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탓인가 기껏 내지른 정권은 닿지도 못 했다. 무리하게 공격을 이어가려 하지 않고 일단 다시 뒤로 물러났다. 저를 보며 눈치가 빠르다는 신수를 향해 어깨 살짝 으쓱였다. 한정적이나마 이만치 관여했으면 모르는게 이상하지 않냐는 듯.
"...하."
그러나 이름 모를 신수가 역린과 여의주를 빼내려한다는 얘기 들었을 때. 미간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제가 강제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물론 역린은 그런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제대로 계약했고 밥도 줬고 어! 여의주도 어. 그가 준 것인데! 참 여유롭게도 저더러 말해보란 표정을 보고 숨 한 번 골랐다. 그리고 말했다.
"싫습니다. 역린의 주인도 이 여의주의 주인도 아니신 분이 어찌 그런 폭거를 행하려 하십니까? 내게서 앗아가려거든 당신이 아니라 그이를 불러오십시오. 역린의 본래 주인이자 여의주의 주인인 그이를 이 자리에 불러 와 그이 손으로 계약을 깨고 여의주를 취하라고 하시어. 그이가 그러한다면 돌려주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래. 이제와 그가 돌려달라 해도 쉽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이것들 제게서 없어지는 날을 그 날로 정해뒀으니.
"그리고 아실까 하여 드리는 말씀이온데. 내 이 역린에 만족스러울 만큼 피와 살을 취하게 해주는 것으로 계약 유지하고 있으며 여의주는 그이와 연 맺은 증표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반려로 삼아달라 청했고 그이가 수락하여 그 표식으로서 넘겨준 것이니. 그이 외의 누군가에게 반환을 강요 받을 이유 없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설령 같은 신수이자 누이라 해도 말입니다."
당돌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할 말을 또박또박 마친 온화 자세 올바르게 하고 서서 신수 바라보았다.
귓가에 내려앉는 소리는 등골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싸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답지않게 경계하며 뒤를 도는 모습이 마치 보이지 않는 털 부풀리듯 순간의 기세가 맹렬했다. 오른쪽으로 길을 들었던 것이 잘못인가, 싶다가도 애초에 성치 않은 눈으로 다닌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 발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귀한 분을 이런 곳까지 데리고 올 수는 없지요."
춘 사감과의 대치에서 깊이 깨달은 바였다. 위험하다. 곁에 두는 것이 무엇보다 낫지만 때로는 곁에 두면 심히 위험할 때가 있다. 특히 하 사감과의 대면 이후 막바지에 들이닥쳤던 현진 도사를 생각하면 더욱이. 행여나 소리 들킬까 품에 안았던 지팡이를 손으로 옮겼을 적, 평온하던 기색에 약간의 금이 갔다.
"이미 답은 정했지만, 하나 묻지요."
차라리 먹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굴레를 끊을 수 있을 텐데……. 또 모순적인 생각이 온몸을 뒤덮기가 무섭게 다른 감정이 떨쳐낸다. 의심이다.
"모든 호의에는 대가가 있는 법입니다. 그쪽 또한 신수라면 공물을 바쳐야 함을 알 터인데, 내게 무엇을 바라고 눈을 주겠노라 덥석 이야기를 꺼내는 겝니까?"
애초에 받을 생각도 없지마는 묻고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눈을 받고 싶지 않느냐니 이야기하는 것이 심히 거슬렸기 때문이리라. 그 이유라도 어디 한 번 들어보고 이 자리에서 잡혀 뼈 두어 개 부러지든 말든 해야겠다.
다난한 사건들이 한 차례 지나고 다시금 수업 때가 돌아왔다. 가볍게 훑은 수업 목록은 얼핏 이변이 없어 보였다. 체력단련 수업에 난데없이 초빙 강사가 들어왔다는 소식만 뺀다면. ……왜인지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유현은 저를 잡아먹겠다며 쫓아왔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자는 그 길로 아예 학당에 눌러앉은 듯 보였다. 확대해석일지도 모르나 그 남자 들어온 시기와 '초빙 강사'의 시기가 일치한다는 지점은 퍽 불길하다. 조심해 나쁠 것 없으니 그리로 갈 우행 범할 생각은 없었다. 유현은 느긋이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사감의 수업을 듣지 않았으니 그리로 가야겠다. 아직까지도 정확히 정체 모를 그 남자에 관해 물을 말이 있기도 했고. 사감도 나중엔 답변해주겠다 말했으니 그 나중은 지금인 듯싶다.
당신을 뜻하는 말이다. 평온한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예민함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끝없이 경계하고, 끝없이 의심하며, 마침내 불신을 넘어서 환멸의 직전에 다다른다. 단 일 년, 일 년이면 됐는데 빌어먹을 사건들은 끊이지 않는다. 대체 왜.
"그딴 것을 바랄 리가 없잖아."
