, 희망에 불을 지피는 것 같은 기로를 발견했을 때가 있었는가. 하지만 아회는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자신은 귀기 무 씨의 사람이기 때문에.
"……사감님도 아시겠지만 이쪽 세상에는 운명이란 것이 있습니다. 신이 존재하기에 점지하는 대로 가야 하며, 그러지 아니하면 감히 유일신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죄로 뒤틀린 삶을 살아야 한다고들 하지요."
이 나이가 되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적이 있던가, 어린 시절처럼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다가 어떤 표정을 짓지도 못한 적이 있긴 했나. 고개를 들어 무뎌짐 속에 가려진 본심을 표정으로 드러냈으나, 아회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웃음이라기엔 울음에 가까운 일그러진 표정이고, 울음이라기엔 웃음에 가까운 입매의 주름이 있었다.
"저는 그중에서도…… 악인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몇 번이고 도피해도 결과는 같았지요. 제게 다가오는 모든 호의를 받아들일 적이면, 저는 주어진 운명에서 꼴사납게 도망치고 그 벌을 받는 사람임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태어남은 죄였다. 설산에 버려졌을 때, 살아 돌아오자 모진 시련이 기다렸다. 형님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결국 무 씨 집안의 피를 이은 사람임을 깨달았다. 처음 요괴를 잡았을 적엔 자신의 본성을 깨쳤고, 어머니와 령도에 도망치고자 했을 적엔 결국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류 씨 가문의 여식과 연 생겼을 때는 스스로가 얼마나 북부의 피가 짙은지 알게 되었고, 땅신령을 만났을 적엔 희망을 모질게 고문하여 자신의 운명이 어찌나 야속한지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니, 아마 자신이 저 호의를 붙잡아 운명을 도피하려 든다 해도. 나는 죽겠지.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부디……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내가 진정 악인이기 때문에. 형님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감히 중간에 역을 끝내었으니 새로운 운명일지언정 같은 최후를 맞이해야만 하겠지. 그것이 신의 뜻일 터이니. 자신이 그 굴레를 끊지 못한다고 해도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알았다. 고이 포갠 손이 가늘게 떨린다. 감히 뱉는 자신의 운명의 말로를 알고 있었기에.
>>264 아무렇게나 던진 아무말이 온화주를 웃길 때마다 저는 무척 행복하답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볼게요(?)
>>266 멋진 노래.... 그리고 멋진 비유... 멋진 연결..... 아름다움 3연타에 감탄하고 있었는데요 맨 마지막 요약에서 앞에 거 잊어버렸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요약했잖아욧~~~!~!!! 아니 그 마크씨랑 일뭐시기씨 결국 현피 안 뜬다고 하는 것 같던데 어라 혹시 아회도...?(?)
캡틴 안녕히 주무세요~ 저도 슬슬 자러 가 봐야겠어요....😴 모두 좋은 새벽 보내시고, 언제나 그렇듯 너무 늦게 주무시지는 말기!!
>>279 ㅋㅋㅋㅋㅋㅋㅋㅋ 오~ 아회 주량 낭낭한감~? 어디 술을 짝으로 놓고 마셔볼까~~ >: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바둥거려도 못 나가쥬? ㅋㅋㅋㅋㅋ 하지만 도화는 스마트폰이 없으므로 쟌넨~ 흠 동영상 대신 지필묵으로 기록이라도 남길까?(?) ㅋㅋㅋ 앗 글고보니 아회 주량은 얼마인지 못 들어본거 같은데?
>>280 낭낭할까요~ 으악 아회야 그렇다고 원샷은 아직 아니라고 봐~!!! 바둥바둥하다가 결국 축 늘어져 포기하는데 얼굴 가린 손은 죽어도 안 치우고요~😏 지필묵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대도 대대손손 읽었다고 해요...🤔 아회 주량이라~ 일단 저를 닮게는 안 하려고요...🤔 예전에 푼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어서요, 잠시 정주행을 해봤어요.
주량은 제법 되는 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위스키 두 잔 정도는 괜찮은...? 천천히 마시는 기준이고, 한국인 평균 잔 채워! 건배! 하는 술집의 빠르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면 1병 하고도 반, 많으면 2병 정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서 노래방 가는 정도의 취함 정도를 생각하고 있답니다...라고는 했지만 여기에서 조금 덧붙이면 노래방 가는 걸음이 절대 정상적이지 않아요.. 한 보 앞으로 걷고 뒤로 두 보 걷는... 취객스탭이죠~😏 이제 조금 톡톡 건드리면 흑룡아회 나옴... 결론은 쭉쭉 마셔라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를 시전하면 해결돼요! >;3
저도 슬슬... 눈 감아볼...게요...🛌 어브브 졸려... 온화주도 너무 늦지않게 주무시구요!! >:0!!!
>>281 아직 안돼 = 허락한다 해버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회가 얼굴을 가린 손을 안 치운다구요? 천부에서 제일 잘나가는 카페의 케이크를 가져와도 그러는지 봅시다 허허 >:3 ㅋㅋㅋㅋ 정성스럽게 적어서 적룡 기숙사에 숨기고 가버릴까~ 음음 아회 주량 확인확인~ ㅋㅋㅋㅋㅋ 분명히 걷고 있는데 자꾸 뒤로 가는 매직★ 아 그럴 일 없게 자리 깔고 마셔야겠네~ 히히... 히히히.... 뒷일은? 우리 영이몫~^^*
나도 슬슬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아회주도 잘 자는거야! 시원하게! 뽀송하게!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하루 되길 바랄게~ 잘 자~ :)
어제가 좋은 날이었든 오늘이 나쁜 날이든. 제가 아직 학당의 학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 1년은 그대로- 일 것이니. 그러니 학생답게 수업을 들으러 가야했다. 그런 약속이었으니.
단추 두엇 푸른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 위로 붉은 두루마기 걸치고 설렁설렁 걸어나온다. 곰방대 대신 붉은 종이담배 하나 물고 피우며 느긋하게 걸어오는데. 묘하게 피로해보인다. 평소와 달리 복도 가장자리를 걷는 것도 꼭 주변과의 접촉 줄이려 하는 것 같달까. 차림은 그대로이나 차분한 걸음걸이로 수업 목록 적힌 곳으로 온다. 그 앞에서 목록 한 번 슥 훑는다.
나른한 붉은 눈이 불을 다루는 법에서 멈추었다. 그곳으로 갈까 고민하듯이. 하지만 슥 굴러 체력단련으로 향했다. 새로운 강사 초빙되었다는 그곳에.
이 시기에 새로운 강사라.
머릿속에 이전날 보았던 이름 모를 남자 떠올랐다. 십중팔구 그 남자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형제이자 신수인 것이 분명한-
후-
담배 연기 길게 내뱉었다. 거의 태운 담배꽁초 손에 쥐자 작은 불씨 호록 피어올라 태운다. 그렇게 타버린 재 바람결에 날려보고. 그 방향으로 향했다. 늘상 체력단련 하던 그 곳으로.
수업이 이뤄질 곳으로 가니 아니나다를까 그 남자가 있었다. 목록에서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그 남자가 저를 보고 미소짓길래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않나. 통할지 모르지만.
학생들 모인 쪽으로 가니 현진 도사가 초록색 끈을 주었다. 별 도술은 없는 그냥 끈 같았다. 손에 쥐고 팔랑팔랑 흔들고 있으니 오늘 수업 내용이 설명되었다. 간단하게 술래잡기였다. 무대는 저 산. 제한시간은 세 시간. 현진 도사와 저 남자가 쫓으러 오는 건 일각 후란다. 어디선가 많이 겪어본 상황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찡그리듯 피식 했다.
이거 완전 역이 된 상황이잖아. 참 나. 제가 쫓기는 쪽이라니.
"보상보다 아프기 싫으니 잡히면 안 되겠으이."
그리 중얼거리곤 도술 외에 체술로 겨룰 것이란 말에 언제나처럼 허리춤에 걸린 역린 슬쩍 만졌다. 저 말은 이것도 허용한다는 의미겠지. 그럼 조금 나을 지도 모르겠군. 초록색 끈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왼쪽 손목에 묶었다. 그리고 신호 떨어지자마자 산 향해 달려나갔다.
무대가 산인 점은 조금 다행이랄까. 익숙하니까. 그것도 밤 아닌 낮이라면 더더욱. 나무와 수풀들 사이를 재주 좋게 뛰고 달려 지나치며 제법 깊숙히까지 들어간다. 주변으로 퍼진 다른 학생들 소리도 들리지 않을 곳까지 들어가 크게 자란 나무등치에 슬그머니 몸 낮추고 기척 숨겨보았다.
아마 자신을 묶고 있는 얄궂은 운명의 끈이 있다면 그 색은 필시 회색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칙칙한 잿더미 속에서 발견될 수조차 없을 만큼 얼룩덜룩한 여러 색으로 물들어 있겠지……. 걷잡을 수 없는 악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그 삶을 긍정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지어진 표정을 갈무리하려 애썼으나 쉬이 되질 않는다. 타인에게 이야기하며 다시금 마주하게 된 자신의 삶 때문이다. 이런 삶을 바라는 자는 누구도 없다. 누가 악인으로 남겨지고 죽기를 바라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다. 하물며 재수도 없게 그런 운명을 타고나버렸으며 자신은 지금 반쯤 체념하고 뒤틀릴 조짐이 보인다. 도망쳐도 같은 삶을 반복할 끝없는 손아귀에 놓였기에 부정적인 생각이 쉬이 떠나질 않는다. 사감님의 말씀대로 벗어날 수 있을까.
"……죽지 않는, 인간 말입니까."
툭 뱉는 말은 실로 터무니없다. 요괴에게 목이 베이거나, 저주에 당해도 죽지 않고 신벌 외엔 죽지도, 늙지도 않는 인간이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냐고? 영원한 북부와도 같은 사람을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면 대답은 한결같으리라. 그 또한 인간이라고. 자신의 형제가 인간이길 포기한 듯한 행동을 하고 다녀도 인간이라고 믿고 살지 않던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보지 않던가…….
"죽음 또한 정해진 순리이니, 손아귀에 영영 쥐여버린 자겠지요. 축복도, 저주도 아닌 삶에 놓여 남모를 불안에 떠는 존재라고 믿고…… 다른 존재가 아닌 가여운 인간으로 볼 터입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한들, 신께서 언제라도 질린다면 그 명을 거두어갈 테니 어찌 하루하루가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반 푼의 눈과 같다. 언제라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여 늘 예비하고 살지 않은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에 젖는다. 이마저도 사라졌을 때의 막막함을 떠올리고,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으나 그 노력마저 수포가 될까 들이닥칠 운명을 걱정하게 된다. 아마 영생의 존재도 그렇지 않을까 하였으나, 그것이 당신의 이야기임을 은연중에 깨달았을 때 아회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깔았다. "…실로 무례한 발언이었군요." 그리 사과하며, 무사히 졸업하길 바란단 말에 다물린 입술을 천천히 깨물었다. 졸업이 고대가 된다. "예, 못 들은 척하겠습니다." 운명이 다시금 굴러갈 터이니. ……다른 사감들은 아닌가 보다. 그럴 법도 하지. 하 사감에 대해 생각하던 아회는 천천히 깨물던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영 사감의 이야기와 가진 감정에 동의한다는 표현이었다. 객기로운 인간으로 보라지. 암만 신수가 자신을 학생이라고 생각하며 봐준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심일지,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는 실로 모순이자 발악이라. "……아, 추워지는, 군요."
기존의 대화와 달리 떨떠름한 어조였다. 자신이 북부사람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학당에서 겨울만 되면 두루마기를 팔에 걸치듯 입고 얼음이 동동 뜬 커피를 홀더도 없이 손에 쥐고 다니는 자였으니 당연할 법도 한가. 잠시 시선을 돌린 아회는 떠나기 전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제 어미의 시신을 한참이고 눈에 담더니 이내 눈 지그시 내리 감으며 당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좋은 꿈을 꾸었다. 눈을 뜬 뒤 휘발되더라도 실로 아름다운 꿈이었노라 희미한 잔재를 더듬었다. 어쩌면 끔찍한 꿈일지도 모른다. 늘 미적지근하게 살며 그 중간의 온도에서 살았으니 옳고 그름을 구분짓고자 하는 감각이 무뎌진 느낌이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찌하랴, 중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수업이 있는 날이니.
"……목화님, 별사탕과 차가운 물을 두었습니다. 끼니는 거르지 마셔야 하고, 피곤하시다면 기다리지 말고 푹 주무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조그마한 털뭉치에게 이것저것 일러주고는 머리를 틀어올린다. 붓으로 적당히 머리를 틀면 오늘의 수업이 무엇인지 적당히 알 수 있으리라. 한복이라 한들 하나하나 갖춰입던 그가 저고리와 움직임이 편한 사폭바지를 입고, 두루마기를 흘러내릴 듯 대충 걸치는 일은 흔치 않았으니. 체력 단련을 위함이다. 시야를 보조하기 위한 지팡이를 짚고, 그나마 반 푼의 눈을 한 푼의 가치로 만들어주는 단안경까지 쓰고 나면 목화를 다시금 한 번 보며 혹시라도 이 조그마한 털뭉치 따라오지 않을까 감시하듯 쭈욱 시선 가져가다 서서히 뒤로 물러나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저번 춘 사감 이후로 데려간 이후로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
춘 사감 이후로. 그때 아프다 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나.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발걸음이 옮겨진다.
다녀오라 인사까지 하다니, 이렇게 영특한 존재가 다 있나. 오늘 영이를 시켜서 별사탕은 고사하고 다른 사탕도 조그맣게 직접 만든 것을 사와달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아회는 우뚝 멈췄다. 하필 초빙 강사가 저 존재였다니, 어딘가 느껴지는 관심이 불편했던 것인지 아회 느릿하게 지팡이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불편하다는 모습을 이리 소극적으로 내보이다가도, 눈 뜨고 싶었냔 말에 손이 새하얘진다.
"……조금 더, 시간과 때를 고려하며 배려하는 법을 아셔야겠습니다."
저게 지금 대뜸 지*하는데 수업 안 듣고 그냥 돌아가도 됩니까? 목 끝까지 올라오려던 단어를 삼키고 말을 최대한 곱게 돌렸다. 초록색 끈을 받은 아회는 감각이란 말에 고개를 들었다. 술래잡기, 뒷산 전체가 숨을 장소, 일각, 3시간…… 시원하고 달콤한 보상은 그렇게 바라지 않는다. 잡히면 조금 많이 아프단 말이 거슬릴 뿐이지.
"……순수 체술이라."
아무래도 수업 잘못 고른 것 같다. 아니지, 시야 없이도 잘 살아왔으니 괜찮겠지. 아니, 산이니 다른가. 그 길 알아채는 방법이 죄다 들킬 가능성이 높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초록색 끈을 손에 쥐고, 지팡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선다. 설산에서 살아남기도 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는 그저 은은히 웃을 뿐이다. 지고한 것들이란 지고로 밑에 있는 것을 모르기에…… 들끓는 뒤틀림을 참아내며 산으로 갔을 적엔, 비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회 코를 위로 하게끔 고개를 들어 재빨리 주변의 기류를 읽어본다. 그래, 어떻게 되었든 인간이란 왼쪽부터 본다고 하던 옛말 떠올랐다.
그리하면 오른쪽이지.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많이 가는 곳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잡힐 확률 늘겠지……
고통의 탓인가 기껏 내지른 정권은 닿지도 못 했다. 무리하게 공격을 이어가려 하지 않고 일단 다시 뒤로 물러났다. 저를 보며 눈치가 빠르다는 신수를 향해 어깨 살짝 으쓱였다. 한정적이나마 이만치 관여했으면 모르는게 이상하지 않냐는 듯.
"...하."
그러나 이름 모를 신수가 역린과 여의주를 빼내려한다는 얘기 들었을 때. 미간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제가 강제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물론 역린은 그런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제대로 계약했고 밥도 줬고 어! 여의주도 어. 그가 준 것인데! 참 여유롭게도 저더러 말해보란 표정을 보고 숨 한 번 골랐다. 그리고 말했다.
"싫습니다. 역린의 주인도 이 여의주의 주인도 아니신 분이 어찌 그런 폭거를 행하려 하십니까? 내게서 앗아가려거든 당신이 아니라 그이를 불러오십시오. 역린의 본래 주인이자 여의주의 주인인 그이를 이 자리에 불러 와 그이 손으로 계약을 깨고 여의주를 취하라고 하시어. 그이가 그러한다면 돌려주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래. 이제와 그가 돌려달라 해도 쉽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이것들 제게서 없어지는 날을 그 날로 정해뒀으니.
"그리고 아실까 하여 드리는 말씀이온데. 내 이 역린에 만족스러울 만큼 피와 살을 취하게 해주는 것으로 계약 유지하고 있으며 여의주는 그이와 연 맺은 증표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반려로 삼아달라 청했고 그이가 수락하여 그 표식으로서 넘겨준 것이니. 그이 외의 누군가에게 반환을 강요 받을 이유 없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설령 같은 신수이자 누이라 해도 말입니다."
당돌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할 말을 또박또박 마친 온화 자세 올바르게 하고 서서 신수 바라보았다.
귓가에 내려앉는 소리는 등골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싸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답지않게 경계하며 뒤를 도는 모습이 마치 보이지 않는 털 부풀리듯 순간의 기세가 맹렬했다. 오른쪽으로 길을 들었던 것이 잘못인가, 싶다가도 애초에 성치 않은 눈으로 다닌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 발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귀한 분을 이런 곳까지 데리고 올 수는 없지요."
춘 사감과의 대치에서 깊이 깨달은 바였다. 위험하다. 곁에 두는 것이 무엇보다 낫지만 때로는 곁에 두면 심히 위험할 때가 있다. 특히 하 사감과의 대면 이후 막바지에 들이닥쳤던 현진 도사를 생각하면 더욱이. 행여나 소리 들킬까 품에 안았던 지팡이를 손으로 옮겼을 적, 평온하던 기색에 약간의 금이 갔다.
"이미 답은 정했지만, 하나 묻지요."
차라리 먹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굴레를 끊을 수 있을 텐데……. 또 모순적인 생각이 온몸을 뒤덮기가 무섭게 다른 감정이 떨쳐낸다. 의심이다.
"모든 호의에는 대가가 있는 법입니다. 그쪽 또한 신수라면 공물을 바쳐야 함을 알 터인데, 내게 무엇을 바라고 눈을 주겠노라 덥석 이야기를 꺼내는 겝니까?"
애초에 받을 생각도 없지마는 묻고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눈을 받고 싶지 않느냐니 이야기하는 것이 심히 거슬렸기 때문이리라. 그 이유라도 어디 한 번 들어보고 이 자리에서 잡혀 뼈 두어 개 부러지든 말든 해야겠다.
다난한 사건들이 한 차례 지나고 다시금 수업 때가 돌아왔다. 가볍게 훑은 수업 목록은 얼핏 이변이 없어 보였다. 체력단련 수업에 난데없이 초빙 강사가 들어왔다는 소식만 뺀다면. ……왜인지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유현은 저를 잡아먹겠다며 쫓아왔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자는 그 길로 아예 학당에 눌러앉은 듯 보였다. 확대해석일지도 모르나 그 남자 들어온 시기와 '초빙 강사'의 시기가 일치한다는 지점은 퍽 불길하다. 조심해 나쁠 것 없으니 그리로 갈 우행 범할 생각은 없었다. 유현은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사감의 수업을 듣지 않았으니 그리로 가야겠다. 아직까지도 정확히 정체 모를 그 남자에 관해 물을 말이 있기도 했고. 사감도 나중엔 답변해주겠다 말했으니 그 나중은 지금인 듯싶다.
