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고 휘둘렀지만 어찌어찌 제 역할은 다 한 모양이었다. 부들거리는 팔에 힘 주어 버티고 있으니 저 위에서 아회 목소리 들리고 곧 무언가 베이는 소리 이어진다. 그리고 흐르는 검은 피. 무언가 잘 되긴 되었구나. 춘 사감 물러나는 기척에 짓눌렸던 몸 추슬렀지만 잠시간은 다시 역린 드는 것조차 힘들 듯 싶었다. 잠깐만 한 숨만 돌렸으면 싶은데. 그럴 틈 주지 않겠다는 듯 거센 불길 덮쳐왔다.
"흑. 아윽!"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불길 맞아 고통에 비명 내질렀다. 그 와중에 품 속 목화 지키려 남은 두루마기 자락으로 덮고 그 위에 제 팔로 감쌌다. 그나마 팔다리 덮던 두루마기 없으니 드러난 팔다리 고스란히 불길에 내주었지만. 한 번 데인 몸 두 번 데인다고 무어 다를까. 설상가상 짓눌릴 적 바닥에 쓸린 이마나 어깨에서도 피가 흐르니. 새삼 이전 제압 때가 날로 먹었구나 싶다. 기억하는 것 하 사감 뿐이지만은.
"흐... 이보시오. 신수여. 춘 사감요! 이만하면 되지 않았소. 이만치 했으면 그만 분 가라앉히고 사감 노릇 하러 돌아올 때 되지 않았느냔 말이오. 기어이 피를 보고. 명 하나는 끊어야 성이 차겄소? 지금이라도 멈춰야- 돌아와야 저 밖의 아이들도 성하게 일어날 거란 말이요! 어! 사감이람시고 거 앉아 있으려거든! 적어도 흉내는 제대로 내란 말이오!"
당장 역린 들기 힘드니 이 말 만이라도 닿길 바라며 소리 바락바락 질러댔다. 가쁜 숨에 큰 소리까지 지르니 머리 띵하고 어지러워 나자빠질 뻔 했지만 역린으로 바닥 딛고 어떻게든 버텼다.
목을 찍어내릴 적 익숙한 감각이 등골을 무섭게 타고 오른다. 이대로 곤죽을 만들어버리면, 나 또한 일원이 될 수 있을 텐데. 그 안에 섞이면 나는─ 희열과 함께 끓어오르려는 피는 같이 떠오르는 생각으로 인해 삽시간에 식어버린다. 일순 싸늘하게 식어버린 감정 때문에 순간의 판단이 어려웠으나 그는 도끼를 거두며 한번 비틀거렸다.
"이제 대화할 생각이 좀 들었으면 좋겠군."
피 번들거리는 얼음 도끼를 내팽개친다. 얼음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자리를 잡아버리듯 우두커니 섰다. 여기서 더 공격했다간 죽여버릴 가능성도 크다. 그랬다가는 필히 돌이킬 수 없으리라.
"……."
불길이 타오른다. 아회는 지팡이를 짚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몸이 다가오지 않으면 공격도 멈추는 법. 그는 자리에서 감정을 잠시 갈무리했다. 인간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증오를 품은 신수가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사감이라 행동했는지, 하물며 그 빌어먹을 형제를 자신의 선조가 어찌 죽였는지, 마지막으로…….
"그래, 분노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오?"
목에 핏대가 섰다. 잠시 심호흡이 깊어졌다.
"분노하기 때문에, 인간의 탈을 써 사감이라 행동하던 자가 그 소명을 내팽개치고 학당 학생들을 위험 속에 빠뜨릴 수 있냔 말이오. 아무리 이 세상이 정명하지 못한 곳이라 한들 그쪽이 통솔하던, 앞으로도 통솔할 학생이요. 인간이라고 해도 그쪽을 믿고 따른 자가 있을 터이거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제 형제만 어여쁘다? 형제라 하였소? 그래, 사감도, 그쪽의 형제들도, 학생도 몇이나 더 죽어나갈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그리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살아갈게요? 학당 밖의 위험이 가득하거늘, 그런 상황에서 뭉치기 바쁠 것들이 제 감정 표출하겠답시고 배척하며 죽이려 든다고? 갈!!!"
기어이 꾸짖었다. 지팡이 쥔 손이 희게 질렸다. 불이 두루마기 자락에 옮겨붙고, 그 순간 아회는 눈을 부릅 떴다.