왜 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규정짓고 그 틀에 박으려 드는가. 시련 속에 몇 번이고 담금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어차피 그마저도 빼앗겨 사라질 것이 뻔한데 내가 왜 스스로 희망을 고문한 뒤 너절하게 나가 떨어져야 하냔 말이다. 지팡이를 쥔 손아귀에 힘을 어찌나 세게 주었는지, 창백한 피부가 시체보다 더 희게 물들고, 그걸 넘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쪽이 원하는 공물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무작정 받겠다 하겠소, 신수들도 세상 모든 지고한 존재인 양 굴더니만 결국 같은 땅에서 자란 존재는 맞나보군. 말도 통하지 않고 처음부터 바라는 것 취하려 내빼고 폭압하는 것은 넌더리가 날 만큼 똑같아."
나도 똑같고. 끝말을 삼키지도 않았는데 자조적인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삭막하고도 뭉근한 어조에서 사납고도 날카로운 단어들이 비수처럼 튀어 나온다. 인간은 다 그런 걸 바란다고? 아니, 바라지 않는다. 한때는 바랐겠으나 이미 늦었다. 어차피 빼앗김을, 그만큼의 대가 필요함을 안다. 계산하고 잰다고? 당연하지 않나? 대가가 만약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것이 나을 텐데, 무작정 받아주길 바란 것인가? 그만큼의 성의도 없는 존재가 내게 거래를 제시해? 오만한 자와 오만한 자가 만났기 때문이다. 속내 알 노력조차 없는 태평한 자가 자존심 드세고 합리화에 둘둘 매여 살며 자신의 인생 계획 다 세워둔 자의 속을 긁고 있으니 어찌 고운 말이 나오랴.
"잡기나 하시오. 그리고 하나 경고하지. 허튼 수작 부리지 마시오. 먹으려 든다면 죽기 직전 하잘것없는 북부놈이라도 사력 다하여 그 아가리를 찢어발기든 혀를 끊어버리든 하여 다시는 입도 벌리지 못하게 할 터이니."
학당 바깥의 일을 알아서 감당할 수 있을 테니 이리 분간 안하고 날뛰겠지. 이미 신의 악의 짙게 받은 몸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랴. 뼈 두엇 부러져도 어차피 그러라고 있는 몸이다. 처먹힌다면 동귀어진이라도 할 것이다. 그럴 수 없음을 알지만 북부의 선조가 제 형제를 죽였다 했으니, 그 후계인 자신이 상처라도 입힐 수 있다면 퍽 볼만하겠다. 와중에 눈도 뜨지 않는다. 얼굴 마주할 생각조차 없었다는 듯.
이 사감은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언제나 시작과 동시 본론으로 들어가니 대비할 시간이 없다. 그는 사감이 있을 저편 방향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사사로운 감정 담긴 불손한 눈빛 따라르하는 것이다. 나름의 불만 표현은 적당히 그만두고, 그는 발을 내딛었다. 우선은 감을 잡아야겠으니 힘 실어 딛지 않고 앞쪽의 땅 가볍게 눌러 보기만 하려 했다.
이건 보통의 땅이다. 운이 좋아 다행이지만 함정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눈 어두우니 보면서 분간하는 것은 무리고, 보기에는 감쪽 같은 구덩이라면 파내어진 땅에 겉만 얇게 덮인 구조일까? 이런저런 추론을 하며 또 다시 발 들어 앞의 바닥을 툭 쳐 본다.
까딱 고갯짓하며 그가 가볍게 대꾸했다. 사감은 퍽 궁금한 눈치로 보였지만 유현이라고 해서 제 도술 실력의 이유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그가 관심을 가진 대상은 타인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그다지 궁금하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제 뱉은 말마따나 지금까지는 우연일 수도 있다. 유현은 혹시라도 발밑 무너질 상황에 대비하고 다시금 땅을 밟는다.
겉으로는 태연히 말하며 평화롭게 풀렸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저 날로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름 모를 신수가 주먹에 힘 주는 것 보고 고민한다. 맞서야 하나. 도망쳐야 하나. 그걸 고민한 시점에서 패착이었는지. 순식간에 뻗쳐온 그 주먹에 다시금 얻어맞았다.
"윽! 형제 싸움은 싫고. 그 형제의 반려는 쥐어패도 좋다 이거요?"
좀 얌전히 굴고 싶었으나 연달아 맞으니 아무리 저라도 열이 안 뻗칠 수가 없다. 그래. 이래뵈도 적룡이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그의 형제이니 버릇없이 굴고 싶지 않았는데. 계속 맞으면 참기 힘들다. 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말로 하면 좀 들어! 이 빌어먹을 신수들!"
맞은 팔이 엿 같이 아팠지만. 아마도 무언가 흘러선 안 될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한 방 정도는 먹여줘야 속이 시원하겠다. 그래서 저도 주먹 꽉 쥐고 내질렀다.
또다시 맞지 않는 주먹에 이를 악물었다. 오늘 정말 안 따라주는 날이구만! 욱하는 성질 튀어나오기 전에 급히 뒤로 몸 물렀다. 잡으려는 손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피하는 그 몸짓 뒤로 무언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진다.