당신을 뜻하는 말이다. 평온한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예민함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끝없이 경계하고, 끝없이 의심하며, 마침내 불신을 넘어서 환멸의 직전에 다다른다. 단 일 년, 일 년이면 됐는데 빌어먹을 사건들은 끊이지 않는다. 대체 왜.
"그딴 것을 바랄 리가 없잖아."
왜 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규정짓고 그 틀에 박으려 드는가. 시련 속에 몇 번이고 담금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어차피 그마저도 빼앗겨 사라질 것이 뻔한데 내가 왜 스스로 희망을 고문한 뒤 너절하게 나가 떨어져야 하냔 말이다. 지팡이를 쥔 손아귀에 힘을 어찌나 세게 주었는지, 창백한 피부가 시체보다 더 희게 물들고, 그걸 넘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쪽이 원하는 공물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무작정 받겠다 하겠소, 신수들도 세상 모든 지고한 존재인 양 굴더니만 결국 같은 땅에서 자란 존재는 맞나보군. 말도 통하지 않고 처음부터 바라는 것 취하려 내빼고 폭압하는 것은 넌더리가 날 만큼 똑같아."
나도 똑같고. 끝말을 삼키지도 않았는데 자조적인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삭막하고도 뭉근한 어조에서 사납고도 날카로운 단어들이 비수처럼 튀어 나온다. 인간은 다 그런 걸 바란다고? 아니, 바라지 않는다. 한때는 바랐겠으나 이미 늦었다. 어차피 빼앗김을, 그만큼의 대가 필요함을 안다. 계산하고 잰다고? 당연하지 않나? 대가가 만약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것이 나을 텐데, 무작정 받아주길 바란 것인가? 그만큼의 성의도 없는 존재가 내게 거래를 제시해? 오만한 자와 오만한 자가 만났기 때문이다. 속내 알 노력조차 없는 태평한 자가 자존심 드세고 합리화에 둘둘 매여 살며 자신의 인생 계획 다 세워둔 자의 속을 긁고 있으니 어찌 고운 말이 나오랴.
"잡기나 하시오. 그리고 하나 경고하지. 허튼 수작 부리지 마시오. 먹으려 든다면 죽기 직전 하잘것없는 북부놈이라도 사력 다하여 그 아가리를 찢어발기든 혀를 끊어버리든 하여 다시는 입도 벌리지 못하게 할 터이니."
학당 바깥의 일을 알아서 감당할 수 있을 테니 이리 분간 안하고 날뛰겠지. 이미 신의 악의 짙게 받은 몸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랴. 뼈 두엇 부러져도 어차피 그러라고 있는 몸이다. 처먹힌다면 동귀어진이라도 할 것이다. 그럴 수 없음을 알지만 북부의 선조가 제 형제를 죽였다 했으니, 그 후계인 자신이 상처라도 입힐 수 있다면 퍽 볼만하겠다. 와중에 눈도 뜨지 않는다. 얼굴 마주할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
이 사감은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언제나 시작과 동시 본론으로 들어가니 대비할 시간이 없다. 그는 사감이 있을 저편 방향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사사로운 감정 담긴 불손한 눈빛 따라르하는 것이다. 나름의 불만 표현은 적당히 그만두고, 그는 발을 내딛었다. 우선은 감을 잡아야겠으니 힘 실어 딛지 않고 앞쪽의 땅 가볍게 눌러 보기만 하려 했다.
이건 보통의 땅이다. 운이 좋아 다행이지만 함정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눈 어두우니 보면서 분간하는 것은 무리고, 보기에는 감쪽 같은 구덩이라면 파내어진 땅에 겉만 얇게 덮인 구조일까? 이런저런 추론을 하며 또 다시 발 들어 앞의 바닥을 툭 쳐 본다.
까딱 고갯짓하며 그가 가볍게 대꾸했다. 사감은 퍽 궁금한 눈치로 보였지만 유현이라고 해서 제 도술 실력의 이유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그가 관심을 가진 대상은 타인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그다지 궁금하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제 뱉은 말마따나 지금까지는 우연일 수도 있다. 유현은 혹시라도 발밑 무너질 상황에 대비하고 다시금 땅을 밟는다.
겉으로는 태연히 말하며 평화롭게 풀렸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저 날로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름 모를 신수가 주먹에 힘 주는 것 보고 고민한다. 맞서야 하나. 도망쳐야 하나. 그걸 고민한 시점에서 패착이었는지. 순식간에 뻗쳐온 그 주먹에 다시금 얻어맞았다.
"윽! 형제 싸움은 싫고. 그 형제의 반려는 쥐어패도 좋다 이거요?"
좀 얌전히 굴고 싶었으나 연달아 맞으니 아무리 저라도 열이 안 뻗칠 수가 없다. 그래. 이래뵈도 적룡이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그의 형제이니 버릇없이 굴고 싶지 않았는데. 계속 맞으면 참기 힘들다. 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말로 하면 좀 들어! 이 빌어먹을 신수들!"
맞은 팔이 엿 같이 아팠지만. 아마도 무언가 흘러선 안 될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한 방 정도는 먹여줘야 속이 시원하겠다. 그래서 저도 주먹 꽉 쥐고 내질렀다.
또다시 맞지 않는 주먹에 이를 악물었다. 오늘 정말 안 따라주는 날이구만! 욱하는 성질 튀어나오기 전에 급히 뒤로 몸 물렀다. 잡으려는 손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피하는 그 몸짓 뒤로 무언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진다.
"그럼 오라고 부르기라도 하시던가. 언질? 그 때 내 들은 말은 수업 때 몸 잘 사리란 말 밖에 없었소. 단지 그 즈음 자주 가는 수업이었다고 홀랑 가버린 쪽도 잘못한 거 아니오? 수업이 한두개도 아니고! 수업 들은 날이 하루이틀도 아니거늘!"
몸의 성질 막아도 정신의 성질머리는 막을 수 없었는지 제법 날카롭게 말 튀어나갔다. 그 짧은 사이 숨 받친 듯 몰아쉬며 주먹 내지른 팔 늘어뜨리니 두루마기 소매 사이로 뭔가 흘러내렸다. 희고 얇으나 군데군데 붉게 물든 천- 붕대라 불리는 그것 스윽 흘러내리더니 왜 있는지 알려주듯 붉은 피도 뒤이어 흘렀다. 늘어뜨린 손끝에 금방 맺혀 후둑 떨어질 정도다. 이제보니 잡는 것 피할 적 바닥에 흘린 것도 피다. 방금 맞아서인지. 혹은 이미 다쳤던 것 터진 건지. 알 수 없는 상처를 소매 위로 꽉 움켜쥔 온화 고개 들어 말했다.
"그 도사가 어디서 뭘 하건 뒤졌건 살았건 내 알 바 아니오. 허나 그건 알아야겠소. 내게 뭘 원하는 거요? 다 내놓으라 하면 두말 할 것 없이 거절이요 놀이상대가 되라 하면 그것도 거절이오. 일방적으로 놀려지는 것 따위 견딜까보냐."
지금의 온화에게 그 외의 신수도 도사도 다 안중 외였다. 그러니 현진 도사가 어찌 되었건 일절 궁금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저를 이리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팔을 소매로 감쌌다. 그런 것 무색하게 금방 붉게 물들고 있었지만.
재미없는 인간이라. 재미로 자신을 판단한다는 점에서 번지수 하나는 지독히도 못 찾았다. 거래를 제안하는 점에서 재밌는 녀석이니 뭐니 알 게 무언가? 흥미를 끈다면 좋겠다마는 그것보다는 거래의 질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가치의 무게를 매다는 법을 배워야 한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서서히 입술을 깨물게 된다. 경중을 잴 필요가 있었구나, 귓등으로도 듣고 싶지 않던 빌어먹을 사람이지만 이 말 하나만큼은 쓸모가 있었구나.
"고작, 학당을 보자는 이유 하나로 너머를 들여다보는 눈을 준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나.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거늘."
그 너머에 무언가가 필시 있을 것이다. 아니면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 영원이 아닌 한 번일수도 있고. 뿌리 깊은 불신이 떨어지지 않는다. 육 년을 봐온 사감에게도 불신의 가시를 세우는데, 이방인을 향한 가시가 서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가시가 극에 달한다. 눈을 가늘게 뜨며, 표정은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딴 것을 가져가서 무엇하지?"
진심이었다.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에서 끔찍함이 묻어나온다. ……제 형님에게 정인 생겼다고 해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을 테지.
"여의주 하나 쥔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질 줄 아는가? 어림없는 소리, 보패를 쥔다 한들 달라지지 않을 것인데 그런 걸 가져가리라 생각하는가? 기고만장하기 그지없군."
인간의 입이 아니다. 등골부터 끼쳐오는 괴리감과 돋아나는 소름이 무색하게 걸음은 오히려 가까워진다. 한 걸음, 두 걸음.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놓아야 하는데 무엇하러 여의주를 쥐지? 달라지는 것이 있나? 죽으면 끝인데. 적룡 이야기가 나올 적엔 오히려 웃음 짓게 되었다. 희미한 웃음기가 목소리에 어리고, 입꼬리의 끄트머리만 미세하게 올라간 수준이지만.
"내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하였지……. 차라리 용에게 생면부지 타인의 목을 수도 없이 바치든 내 몸뚱이 처먹으라 하든 그렇게 간곡히 빌며 해결하고자 하였지만, 이젠 아니다. 애초에 웃놈들이 필요하지 않았어……. 내게 주어졌기에, 응당 해야 하는 일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던 게야. 그러니 네 생각을 하는 법도, 그 너머의 추측도 죄 틀려먹었다."
오만하고 신경질적이며, 한없이 예민한 어조였다. 역시 춘 사감 말이 맞다. 신수와 인간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데 이런 존재들과 이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앞에 다다랐을 적, 그리도 곱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부드러운 움직임과 달리 당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손등으로 후려치려 들었다.
"내 보기에 네 퍽이나 안타까운 나머지 그만."
보기 흉하니 그 입 좀 다물라는 의도였으나 그 과정이 심히 날카로웠다.
"나는 그쪽의 눈도, 여의주도, 적룡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얌전히 입 다물고 잡아가기나 해. 실랑이할 시간에 다른 학생 여럿 잡았을 터인데 아깝지도 않나?"
아회의 입장에서는요, 응. 아무래도 속이 많이 꼬였을 것 같아요.🥲 하 사감님과의 대화 이후로 무의미하다는 것과 신수 또한 방법이 아니라 깨달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결심 굳힌 이후에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무언가를 주겠다고 하고, 신수와 붙어먹으려 한다고 하면... 쉽게 말하면 응...
현대에유 아회가 단 음식을 멀리하려 했는데 설빙 초코빙수 기프티콘 주는 느낌... 그마저도 유효기간 끝남... 이지 않을까요...?(ㅋㅋ)
그리고 진심이기도 하답니다... 여의주가 필요가 없대요~ 거기다 형님 정인 생겨도 저런 표정은 안 지을 걸요...😏
3번부터면 그냥 우연이 아닌 듯도 하고. 유현은 잠시 멈칫한 채로 제 발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땅을 밟는 솜씨라 해도 잘 모르겠는데…… 걷던 것도 멈추고 잠시 턱 짚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그럴듯한 성과는 없었기에 금세 그만두었지만. 옆에서 들리는 소리는 집중에 거슬릴 뿐이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빠지면 저 꼴이 되나. 무시하고 계속 나아가기로 한다. 연속된 성공에 힘입어, 이전보다는 조금 빠르게 발을 내딛는다.
지네의 딜레마라고 했던가? 집중하지 않았을 때는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던 행동들이, 한 번 의식하고 나면 삐걱이며 실패하게 되는 효과 말이다. 유현은 그 개념 그대로 무너진 모래 구덩이에 처박힐 위기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아, 이런 구조였군. 함정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꼴사납게 흙이나 먹을 생각은 없었기에 부스러지지 않은 땅끝을 붙잡고 최대한 버텨 보려 했다.
처음엔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가슴까지 잠긴 시점부터는 저항을 포기했다. 화유현은 그리 팔팔하고 의욕 넘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대신에 좀 건져 달란 듯한 눈으로 사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는 봤지만……. 저 사람 아니며 엄격하게 굴리는 사감께서 건져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다. 돕는다 해도 지난번 수업을 생각하면 고운 방법으로 올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짧게 심호흡한 후, 도술로 몸을 파묻은 모래며 흙을 치우려 해 보았다.
물 소리의 근원은 호수였다. 이런 곳에도 호수가 있었나. 수업이 없는 날에 와서 쉬어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까이 다가가니 왠 요괴들이 있는데. 굳이 적대할 필요도 없었다. 전부 엎드려 있었으니까.
뒤에서 쫓아오던 기척은 저를 찾지 못 하고 지나친 듯 했다. 금방 올 것 같진 않으니 조금 쉬어보자. 요괴들과는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가 호숫가에 앉았다. 슬슬 피가 굳어가는 팔을 씻고 싶었지만. 어찌 될 지 모르니 참기로 한다. 덜덜 떨었던 역린만 무릎에 올려놓고 토닥토닥 보듬어주었다.
...그런데 대체 여기서 뭐가 있었던 거지?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요괴들의 행태는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기에. 앉은 채로 슬쩍 주변도 둘러보았다.
이 수업을 들으면 온 몸이 흙이며 모래 범벅이 되니 번거롭다. 옷 안으로 들어간 흙을 탈탈 털어내자 모래가 아주 비처럼 떨어졌다. 그러고도 덜 빠진 모래가 찜찜했지만, 어차피 수업이 끝나기 전엔 또 구덩이에 떨어질지도 모르니 찝찝한 감각 참기로 한다. 그는 사감의 말에 긴 숨을 내쉬었다. 그저 심호흡이었을 뿐이지만 묘하게 한숨 같기도 한 것이, 나름대로 몸은 고생 안 하고 살았던지라 조금 피곤해졌다. 하지만 지형이 이러니 도망갈 수도 없을 테고, 수업을 끝까지 따라가는 게 이 고생 끝내는 가장 빠른 길이리라.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보상이 기다릴 때 보다 의욕이 고취되는 생물이랍니다. 그러니 제 의욕을 북돋기 위해 대가를 걸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제가 지난번 궁금해했던 일에 관해서 물을 기회라든지."
인간은 이런 생물이라는 화두로 운을 뗀 까닭은 백룡의 사감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상대가 정말로 인간 아닐 게 뻔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영 사감이 인간일지'라니? 사감들과 사적인 대화를 그리 많이 나누어 보진 못했지만……. 짧게나마 스쳐가며 느낀바 영 사감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겉도는 듯한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그래서 영 사감만은 어느 쪽일지 쉬이 짐작지 못하고 별개로 두었었는데, 추 사감이 확실히 언급하자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 정보에 대해 원래 물으려던 것까지 대답해 주신다면, 좋네요."
남의 비밀이고 뭐고 양심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사생활을 건 무언의 협상이 참 화기애애하다.
선조가 죽여서 여의주를 취하려 했다고? 금시초문이다. 알 수가 없는 얘기였다. 사생아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적었는데 대체 자신이 뭘 안다고 그런 얘기를 꺼내고 있지? 애초에 귀기 무 씨가 아는 일인가? 모른다. 불쾌하기만 하다. 응당 자신마저 그럴 것이란 생각에 부아가 치민다. 그리고 끝내 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당신은 기름칠을 한다. 방금.
"뭐라고?"
내가 그래서 놓았잖아. 내가 태어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 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한 번쯤은 손 뻗어보고 싶었는데, 부질없는 바람에 애태웠건만,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그제야 눈이 뜨였다. 온전히 뜨인 눈이 세상을 담지 못해도 소리가 난 곳을, 당신을 명확하게 마주하려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기대하지 않는다 했지 않은가,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바라지 않겠다고 했잖아, 내가 일을 해결해달라 빌 것 같았나? 이 내가? 어디서 숟가락을 얹게 두게 내버려 두겠어, 그딴 짓을 왜, 왜 하겠냐고. 내가 끝낼 일에 대해 빌었더라면 진작 내 몸뚱이 고통받으라고 산제물로 바쳤겠지 어찌 신수에게 빌겠느냔 말이야,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자에게 억지로 눈알 쥐여주려 한 건 누구였지? 누구였냐고, 제 말도 뒤집어버린 주제에 어떻게, 어찌……. 선조 따위 알게 무어냐, 겨울탑에 내가 갇히고 싶어 갇힌 것도 아닌데 그딴 것을 알아서 좋을 일이 있겠냔 말이야."
애초에 잘못된 것이, 내가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됐던 건가? 그래서 이렇게 내게……. 옷깃 잡히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래, 기대하지 말았어야지. 모습이 뒤틀릴 적 점차 이성 또한 뒤틀린다. 이미 초점이 없는 눈이었기 때문에 뒤틀려가는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새삼 요괴를 처음 죽였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의 욕심이 가슴 속에서 들끓는다. 바라는 것은 괴롭힘의 중단도, 무가의 일원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요괴에게 자신을 대입했을 뿐이지. 편해지고 싶었다. 그때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게끔, 오지 말아달라 했던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차라리 당신이라면. 모순이다. 끔찍한 모순이다.
이번엔 도망치는 뒤로 소름 끼치는 감각 느껴졌다. 분명 뭐라도 하려 남았더라면 필시 학당으로 돌아가지 못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 만은 안 된다. 언젠가 어쩔 수 없는 일 생기더라도. 여기서 그런 식으로는.
급히 도망치다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 잠시 멈춰야 했다. 서두르느라 놓친 소매 아래로는 다시 피 흐르고 있었다. 이러다 흉 남겠네. 두루마기 들춰볼까 하다가 이미 상처와 들러붙은 것 같아 그만둔다. 그대로 서서 숨 고르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학생들 목소리 들려오길래 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보았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봤자 애초에 어떠한 의미도 없었구나. 초점 없는 아스라한 눈은 당신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무의식 속을 헤집고 있었다. 여의주 따위는 필요가 없다, 용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 않다. 혼잡한 머리에서 한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용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뭇가지에 안착한다. 지상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 발소리가 멀어졌을 적.
너무도 쉽게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몸을 온전히 위로 안착한다. 바람이 시원한 것이 곧 가을이 올 것만 같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나는 것 같고, 세상이 싸늘한 겨울이 오는 것 같다. 부질없다. 역시 부질없다. 이리 나무 위에 있으니 어릴적 도술 연습하다 나무 위에 오른 뒤 내려오지 못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는 구해주셨는데."
한 시진을 내려오질 못해 나무에서 내려오기가 무섭게 훌쩍였지만 지금은 그럴 일도 없겠지. 아회는 눈을 감았다. 아무나 구하러 오겠지. 그게 아니라면.
"영아."
있느냐. 아회 작게 웃었다.
"네 있다면 내 여기서 투신할 터이니 알아서 받아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수업 따위 알 게 무어냐, 북부로 가서 농땡이나 치자꾸나."
위에서 보는 바닥은 아찔하기 그지없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치면 그대로 몸이 떠밀려 떨어지고, 한때 영원한 겨울이 있는 집안에서 낙상홍이 눈밭에 떨어지듯 쏟아지고 말겠지. 한참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회는 무영을 불렀다. 나무 밑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영은 자연스레 고개를 올렸다. 드높은 나무 위에서 속삭이는 제 주군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 네 있다면 내 여기서 투신할 터이니 알아서 받아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수업 따위 알 게 무어냐, 북부로 가서 농땡이나 치자꾸나.