"언제까지 세상을 외면하고 살 게냐! 대체 무얼 바라느냐, 인간에 대한 증오요 복수냐? 그러하면 네 학당에서 마음껏 날뛰어라. 그런 뒤에 어디, 홀로 감당해보거라. 농질이 학당에 나타났을 때 가만히 손가락만 빨며 학생에게 떠맡긴 주제에 다시금 돌아오면 퍽이나 잘도 대응하겠구나. 왜, 농질도 죽일 터냐? 그렇기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주제에 무얼 한다고? 이제 네 형제 중 하나라도 죽어버리면 네 탓이겠구나. 아니하더냐? 영문도 모르고 일 떠맡겨져 농질 대신 상대하던 학생들이 없으니 말이다. 자, 각오가 됐다면 어디 해봐라. 춘인지 사자 대가리인지 알게 무어냐. 내가 신경 쓸 것 같더냐?"
그 목이 꺽이고 떨어지고! 산예가 거칠게 으르렁거렸습니다. 당신들의 말에서 무언가 흥분해서 숨을 헐떡이던 산예의 숨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합니다. 힘이 빠지기 시작한 듯 합니다. 온화의 등 뒤에서 전해지는 무게가 점점 가벼워집니다. 목화는 삑삑 소리를 내면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아회 쪽으로 뽀르르 뛰어가기 시작합니다. 흰 털이 검게 물들었습니다. 아회 앞으로 가자마자, 온 몸을 털어서 다시 하얗게 돌아왔군요.
' ......... '
사자 머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春사감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는 미안한 것 같으면서도 화난 것 같으면서도 슬픈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 .... 미안하다...... '
불길이 잦아듭니다. 春사감이 당신들에게 사과하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녀의 눈도 인간의 그것으로 돌아왔습니다. 굉장히 미안하고 부끄러운 듯 합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당신들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아회가 연달아 소리친 것이 때마침 잘 들렸는지. 등 위의 씨근거림 줄어들고 무게도 점점 가벼워져간다. 슬슬 몸 일으킬 수 있겠다 싶을 쯤. 품에 있던 목화 빠져나가는 것 보고 피식 웃었다. 뒤도 안 보고 가네. 저 털뭉치 녀석. 그래도 다친 곳 없어보이니 다행이다. 그리 생각하는 제 몸 거진 반신이 데이고 긁혀 엉망이었으면서.
"아이고 죽겠다..."
뻐근한 등 툭툭 두드리며 어떻게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다 데인 팔 스쳐 따가움에 파르르 떨었다. 얼른 찬물이라도 끼얹지 않으면 흉이 크게 남을 듯 싶은데. 당장은 나갈 힘도 안 들고 이대로 나가기엔 조금 아쉬웠다. 겨우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와 미안하다 하는 춘 사감에게 어쩌면 물을 수 있을 지도 몰라서. 역린 든 채로 비실비실 몸 끌어 춘 사감에게 다가갔다. 지친 얼굴로 춘 사감 물끄러미 보다가 덜 데인 팔로 안고 등 토닥여주려 했을 것이다. 나직하게 그런 말도 하고.
"되었소. 이쯤에서라도 돌아왔으면."
기어코 역린으로 그 목 끊는 일 없어 다행일 뿐이라고. 한숨 내쉬며 말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아. 그러니까 무엇 물어야 하던가. 여즉 열 내리지 않아 몽롱한 정신으로 머릿속 뒤적이다가 겨우 물음 하나 끄집어냈다.
"그. 무엇이냐... 아. 목 떨어졌다던 당신네 형제. 찾고 있다 들었소만. 내 도울 수 있는 방도 있으면 좀 알려주시게. 이리 날뛰던 것 진정시켜 주었으니 그 정도는 해줄 만 하지 않나?"
물어야 하는게 이것 맞던가. 멍한 정신에 잠깐 넋을 놓았다가 흠칫 정신 차린다. 그 김에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내가 가진 것 분명히 건네받은 것이니 오해 마시게. 훔친 것 아니고 반려의 증표로 받은 것이네."
한 걸음씩 걸어가 산예, 사감에게 가까워진다. 이글거리는 온도, 팽배한 분위기와 거칠게 으르렁거리던 소리가 점차 진정되며 불길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삑삑 소리와 함께 답지 않은 조그마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대화가 통했던 모양이다. 그는 단시간에 체력을 쏟은 탓에 자리에 주저앉듯 하며 손을 벌렸다.
