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봤자 애초에 어떠한 의미도 없었구나. 초점 없는 아스라한 눈은 당신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무의식 속을 헤집고 있었다. 여의주 따위는 필요가 없다, 용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 않다. 혼잡한 머리에서 한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용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뭇가지에 안착한다. 지상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 발소리가 멀어졌을 적.
너무도 쉽게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몸을 온전히 위로 안착한다. 바람이 시원한 것이 곧 가을이 올 것만 같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나는 것 같고, 세상이 싸늘한 겨울이 오는 것 같다. 부질없다. 역시 부질없다. 이리 나무 위에 있으니 어릴적 도술 연습하다 나무 위에 오른 뒤 내려오지 못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는 구해주셨는데."
한 시진을 내려오질 못해 나무에서 내려오기가 무섭게 훌쩍였지만 지금은 그럴 일도 없겠지. 아회는 눈을 감았다. 아무나 구하러 오겠지. 그게 아니라면.
"영아."
있느냐. 아회 작게 웃었다.
"네 있다면 내 여기서 투신할 터이니 알아서 받아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수업 따위 알 게 무어냐, 북부로 가서 농땡이나 치자꾸나."
위에서 보는 바닥은 아찔하기 그지없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치면 그대로 몸이 떠밀려 떨어지고, 한때 영원한 겨울이 있는 집안에서 낙상홍이 눈밭에 떨어지듯 쏟아지고 말겠지. 한참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회는 무영을 불렀다. 나무 밑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영은 자연스레 고개를 올렸다. 드높은 나무 위에서 속삭이는 제 주군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 네 있다면 내 여기서 투신할 터이니 알아서 받아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수업 따위 알 게 무어냐, 북부로 가서 농땡이나 치자꾸나.
그 높은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투신하겠다 하지만 불만도, 놀라움도 표출할 수 없었다. 무영은 얌전히 팔을 벌렸고, 아회는 무영이 팔을 벌리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몸을 아래로 기울였다. 기실 언제나 바라던 것이 있었다. 네가 내 명을 듣지 않으면 어떨까, 지금 내 명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너 또한 하나의 인간임을 증명하고 나를 차라리 내쳤더라면 좋을 텐데. 덧없는 육신이 휘청이다 바람을 가른다.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었으나 간청은 길었다.
부질없는 바람에 여전히도 애태운다.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니 앞으로 내게 기대 가질 것을 만들게 하지 말아 줬으면. 그렇게 몸이 충돌했으나 맞닿은 것은 지면이 아니었다. 도술을 쓴 무영 덕분에 충격 없이 얌전히 품에 안겼을 적, 아회는 내심 실망했다. 차라리 네가 나를 내쳤더라면 굴레를 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너 또한 결국 굴레 내부에 있는 존재구나. 인간임을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허탈한 감정이 웃음으로 변모해 짧은 숨을 뱉는다.
"이번엔…… 위험했습니다." "각오한 일 아니더니." "……."
거 봐,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왜 걱정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대로 어머니 계신 곳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곁에 있다면 생각이 좀 정리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입을 다물었다. 품에서 내려오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있자 무영은 품에 안긴 아회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고쳐안는 팔이 든든했다. 아회는 품 속에서 고개를 파묻었다. 든든한 팔이지만 감촉이 다르다. 일정한 걸음과 함께 흔들리는 몸이지만 그 걸음걸이가 다르다. 어린 시절 나무 위에서 옹송그리고 있던 자신을 구해줬던 그때의 기억과는 감각도, 상황도 다르다. 다시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여전히 입안이 쓰다.
"영아." "예, 주군." "너는…… 따라오지 말아라."
운명이란 것은 거학의 너울이며, 그 안에 안배한 혼백은 쉼 없이 흔들리는 경가다. 너는 흔들리지 말아라. 인간이 아무리 경가의 노 잡아 방향 잡는다 한들 너울은 신의 손아귀대로 방향 이끄려 드니, 네가 아무리 운의 갈피를 잡으려 해도 명은 순리대로 가리라.
"너는 살아."