그 높은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투신하겠다 하지만 불만도, 놀라움도 표출할 수 없었다. 무영은 얌전히 팔을 벌렸고, 아회는 무영이 팔을 벌리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몸을 아래로 기울였다. 기실 언제나 바라던 것이 있었다. 네가 내 명을 듣지 않으면 어떨까, 지금 내 명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너 또한 하나의 인간임을 증명하고 나를 차라리 내쳤더라면 좋을 텐데. 덧없는 육신이 휘청이다 바람을 가른다.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었으나 간청은 길었다.
부질없는 바람에 여전히도 애태운다.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니 앞으로 내게 기대 가질 것을 만들게 하지 말아 줬으면. 그렇게 몸이 충돌했으나 맞닿은 것은 지면이 아니었다. 도술을 쓴 무영 덕분에 충격 없이 얌전히 품에 안겼을 적, 아회는 내심 실망했다. 차라리 네가 나를 내쳤더라면 굴레를 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너 또한 결국 굴레 내부에 있는 존재구나. 인간임을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허탈한 감정이 웃음으로 변모해 짧은 숨을 뱉는다.
"이번엔…… 위험했습니다." "각오한 일 아니더니." "……."
거 봐,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왜 걱정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대로 어머니 계신 곳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곁에 있다면 생각이 좀 정리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입을 다물었다. 품에서 내려오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있자 무영은 품에 안긴 아회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고쳐안는 팔이 든든했다. 아회는 품 속에서 고개를 파묻었다. 든든한 팔이지만 감촉이 다르다. 일정한 걸음과 함께 흔들리는 몸이지만 그 걸음걸이가 다르다. 어린 시절 나무 위에서 옹송그리고 있던 자신을 구해줬던 그때의 기억과는 감각도, 상황도 다르다. 다시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여전히 입안이 쓰다.
"영아." "예, 주군." "너는…… 따라오지 말아라."
운명이란 것은 거학의 너울이며, 그 안에 안배한 혼백은 쉼 없이 흔들리는 경가다. 너는 흔들리지 말아라. 인간이 아무리 경가의 노 잡아 방향 잡는다 한들 너울은 신의 손아귀대로 방향 이끄려 드니, 네가 아무리 운의 갈피를 잡으려 해도 명은 순리대로 가리라.
"너는 살아."
그러니 너는 주어진 섬에 도달하라. 가라앉는 것은 나로 족하다. 무영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아회는 눈을 감았다. 영원한 것 없다고 하였으나, 영원한 어둠 속에 세상을 가두며 아무런 덧붙임도 없이 입까지 닫아버리며, 마침내 기숙사 방에 들어설 적까지 품 속에 웅크려 그 어떤 것도 열지 않았다.
길 가던 도중 발 아래 살피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학당 일과 중 어디론가 향하던 유현은, 걸음 내딛는 순간 절묘하게 굴러들어온 유리병을 밟고 앞으로 구르고 말았다.
"……."
가뜩이나 더운데 이렇게 되니 움직일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시선 아랑곳 않고 유현은 그렇게 몇 분간 누워 있다 몸 일으켰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칼 정돈하지도 않고 제 밟았던 물건부터 들어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병인 듯했지만, 이렇게 절묘하게 굴러다니는 간식거리라니. 머릿속으로 몇달 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신께서 장난을 치셨다지. 제아무리 화유현이라 해도 길에 떨어진 음식 함부로 주워먹는 기행은 쉬이 벌이지 않는다. 하지만 합당한 의문과 호기심이 생기기만 한다면, 독 든 음식이라도 맛보는 자가 바로 그였다. 평범한 간식거리일지 신의 손 닿은 물건인지는 먹어 보면 알겠지. 유현은 병을 열고 안에 든 별사탕을 꺼내었다. 사실 평소의 그였다면 아무에게나 먼저 먹여 보는 정도의 확인절차는 갖추었겠으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평소엔 다소 약했던 부류의 욕구가 충동질당하는 듯한 기분이다. 그는 별사탕 하나를 집어먹었다.
.dice 1 4. = 2
1. 과거를 환상으로! 2. 숨겨진 진실을 한 번! 3. 무지개를 토해보자! 4. 동물의 귀와 꼬리가 뿅!
- 죄인을 들여 형을 치르게 한다니 가문의 분위기가 흉흉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다. 가문 내에 정해진 서열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제법 화기애애하고 화목하다. 죄인도 거스르지 않고 개선의 의지를 보인다면 출가는 무리이나 여생을 보살펴주기도 한다. 죄인의 형이란 것도 류 가의 일을 돕는 것이다. 이는 본디 류 가의 사람 대부분이 요괴 사냥을 업으로 하여 온 터라 성미가 호탕하고 의식이 개방적이기도 하고, 가문 내에서 불화가 일어나거나 고의로 일으키는 것은 가주가 직접 벌을 내릴 정도로 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단락에서 하나. '가문 내에 정해진 서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언뜻 보기에 류 가에 속한 모두가 수평적이고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 같으나 직간접적으로 상하를 구분짓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도' 라는 표현에서 비단 류 가/죄인의 이분법적인 나눔이 아님 또한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별개의 기준일까? 사람간 서열에 상하가 있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윗선이며 아랫사람일까? 윗선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을 할까?
둘. '가문 내에서 불화가 일어나거나 고의로 일으키는 것은 가주가 직접 벌을 내릴 정도' 라는 문장은 그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윗사람을 제외한다거나 류 가의 사람은 예외라거나 하는 기준이 없다. 그리고 불화의 구분과 정도, 벌의 정도에 최소치와 최대치 또한 모호하다. 간략히 적는 것이 시트이기 때문도 있지만 이 경우 뒤가 있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려놓았다.
그리고 온화는 지금 '가문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을 받는 중'이다.
셋. 이전 독백에서 풀었듯 류 가에 잡혀온 모든 죄인이 류 가에 속하지는 않는다. 비율적으로 속하는 인원보다 속하지 않는 인원이 더 많다. 그렇다고 남는 인원을 밖에 풀어주는가? 절대 아니다. 류 가에 잡힌 죄인은 류 가에 속해지지 않는 한 결코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인원은 어찌 할까? 참고로 류 가에서 사람은 전부 인적 '자원'으로 인식한다. '전부' 말이다.
정해진 서열... 윗선... 온화의 죄와 자원...?? 자원???? (머리 부여잡) 온화주... 아회의 행복도 행복인데 온화가 더 시급한 것 같은데요???🥺 우리 온화가 벌을 받는다고요...? 말도 안돼!!! 철폐하라! 이것저것 보장하라!😫 온화주가 부러워요... 독백 내용 이미 알고 있겠지... 부럽다...(질누하!)
찐친 오브 찐친인데 유효기간이 있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 참 진짜 기구하다... 도화 애들도 NPC들도...
서로 멘탈 깬 일상 다음인데 어디서 각자 멘탈 털려와서 만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용생구자 뒷담은 당연히 까야지 얼마나 억울한대~! 근데 하 사감 얘기 나오면 쵸큼 예민!할지도 상대가 아회니까 막 화는 못 내는데 궁시렁궁시렁... ㅋㅋㅋㅋㅋㅋㅋ 그럼 말 나온 김에? 츄라이 츄라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깬거 아니야~!!! 서로 어떻게든 수습했는데 갑자기 와서 아니야~ 하고 박살내버렸죠...ㅋㅋㅋㅋㅋㅋ 궁시렁궁시렁 온화 귀여워요~ 하 사감에 대해서 "용이든 뭐든 그냥 사람 좀 살겠다는데 그 조차 안 되게 하는 것 같아서..."같은 섭섭함만 얘기하겠대요~😏 그런데 취하면 이제 흑룡됨...(돌겠음) 헉 츄라이 할까요~? 텀이 좀 느리겠지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난 좀 재밌는게 온화는 깨질 멘탈이 없을 줄 알았거든? 근데 지금 쓰는 독백 보고 깨달음 아 얘도 있구나... 깨지는구나... 조금만 더 깨볼까?(<만악의근원) ㅋㅋㅋ 아 난 그것도 기대돼 과연 아회가 반려에 대해 물어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 음 아회는 미즈와리만 마시자 온화가 기깔나게 말아줄거야^^
아회주만 좋다면 츄라이! 하고 싶지만 내 몸이 당장 눕지 않으면 내일 컨디션을 조져버리겠대... 일단 자고 인나서 이벤트 레스도 함 써보고! 시간 맞으면 그때 시작해보자~ 음 아니면 지금 호다닥 선레랑 상황이랑 정해두고 천천히 이어도 좋구~!
처음에는 여느 별사탕과 다름없던 맛이 점차 변질되기 시작한다. 정제된 음식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지나치게 생생하고 비치근한 맛. 입안 가득 피가 들어찬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평범한 음식이 아니리란 예상 들어맞은 셈이니까. 일련의 광경 모두 지나간 후, 그는 제자리에서 멍하니 눈 깜빡였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송보리와 피칠갑이 된 광경에 대한 의문보다도 다른 생각이 더 앞섰다. 다음은 없나? 끝까지 보아야 어디에서부터 생각해야 할지 정리가 될 듯싶다. 이 상황이 지난번 사건과 같은 경우라면 분명 다른 곳에 병이 더 숨겨져 있으리라. 일과는 더는 중요치 않다. 그는 몸 돌려 원래 가려던 곳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었다. 그러니까 이 인간 별사탕 찾으려고 시원하게 수업을 쨌다는 뜻이다.
……그런 우여곡절이 있고, 그는 마침내 제 방에서 병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침 움직인 탓에 지쳐서 당이 필요하기도 했다. 별사탕을 꺼내어 입 안에 던져넣는다.
.dice 1 4. = 4
1. 과거를 환상으로! 2. 숨겨진 진실을 한 번! 3. 무지개를 토해보자! 4. 동물의 귀와 꼬리가 뿅!
촛불이 일렁인다. 잠은 오지 않는다. 호위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러 그림자에 녹아 사라졌고, 목화는 잠들었다. 깨어있는 것은 불타는 촛불과 나로구나. 문득 지팡이 손잡이를 비틀어 그 내부를 닦던 손 멈추며 눈을 가늘게 뜬다. 무언가가 걸려 잘그락대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손에 쥐니 목화에게 준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이다.
이런 것을 산 기억은 없다. 손 안에서 굴리던 것을 보다 기가 차다는 듯 웃음도 아닌 헛바람만 분다.
"……."
덤덤하게 마개를 열고 안에 있는 것을 하나 집어먹는다. 단 음식을 바라는 상황도, 허기가 진 것도, 이전 농간을 익히 알고 있으며 어울리지 않으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단순히 충동이었다. 차라리 놀음에 어울려서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강제로라도 접어두고 싶음에서 비롯된 충동.
.dice 1 4. = 4 1. 과거를 환상으로! 2. 숨겨진 진실을 한 번! 3. 무지개를 토해보자! 4. 동물의 귀와 꼬리가 뿅!
넋을 경가로 빗대는 것에서 시작하노니 너른 거학은 운명이며, 운運의 넋은 노를 쥐고 갈피를 잡아 섬이라는 거학의 항로를 개척하고, 때때로 몰아치는 너울은 신의 안배요 명命이라는 정해진 항로로 이끄는 성질이며, 깨달음은 섬으로 빗대리라.
아회의 경가는 수면 위에서 중심을 유지하고 있으나 몇 번의 너울질에 깎이고 부식되었다. 그러나 무뎌졌기 때문에 무감하되 평온하였다. 부식된 틈새로 바닷물 차고 있음을 알고 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가라앉지 않기 위해 노를 저어도 물은 차오를 것이고, 안배할 섬은 선택받은 자에게 존재한다.
그는 공교롭게도 섬을 선택받은 자가 아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해저에 앎이 있으리라 선택받은 자였지.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저곳에 있으리니.
두려워 말라.
*
발을 치고 벽난로의 불도 꺼버린 암실 속, 유일하게 일렁이는 촛불의 빛을 한참이고 쳐다본다. 촛농 죄다 녹아 곧 꺼질 불은 마지막 생을 발악하듯 몸 열렬히 불태우고 있었다.
저것은 삶이다.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삶이자 목표이다. 그리고 이젠 자신의 삶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다르니 이는 서로가 타인과 다름없노라. 촛불은 결국 꺼지고 어둠만이 남는다. 비로소 이것이 나다.
아회는 눈을 감았다. 평소라면 다시금 과거의 삶을 빗댄 촛불을 호위가 켜주었겠으나 이젠 삶을 부여하여 묵묵히 제 할일을 하러 갔기에 캄캄한 어둠과 싸늘함, 정적만이 느껴진다. 아회는 그 사이에서 평온을 느꼈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섬으로 갈 자는 해저 아닌 섬으로 보냈어야 했고, 부질없는 바람에 애태우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있는 것이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있으리라. 이곳에 있는 것과 그곳에 있는 것이 차이가 있다고 보는 자는 영원히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걸으리라. 참된 마음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으니, 그곳은 이곳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곳이 이곳과 차이가 있다고 보는 자는 영원히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걸으리라.
우파니샤드, 심의서라고도 불리는 힌두교의 경전 중에서 발췌한 글이에요.
죽음, 사후세계에 대한 깨달음의 글귀이지요. 저도 이제 막 읽어가는지라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 부분에서 아회의 잿더미 사상에서 아주아주 큰 영향을 받았답니다.🤔
>>66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짤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철학은 늘 지성을 시험하지만 그만큼 흥미롭고 유익하죠! 아아니 그렇게 기습 칭찬하시면 제가 좋아할 줄 알고!!!!11 어케 아셨지!!!!🥰☺ 히히히 감동받은 만큼 유현이 운동 시키고 싶어질 정도로 좋아요(유현: 왜...?)
>>667 목화님을 위해 먹기 싫은 걸 먹어주다니.... 아회는 아버지구나......(?)
>>668 (실시간 능지이슈 무말랭이주) 흥미롭고 유익하며... 가끔 상반되는 주장을 볼 때마다 누구 철학이 옳은지 배틀하는 것 바라보는 게 즐겁지요~(?) 저는 기습 칭찬마랍니다!! >:3 이 어장 사람들을 갑자기 칭찬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유현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참에 유현이도 운동을 하는 거예요...😇
아회: 체력 단련은 어떠하니. < 나만 당할 수 없지 마인드
아버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엇이든지 드셔주는... 그거 냅둬 아빠 주게...의 아빠를 맡은 아회랍니다(?)
인간의 혼백(넋): 작은 배(경가) 운명 전체를 아우르는 것: 바다(거학) 노와 노질: 혼백을 이끌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인간(운運) 너울: 신이 정한 운명으로 이끌고자 하는 성질(명命) 섬: 인간이 직접 종착할 수 있는 인생의 목적지(꿈, 장래희망, 미래의 개척 등) = 노질을 통해 경가를 이끌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희망적인 선택지 해저: 노질로는 선택할 수 없고 너울로만 선택되는 흐름 = 아회의 시점으로 설명할 경우 귀기 무 씨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그 죄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전체적인 삶.
>>680 (뒷북 썰 후루룩) 사람의 삶과 운명의 비유..... 사실 처음 읽었을 때부터 너무 아름다워서 입을 떡 벌리고 말았어요☺ 이렇게 써 두니까 문학지문 분석같기도 하고... 아회주의 글이 그만큼 유려하다는 뜻이겠죠?😏 이제 이거 캡쳐해 놓고 달달 암기해서 분석해야지~
>>686 꺄 아 악!!!!!!!!! 으아아악 귀여워!!!!!!!!!!!! 귀여워서 죽을래!!!!!!!!!!!! 이 아기고양이 누구죠??? 우쭈쭈 귀여워라~☺(그리고 궁기에게 끔살당하는데....) 우웃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해,,, 어떻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괴롭힐 수가 있지........ 무씨 사람들 너무하다....🥺🥺🥺
오....... 아회는..... 아회가 생각하는대로 정말 인생이 자기 게 아?니네요 오...............🤦♀️
그그그그리고... 사실은요, 처음엔 티베트 경전과 북부 태생의 영향을 받아서 설산으로 비유하려 했고 실제로 잠들기 전까지 쓴 글은 설산을 비유로 뒀는데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본 바다와 조각배가 아름다운 나머지...👀 사람 운명이 망망대해란 말도 있기도 하고요~😏 ((진짜 쓸데없는 tmi))
"형님. 저희 류 가에서. 아니. 사실 이 땅 전체에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류 가에서 가장 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장 쉬운 것 말인가요? 글쎄요. 문서의 필사?" "아닙니다. 가장 쉬운 것은 바로 '죽음'이지요." "아. 아... 그런 의미였나요..." "하하. 예. 그럼 반대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장 어려운 것 말입니다." "반대라면. 죽음의 반대니까... 혹시." "...예. 적어도 저희 류 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는 것'. 정확히는-
'삶을 허락 받는 것'입니다."
빌어먹을 인생. 빌어먹을 운명.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이여.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다. 화가 온 다음엔 복이 온다는 의미를 가졌으나 복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는 정 반대의 의미도 가진 말이다. 그런 양면을 가진 격언이지만. 온화의 인생엔 항상 후자의 의미로만 쓰였다. 가장 찬란할 시기에 끌어내려져 바닥을 나뒹굴게 하는 일 반드시 생기곤 했으니까.
바로 오늘처럼.
하 사감의 방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제 방으로 돌아오니 문 밖에서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다. 본능이 경고하는 무언가 있었다. 문을 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가 제 방이고 그 안에 제 물건 다 있는데 들어가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문 앞에서 머뭇거렸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날의 오붓한 시간이 긴장 꽤나 늘어뜨려 준 덕일까. 설마 죽기야 하겠냐며 문 벌컥 열어제꼈다. 그러자 처참한 방 안 모습 한 눈에 들어왔다.
"...으."
방 안은 경면주사 갠 물 가득 넣은 주머니를 터뜨린 듯 사방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군데군데 여즉 마르지 않아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소름 끼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한 철냄새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꼴 밖에 내보일라 얼른 문 닫고 들어온 온화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 이걸 언제 다 치운담. 옷은 또 언제 다 빨고 이불은 언제 새 것 가져오나. 이것 빌미로 그의 방에 하루 더 머물러볼까. 애써 그런 생각 하며 맨발로 붉게 물든 바닥 밟았다. 그러자 그 순간. 온 방안의 붉은 물이 방 한 가운데 바닥에 모이며 거대한 글자 만들어냈다.
굵고 단호한 획의 단 한 글자.
- 歸 -
부탁도 권유도 아닌. 지극히 간단명료한 명령이었다. 그래. 명령. 일향 손에 서신 들려 보낸 후로 아무 말이 없길래 이것도 그냥 두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아닌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당장 본가에 오라 다그치는 것 보면.
"아."
가기 싫어어어...
온화 학당 들어오고 처음으로 집에 가기 싫어졌다. 항상 하루라도 더 기숙사 밖에 있고 싶었는데. 이제는 정 반대가 되어버렸다. 가기 싫다.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예상이 되는 이상. 더더욱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러나- 거의 울상인 얼굴로 글자 바라보다 손으로 목 쓸어내렸다. 하얀 목 중간을 정확히 가로지르는 검은 띠. 살갗인 양 착 달라붙었으면서 만져보면 우둘투둘한 표면 선명한 그것. 제가 류 가의 사람 임을 매 순간 떠올리게 하는 그것 있는 한 이 부름에 응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쯧!
눈 감고 혀를 찼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 내려 희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주먹 쥐어 바닥의 글씨 향해 내리쳤다. 단단한 바닥에 뼈가 부딪힌 듯 둔탁한 소리 났지만 글씨는 그대로였다. 절절한 손 무시하며 눈을 떴다. 흠집조차 나지 않은 글씨 노려보았다. 그대로 있으니 저를 놀리듯 서서히 증발해 사라져가기 시작한 글씨 다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다가 입고 있던 옷 찢듯 벗어 그 바닥에 내던졌다. 입술 뜯어낼 듯 깨물며 분 삭혔다. 손의 얼얼함 겨우 가셨을 쯤. 평소와 같은 옷 재차 걸치고서 거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오후쯤 기숙사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땐 저녁해가 한창 저물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저녁식사 시간인지 요란하게 대문을 넘어도 마당이나 마루에 사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마루에 올라가지 않고 마당 빙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가주의- 아버지의 집무실로 곧장 이어지는 길이었다. 여미지 않은 두루마기 크게 펄럭이며 성큼성큼 걸어가 집무실 복도에 다다르자 거의 던지듯 댓돌에 신발 벗어던지고 복도에 올라섰다.