"……얌전히, 잘 있어주었습니다, 목화."
목화가 새까맣던 몸을 털자 다시금 하얗게 돌아오는 것에 웃음이 날법도 한데 기력이 쇠하여 그 조그마한 몸 양손으로 겨우 쓰다듬어주는 것으로도 벅찼는지 잠시 손길이 느려졌다. 그리고 사감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사감님께서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디 용서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해 어딘가 체념한 것에 더 가까웠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에게 사과를 받아봤자 큰 의미가 없다는 듯. 그는 눈을 다시금 감아 세상을 외면했다. 어차피 모든 삶이 다 이런 법이다. 인간이 그러하듯 신수도 결국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감정은 너무나도 쉽게 잿더미가 된다.
"……대체 왜 그랬습니까?"
아회는 근본적인 것을 질문했다. 대체 왜.
"진정으로, 형제를 잃었다는 그 사건으로 비롯되어…… 인간에 대한 혐오를 품은 것이, 이번 사건의, 아니, 지금까지 저희가 사감님들을 상대하게 된 방아쇠가 맞습니까? 다른 외부적인 요인이 있던 것이 아니고?"
불현듯 목화가 아프다 하였던 것을 떠올렸다. 신수가 아프다 했는데, 사감들도 신수라면 영향이 있던 것은 아닐까 싶었기에.
능소화와 금잔화 두어 송이가 덧없이 땅에 꽃잎 나풀거리며 그 몸 투신하기가 무섭게 혹여라도 거기서 더 떨어질까 싶어 아회는 꽃다발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계절마다 피는 꽃은 영원한 겨울이나 다름없는 북부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볼 수 없었거니와, 여름의 꽃은 특히나 귀했기 때문이다. 이런 꽃을 한 송이라도 더 떨어뜨렸다간 다시금 돈 지불해야 하는 일 생길 것이고, 말 많은 꽃집 주인의 수다에 질려 기 떨어질 것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것 같다.
"그걸 어떻게……."
다만 중한 것은 그게 아니다. 꽃다발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소속을 서슴없이 얘기하는 제법 익숙한 듯 어딘가 낯선 목소리 때문이다. 누구지? 아회는 기억을 더듬으며 몸을 잠시 움츠리더니 뒤로 반 걸음 정도 물러섰다. 반쯤 벌어진 흰 비단 너머의 표정은 여전히 눈 곱게 감겨있고 평온했으나, 일자로 앙다문 입은 경계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면 탐탁지 않은 시선이 드러나겠지.
"그러니까, 영 사감님…… 이셨군요."
기억을 더듬으며 보이지 않는 털 부풀리기도 잠시, 아회는 학당 사감이라는 소리에 그 목소리가 입학식 때마다 들어오던 자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 한 번 거하게 남기고 싶지 않느냐, 이번에도 물어보았던 그 사감. 꽃다발을 안고 경계하듯 굳어있던 몸에 긴장이 풀리고, 꾹 다물린 입매도 천천히 힘이 빠져간다. 한 손을 들어 반쯤 드리워졌던 비단을 온전히 걷으며 감긴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비단의 매무새를 정돈하는 손 때문에 눈이 어느 정도 가려졌지만 시야를 제한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아무래도 자주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기억이 쉬이 떠오르지 못했으니, 경계 누그러뜨리기가 무섭게 잿더미처럼 감정 다 타버려 삭막한 목소리 흐른다. 원하는 꽃 종류와 더불어 새로 챙겨준다는 말에 아회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탁한 은빛 눈이 잠깐 당신을, 정확히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영 사감님께서 가르치는 학생들은 지팡이로 도술 비슷한 것을 사용한다고 하였지. 지금 손에 지팡이를 쥔 것 같으니 그 요사스러운 힘쓰시려는 것인가. 아회는 잠시 입 다물다 다시금 시선을 내려 땅에 떨어진 꽃을 바라보았다.
"능소화와, 금잔화 한 송이씩이면… 충분합니다만…… 제가 정신이 없어, 부딪친 잘못도 있습니다."
재차 사과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보니 무더운 날과 어울리지 않게 옷차림은 겨울에 입어야 하는 용도처럼 도톰한 편에 속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