"그럼 오라고 부르기라도 하시던가. 언질? 그 때 내 들은 말은 수업 때 몸 잘 사리란 말 밖에 없었소. 단지 그 즈음 자주 가는 수업이었다고 홀랑 가버린 쪽도 잘못한 거 아니오? 수업이 한두개도 아니고! 수업 들은 날이 하루이틀도 아니거늘!"
몸의 성질 막아도 정신의 성질머리는 막을 수 없었는지 제법 날카롭게 말 튀어나갔다. 그 짧은 사이 숨 받친 듯 몰아쉬며 주먹 내지른 팔 늘어뜨리니 두루마기 소매 사이로 뭔가 흘러내렸다. 희고 얇으나 군데군데 붉게 물든 천- 붕대라 불리는 그것 스윽 흘러내리더니 왜 있는지 알려주듯 붉은 피도 뒤이어 흘렀다. 늘어뜨린 손끝에 금방 맺혀 후둑 떨어질 정도다. 이제보니 잡는 것 피할 적 바닥에 흘린 것도 피다. 방금 맞아서인지. 혹은 이미 다쳤던 것 터진 건지. 알 수 없는 상처를 소매 위로 꽉 움켜쥔 온화 고개 들어 말했다.
"그 도사가 어디서 뭘 하건 뒤졌건 살았건 내 알 바 아니오. 허나 그건 알아야겠소. 내게 뭘 원하는 거요? 다 내놓으라 하면 두말 할 것 없이 거절이요 놀이상대가 되라 하면 그것도 거절이오. 일방적으로 놀려지는 것 따위 견딜까보냐."
지금의 온화에게 그 외의 신수도 도사도 다 안중 외였다. 그러니 현진 도사가 어찌 되었건 일절 궁금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저를 이리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팔을 소매로 감쌌다. 그런 것 무색하게 금방 붉게 물들고 있었지만.
재미없는 인간이라. 재미로 자신을 판단한다는 점에서 번지수 하나는 지독히도 못 찾았다. 거래를 제안하는 점에서 재밌는 녀석이니 뭐니 알 게 무언가? 흥미를 끈다면 좋겠다마는 그것보다는 거래의 질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가치의 무게를 매다는 법을 배워야 한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서서히 입술을 깨물게 된다. 경중을 잴 필요가 있었구나, 귓등으로도 듣고 싶지 않던 빌어먹을 사람이지만 이 말 하나만큼은 쓸모가 있었구나.
"고작, 학당을 보자는 이유 하나로 너머를 들여다보는 눈을 준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나.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거늘."
그 너머에 무언가가 필시 있을 것이다. 아니면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 영원이 아닌 한 번일수도 있고. 뿌리 깊은 불신이 떨어지지 않는다. 육 년을 봐온 사감에게도 불신의 가시를 세우는데, 이방인을 향한 가시가 서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가시가 극에 달한다. 눈을 가늘게 뜨며, 표정은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딴 것을 가져가서 무엇하지?"
진심이었다.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에서 끔찍함이 묻어나온다. ……제 형님에게 정인 생겼다고 해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을 테지.
"여의주 하나 쥔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질 줄 아는가? 어림없는 소리, 보패를 쥔다 한들 달라지지 않을 것인데 그런 걸 가져가리라 생각하는가? 기고만장하기 그지없군."
인간의 입이 아니다. 등골부터 끼쳐오는 괴리감과 돋아나는 소름이 무색하게 걸음은 오히려 가까워진다. 한 걸음, 두 걸음.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놓아야 하는데 무엇하러 여의주를 쥐지? 달라지는 것이 있나? 죽으면 끝인데. 적룡 이야기가 나올 적엔 오히려 웃음 짓게 되었다. 희미한 웃음기가 목소리에 어리고, 입꼬리의 끄트머리만 미세하게 올라간 수준이지만.
"내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하였지……. 차라리 용에게 생면부지 타인의 목을 수도 없이 바치든 내 몸뚱이 처먹으라 하든 그렇게 간곡히 빌며 해결하고자 하였지만, 이젠 아니다. 애초에 웃놈들이 필요하지 않았어……. 내게 주어졌기에, 응당 해야 하는 일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던 게야. 그러니 네 생각을 하는 법도, 그 너머의 추측도 죄 틀려먹었다."
오만하고 신경질적이며, 한없이 예민한 어조였다. 역시 춘 사감 말이 맞다. 신수와 인간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데 이런 존재들과 이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앞에 다다랐을 적, 그리도 곱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부드러운 움직임과 달리 당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손등으로 후려치려 들었다.
"내 보기에 네 퍽이나 안타까운 나머지 그만."
보기 흉하니 그 입 좀 다물라는 의도였으나 그 과정이 심히 날카로웠다.
"나는 그쪽의 눈도, 여의주도, 적룡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얌전히 입 다물고 잡아가기나 해. 실랑이할 시간에 다른 학생 여럿 잡았을 터인데 아깝지도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