이럴 때는 큰 키도 긴 다리도 좋다. 한 걸음에 복도 가로지르고 한 걸음에 집무실 문 열어제껴 성큼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 거 계시ㄴ윽!"
경박함을 넘어 불경한 태도 맞이하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아버지의 농 섞인 말이 아니었다. 문턱 넘기 무섭게 안쪽으로부터 금줄 날아왔다. 불길하게 새빨간 금줄이 팔과 다리 감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 거의 자빠졌다. 우당탕 요란스럽게 넘어지고서야 뒤집혔던 눈 올바르게 돌아오는 듯 했다. 부딪혀 얼얼한 턱 들어 눈 크게 뜨니 그제야 집무실 안이 제대로 보였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경거망동 하느냐. 류 온화."
아버지 온일은 가주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평소 잘 모이지 않는 어르신들- 제게 할아버님 되는 전대 가주와 연선화홍의 우두머리, 공방의 제 1 철장님을 비롯한 가문 내 각 분야의 머리 되는 분들이시겠다. '이런 일'이 생길 때에만 한 자리에 모이는 류 가의 윗선. 열 명 남짓 되는 그 분들은 마치 기다렸단 듯 자리에 앉아 바닥에 엎어진 저를 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제게 느긋한 타박을 한 사람은 할아버님이셨다. 환갑을 훌쩍 넘기고도 정정한 모습의 그 분은 무기질적인 눈으로 그에 버금하는 서늘한 시선을 주고 계셨다. 아니. 그 분 뿐일까. 그 자리에 앉은 전부가 그런 눈으로 저를 보았다. 아버지조차도.
"...저 하나 보겠다고 이리 모여 계신데. 그냥 들어오면 되겠습니까? 제 성미 잘 아시는 분들이 왜 그러실까." "하하! 녀석. 갈수록 입만 사는구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혹여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전혀 유쾌하지 않은 웃음 소리를 내며 말한 분은 연선화홍의 우두머리이자 큰아버지셨다. 그 분은 그렇게 말하고 부적 한 장을 제게 날렸다. 붉은 부적이 저를 옥죈 금줄에 착 달라붙자 손으로 당기는 시늉을 하여 그 분들 한 가운데로 끌어당겨졌다. 그대로 바닥을 긁으며 끌려왔기에 금줄 메인 몸 곳곳 쓸려나가는 감각 선명했다. 여린 살갗 벗겨지는 쓰라린 통증에 끌려오고도 자세를 취하지 못 하자 다시금 억지로 일으켜졌다. 뒤로 한 번. 옆으로 한 번. 가차없이 휘둘린 끝에 어찌어찌 앉는 꼴 취할 수 있었다. 과도한 처사에 아파하기보다 분으로 씨근대며 고개 치켜들자 매서운 시선들이 재차 제게 꽂혀들었다.
"류 온화."
그 속에서 아버지가- 가주님이 입을 여셨다.
"이리 부른 이유. 네가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글쎄올시다. 무슨 말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ㅈ"
짜악!
아버지. 그 단어 끝나기 전에 혀와 입술 씹히며 고개 팩 돌아갔다. 얻어맞은 뺨은 금새 벌겋게 물들며 부어오른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숨 추스르는 제 귀에 낮고 묵직한 목소리 들렸다.
"네 이런 자리 오랜만인지라 예의범절 죄 잊어먹은 모양이구나.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으냐." "...아닙니다. 가주님." "그래. 그럼 이제 말 해보거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그런 짓. 그런 짓이던가. 제가 한 것은.
"제 나이 정도면 반려 맞이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제가 직접 반려감 찾아 맞아들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잘못입니까?"
온화 그 말 하며 다시 뺨 날아올 것 각오했다. 하지만 뺨 갈기는 감촉은 없었고. 더욱 냉랭해진 목소리 만이 들려왔다.
"네 나이면 충분히 혼인할 만 하지. 헌데 누가 너에게 그것을 허락했지?" "......" "누가. 너에게. 졸업 이후의 삶을 허락했느냔 말이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짜악!
한 번 갈겨졌던 뺨이 한층 더 붉어졌다. 두 번 씹힌 입술에선 피가 흘러 턱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쿨럭! 밭은 숨 기침으로 뱉어내니 붉은 침 튀어나왔다. 온 몸이 묶여 닦지도 못 하고 침이며 피며 질질 흘리는 제게 하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건만. 어찌 그런 불상사를 저질렀느냐." "불상사... 입니까? 계집으로 태어나. 마음에 품은 분의 반려 되는 것이?" "네가 그냥 계집아이였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 허나 너는 아니잖느냐." "......" "네 목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아닙니ㄷ으큭!"
쿵!
금줄 앞으로 홱 당겨지며 바닥에 짓눌린다. 다시금 엎어진 제 위로 호탕한 큰아버지의 무거운 일갈 날아든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리 굴었다라! 그러면 아니되지. 온화야. 너는 지금 살려두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즉 쳐냈어야 할 목을 그 금주 하나로 붙여주고 있는 것이야. 헌데 그것 무시하고 이토록 방자하게 군다? 당장 그 목 떨어뜨려주랴?" "윽..." "그 날 그리 된 순간부터 너는 죄인된 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죄인이지! 네 나이 너무 어려 봐주었던 것이 화근이었구나. 더 미련 갖기 전에 이 자리에서 끝내주마. 본래 끝났어야 할 시기 고작 1년 당겨졌을 뿐이니. 너무 원망 말거라!"
한없는 일갈 하시며 큰아버지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붉은 장속 차림으로 아끼는 검 뽑아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 제 두 눈에 똑똑히 비쳤다. 아무도 막지 않는 것도. 아버지조차 싸늘한 눈으로 관망하시는 것도. 이윽고 바로 지척에 선 큰아버지가 검 치켜든 순간. 내려치기 직전. 간발의 차로 제 몸 뒤로 내빼었다. 꼴사납게 굴러야 했지만 지금 그런 추태 생각할 틈 따윈 없었다. 당장 여기를 벗어나 뛰쳐나가야 했다. 그러나 다시 금줄에 붙들렸다. 이번엔 벽으로 내던져지며 부딪힌 충격과 또다시 옷 위로 파고드는 금줄의 고통까지 느껴야 했다. 눈 앞이 핑 돌아 바닥에 널브러져 숨만 겨우 쉬고 있으니. 큰아버지 다가와 직접 제 멱살 쥐어 들어올리셨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자리로 던져지고. 재차 뱉어진 피가 바닥 적신다. 또 도망칠 여력은 없었기에 가까워지는 큰아버지의 검을 보고만 있어야 했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것을 멈추었다.
"그 쯤 하십시오. 상일. 오늘은 하문하는 자리이지 처형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 한 마디에 큰아버지는 군말 없이 검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가 앉으셨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의 그 자세로 돌아가 처음의 그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큰아버지 뿐만 아니다. 이 방 안의 모두가 그랬다. 평소 얼마나 살가웠던. 다정했던. 친절했던. 그런 것 일절 없이. 그저 저를 일개 죄인으로 보는 시선 뿐이었다. 어쩐지 웃고 싶어졌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반항할 기력도 없이 숨만 쉬며 늘어져 있으니 아버지이자 가주님의 목소리가 말한다.
"류 온화 듣거라. 네 잊은 것 없고. 스스로 불상사 일으켰음 익히 잘 알고 있으니. 이후의 대처 또한 잘 하리라 여기겠다." "...대처... 무엇을...?" "불상사로 인해 생긴 연 끊는 것. 그리고 혈육을 제외한 주변인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제 낭군님도, 벗도, 지인도, 전부... 말입니까...?" "그래. 헛짓 할 생각은 말거라. 네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보고 받고 있으니." "...흐."
흐흐. 흐흐흐흐흐...
일방적인 명령에 그제야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그렇구나. 그마저도 모두 당신네들이 허락했기 때문에 용납되었던 것이구나. 저의 모든 말. 모든 행동. 모든 행보가. 스스로 일구어낸다 여겼건만 전부 당신네들 손바닥 위였기 때문에...
"...이럴 것이면 그 때 죽이지 그러셨습니까... 그 날. 그 때. 제 눈 돌아 미쳤을 적 쳐내셨으면 좋았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저를 살려...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시는 겁니까? 제가 이렇게 된 것... 원해서도 아닌데..." "실험이었느니라. 전대의 기록 중에도 너와 같은 사례는 없었으니. 필히 죽을 숨이라면 아깝지 않게 써야 하지 않겠느냐."
방금 말한 것 누구였던가. 할아버님? 아니면 다른 사람? 모르겠다. 제게 들린 말의 의미 만이 새삼스레 명치를 파고들었다. 견딜 수 없었다. 너무나도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그래서 천천히 혀를 잇새에 물고 남은 힘 끌어모으려고 했다.
그러나 툭- 하고 뒷목 치는 감각과 함께 의식 잃었다. 흐려지는 시야 속 마지막은 제게서 고개 돌린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무슨 짓이냐. 일향."
실성하기 직전의 온화 기절시킨 인물은 일향이었다. 온화가 보지 못 했지만 일향과 그의 의형제는 처음부터 방 안에 있었다. 방 한 구석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있다가. 온화 혀 깨물려는 낌새 느껴지자마자 일향 달려가 기절시킨 것이다. 명령하지 않은 행동 저지른 가문원 향해 가주가 추궁하자 일향 주저없이 대답했다.
"하문하실 것 다 하셨고. 명하실 것도 다 하셨지 않습니까. 아니면 기어코 이 아이가 스스로 혀 깨물어 죽는 것을 보려고 하셨습니까?" "기진맥진하여 제대로 물기나 했겠느냐. 혀야 끊어지지만 않으면 될 것을." "만에 하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가주님."
일향은 단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며 기절한 온화를 챙겼다. 손수 금줄 풀어주고 목 꺾이지 않게 받치고서 가주를- 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온일은 일향의 행동 지켜보다 담담히 말했다.
"데려가거라. 얼굴만 성하게 해서 보내." "예."
허락 떨어지자마자 일향 일어나 그의 의형제와 함께 온화 데리고 가주의 집무실 나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나가는 뒷모습 끝까지 지켜보던 온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향과 그의 의형제 혜월은 온화를 본가의 방으로 옮겼다. 한동안 주인 없던 방에 조용한 소란 일며 혜월이 다급히 방과 바깥을 오갔다. 약과 부적과 깨끗한 수건과 물 등등 필요한 것을 가져오면 일향이 빠르고 적절한 처치로 온화의 상처를 손보았다. 뺨은 피부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고 금줄이 스친 살갗은 빠짐없이 긁히고 쓸려 진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사내아이도 아니고 여자아이인데. 흉터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닦고 약 바르고 치유를 돕는 부적을 붙이고 있으니 뒤에서 우물쭈물 하는 기척 느껴졌다.
"......" "하시고 싶은 말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형님." "...그.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류 가도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이라 이것이지요."
막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기절한 온화가 약이 쓰라린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일순간 공기 얼어붙기에 충분했다. 잠시 그대로 시간이 지나고. 일향 멈췄던 손 다시 움직이며 말했다.
"일전에 들으셨지요. 저와 형님 맺은 금술의 설명. 그 부작용도 기억하십니까?" "광증...이요...?" "예. 그겁니다. 온화는 열 두살 적 이미 광증이 터진 아이에요. 그러나 불안정한 광증이기에 죽이는 대신 역으로 짠 금주를 걸어 얼마나 버틸지 지켜보기로 했답니다. 기한은 학당 졸업할 때까지. 금주가 통하는 것은 대략 스무살까지라 아슬아슬한 기한까지 라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그 전에 금주가 듣지 않게 되거나 성년이 되면 가문에서 금주를 풀고 광증이 새로이 터지기 전에 처형를 치를 예정이었지요." "그런... 가주님의 자식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런 처사를 한다고요...?" "여기 류 가에서 누가 누구의 자식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인조차 쓸모가 있으면 거두지 않습니까. 그러나 광증은. 터진 순간 누구든 그저 죽어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온화도 다 알고 있었지요. 다 알고. 얼마 안 되는 시간 제 마음대로 살다 가려고 했었어요. 미련이 남지 않게. 미련 남을 것은 하나도 하지 않으려 했건만." "그... 너무한..." "형님은 그런 아이에게 죽음을 그리 쉽게 말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미련을 가지라고."
혜월은 숨이 턱 막혔다.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그의 말에 웃으면서도 어딘가 씁쓸함 떨치지 못 하던 온화의 얼굴이 떠올라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일향은 조용히 사용한 물건들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죄책감을 가지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그 한 마디에 아주 약간이라도 책임감을 느낀다면. 금주를 대신할 저주 만들겠다는 말을 지킬 수 있으셨으면 합니다." "알겠... 습니... 흑..." "예. 처치는 다 되었으니 저희는 이만 나가보죠. 술이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ㅇ... 예..."
두 의형제는 발소리조차 죽이며 온화의 방을 나갔다. 곱게 종이 바른 문 열리고 닫힌 후 사람의 기척 서서히 멀어져 간다.
창문조차 열지 않은 방 안엔 죽은 듯한 침묵만 흘렀다. 정적이 한 겹 두 겹 먼지처럼 쌓여가고 있을 때. 아주 아주 희미한 소리가 미약하게 같이 깔렸다. 눅눅한 물기 섞인 소리가 소리 없이 구르는 물방울과 함께 한참을 이어졌다.
>>694 (아아니 이 사람 센스가...? 후루룩!) 히히히 어디가세요 21세기의 이상~ 한국의 셰익스피어님~😏
어른호랑이인 지금도 냥냐리할 때가 있는데 어렸을 때는 더 야옹이 같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ㅖ??? 아 아니 근데 왜 결론이 그렇게 음~ 원래 이럴 땐 새로 만들어서 주는 게 정석이지만! 오랜만에 이걸 슬쩍 꺼내봐요...👀(situplay>1596848084>340) 같은 픽크루로 만든 거라서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말이죠...👀 앗 이제 보니 앞머리도 같네요? 장발남은 어렸을 때부터 앞머리를 이렇게 내리는 레이더가 있는 건가(?)
설산.... 설산도 웅장하고 아름답죠.... 바다는 장엄하고도 잔혹한 운명을 표현하기엔 적격이라 지금의 바다 비유도 탁월했다고 생각해요! 히히히 tmi도 맛있다.... 언제나 풍족한 썰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으 아아 아 아 아 악!!!!!!!!!!!!!!!!!!!!!!!!!!!!! (독백 다 읽고 머리 박살내는 아회주) 결국 온화도 쓸모가 있는 자원 취급이었기에 살렸던 거냐고요... 실험체나 다름 없는 삶에다가 일거수일투족 감시 당하듯 살았냐고요... 삶까지 정해지냐고요... 축제 가득하고 즐겁던 삶이 다 가짜 같아서 악악 자기들 금술을 왜... 왜... 악악악 온화야... 온화야...😢 이런 삶을 살아오니 당연히 술과 담배로 버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화야... 하 사감님과 백년해로를 해야 하는데...
와중에 연을 끊으란 말도 참... 참.............. 여기는 천공섬이 맞구나 싶네요... 정상적인 집안이 단 하나도 없어....(울다 쓰러져요)
냥냐리 ㅋㅋㅋㅋㅋㅋㅋ 어릴 때는 높은 곳만 보면 높아! 하고 올라갔다가 못 내려왔대요~😏 지금은 매달리고요...(?) 가계 도술로 변신하면 우다다도 많이 했을 것 같고... 꼬리펑도 많이 했을 것 같고... 보다 못한 가주님이 야생성을 제어하라며 뒷목 잡고 들어올리면 묭... 하게 있는거죠...😏 흐아악 귀여워 무표정에 가깝더라도 사랑스러워 와랄라 뽀뽀해주고 싶어요~!!!!(무자비한 입술 공격!) 앞머리가 같아요! :0 ㅋㅋㅋㅋ장발남 특징... 앞머리를 애매하게 내림...
저야말로 늘 어울려주셔서 감사한걸요~ 흐흐 바다 좋아.. 바다여행... 가고싶다...(갑자기
>>717 결국 류 가도 천공섬의 사람들인거지~ 필요하다면 쓸모가 있다면 자기 식솔들마저 도구로 쓰는 매드-사이언틱한 류 가문~ ㅎㅎㅎ 그~ 예전에 온화가 수일이한테 화내던 독백 있었지~? 수일이 유독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어서 끝내 온화 빡쳐버린 독백... 학당의 일도 모두 보고 받고 있다는 아버지 가주님의 말... ㅎㅎㅎㅎㅎ.... (도망!)
夏사감이 움찔 몸을 굳혔고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부러뜨렸습니다. 그의 앞에서 英사감이 직접 만든 새 한 마리를 쫓던 남자도 무언가를 본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 우리 아우, 내가 왜 그렇게 불안한지 맞춰볼까ㅡ? ' ' .... '
남자가 친근하게 자신의 어깨로 어깨동무하듯 감싸오자, 夏사감이 질색하는 표정을 쥐었습니다.
' 역린으로 대충 상황은 알거든? ' '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잖아 ' ' ...... ' ' 그러니까 인간을 왜 반려로 맞이했어, 응?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몰라? ' ' 형님. '
허공을 보며 조잘조잘 떠들던 남자는 싸늘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夏사감을 올려다봤습니다. 우리 아우가 많이 화났네에ㅡ 하고 말끝을 늘여 웃던 그의 두 손에 잡혔던 새는 다시 방을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새를 손에서 놓아준 채, 천천히 夏사감이 앉은 마호가니 책상 위로 기듯이 올라갔습니다.
' 금주라는 거에 얽매여 있는데 가엾네 ' ' 하나도 가엾게 여기지 않는 거 다 알거든. ' ' 아우야. ' ' 왜. '
夏사감이 자신의 책상을 타고 넘어 온 남자를 올려다봤습니다. 싸늘한 표정이, 오히려 굉장히 화났다는 것을 말해주듯 夏사감은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 저 인간들 있는 곳 조금만 있으면 알 거 같은데. '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 나 인간들 많이 보게 해주라. ' ' 먹으려고? ' ' 우리 아우가 예전부터 내던진 일을 대신 해주겠다는 거지, 형제 좋다는 게 뭐야. '
남자의 말에 夏사감이 그를 올려다봤습니다. 남자가 웃었고 그의 뒤에 날아다니던 새가 꼬리에 휘감겨 무자비하게 책상 위로 던져졌습니다. 새가 파르르, 떨다가 그대로 싸늘한 주검이 되었습니다.
' 사감 자리는 참 괴롭겠다. 그치? 원래 주어진 일도 못하고. 옛날에는 인간들 많이 죽이고 많이 먹었는데. ' ' ...... ' ' 감히 우리도 인간들의 주술로 묶을 수 있다 믿는 게 참 어리석어, 그렇지? '
남자가 夏사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거의 안기듯 몸을 쭉 내밀었습니다. 夏사감은 제 형이 뭐라 지껄이는지 들어나보자, 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응시할 뿐입니다.
' 인간은 참 오만해. 그리고 참 잘 죽어. ' ' 본론이 뭐야, 형님. '
夏사감의 물음에 남자는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습니다.