그러니 너는 주어진 섬에 도달하라. 가라앉는 것은 나로 족하다. 무영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아회는 눈을 감았다. 영원한 것 없다고 하였으나, 영원한 어둠 속에 세상을 가두며 아무런 덧붙임도 없이 입까지 닫아버리며, 마침내 기숙사 방에 들어설 적까지 품 속에 웅크려 그 어떤 것도 열지 않았다.
길 가던 도중 발 아래 살피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학당 일과 중 어디론가 향하던 유현은, 걸음 내딛는 순간 절묘하게 굴러들어온 유리병을 밟고 앞으로 구르고 말았다.
"……."
가뜩이나 더운데 이렇게 되니 움직일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시선 아랑곳 않고 유현은 그렇게 몇 분간 누워 있다 몸 일으켰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칼 정돈하지도 않고 제 밟았던 물건부터 들어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병인 듯했지만, 이렇게 절묘하게 굴러다니는 간식거리라니. 머릿속으로 몇달 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신께서 장난을 치셨다지. 제아무리 화유현이라 해도 길에 떨어진 음식 함부로 주워먹는 기행은 쉬이 벌이지 않는다. 하지만 합당한 의문과 호기심이 생기기만 한다면, 독 든 음식이라도 맛보는 자가 바로 그였다. 평범한 간식거리일지 신의 손 닿은 물건인지는 먹어 보면 알겠지. 유현은 병을 열고 안에 든 별사탕을 꺼내었다. 사실 평소의 그였다면 아무에게나 먼저 먹여 보는 정도의 확인절차는 갖추었겠으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평소엔 다소 약했던 부류의 욕구가 충동질당하는 듯한 기분이다. 그는 별사탕 하나를 집어먹었다.
.dice 1 4. = 2
1. 과거를 환상으로! 2. 숨겨진 진실을 한 번! 3. 무지개를 토해보자! 4. 동물의 귀와 꼬리가 뿅!
- 죄인을 들여 형을 치르게 한다니 가문의 분위기가 흉흉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다. 가문 내에 정해진 서열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제법 화기애애하고 화목하다. 죄인도 거스르지 않고 개선의 의지를 보인다면 출가는 무리이나 여생을 보살펴주기도 한다. 죄인의 형이란 것도 류 가의 일을 돕는 것이다. 이는 본디 류 가의 사람 대부분이 요괴 사냥을 업으로 하여 온 터라 성미가 호탕하고 의식이 개방적이기도 하고, 가문 내에서 불화가 일어나거나 고의로 일으키는 것은 가주가 직접 벌을 내릴 정도로 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단락에서 하나. '가문 내에 정해진 서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언뜻 보기에 류 가에 속한 모두가 수평적이고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 같으나 직간접적으로 상하를 구분짓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도' 라는 표현에서 비단 류 가/죄인의 이분법적인 나눔이 아님 또한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별개의 기준일까? 사람간 서열에 상하가 있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윗선이며 아랫사람일까? 윗선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을 할까?
둘. '가문 내에서 불화가 일어나거나 고의로 일으키는 것은 가주가 직접 벌을 내릴 정도' 라는 문장은 그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윗사람을 제외한다거나 류 가의 사람은 예외라거나 하는 기준이 없다. 그리고 불화의 구분과 정도, 벌의 정도에 최소치와 최대치 또한 모호하다. 간략히 적는 것이 시트이기 때문도 있지만 이 경우 뒤가 있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려놓았다.
그리고 온화는 지금 '가문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을 받는 중'이다.
셋. 이전 독백에서 풀었듯 류 가에 잡혀온 모든 죄인이 류 가에 속하지는 않는다. 비율적으로 속하는 인원보다 속하지 않는 인원이 더 많다. 그렇다고 남는 인원을 밖에 풀어주는가? 절대 아니다. 류 가에 잡힌 죄인은 류 가에 속해지지 않는 한 결코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인원은 어찌 할까? 참고로 류 가에서 사람은 전부 인적 '자원'으로 인식한다. '전부' 말이다.
정해진 서열... 윗선... 온화의 죄와 자원...?? 자원???? (머리 부여잡) 온화주... 아회의 행복도 행복인데 온화가 더 시급한 것 같은데요???🥺 우리 온화가 벌을 받는다고요...? 말도 안돼!!! 철폐하라! 이것저것 보장하라!😫 온화주가 부러워요... 독백 내용 이미 알고 있겠지... 부럽다...(질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