' 옛날처럼 인간들 처형하면 되잖아? 네 할 일을 내가 친히 대신 해줄게. 난 인간을 먹고 너와 네 반려는 위험이 사라지고. 반려에게도 좋은 거 아니야? 금술 정도야, 막내에게 잠가버리라고 하면 되는 문제니까. 와. 옛날에 태초의 어머니가 읽어주던 동화 같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되는 거네? ' ' ......... '
남자가 좋을대로 떠들며, 제 꼬리에 묻은 피를 핥았습니다. 夏사감은 절대로 그 말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주 옛날부터 제 동생들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억... 억떡개.. .억떡개 이런 잔혹한일이잇을수잇나요..........🥺🥺🥺 시한부 운명을 암시하는 묘사는 각오할 수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죽게 될 거라는 건 흐어어어어엉 술담배 펑펑하고 망나니 라이프 살던 온화 심정이 이해가 되고요... 어떻게 정상적인 집안이 하나도 없어22
>>714 장발 남캐 최고!!!!!!!! 아 신난다~ 오늘은 무슨 날일까요 어린이의 축복이 끝이 없네....😇
>>718 ㅋㅋㅋㅋㅋㅋㅋㅋㅋ히히히 어디가세요 비운의 천재 예술가님~😙😙 꺄아악!!!! 진짜 고양이잖아 사랑스러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준서씨는 인.쓰.시지만 아회가 들어올려지는 장면만큼은 참을 수 없이 귀엽고 훈훈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뽀뽀하려고 하면 바로 도망갈 거래요~(유현: 침 묻는 거 싫은데.)(?) 어렸을 때는 머리 짧았지만 저 앞머리에서 장발남의 기미가 보였던 거임(?)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음을, 내가 가장 처절한 순간을 그 눈에 찔러박아 다시는 기억에서 잊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노라고. 그리고 맥이 뛰는 목을 꼭, 제 손으로 찢어내겠다고. 그렇게 잘린 목을 안고 내 겪은 일 이제 들리지 않을 뭉개진 귀에 속삭이겠노라고. 역시 형님은 다른 사람에게 사냥당하기엔 아까운 맹수이니 내가 사냥하여 가죽을 벗겨야지요.
오후 해 훌쩍 넘어간 이른 저녁 즈음. 온종일 별사탕만 몇 번 까먹은 것이 전부다보니 제아무리 기분 우울해도 배는 고파왔다. 더불어 술도.
"...하-"
술 줄이자고 한 것이 엊그제인가 그랬는데. 어찌하여 세상만사 저를 마시게 하지 못 해 안달일까. 한참을 더 가만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늘어져있던 몸 천천히 일으켰다. 소매 없는 상의와 짧은 하의 덕에 드러난 팔다리는 곳곳이 붕대와 부적 투성이였다. 헐렁한 상의 안으로도 약 바른 부적 힐끔 보인다. 특히 양 팔뚝. 윗팔뚝 중간이 크게 다친 듯 두터운 붕대로 둘둘 감겨있었다. 팔 그러하니 몸 일으킬 적 침대를 짚기만 해도 앓는 소리 절로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드러누워있으면 누가 밥을 먹여주나. 술을 넘겨주나. 다 제가 해야지. 그렇고말고.
일어나서 애용하는 소반 끌어오고. 주섬주섬 방구석에서 술이며 다과며 집어오다 문득 그의 생각이 났다. 혼자 마시면 쫓아와서 성질 내는 거 아닐까 몰라. 하지만 찾아갈 수는 없었다. 이 꼴 된 몸을 무슨 낯으로 보여주나. 혼자 피식대며 집에서 나올 적 일향이 챙겨준 다과 꾸러미 열어보았다. 떡과 강정. 유과와 약과. 곶감과 다식. 제가 그나마 먹는 것들로 참 알차게도 싸주었구나 싶다. 분명 알았겠지. 돌아가면 또 이러고 있을 것을. 이러다 술만 주구장창 들이부을 것을.
침대에 기대 앉아 가만히 소반 위 다과 꾸러미 보다가 슬쩍 일어섰다. 어디 부를 사람이 그 밖에 없던가. 인연이라면 더 있지 않더냐. 그 몸 위에 옷을 덧입을 수는 없으니 적룡의 두루마기만 어찌어찌 걸치고 비실비실 밖으로 나갔다. 밖이래도 기숙사 밖은 아니었다. 그저 층수만 다른 제 방 아닌 방 찾아갔다.
똑똑.
항상 기차게 두들겼던 문 오늘은 얌전히 두드렸다. 제 왔음 기별하고. 말을 하려니 목이 잠겨 크흠 헛기침 두어번 해야 했다. 그럼에도 낮게 잠긴 목소리에 어쩌겠나 하며 말을 했지.
"무 오라비야- 거 안에 있소? 어째 얼굴 보기 힘들구만- 내 저번에 그리 했다고 삐진 건 아니지요. 응?"
평소처럼 농 꺼내고 낄낄 웃으려고 했지만 나오는 건 마른 목 간질여 나오는 기침 뿐이었다. 밭은 기침 두어번 하니 목에서 비릿한 맛 올라온다. 기침 몇 번 했다고 눈 앞도 어질해진다. 아이고. 소리 절로 나오며 한 손으로 문 짚고 섰다. 오래는 못 있겠구먼. 조용히 숨 고르고. 말 조금 더했다.
"내 나가기는 싫고 그냥 있자니 심심하여 놀아달라 왔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이. 내 방에 가 얌전히 쉴 터이니. 오라비도 푹 쉬시게."
정말 별 일이었을 것이다. 왠일로 얌전히 문 두드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간 것은. 그 말 농 아닌 듯 온화 곧장 뒤돌아 다시 비실비실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홀로 마실 준비나 하고 있었다.
그날, 추 사감의 수업이 끝나고 정확히 얼마 정도를 더 파묻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땅을 느끼고 하나 되란 이유가 있었으니 납득은 할 수 있었으나, 그래서 결국 그럴싸한 깨달음 얻었느냐 하면 고되기만 할 뿐 그다지.
안뜰 한구석. 유현은 가꾸어진 잔디밭을 밟고 들어가, 적당히 자란 작은 나무 뒤편에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이런저런 괴상한 짓 종종 하는 인간이니 이런다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지만, 오늘은 웬일로 평소엔 어질어질하다며 쓰지 않는 안경까지 갖춘 채였다. 무엇을 하나 싶어 보자니 그가 땅바닥 내려다보면서 부적을 꺼낸다. 한 장도 아닌 여럿 꺼내고는 유현은 그것들을 한꺼번에 찢어낸다. 무엇을 하나 했더니 이번에 새로이 배운 도술을 시험해보려는 목적이인 것이었다. 좋게 말해 복습이고 달리 말하면 기껏 가꾼 화단에다 장난질하는 셈인데, 왜 굳이 안뜰에 들어와 이러냐 하면…… 연습해야겠다 생각한 당시 시점으론 산이나 공터보다는 여기가 더 가깝고, 걷기에도 편해서 말이다. 이곳 흙이 더 부드러운 듯하단 이유도 더하여 있었다. 찢어진 부적 손 안에서 조각조각 흩어지며 떨어져 내린다. 유현은 제 발밑 묵묵히 내려다보여 반응을 기다렸다. 해서, 결과는 어떻지?
실패다. 늘상 실패가 잦았던 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다시금 시도하려 하던 찰나였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도술에 열중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저 자가 인간 아니기에 발소리조차 없기 때문이었을까? 유현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지나칠 정도로 보통의 정도를 지킨 빠르기였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직감은 했지만 정말로 저 양반 버티고 있을 줄이야. 비교적 선명해진 상은 남자의 표정이며 눈길을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유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툭하면 절 먹겠다 말하는 자에게 어떤 태도 보여야 할지 조금 생각하는 것이다.
"연습을 도와준단 명목으로 제 고기를 요구한다거나 잡아먹으려 들지만 않는다면, 아니, 대가는 무엇이라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여하간 그리해 주신다면… 네. 기껍겠군요."
생각한 결과, 당장은 잡아먹지 않을 듯하니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정말 못 참을 정도였다면 자신이 눈치 못 채고 있었을 때 진작 잡아먹었겠지. 이 생각이 틀려 상대가 갑자기 돌변하게 된다면 그날로 죽는 것일 뿐이고. 어차피 이 세상은 험하게 생겨먹었으니 호들갑 떨어봤자 유난밖에 안 된다. 그는 쪼그려앉았던 몸 일으키고 상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줄 거냐는 양.
"배가 고픈지는 얼마나 됐나요? 혹시 당신은 영원히 허기에 괴로워할 운명이라거나, 인간을 주식으로 삼는 부류인가요? 절 쫓았던 이후로 아직 아무도 못 잡아 드셨나요? ……아, 이리 묻는다 해서 절 먹으라는 뜻은 물론 아니에요."
그리고 곧장 이것저것 따져 묻는다. 백룡은 본래 탐구열에 미친 족속들의 집합소다. 저 남자나 사감들 정체에 관해 의문 가진 지도 오래되었으며, 상대가 인간 아니며 저를 잡아먹겠다 날뛴 자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간에 수업을 빠져버린 주제에 징계도 받으러 가지 않고, 기숙사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문을 굳세게 걸어 잠근 뒤 목화를 재우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평소 같으면 호위라도 곁에 불러 담소라도 나누었겠으나 이제 호위는 곁에 없고 하염없는 침묵만 가득하다. 하 사감과의 대면에서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춘 사감과의 싸움에서 마주한 시선도 그러했고, 영 사감과의 대면에서 마주한 처지 또한 무감했으며, 용을 마주했을 때엔 기대하지 않기에 욕심도 내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앎이란 그러한 것이기에. 다만 앎이란 금세 번뇌에 빠지곤 하니 언제 또 흔들려 어리석게 경가의 노를 지어 도망치려 들다 다시금 너울에 휩쓸리겠지.
그러나 더는 두렵지 아니하였다. 굴러다니는 별사탕은 더 삼키지 않고, 이미 번쩍번쩍하게 닦은 지팡이를 기계처럼 멈추지 아니하며 닦기만 할 때였다. 아회는 느릿하게 입 벌려 중얼거렸다. "아둔한 것들." 비록 주체를 대지 아니하나 최근 있던 사건들로 추리하자면 단 하나로 직결되는 존재들이 있었다.
"……."
다만 샘솟던 것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시금 눈을 감는다. 불경한 생각은 해서도 아니 되는 법이요 행해서도 아니된다. 자신은 참아야 하는 존재고 외면해야 하는 존재이니 이는 방관하지 않으면 번뇌 이어지기 때문이라. 그러니 나는 행하지 아니하고 방관하리라…….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 돌리지도 않는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나지막이 들렸다 떨어지고, 목소리와 달리 익숙지 않은 밭은 기침과 말소리 멀어지며 발소리까지 들리지 않는 순간까지 침묵했다. 얌전히 돌아가니 세상 별 일이나 인간사에 신경 쏟아 무엇하나, 무시하면 되겠지. 한참을 그렇게 지팡이나 닦던 아회는 불현듯 손을 멈췄다.
"……하루도 가만 두질 않는군."
무시하면 될 것인데.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숙일 적 정돈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쏟아졌으나 한참을 그리 가만히 있다가도, 이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 지랄맞은 것이 한두 번이었나."
언제부터 자신이 그런 일에 주눅들고 살았다고 죄없는 것에게 침묵하고 자빠졌는지. 깊게 한숨 쉬며 자리에서 일어선 아회는 새것같은 지팡이를 짚었다. 긴 머리카락과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옷가지 주섬거리며 갖춰입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암실의 벽난로 타오르며 문 굳게 닫혔다.
***
유령과 같은 걸음은 평시와 같다. 잿더미의 유일한 장점은 무슨 일을 겪어도 같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 번 폭발해도, 그 이후 몇 번이고 찬물이 끼얹어져도 재는 재였다. 위태로움을 가릴 수 있는 방법을 알기에 늘 그렇듯이 초연함 유지하며 어느 한 곳에 도달한 아회는 손을 들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나다."
다만 잿더미라도 달라진 점이라면 당신에게 더 격식 차리지 않는단 점이요 이는 당신이 안을 들쑤셔 불티 본 탓이다. 시생이오, 문을 좀 열어주실 수 있겠소? 본디 그리 할말을 이리도 짧게 뱉고는 아회 덤덤하게 덧붙였다.
"화야, 내 나가기는 신수 탓에 글러먹었고 그냥 있기엔 난데없는 기침 소리에 잠 깨어버린지라 놀아달라 왔는데 혼자 재미보지 말고 문 좀 열어줄 수 있겠더니."
당신이 했던 언사 그대로 써먹으니 그 꼴 퍽 우습다만, 이 방법 아니면 문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이리 짓궂게 굴어버린다.
고작 복도 좀 걷고 계단 좀 오르내렸다고 숨이 차는 날 올 줄은 몰랐다. 아. 적어도 저번 수업 때 그리 뛰고 맞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보단 나았겠지. 덕분에 방 돌아오자마자 다시 침대에 엎어져야 했다. 푹신한 이불에 엎어지는 것 조차 뼈와 살 울려 괜히 눈물 핑 돌았다. 몸이 고달프면 마음도 쉬이 흐트러진다 하던가. 술도 다과도 다 꺼내놓았지만 먹을 기미 없이 그대로 침대에 다시 파고들려 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힐끔 눈만 들어 문 바라보았다. 제가 찾아갔을 때엔 숨소리도 안 들리더니. 안에 있긴 있었나 보다. 이번엔 제가 없는 척 아니면 자는 척 침묵할까 했지만. 더는 예의 차리지 않는 것. 제 말을 똑같이 돌려주는 것에 입 꾹 다물곤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알고 저러는 것이다. 정말 치사하지. 흘러내린 두루마기 휙 벗어 침대에 던져놓고 저벅저벅 걸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열 것이지만 괜히 그 앞에서 조금 뜸 들이다가 한 뼘 만큼만 열고 아회에게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치사하긴."
아. 다른 건 참아도 그 말은 했었어야 했나 보다. 그리 종알댄 후 방문 마저 열었다. 희미하게 경첩 맞물리는 소리 나며 열린 방에선 굳이 코를 세울 것도 없이 독한 약냄새와 진한 담배향이 진동했다. 그리고 아회의 예민한 코엔 선명히 느껴졌을 것이다. 짙은 두 향취 아래 숨겨진 비릿한 철내음을.
"내 기침으로 오라비 잠 깨웠다니 그것만큼 기쁜 소리도 없겠구려. 들어오소."
편히 들어올 만큼 문 열어주고 온화 앞서 안으로 슥 들어갔다. 창문은 열었으나 두터운 커튼 드리워 방 안 어둑하니 잘 뵈지 않겠지만. 바닥에 걸릴 것 없으니 걱정 말고 들어오라는 말 있었다. 휘적휘적 들어간 온화 앞서 차려둔 술상 앞에 턱 하니 앉으며 아회 향해 그런 말도 했다.
"대답 없길래 혼자 술잔 기울이던 중인데. 어찌. 오라비도 한잔 할 테요? 싫음 거 앉아서 안주거리나 먹든지."
아회가 예의 차리길 그만둔 만큼 온화 또한 방자하게 나갈 셈인지. 혹은 몸 아프고 정신머리 마땅치 않아서인지. 툭툭 내뱉듯 말하고 술 잔 두 개 소반에 올렸다. 한 손에 딱 들기 좋은 크기의 둥근 술잔은 어느 것도 아직 비어 있었다. 술병 역시 큼지막한 소주 됫병이 마개도 열리지 않은 채 옆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온화는 아회 보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기엔 별일 아닌 것 같던 일이 못내 거슬렸던 차다. 아니, 애초에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세상이 언젠 자신에게 이리 굴지 않았는지 괜히 유난 떨며 청승맞게 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럴수록 약점만 늘어날 뿐이다. 무너지는 것도 지금은 안 된다. 유령 같던 발걸음과 함께 문 두드릴 적에는, 이미 악착같이 무너지려는 자신을 속으로 채근하며 유예기간을 줘버린 지 오래였다.
문 앞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예민한 귀를 타고 들려온다. 아회는 얌전히 그 앞에서 기다리며 지팡이 위에 두 손을 모두 올렸다. 잠시간의 정적 뒤로 문이 한 뼘 정도 열렸을 때, 중얼거리는 당신의 소리에 아회는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었는데, 그런 의도로 한 번 고개를 까딱인다.
문이 열렸을 적, 아회는 자신의 감긴 눈을 희미하게 떴다. 남령초 태운 냄새는 익숙하지만 약 냄새와 비릿한 냄새는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각자의 생활이 있거니와 자신이 간섭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니. 다시 문 닫아버릴까 싶은 것도 한몫하였으리라.
"에잉, 만일 목화까지 깨었으면 경 치러 왔을 텐데 기쁘기는."
남의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형님의 방을 제외하면 육 년의 시간 동안 처음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아회는 이제 보니 몰골이 영 좋지 못했다. 머리도 묶지 못했고, 귀에는 난데없는 검은 술 달린 귀걸이 달려있으며, 눈 밑에 드리운 푸른 그늘과 더불어 옷차림까지 평소처럼 한복 차림이지 않았으니 소매 너르되 길고 허리춤 끈으로 동여매는 차림인지라 동방 어딘가의 복식 섞어둔 것만 같은 약식이었다. "실례하지." 어둑한 방이라지만 쉬이 들어서며 신발은 제대로 벗는다. 그제야 희미하던 눈 가늘게 뜬다. 술상 때문이다.
"……."
술. 입에 대본 적 일절 없고 예비함에 있어 의존과 흐트러짐을 경계하였기에 멀리하던 단어가 오늘은 퍽이나 가까이 다가온다. 아회는 잠시 가만히 서있더니만, 이내 자리에 털썩 앉으며 지팡이를 제 몸 옆으로 아무렇게나 내려두었다. 이 와중에도 한 가지 나은 점 있다면, 비록 격식 내려둔 언사였으나 앉는 자세만큼은 평소와 같이 예 차렸단 점이다.
"네 내가 술 마셔본 적 없음을 알면서도……. 그래, 한 잔 주려무나."
실로 의외다. 사건이라고 칭해도 좋다. 청렴하기로 소문나다 못해 무소유의 경지에 이른 것 아니냐는 천하의 무아회가 흔쾌히 대작하겠노라 하니 아마 내일 해는 서쪽에서 뜰 모양이다. 아회는 반쯤 눈을 뜨며 당신을 마주 봤다.
"……최근 기호품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고 말이오."
돌려 말하지만 뜻은 명료했다. 학당 일로 마음이 심란하다고. 서로 술잔 기울이며 대화하고 싶노라 청하는 목소리는 그제야 평온해졌다. 덤덤하지만 방금 전과 같이 어딘가 불온한 기색 없고, 평시와 다를 바 없이.
치사하다 하니 누가 할 소리냔 듯 고개 까딱이는 것이나 실없는 제 말에 실없는 소리로 대꾸하는 것이나. 전과 다른 것 조목조목 눈에 밟히니 그 날의 난리통이 새삼 대단했구나 싶다. 하기사 저도 마찬가지만은. 보이지 않게 눈 감았다 뜨며 한 손 들어 까딱 움직였다. 아회 방 안으로 들어오거든 그 뒤에 문 닫혔을 것이다. 끼익. 철컥.
"고 쪼매난 것 깨었으면 오지도 않았겠지. 아예 한 소란 내고 올 걸 그랬나?"
아회 보며 하는 말이었으나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 듯 혼자 낄낄대었다. 말 좀 했다고 그새 목이 풀려 웃음도 나오고 그런다. 언제는 뭐라도 넘겨야 소리 내고 그러더니. 십수년을 함께 한 제 몸뚱이인데도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목 재차 간질여지기 전에 웃음 그치고 방에 들어온 아회 보았다. 어둠에 눅은 눈은 굳이 좁혀 뜨지 않아도 아회 모습 온전히 담아내었다. 이제보니 평소와 다른 옷에 저- 귀에 단 것은 귀걸이인가? 어허. 별 일인 것은 저 뿐만이 아닌가 보다. 찬찬히 물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 것까지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까이 오니 눈밑까지 푸르스름한 것 보여 아이고. 보면 볼 수록 물어야 할 것이 늘면 늘었지 줄지를 않는다. 느슨히 이어진 대화에서 또한 그러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라 그러나. 한 번 해본 소리인데. 드시겠다면야 못 드릴 것 없지."
말투는 바뀌었어도 자리한 모습만큼은 변함이 없어 술 권해도 손도 대지 않을 듯 하더니. 선뜻 한 잔 달란다. 제가 그리도 기호품이라며 권할 적에는 학을 떼놓곤. 그래도 왜 그러는가 만큼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의미겠지. 그 잿더미이자 적룡에서도 현자라 불리는 아회조차 술 한 잔 걸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주변 소란하다는 것임을.
어차피 잔도 둘 놓았겠다 달리 준비할 것 없었다. 손바닥만한 팔각 소반 위에 풀어놓은 다과 꾸러미 조금 더 넓게 펼쳐놓고. 제 옆의 됫병 덥석 잡아 끌어와 뚜껑 열었다. 이익. 하고 뚜껑 돌릴 적 작게 소리 내었으나 못 열지는 않았다. 병에 들은 술 평소 향취 좋은 물건 찾아다니던 것과 달리 무색 무취한 맑은 소주다. 그저 한없이 들이키고 정신 놓아버릴 수 있는 술이었다. 역시나 답지 않게 두 손으로 병 받쳐 아회의 잔과 제 잔 번갈아 술 따르고 다시 옆에 쿵 내려놓는다. 작게 숨 내쉰 온화 손 그저 늘어뜨린 채 말했다.
"나한테는 물이나 다름 없으나 오라비에겐 제법 독할 거요. 천천히 드시게. 거 앞에 입가심 할 것 있으니 것도 같이 들고."
서로 잔을 맞대는 것은 하지 않을 셈인지. 아회 잔 들어도 온화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청하다면 손을 움직였을 수도 있지만. 첫 잔 그리 내어두고서 역시나 느긋하게 대화의 물꼬 한 번 틀어보려 하였지.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 천하의 무아회가 술까지 자시게 되셨나? 내 그리 들쑤신 후에 누가 또 부지깽이 들고 들이닥치기라도 하였소?"
낄낄. 웃는 소리 만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박하였다. 저 헐렁한 차림으로 삐뚜름히 앉은 것도 그러하고 말이다.
학당에서 목숨을 부지할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남았을지를 되새기면 저도 모르게 속내 뒤틀리기 마련이다. 뒤틀릴수록 일탈을 바라게 되고, 일탈을 바랄수록 오히려 차분해진다. 그리고 끝내 내린 결론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만인이 알 터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당신의 모습 보아하니 딱 그렇다.
"너도 참. 허튼 소리를."
대답 바란 것 아니었어도 툭 대꾸하곤 이전처럼 웃음뱉는 모습에 안도한다. 생각한 것보다 큰 부상은 아닌가, 혹은 참는 것인가, 글쎄. 알 수 없다. 정보는 부족하고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상이니. 자리에 앉자 긴 소매가 바닥으로 흐른다. 이를 가볍게 정리하던 아회는 손 다소곳이 모았다. 예 갖추는 모습과 달리 해 서쪽에서 뜰법한 발언 뒤로 상 차려지고 맑은 소리 들린다. 잔에 따르는 무색 무취의 액체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아회는 그제야 손을 들어 잔을 쥐었다.
"……고맙구나. 선뜻 잔 따라주어서."
거절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리 잔 따라주니 고마울 뿐이다. 다음 잔은 자신이 따르는 것이 맞겠구나 싶었으나 반 푼의 눈으로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든다. 또한 잔 맞대지 않길 바라는 것 같으니 얌전히 있는다. 지금은 분위기가 설익어 영 좋지 못하니, 무르익으면 자연스레 나올 것임을 알았기에 행하지 않는 점도 있다.
"……그래."
아회는 순순히 대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으나 누군가 부지깽이 들고 들이닥쳤음을 시인하니, 그날 크게 불 붙어버리고 졸업 전까지 오라비 노릇 하겠다는 약조가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입가에 잔을 가까이 가지다 댔을 적, 잠시 멈춘다. 아직 잔 마시지는 않는 탓은 도전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행위였을 터다. 아회는 심호흡을 하듯 한숨을 푹 쉬었다.
"……네 반려와 입씨름 한 판 붙었다. 그 이후로 춘 사감한테 듣도보도 못한 소리 듣고, 수업에서는 처음 보는 신수가 달라붙던지라 그 뺨 쳐올렸고."
와중에 당신의 반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인지, 하물며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안다는 듯 술술 이야기 뱉고는 술을 망설임없이 털어넣었다. 목으로 넘기기가 무섭게 비강을 타고 독한 증류주 내음 가득 느껴지며 속내로 독한 느낌 든다.
"으."
쓰다! 잠시 아회는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난생 처음 겪는 익숙하지 않은 맛이다. 다만 처음 술을 마신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각종 걱정이 너무 컸던 탓일까, 거부감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두 눈 온전히 뜨며 술잔 한 번, 당신 한 번 쳐다본다.
"틀린 데 없는 말씀이지만, 당신의 사고는 한낱 인간인 저의 방식과 괴리가 커서 말입니다. 지난번처럼 모르는 사이 중한 것을 걸어버릴지도 몰라 우선은 안전선을 두어 보았죠."
밥이나 사주려 했더니 대뜸 너도 먹어도 되냔 소리 했던 것 아직 잊지 않았다. 인간 중에선 괴상하단 평 자주 들었던 자신도 그런 식으로 비약해서 생각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전적이 있으니 최소한의 경계는 하지만 그 태도에서 뾰족하게 곤두선 사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무덤덤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네, 모르죠. 하면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건 그렇고 백룡은 여성격이었나 보다. 맞장구 바란 말은 아닌 듯해 유현은 물끄러미 상대방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어느덧 가까워진 남자를 피하고 않고 고갯짓 까딱 해 보이며 묻는다.
"영혼은 정확히 얼마나 원하시죠? 영혼을 바친다면 저라는 존재에게 어떤 작용이 뒤따르게 되나요?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에요. 영혼은 고작 교과 과정 돕는 일로 내어주기엔 다소 거창한 대가라 생각하는데, 당신도 더 좋은 것 내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문장 한 번에 질문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다. 인간은 보통 이런 경우 도망가기 마련인데 이 자는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영혼 운운하고 백룡을 안다는 듯 말하는 것으로 보아 격 낮은 존재 아니리란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 것치곤 늘 입맛을 다시셔서 말이죠. 학생은 사감들이 말린다 해도 바깥 인간은 상관없지 않나요?"
……땅 흔드는 것도 그렇고. 유현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조금 비틀거리다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 시선이 무언의 질책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저 자가 알아들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당신이 어떤 것들을 선호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예시를 들어주신다면 좋겠네요."
원하던 결과 나오지 않았음에도 나쁘지 않다. 적어도 지난번 장난과 비슷한 부분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이제 다시 병을 찾으려 가면 되겠는데……. 시선이 잠시 흐릿한 시야 너머 문 있을 방향을 향했다. ……이 종이인간, 나가기 귀찮아진 모양이다. 유현은 느릿느릿 일어나 제 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방 안에 병이 있기를 바라며 편향적인 행동에 나섰다는 뜻이다. 다행히 그 행동엔 소득이 있었다.
병을 뒤집어 안에 든 것을 꺼내 먹는다. 별사탕의 맛 느끼며 이변 일어날지 천천히 기다려 본다.
.dice 1 4. = 1
1. 과거를 환상으로! 2. 숨겨진 진실을 한 번! 3. 무지개를 토해보자! 4. 동물의 귀와 꼬리가 뿅!
대답 바라지 않은 말에 허튼 소리라며 기어코 한 대꾸 던져주는 것에 웃음 조금 더 났다. 이것도 전과는 다를까. 이전이었으면 저 한 마디 더 없어서 뭇내 서운하면서도 그런 티 내지 않았을 것이다. 딱 그만큼의 거리 가까워졌다는 걸까. 그 이후로.
아회 앉고보니 저 차림새 더욱 독특하다. 소매가 두루마기와 비슷한 줄 알았더니 옆으로 길게 퍼지는 것이 옷이 아니라 날개깃 같기도 하다. 날개- 달린 호랑이? 혼자 삼천포로 생각 빠질 뻔 한다. 이 오래된 버릇은 현실에서 눈 돌리고픈 회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젠가 닥쳐올 운명 조금이나마 잊고픈 마음에 생겨버린.
눈 한 번 깜빡일 시간만큼 생각 옆길로 샜다가 돌아와 술 따르고. 뜻밖의 말에 고개 살짝 기울였더란다.
"받겠다 했으니 주었지요. 무얼. 별 것도 아닌 걸."
반쯤 농이었다곤 하나 아회가 제 권유 받아들였는데 주지 않을 이유 없었다. 받겠다 했으니 주었고. 마실지 말지도 아회 기분따라 였다. 온화 한 마디 한 어절도 채근하지 않았다. 희고 가는 손이 술잔 들어올리는 것 멀거니 보며 무슨 연유로 그러느냐 물었다. 누가 또 들쑤셨느냐. 하니 그렇단다. 아 그렇구나.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술잔 들고 우물쭈물 하는 것이 저 처음 술 마실 적 떠올라 웃음이-
"!!!"
아이고. 술잔 안 들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 입도 안 대서 다행이야. 들고 있거나 마시는 중이었으면 분명히 엎거나 뿜었다. 제 반려와 입씨름이 붙었다니. 저건 완전히 다 알고 하는 소리 아닌가! 아니. 아니지. 거기에만 집중하지 말자. 침착하게 놀람을 가라앉히고 다시 대화에 집중하려 한다. 한 손으로 지그시 명치 언저리 짚고 아회 보다가 결국 참지 못 하고 웃음 터뜨렸다.
"하하! 그래. 첫 술이 제법 쓰지. 오라비야?"
아하하. 한 잔 마시고 쓴 맛 못 참는 그 반응 보고 어찌 웃지 않으랴. 저도 처음엔 저랬으니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남의 모습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기세 좋게 터진 웃음 치고 그 소리 오래 가지 못 했다. 큭큭대던 것이 도중 큭. 하고 누가 목 쥔 것 같은 소리로 바뀌고 이내 문 두드릴 적과 비슷한- 더 격한 기침으로 바뀐다. 기침에 못 이긴 듯 옆으로 기울어지려는 몸 한 손으로 짚어 버티고. 제 손으로 명치 아래 쓸어내리며 숨 고른다. 바로 앞에 사람이 있음에도 도움 청하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매우 익숙한 행동이었다. 거센 기침 점차 가라앉으며 이윽고 시익대는 숨으로 바뀌자 그제야 살겠다는 듯 긴 날숨 내뱉었다.
"후... 아이고. 미안허이. 내 몸이 성치 않아 기침만 해도 이러네. 별 것 아니여. 응."
제 상태는 별 것 아니라 하며. 온화 또한 술잔 집어들었다. 떨어뜨릴새라 얼른 마셔버리고 옆에 둔 됫병 다시 들었다. 그 병 아회에게 건네지 않고 다음 잔도 제가 채워주며 그리 말 이었다.
"내가 어떤가는 조금 뒤로 미뤄두고. 오라비 얘기 먼저 해봅세. 내 반려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무슨 얘길 했는지. 춘 사감에게 들은 말은 그것이지? 오라비네 선조가 신수를 꼬여냈느니 하는 것. 그것 관해서는 뭐 알아낸 것 있는지. 그리고- 수업 중이라면. 크흠. 그 요상한 남정네 말하는 듯 한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뺨까지 쳤는지."
한 잔 더 들이키고 천천히 풀어보시게. 그리 말하고 소반 위 다과 꾸러미도 톡톡 두드려준다. 여 입가심 할 것 있으니 쓴 것 참지 말고 달래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은근히 제 얘기 뒤로 밀어두려는 듯이.
>>858 토론의 전제사항에서 회빙환의 추락사 과로사 묻지마 살인이 아닌 트럭과 같은 교통수단의 방법만으로만 보낼 수 있다면~이 있었답니다. 그렇다면 트럭 발명 이전 시대에는 무엇으로 보내는 것이 보편적이었는가? 하자마자 당당하게 "소 달구지." 하길래 울듯이 웃었어요...
김첨지의 아내를 잃은 감정에서 비롯된 분노의 질주에서 두 배로 울었고요...😂
물론 교통수단 아닌 기본 클리셰라면?은 온화주처럼 절벽이 압도적이긴 했답니다.🤔 애초에 한국인 설화에서 절벽설화 너무 많아~(?)
술이란 것은 약간은 용기를 북돋게 하고, 적당히는 정신을 흐리게 하며, 주취 하게 된다면 본성을 드러낸다고들 한다. 오늘은 적당히와 주취의 사이의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가고자 했다. 자신의 주량을 모르니 적당히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지 않을까. 첫 술이란 것에서 가슴을 저도 모르게 졸이게 된다. 역시 그 적당히와 주취의 사이를 모르기 때문에서 비롯되는 미지의 공포나 언뜻 느끼던 향취에서의 거부감 때문이다.
"역시나."
첫 술을 들이켜기 전 언뜻 본 광경은 제 추측이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놀란 것 분명해보이는 당신을 바라보고 더 알아볼까 싶다가도 익숙하지 않은 맛에 인상 찌푸리게 됐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다고도 할 수 없다. 물이나 차와는 사뭇 다르게 목구멍을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느낌도 그렇고, 속을 훑는 온기도 그러하지만 특히 비강에 넘치는 이 느낌이 특히 그렇다. 아회는 잔을 내려두며 당신을 꽁한 시선으로 쳐다보더니 점차 그마저도 굳어간다. 당신의 행동 때문이다. 격한 기침과 기울어지는 몸을 보니 지탱이라도 해주어야 하나 싶어 손 뻗다가도, 스스로 다스리는 모습에 들었던 손 가만히 잔 매만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도움 받지 않으려는 모습이었으니 어찌 손 대겠나. 아회는 잠시 침묵하다 깊게 심호흡 하듯 한숨을 쉬었다.
"화야, 내 학당에서 사람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구나…."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이라도 쉬고 싶다면 푹 쉬라는 듯 목소리는 나긋했다. 자신이 따를까 싶던 잔은 어느새 당신이 채워버리고, 아회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먼저 물었건만 능란하게 빠져나가는 것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래, 누군들 사정 있기 마련이고 제 이야기는 돌리고 싶은 사유 있겠지.
"아주 다 털어가지 그러니?"
그렇다고 자신을 터는 방향으로 사유 돌릴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 자신마저 빠져나가면 이 담소는 파토가 날 것이 분명하니, 곶감에 자연스럽게 손 가더니 잇새로 슬쩍 베어 물고는 다른 손으로 술잔 쥐었다. 단어를 정리하고자 잠시 침묵 있더니만 술잔이 다시금 입가로 향했다.
"……한 번쯤은 손 뻗어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신수에게 조언이라도 얻어보고자 했다가 하 사감과 입씨름으로 번졌는데, 대뜸 제 반려가 슬퍼할 것이라 하며 대화 끝내더구나. 처음엔 그게 무슨 상관이지 싶었는데, 네가 딱 춘 사감님께 반려니 무어니 얘기를 꺼내니 어찌 모르겠더니? 더군다나 신수에게 행한 선조의 죄를 나는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르고자 한단다. 내가 그런 것을 알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이미 지난 일이거니와 신수들은 그 후손조차 같은 존재라고 단정지었는데, 숨겨진 과거를 파헤친다고 해서 앎이 갸륵하노라 용서할 리가 없지 않더니."
아회는 눈을 들어 당신을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당신은 이렇게 생겼구나. 삼 년간 눈 감고 사느라, 하물며 반 푼의 눈으로는 정신 없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이리 자세히 보진 못했는데. 잠시 침묵하며 잔을 기울이곤 오만상을 썼다. 그것이 술이 쓴 탓인지, 다른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명색이 신수란 것이 자기들만 아는 내용을 얘기하면서 인간을 깔보고 무조건적인 이해와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나 먹어도 되냐는 말밖에 할 줄 모르더구나."
곶감 다시금 베어무는 날선 송곳니가 찐득한 속내 뜯어내는 것이 맹수가 고기 뜯듯 어딘가 거칠었다.
"편견을 품고 싶지는 않다마는 신수들이 원래 다 그런 건지. 사감들이 제대로 된 상식을 갖춘 존재로 보이기는 처음이었단다."
마냥 즐겁고 싶었다. 한치 앞날도 내다보지 않고 그저 디뎌지는 대로 밟히는 대로 나아가며 그 끝에 깎아지른 절벽 나오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훌쩍 이 한 몸 던질 수 있게. 현실이 문득 코 앞으로 다가올 적이나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 실감할 적마다 그저 웃으며 외면했다. 여태 그리 살았으니. 면전에서 염려하는 말 들어도 맹하니 웃을 뿐이다.
"죽긴 누가 죽어. 내 숭한 꼴 좀 보였다고 면박 주는 게요? 에잉 못 됐긴."
겨우 추스른 숨으로 한다는 소리가 그렇다. 가슴팍에 손 얹고 조금만 깊게 숨 쉴라 치면 손톱으로 쇠 긁듯 시익대는 소리 금새 흐르는대도. 훌쩍 술 마시더니 제 손으로 다시 잔 채웠다. 한쪽 다리 세워 거기에 기대듯 자세 바꾸며 고집스럽게 앉아 있었다.
"그럼. 샅주머니 구멍날만치 털어드릴 거요."
화두 돌린 것도 모자라 아회에게 향해버리니 네 그럴 거냐 싶었겠지.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다음에 또 언제일까 싶으니 기회 될 때 털어야 하지 않겠나. 사실 그다지 생각 없었는데 저리 말하니 평소와 같은 오기 슬금 올라온 탓도 있다. 소리 없이 히죽 웃으며 턱 괴고 보자 아회 손에 곶감 하나 들려간다. 그 곶감 한 입 무는 것. 그리고 다시 술잔 쥐는 것. 하나하나 눈으로 쫓으며 들려오는 말은 귀담아 들었다. 가잔 먼저 반려 알게 된 것에 작게 숨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리 된 것이었나."
입씨름 했다 하니 제 반려- 이자 사감인 그이 성격에 과격한 반응 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농이든 아니든 해를 가하려 했으나 제가 아회와 가까이 지내니 에이 됐다 하며 관두었을까. 그런 후에 때마침 제게서 반려라는 말 나오고 그것도 춘 사감 앞이었으니 조각 딱딱 맞아들었겠지. 달리 숨겨야 할 이유 없었으니 설명할 과정 덜어서 편해졌다. 그리고 다른 것은-
"...신수의 눈에는 인간 개개인이 구분되지 않고 구분하려 하지도 않아서 그럴 거요. 오라비 말마따나 사감들은 사감 노릇이라도 하려 하니 그나마 소통 되는 것이지."
신수들이 말 안 통하는 것이나 그 불쾌한 시선에 대해서는 저도 익히 느꼈으므로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하여 일전 하 사감에게 들었던 말 토대로 제 생각 얘기하고 조용히 술잔 비웠다. 연거푸 마셔도 온화 얼굴 평온하기만 했다. 다만 아회 눈에 비친 것은 평소보다 희멀겋고. 거진 헐벗은 차림이나 드러난 곳곳 붕대에 약바른 천 덕지덕지하여 남사스럽기보다 안쓰러운 꼴이다. 시선 눈치 챈 듯 아회와 눈 마주칠 적엔 그 모든 것 무슨 대수냐는 듯 히- 하고 맹추마냥 웃는 온화였지만은.
"나도 겪어본 신수래야 사감들에 도사 빙자한 그들 뿐이지만은. 아. 알고 계셨소? 요전에 체력 단련 수업 때 현진 도사도 사실 신수였소. 사감들보다 위에 누이인 듯 하던데. 운 나쁘게랄지 수업 중에 잡혀버렸지 뭐요. 그러면서 내가 역린 좀 취했기로서니 대뜸 나를 자기네들 막내 여의주를 훔쳐갔나 봐야겠다 하질 않나. 막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는! 내 받은 것 도로 가져가겠다 하질 않나. 보고도 모르냔 말이네. 명색이 신수면서! 손은 또 어찌나 가차없던지. 내 이런 몸뚱인데도 주먹질 연거푸 날려 팔 하나 부러지는 줄 알았소."
한 두 마디로 시작한 볼멘소리 금새 터진 듯 술술 잘도 나온다. 투덜투덜. 불만 가득한 소리 하며 다시금 술잔 채웠다. 제 것 한 가득. 아회의 잔도 비었다면 같이.
"인간은 못 믿겠다길래 하나 쯤은 예외로 둬달라니 못 믿은 세월이 너무 길어 못하겠다 하질 않나. 뭘 좀 진득히도 못 하면 그기 무슨 신수요. 날 찾아왔담서 애먼 수업 가가지고 왜 안 왔냐 따지기나 하고. 신수가 인간보다 더 해 아주."
궁시렁궁시렁. 떠들면서 방금 채운 술잔 금새 비워버렸다. 어찌 보면 저 혼자만 물 마시는 줄 알겠다. 쓴 소리도 내지 않으니.
염려해도 저리 웃지만 누가 모를까, 숨소리부터 그리 좋지 않거늘 능글맞게 넘어가려는 모습 달갑지 않다. 저 반질반질한 이마에 다시금 딱밤이라도 놓아야 하나 싶지만 환자에게 손을 댈 수도 없으니 "내 못된 걸 이제 알았느냐." 하며 한숨 다시금 쉬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약조한 것도 있거니와 딱히 비밀도 아니니 하나하나 천천히 고하기로 했다. 곶감 씹으니 자연스러운 단맛 배어 나온다. 호랑이 곶감 무서워한다지만 일단 자신은 사람이니 무서워할 리가 없었다. 설겅설겅 곶감 씹어 삼켰을 적 당신의 이야기에 고개 끄덕인다. 지고한 존재들은 본디 인간을 구분하려 들지 않는다. 애초에 인간 또한 무언가에 관심 깊은 자 아니면 굳이 구분 짓지 않고 곤충을 벌레라 통칭하고 어류를 물고기라 통칭하듯. 그런 느낌에 가까우리라.
"……."
술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저리 잘 마신다던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에 남겨보려 애써본다. 붉은 색만 기억이 났지만 이번엔 얼굴이라도 익혀보고 싶었다. 하지만 잘 되질 않는다. 자신의 눈이 문제는 아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붕대요 약 바른 천 칭칭 동여맸는데 어찌 면구에 집중을 할 수 있을까. 눈이 마주쳤을 때 웃어버리는 모습 보며 아회는 눈을 반쯤 치켜떴다. 자랑이냐는 듯.
"현진 도사도 신수였다고?"
이대로면 아예 학당 모든 도사들을 신수들이 바꿔치기하게 생겼다. 이야기 들었을 적 자연스럽게 상황 겹쳐 보인다. 여의주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받은 것 가져가겠다 으름장 놓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불만의 물꼬가 터졌을 때, 아회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암. 일단 결론부터 지어놓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납득하려 들지 않으니 앞뒤로 꽉 막혔지. 북부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아니거늘."
신수가 인간보다 더 하다는 말에 특히나 공감하듯 하더니만 채운 잔 동시에 들이켰다. 다른 점 있다면 아회는 술 들이켰을 때 이제야 익숙해질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못해 인상 미미하게 찌푸려지고, 당신은 물 마시듯 쭉쭉 넘기고 있다. 속에 퍼지는 느낌이 미묘하여 입술 꾹 다물던 아회는 곶감 입에 물고는 그대로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며 턱을 괴었다. 미묘하게 삐딱한 모습이었지만 어찌하랴, 한 번 불만의 물꼬 터지면 정적인 자세로 대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지 않나. 하물며 술자리에선 더욱. 곶감 질겅거리며 입속으로 들어가고는 목울대 움직였다.
"그 누이라는 신수는 반려라는 것도 믿지 않고 여의주나 훔쳐 갔노라 멋대로 단정 지어 주먹질에 겁박이요, 형제인 신수는 침이나 흘리며 인간 잡아먹을 생각에 멋대로 제 눈알 받아 가라 강요를 하질 않나, 싫다니까 조상 얘기를 꺼내며 나무에 매달고 있으니 그 방자함이 끝이 없어. 저번에 듣기로는 하 사감 말로는 와서는 안 될 것이라 하였는데 학당에서는 그런 불청객들을 언제까지 내버려 둘지 모르겠구나."
누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형제도 문제다. 참지 않다 누구 하나 잡아먹으면 그땐 어쩌려고? 이번엔 자신이 잔 채워주겠다는 듯 빈손 뻗었다. 만일 병 제 쪽으로 주었더라면 당신 잔 따라주고 제 몫도 채웠으리라. 아, 맞다. 그제야 떠오른 듯 아회는 당신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잠깐, 그럼 그 답답한 신수가 네 시누이 되겠구나. 너도 고생 참 많겠어."
새삼 충격적인 발언 아무렇지도 않게 뱉으니 당신이 아는 북부 사람들이란 본디 그런 듯싶다. 아니라고? 뒤집힌 세상에 무엇을 바라랴.
자캐식으로_네게_내_목숨을_바칠게 : "모두 그쪽을 위한 일이었어. 이 순간만을 위해서 하루도 도망치지 않았어……,: "그러니 부디, 마지막 공물 받으소서."
10년_전의_자캐가_현재_자신의_삶을_본다면 : 궁기가 떠나기 전이라면 그 내막을 알게 되면서 부정하려 들겠지만, 궁기가 떠난 이후라면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거예요.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지금 아회가 모든 수를 다 보았고 그 누구도 끌어들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겠다 무영까지 놓아준 상태이니 그대로 가고자 할지도 모르겠어요.
자캐가_자주_꾸는_꿈 : 눈을 잃었던 시점의 꿈이랑,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눈으로 봤을 때의 꿈을 자주 꿔요. 특히 전자를 압도적으로 많이 꾼답니다. 그럴 때마다 일어나서 가만히 자기 눈을 덮어 가리다가 마음을 다스려요.
#오늘의_자캐해시 #shindanmaker https://kr.shindanmaker.com/977489 아회, 어서오세요. 오늘 당신이 표현할 대사는...
1. 『내가 먼저 말하려 했는데』 : "선수를 뺏겼구려. 같은 뜻이니 더 붙이진 않겠소."
"아. 그." "이쪽이 먼저 꺼지라고 말하려 했는데……."
2. 『내가 졌어』 : "졌소." "에잉, 이래서 체스가 싫다니까……."
"……부디 어울려주시는 동안 즐거웠길 바라겠습니다." "결국엔 이리 될 것임에도 어리석었지."
3. 『사라져』 : "또 제안하러 온 것이라면 오늘은 대화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지금 주변에 아무것도 없길 바라니 편의를 봐주시지요. 아니, 아니지." "편의조차 봐주지 않고 그리 굴고자 하니 이쪽이 떠나는 것이 옳지요." "쫓아올 생각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만일 인간의 도움 필요한 신수에게 그 어떤 인간도 손 뻗지 않고…… 그렇게 신수가 날뛸 적 인간들은 제 학우요 가족 죽어가는 꼴 보고만 있지 않을 터이니……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잘것없는 인간이라 한들 신의 안배요 사랑 받는 자도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런 존재들은 신께서도 묵인하시지요. 자연의 이치대로 말입니다. 아니면 당신들이 그리도 학을 떼는 용에게 붙어먹는 존재라면? 과연 용께서 당신들을 신경이나 쓸까요." "물론 '만일'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어야지요, 그렇지요?" "그러니, 부디 그만 두지 않겠습니까?"
"제발, 내버려 두십시오. 두 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혼자 있게 해줘." "내가, 당신을 온전히 증오할 수 있게……."
이전 같았으면 바로 앓는 소리 내며 위신이 어쩌고 체면을 어쩌고 했을 상스러운 소리를 그저 담담하게 받아치는 아회라. 요건 또 새로운 느낌이다. 마냥 샌님인 줄 알았더만 어쩜 재주 좋게 숨기고 있었는지. 여태 일부러 샌님인 척 했나? 생각하면 심술이 솟으면서도 그건 그거대로 재밌었으니 그러려니 하자 싶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지 뭘.
저는 술 마시고. 아회는 곶감 씹으며. 주저리주저리 요근래 신수들과 있었던 일화며 불만이며 늘어놓으니 아회도 고개 끄덕이고 그런다. 저에 버금가게 성가신 일 겪었던 것이겠지. 그러다 눈 마주쳐 히죽 웃으니 저 저. 눈빛으로 타박한다. 그래서 연유 모르겠단 듯 입술 비죽 내밀고 눈 크게 깜빡이고 어깨까지 으쓱였다. 그렇다고 정말 몰랐을까. 다 아니 그랬지.
"음. 현진 도사가 신수였다는 것 아니라. 그 날하고 아마 이전 수업에도 신수가 현진 도사인 척 했단 거요. 진짜는 어디서 끝내주는 휴가를 보내는 중이라나. 이제 생각하니 그리 홀랑 가버린 도사도 도사구만."
혹시나 제 말에 오해 생길까 싶어 정정해주다가 그 누이 신수 했던 말 생각나 그것도 말했다. 도사라는 작자가 학생들 두고 휭하니 가버려도 되느냔 말이다. 나중에 진짜가 돌아오거든 경외의 마음 담아 주먹다짐을 신청해버릴까. 안 받아주겠지만.
"북부 사람도 그 정도는 아니라니. 무 오라비야. 그런 농도 칠 줄 알았소? 보면 볼수록 웃긴 사람이구만?"
같이 신수에 대한 불만 늘어놓던 아회 한 말에 온화 다시금 큭큭대며 웃었다. 제 몸에 자극 되지 않게끔 소리 가능한 줄여 웃는데 이것 참 답답해 돌아가시것다. 에잉! 이 몸뚱이만 아니었어도! 짧게 웃곤 아회 보았다. 삐딱한 자세로 곶감 질겅질겅 씹는데 저게 또 나름 어울려서 웃음이 피식 피식 새었다. 빈 잔 만지작대며 아회 얘기 듣다가 문득 걸리는 것 있어 입을 열었다.
"눈알 받으라 했다고? 음- 아마 누굴 먹으려고 그런 건 아닐 테요. 춘 사감 때나 이번이나 보아하니 경을 치지만 않으면 학생이 먹힐 일은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눈이라. 내 들은 것 있어 유추하건데 오라비 눈 통해 학당 안 보려고 한 걸 거요. 신수들이 이 학당 안은 잘 안 보인다 했으니."
그리고 그건- 말을 해도 되려나. 조금 머뭇거리며 말 끊었다가 아회 손 뻗는 것 보고 술병 집어 그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제 잔 들어 술 무사히 따를 수 있게 받치려고도 하고. 술 받으며 생각하다 대뜸 아회가 그런 소리 하는 바람에 잔 놓칠 뻔 했지만.
"아니 이 오라비가. 참 나. 지금도 가만 못 둬서 안달인데 잘도 그 대접을 해주것소. 내가 아무리 용써봐야 인간 나부랭인데."
인간 나부랭이고. 어쩌면 이 노릇마저 삽시간에 끝나버릴지 모르는데. 하는 말은 일단 혀 뒤로 삼켰다. 조금 이따. 조금 후에. 지금은 말고. 라며. 슬그머니 화두 돌려 앞서 고민하던 것 그냥 꺼내버린다.
"아무튼. 아무튼 조금 전에 눈 말이오. 오라비 통해 학당 안 보려는 것이 맞다면 그들은 제 형제 목을 찾고 있는 거요. 먼 옛날 인간의 편 들었다가 목이 떨어진 형제가 있는데. 이 땅 전부를 뒤져도 목을 못 찾았더이다. 허면 남은 곳 여기 뿐인데. 신수들은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눈을 빌려주며 동시에 시야를 빌리려 한 것이겠지요. 제 형제의 목 찾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그 막내? 신수의 여의주도 찾으려 하는지도 모르고."
줄줄 얘기 늘어놓다가 아. 하고 무언가 깨달은 듯 눈 끔뻑였다. 그 뒤에 질문 하나 아회에게 향했다. 별 것 아닌 듯 태연하게.
"혹시 말인데. 하 사감과 춘 사감 사이에 다른 사감 일 친 적 있소? 내 거기 있었을지 모르나. 기억이 없거든."
숭한 말 잘도 하니 경 치려다 휘둘릴까 싶어 그만 두었다만 역시 경 치는 것이 좋았겠다. 한 번 봐주니 끝도 없이 얄궂게 굴지 아니한가. 입술 비죽 내밀며 눈 크게 깜빡이는 모습에 미간에 미세하게 주름 잡히더니 어깨 으쓱일 적엔 기어이 앓는 소리 내고 만다. 에이잉, 내가 환자니 크게 혼을 낼 수도 없고.
턱 괼 적에 등판의 머리카락 쏟아지듯 가슴팍 너머로 흘러내린다. 바닥을 쓸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 팔뚝이요 목에 우수수 쏟아졌을 적, 그게 또 거슬렸는지 목 근처에서 노닐던 터럭만 대충 쓸어 넘겼다. 그러면서도 그 손길 어딘가 스산하니 당신처럼 조만간에 현진 도사 돌아오는 날에 신명나는 체력 단련을 하겠거니 다짐한 듯싶다.
"내 아무리 세상사 덤덤하게 살더라도 농담은 할 줄 안단다."
큭큭대며 웃는 모습에 픽 한숨 쉰다. 대체 자신을 얼마나 덤덤한 사람으로 봤으면 저런 반응인지. 바깥의 부처라는 존재처럼 보기라도 하였던 건가? 에잉.
"마침 그 말을 하긴 하더구나. 학당을 보는 조건으로 눈을 받아가는 것이라고, 매달기 직전에 말해서 더 짜증이 났었지."
그래서 더 받기 싫어졌던 터다. 이것보다 더 깊은 이야기는 자신의 목표요 현재 사상까지 죄 말해야 하니 여전히 숨긴다.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때 품었던 감정을 같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머뭇거리며 말 끊는 모습에 잠시 기다려주듯 술 따르니, 더듬거리며 술병 쥔 손길이 다행스럽게 술 넘치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하면 인간 나부랭이라며 어떻게든 시누이 취급조차 안 하려 들며 그리 군다는 것은, 그만큼 네 반려가 널 귀히 생각한다는 것 아니겠느냐. 반려가 네 귀히 여기지 않았으면 도리어 그러든지 말든지 생각하며 인간이 재밌느니 뭐니 하였겠지. 그리 생각해 보자꾸나. 시누이를 죽일 순 없잖니?"
다시금 충격적인 발언 이어진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나온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는 듯 웃음기도 어려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학습한 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 이어놓고 아회는 다시금 술잔을 털어넣었다. ……누군가의 눈에 심히 거슬렸기 때문에 제 어미 죽었으니 당연하겠다마는 당신은 아직 이 일을 모른다.
"형제의 목을 찾는다라……. 여의주도 찾을 겸 그리 눈 빌려주려 들었다는 게지."
빈 술잔을 매만지던 아회의 눈은 여전히 텅 비어있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어 그리 비어있는 듯 보였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도, 너머의 생각도 비치지 않는 눈을 잔을 향해 굴리고 한참을 골몰하다 잔 매만지기를 그만 두었다.
"아, 있었지, 동 사감. 감각을 잠가서 원체 고생하였어. 생각해 보니 그때 온화 네가 아이처럼 굴긴 하였다. 그리고… 만일 사감들이 차례대로 폭주하면 다음이자 마지막은 추 사감이 되겠지."
그리고 다시금 침묵했다. 뭔가 고민하다 뒤늦은 이야기를 꺼낸다. 은빛 아스라한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눈을 통해 형제의 목을 찾고, 여의주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 필히 찾고 싶겠지. 그러나 화야, 나는 돕지 않을 생각이란다. 나는 세상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자신들이 무엇이길래 바라지 않는다는 내 의사를 무시하며 억지로 수단으로 쓰려 하는지 모르겠구나……. 멸시할 땐 언제고 제 목적은 달성해야 하니 동정이라 잘 포장한 욕심을 호소하는데 어찌 마음이 동하겠느냐…….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단다."
이 이야기는 어차피 그 신수에게도 할 생각이니 더 논쟁하지 않고 싶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냥 당신의 추리가 맞는다면, 제 마음은 그렇다고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곶감 제하면 빈 속에 마시던 것들이라 그런지 연거푸 마신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느낌이다.
거듭 능청 떨어도 혼 내는 소리 대신 미간 구기거나 골치 아픈 소리만 내는 것 보고 또 슬금슬금 장난기가 돋는다. 저 아회의 긴 머리 제멋대로 풀어진 것 보고 냉큼 가서 건드리고 싶은데. 이 작은 소반 너머 가는 것 조차 크게 숨 한 번 내쉬고 가야 할 판이다. 거 참 아쉽기도 하지. 흘러내린 머리 쓸어내는 손만 아쉬운 눈으로 쫓으며 히죽이기만 했다.
"그러게 말이오. 우린 일개 학생이지 무슨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을."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생이 학당 위해 움직이는 것이 맞느냐고. 궁시렁궁시렁 중얼대다가 아회 한숨 쉴 적 그리 조잘대기도 한다.
"아니. 오라비도 오라비인데 북부 출신은 어째 농이랑 잘 안 맞아 뵈니 말이오. 농담도 농담 아닌 듯 들린다 할지."
온화 그리 생각하는 것은 소꿉친구이자 북부 사람인 벗 있어서 였다. 다시금 생각해보니 그 녀석도 비슷한 부류 같고. 흠. 다음에 데려다가 농지꺼리 나오게 해봐? 한 번? 아. 안 될 것 같은데. 그 녀석이라면.
아회에게서 술 받으며 들으니 제 추측에 대해 그 신수에게 말 듣긴 들었나 보다. 그런데 매달았다니. 현진 도사 둔갑한 신수는 주먹질을 하더니 저 치는 그런 부류인가? 필히 그 행동에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제 말대로 되어주지 않으니 심술 부려 그랬겠지. 신수가 다 그렇지 뭐! 인 셈이다.
"오라비도 욕봤구먼."
짧게 말하고 받은 술 훌쩍 마셨다. 첫 잔은 그래도 혀가 아릿하더니 이젠 그냥 물이나 다름없다. 감질맛 나는구만. 손에 빈 잔 들고 이리 저리 굴리며 말 끊기지 않게 이어간다.
"내 반려가 날 귀히 여기기 때문이라. 무 오라비한테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으이. 나는 또 신수란 것들이 하나같이 제멋대로이니 반려고 나발이고 하여 그리들 구는 것 아니겠냐 할 줄 알았는데. 귀히 여기기 때문이라. 재밌는 발상이여."
귀히 여기기 때문에. 도리어 시누이로 대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도 귀찮게 군다는 것일지. 온화 눈동자 저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다가 돌아오며 중얼거렸다.
"헌데 뭐. 인간도 피 나눈 육친 서슴없이 찔러죽이는데 신수라고 아니그럴까. 시누이라 죽일 수 없는게 아니라 구실이 없다고 보오. 나는."
온화는 모른다. 아회가 겪은 일에 대해서는. 하지만 아회도 모른다. 온화가 어떤 집안에서 자랐고 그로 인해 어떤 상태인지. 아직은 모른다.
저도 아회도 잔이 비었지만 다시 채우지는 않았다. 어느새 서로 빈 잔을 만지작대고 있음 알았지만 다시 술병 들거나 달려 잔 들지 않았다. 아회 중얼거리고 그 손 멈추어도 제 손엔 한참을 더 빈 술잔 들려있었다. 깊은 고민 있으나 말은 못 하겠고 하여 손이라도 그래야겠단 듯. 그러다 손 멈칫하며 이잉. 하고 불만스런 소리 작게 흘렸다.
"동 사감인 거야 예상 좀 했다지만. 에잉. 오라비도 봤소? 어째 얌전히를 몰러. 이 몸뚱이는."
아회가 봤다면 그 날 모인 사람은 다 봤다 쳐야겠지. 아이고- 이 무슨 추태람. 결국 온화도 술잔 놓고 얼굴 길게 쓸어내렸다. 이 얘기 더 나올까 싶어 말 돌리려는데 아회의 말이 한 박자 빨랐다. 담담히 풀어놓는 아회의 속내에 제 머리 긁적이고 입술 달싹였다. 하지만 달리 첨언 하지 않은 채 에구구- 하며 몸만 일으켰다.
"그래. 그래- 우리 오라비가 첫 술부터 진하게 취해보고 싶다 이거구만. 그럼 내 아끼던 것도 꺼내야지-"
그리 말하며 일어서 걸으니 침잠해있던 약내가 방 안 휘감는다. 온화 느릿느릿 걸어 방구석으로 가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더니 병 하나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아. 정확하게는 아회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몇걸음 더 가기 싫어서인지. 다른 생각인지. 몸 숙여 손끝으로 아회 옷자락 구겨지지 않게 밀어내려 하곤 털석 앉아 소반 옆에 새 술병 턱 하니 놓았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진한 금빛 술이 출렁거렸다. 마시던 술잔 그대로 쓸 참인지 저 쪽에 있던 제 술잔 제 앞으로 가져오곤 태연히 떠들었다.
"이것은 천천히 마시는게 좋을 것이여- 본디 얼음 넣고 해야 하지만은 지금은 준비가 되어있질 않으니. 저것마냥 홀짝홀짝 마시고 취하면 것도 볼 만 하겠지만은?"
낄낄. 경박한 웃음소리 한층 가깝게 흘리고. 제 손으로 술병 열었다. 꾹 닫혀 있던 뚜껑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술냄새는 저라도 움찔하게 만든다. 열 때마다 긴장되게 만들지. 이것. 그 병에 담긴 금빛 술 두 잔에 절반 조금 넘게 따르고 가볍게 뚜껑 걸쳐놓고서. 아회 손이 잔 들기 전에 말을 꺼내본다.
"취하고 싶은 것 알겠으나 더 취하기 전에 들어주시게. 무 오라비야. 아까- 눈 말인데. 내가 부탁해도 안 되겠소? 그 눈 받아 그치들 형제의 목 찾는 것 만이라도 해주면 아니되어?"
아회가 이미 하지 않을거라 말 했음에도 온화 그 부탁 꺼낼 수 밖에 없었다. 그야. 제게는 눈 빌려주겠다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 연유도 설명해야 함이 마땅하겠으나 그 이상 쉬이 말 꺼내지 못 하고 아회 눈치만 살폈다. 지척에 앉아 그러고 있으니 입술 잘근대는 것도 힐끔이는 눈도 숨김없이 드러났겠지.
일개 학생이지 재주가 있지 않다. 아회는 그 부분에서 침묵했다. 학생일 뿐인데 주어진 짐이 너무나도 무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재주도 없는데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바라고 겪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렇기에 섬에 도달할 수 없다. 너울이 이끌어 해저에 남겠지.
"그쪽 출신들이 유독 삭막하긴 하지."
북부는 웃음이 적다. 있다고 해도 좋은 웃음은 드물다. 안주라도 하나 더 집어야겠다 싶어 손 뻗었으나 다식에 손 잠시 멈칫하고는 그 옆에 있는 유과 집었다.
"소중한 것이 생기면 약점이기 마련이거든. 시누이 입장에서는 그 약점이 달갑겠더니. 하물며 구실이 없다니. 이미 차고 넘치지 않더니."
첫마디가 퍽 닮았구나, 스스로 뱉어놓고 자조적인 웃음 삼키고자 유과 베어 물었다. 소중한 것만 얘기하다 보면 이리 형님과 똑 닮은 얘기를 해버리니, 싫어도 결국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두 입째, 유과는 입술로도 파사삭 소리를 내며 허무하게 부서지고 입안에서 끈덕지게 녹아든다.
"어찌하겠니, 부끄럽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렴."
농담 툭 던지고 빈 술잔을 손 위에서 굴렸다. 이야기할 것도 모두 하였으니 잠시간의 침묵 생길 법도 한데, 뱉은 말은 지켜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이 침묵 멋쩍은 것인지 아끼던 것 꺼내겠다 일어서는 모습에 눈만 들어 당신 쳐다본다. 무언가 꺼내더니 옆자리 앉을 적, 아회는 넓은 소매와 옷자락 불편하지 않게 팔 움직여 앉을 자리 만들게끔 도왔다.
"꽤 독한가 보구나. 그래, 오늘 한 번 거나하게 주취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참에 주취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서로 잊는 것도 좋을 터요, 기억하더라도 술김에 뱉었노라 무마하고 싶다. 다만 생각 잘못하였나……. 하고 잠깐 고민하게 되는 것이, 훅 끼치는 술 냄새가 코에 꽂혔을 때다. 금빛 액체 넘실거리나 아까처럼 잔 끄트머리 근접하지 않으니 그 자체로도 위용 드세 기가 한풀 꺾이려 했으나, 정신을 차리게 하는 말이 있었다.
"……."
술잔을 들지 않고, 손가락이 반 조금 넘게 찬 잔의 가장자리를 훑는다. 둥글게 그 윤곽을 훑어가며 아회는 잠시 말을 골랐다. 올라오기 시작하는 취기 속에서 단어를 구분 짓기는 영 어려운 일이라, 침묵은 길지 못했다.
"화야, 이해한단다. 참으로 쉬운 일이지 않더니. 잠시 받았다가 목만 찾고 다시 그 눈 돌려주면 되는 일이야. 반려의 형제 일이거니와 나름 목표 있다면 도움 주고 싶음이 마땅하지. 그럼에도 어찌 내게만 그런 계약을 요구하는지 아느냐."
눈치 살피는 모습에 아회는 잔을 매만지던 손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지척에 있는 자에게 다시금 제 눈을 드러낸다. "내가 소경이기 때문이란다." 제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흐릿하고 은빛 아스라한 눈을.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는, 그것을.
"나는…… 어릴 적 나의 실수로 눈을 다쳐, 앞이 보이지 않는단다. 이미 한 쪽은 멀었고, 다른 한쪽은 내 뜻대로 기능하지 않아 이마저도 곧 잃을 것이야. 나는 잘 안다. 한 푼도 아닌 반 푼의 눈으로 산 지가 십 년인데 그동안 보이던 것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어찌 모르겠더니. 아무리 안경을 쓴다 한들 네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아야 그 얼굴 볼까 말까 하지……. 그렇기에 그 신수가 내게 계약을 청한 거란다. 내가 무엇보다 세상 보는 것이 갈급한 사람임을 아니까."
나의 실수다. 형님이 앗아간 것이 아니다. 도운 것이다. 아회는 알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망상일지언정.
"……그런 갈급한 자가 제안을 거절하였단다. 어째서일까."
아회는 미안하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얼굴에 그려냈다. 세상을 간절히 보고자 했으나 모진 세월과 시선의 풍파에 깎이고 휩쓸려, 끝내 바스러져 제 기능하지 못하는 희망은 짙은 체념이 된 자의 입이며, 제 소망을 일찍이 내려놓아 소유하지 않으려 하는 자의 눈이었다. 쥐었다 한들 사라짐을 알기에, 만족의 시간 오래이지 않을 것만 같은 미소. 이전에는 불같이 화를 냈다면, 이제는 그 불도 타오를 수 없게 되었던 모양이다. 눈이 조금 더 휘어 감정을 떨쳐내려 들었다. 선명하게 드러난 체념이란 감정마저 잿더미처럼 흩어지고 평소처럼 어떤 것도 담지 않는다. 상황과 맞지 않는 청초하고 말간 미소가 입가에 진하게 그려지더니, 잔을 들었다. 혹여 추궁할까 싶어 이 상황을 회피하듯이.
북부는 삭막하다라. 어릴 적 자주 다녔던 그 시절을 되짚어보면 하얀 풍경과 정적이 태반이긴 하다. 아이들 노는 소리조차 새하얀 설원이 잡아먹는 듯 했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 어린 저는 은연중에 그것이 벌이 아닐까 했었다. 언제 와도 한결 같은 눈밭 바라보며.
아회의 손이 유과 가져가고 동시에 말 들렸다. 소중한 것이 생기면 약점이 되지 않겠느냐. 이미 구실은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런 말을 아회가 하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과 그렇다면 구실 있음에도 쉬이 손 대지 않는 이유 무얼까 싶다. 그 신수 말대로 형제 싸움 하기 싫어서 뿐일까. 의문은 들었으나 깊이 생각하진 않기로 한다. 같은 인간끼리도 생각 통하지 못하거늘 격이 다른 신수들의 의도를 한낱 인간인 제가 가늠할 수는 없으니. 유과 부서지는 소리에 맞춰 슬그머니 생각 밀어낸다.
또다시 들려온 가벼운 농담에 말이 쉽지. 하고 실없이 웃었고. 거하게 취해보자길래 저는 그래본 적 없으니 구경 잘 하겠다며 히죽거리기도 했다. 새 술 가져와 앉을 적 아회도 움직여주어 자리 잡는 것 수월했다. 수월하지 않은 건 제 몸뚱이였으나 뭐 어찌저찌 한 쪽 무릎 세우고 앉아 술 따르니 병 열었을 적보다 강렬한 향이 코 끝 훑었다. 되려 술 깨우는 듯한 향취에 어렵사리 그 말 꺼냈다. 그리고 조금 침묵. 이후 그런 대답 들렸다. 예상했다면 예상한 내용이며 그랬구나- 싶은 사실까지.
"...대강 알고는 있었지. 오라비 눈 어떠한지."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회 시야 그리 맑지 못 한 것 말이다. 장장 삼 년을 지켜보았다. 그래놓고 모르면 그야말로 바보천치 아닌가. 하지만 이리 지척에서 흰 눈 마주하고 당사자의 입에서 그 사실 들으니 여캐 술 잘만 넘기던 목 누가 움켜쥔 듯 메인다. 그렇겠지. 굳이 저도 다른 학생도 아닌 아회에게 구태여 눈을 제시한 것은. 인간 따위 이해하지 못 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 신수에게 아회는 참으로 먹음직하게 보였겠지. 단지 그 신수가 간과한 것은. 아회가 이리도 다 타버린 잿더미와 같은 인간이란 것일 터다.
온화 잠시간 말없이 아회 마주보았다. 그 얼굴에 스치는 무수한 감정 끝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을 보았다. 체념조차 흩어지고 공허해지는 얼굴에 무슨 말 더할까. 그 미소에 답할 표정 지을 수 없어 그냥 눈 내리 감았다. 다시 고개 돌려 소반 향해 눈 반쯤 뜨고 중얼거렸다.
"거- 미안하게 됐소. 속도 모르고 부탁이랍시고 그런 소리 해서."
가타부타 길게 얹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게도 두지 않고 그저 길 가다 부딪혀 사과할 때마냥 흘려버리듯 사과의 말 하였다. 그럼에도 쉬이 잔 들지 못 하다가 조금 지나서야 손 올려 술잔 감싸쥐었다. 잔 부딪히자는 듯 내밀며 조금 불퉁하게 내뱉긴 했다.
"쓸데없긴. 그 동안 아낀 말에 비하면 새 발에 피도 안 되겠구만."
그렇긴 했다. 그 전 같았으면 절대 이렇게까지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미 없대도 이제 그런 것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음에 의의 두자고. 그리 말하며 술잔 비웠을 것이다. 그 독한 술 한 모금에 넘겨버리고도 온화 작은 헛기침 정도만 하였지만은.
"크흠. 여전히 독하구만 이것. 어째. 오라비는 마실 만 한가? 독하거든 더 안 마셔도 되는데?"
진중한 분위기 홀랑 잊은 듯 샐샐 웃으며 고개 기울이더니 아회 마신 반응 살펴본다. 많이 쓰지? 고소한 강정 하나 먹어볼텨? 하며 소복한 다과 중에서 콩과 깨로 빚은 강정 하나 집어들어 아회 앞으로 슥 내밀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앉아 히히- 하고 웃으니 나이 덜 먹은 철부지 같기도 했다.
치미. 남자의 대답에 유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명이라 해도 좋을 이름은 따로 있는 듯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인간들 사이에선 값 높이 부른 후 의견을 맞추어 가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계약 방식이라 말이죠. 우인 아니고서야 무엇을 얼마나 바칠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자와 거래하기는 쉽지 않답니다. ……하지만 전 그리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흥미는 동하네요. 그렇다면 대가는 언제쯤 거둘 생각이신가요?"
이 자들은 이 핏줄에 원한이 있었지. 떨치지 못할 운명이나 원죄 같은 것들에 유감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다. 유현은 여전히 치미라는 자가 무얼 하든 그가 하는 행동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 제 팔 쳐다보는 것도─저 작자는 팔 뜯어먹길 좋아하는 입맛인가?─, 적의 담긴 태도로 쿡쿡 찔러 와도, 그저 가만히.
"정 원망스럽다면 제 신벌 받은 꼴이라도 구경감 삼아 보시지요. 이래 뵈어도 나름대로는 충분히 고한에 시달리는 중이라서요. 당신들 비범한 존재이며 제 집안에 어떤 원한 있을지 누이 되시는 분께 들어 짐작하는데, 제 꼬락서니 당신들에겐 잘된 일 아닌가요? 아마 저는 죽음보단 생이 더욱 괴로울 테지만… 당신 가학성향이 심한 편이라면야 수긍은 하겠습니다."
유현은 일순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넋을 잃었다. 아, 저것조차 탐이 난다. 저는 결코 갖지 못할 악의를, 저것조차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하고 원대怨懟하도록 하는 한이란 무엇인가? 세상에서 어느 것 하나 나와 같지 않다. 이 비좁은 땅끝 빽빽하게 메운 인간들 천지라도 한평생 내가 그들 중 하나라 느낀 적 없다. 분명 저와 같은 가죽 쓰고 같은 말을 내뱉고 있건만 통할 수 없다는 사실 지독하게 괴롭다. 차라리 내 진정한 무념에 닿았더라면 번민 역시 없었을 터인데. 혹은 차라리, 저것들처럼 처음부터 인간 아닌 존재였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가정도 찰나간 스쳐 간다. 하지만 저것들끼리도 누이니 아우니 하는 우애 지닌 모양이니 나는 또 그것조차 되지 못함만 확연해졌다. 나는 필시 이물도 인간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 처음부터 온전하게 살았던 적 없는데 영혼 떼어낸들 쪼갠들 중하기는 할까. 무심한 시선 줄곧 치미를 향한다. 느릿이 눈 내리감긴다. 눈꺼풀 재차 들어올려지고, 한숨 같은 긴 호흡과 함께 뱉어낸 말은.
대화의 흐름은 잠시 침울해지거나 어색할지언정 언성을 높이는 등의 큰 불꽃은 튀지 않는다. 이 정도만 하여도 대단히 온건한 축에 드니, 머리를 굴리지 아니하고, 그 어떤 것도 가늠하지 아니하는 이런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하는 것이 얼마 만이더라. 약관을 일 년 남겨두는 세월 동안, 학당 내외를 통틀어 손에 꼽을 것이다. 새삼 불가살과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도 편안하긴 했다마는 결국 서로의 이득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이 은연중에 느껴졌지 않던가. 그 뒤로는.
"네 모를 리가 없지."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었으니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일단 손에 쥐어 만져본 뒤에야 무엇이구나 얘기하는 버릇 있다는 것과 걸을 적 낮은 휘파람 불었다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겪지 않았으니 온전히 공감할 수 없겠지만 정서적인 공감이 있지 않은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에게 처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자신이 당신 눈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여졌으면.
"미안할 필요가 어디 있겠니."
그러니, 그것만으로 족하다. 더 화내지 않고, 더 감정 드러내지 않고, 더 외면하지도 않는다. 무게 없는 사과조차 귀한 상황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잔을 들자 잠시간의 정적이 인다. 이마저도 한때다. 금빛 술은 자신을 담아낸 벽에 부딪쳐 맑은 소리를 내더니 가벼운 파도처럼 일렁였고, 아회는 여전히 말간 미소를 입가에 잔잔히도 띠우고 있었다.
"……하하, 그렇긴 하구나. 그랬지."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려 들었겠지. 다시금 불타고 벽을 세우며 밀어냈으리라. 이리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 마음이 가벼웠던 것이로구나. 밤에 뜬 달 한 잔 마시고자 입에 담으니, 역시 하늘에 있는 것은 함부로 탐내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콜록!"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아회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독하다! 아니, 독한 것보다 더했다. 삼킬 적엔 술 자체의 향취도 느낄 수 없을 만치 비강에 발효된 내음 훅 끼쳐와 쓰다 못해 맵고, 목구멍으로 넘어갈 적엔 자신이 어디에 있노라 실시간으로 그 위치를 알려주는 화끈거리는 느낌에 정신이 아찔했다. 목에 걸린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어 입을 가린 소매를 차마 내릴 수가 없고 눈은 순간의 기침 탓에 눈물 고인다. 속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인 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회는 금빛 술이 품었던 향이 비강에 고여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첫 술이다마는 참으로 좋은 술이로구나. 독한 것만 빼면.
"……."
겨우 소매를 입가에서 떼어낸 아회는 눈을 슬쩍 굴려 당신을 새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리 멀쩡하지? 자신은 지금 속내에서 화끈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당신은 몇 번 헛기침만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새삼 놀라워 아무런 말도 못 하다 내밀어진 다과에 앓는 소리 냈다.
"황새 쫓다 가랑이 찢겼구나……."
그렇다고 가랑이 찢어진 뱁새가 모이 안 먹는다는 건 아니다. 강정을 입에 물고 잠시 그대로 달달한 조청 겉면 혀 위에서 녹을 때까지 기다리다 입술 움직여 파삭파삭 입속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손 슬쩍 들어 당신 앞에 다과 놓아준다. 곶감이다. 호랑이는 무서워한다지만 아회는 잘도 씹었던 곶감. 빈속에 연거푸 마셨던 잔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독한 술의 습격, 그리고 무방비한 몸에 덜컥 들이닥친 충격까지.
"네 내게 주었잖니, 너도 하나 먹으렴."
주취로 가는 빠른 지름길 세 박자를 골고루 갖춰 그야말로 적기이니 나긋한 어조, 상냥한 미소, 손길과 함께 시작되고 말았다. 이 희멀건 존재, 슬슬 무섭게 오르기 시작하는 취기와 제정신 사이에서 혈투를 벌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