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독기를 받아내야 한다. 라. 결국 그를 대신할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 사감 본인이 그리 말하니 더는 물을 것도 없겠다. 방법이 있다 한들 문제만 첩첩산중이로구나. 자꾸 먼 곳만 보게 되는 것 같아 조금은 앞을 보려고 해도 당장 앞은 캄캄하니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 연이어 들려오는 부정적인 말들이 족쇄가 되었으면 되었지 가슴 짓누른 기분 덜어주지는 않은 탓이기도 하다.
신수도 못 찾는 걸 인간이 찾을 수 있겠냐. 불가능이다. 제 물음에 무언가의 제약 있는 듯 대답은 할 수 없지만 단지 약조였노라 하는 말까지 듣고. 온화 작은 한숨 내쉬었다.
뭐가 이리도 복잡하고- 복잡한 건가. 끽해야 인과 두어가닥 엉킨 줄 알았더니 너무 커서 다 안 보이는 것이었다. 거대해보이는 인과의 덩어리 앞에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제가 감히 손 댈 수 있는 것인가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도 쓰지 않고 이대로 두는게 맞는가? 아직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못 해봤는데. 아. 기껏 풀렸던 심기 다시 꼬여간다. 모순적이게도 제 심기 거스른 것은 그의 태도였다. 안된다 할 수 없다 하며 그저 늘어진 이 모습. 전혀 그 답지 않아보이는 모습에 다시 삐죽해지려는 말투 조금 다잡고 말했다.
"불가능이라. 그러면 뭐. 일개 인간이 신수의 심장 취하고 꼬여내어 여의주까지 받아낸 건 불가능한 것 아니었고?"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서.
"그래요. 말 못 하는 거. 무슨 이유가 있겠죠. 약조했다는 건 들었으니 그건 내가 수소문을 하든 뭘 하든 알아내던가 하면 돼. 그럼 질문을 좀 바꿔볼까요? 나는 유야무야 흐리멍텅한게 싫거든."
여태 흐르던 음울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제법 산뜻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제 품에서 하 사감 떼어내려 했다. 완전히 밀어내진 않고 얼굴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 떼어내고 그의 어깨에 가벼이 손 올렸을 것이다. 마주한 제 얼굴 사뭇 진지하나 어째서인지 장난기 다분한 얼굴이었겠지. 무언가를 참는 듯. 혹은 아무래도 좋은 듯. 재차 싱긋 웃기까지 하곤 그 질문이란 것을 꺼내었다.
"당신. 진정 나를 반려로 생각하고 정녕 나와 함께 살고 싶다 바라나요?"
새삼 물을 것 있나 싶은 물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온화 말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여느 인간과 똑같이 욕심이 많고 이미 가진 것 놓아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아요. 그러니 홀로 나가는 것 따위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바라지 않는다면- 굳이 나가서 함께하는 것까지 바라지 않겠다면 나는 홀로 나갈 것이요 허나 홀로 살진 않을 거에요. 몇이나 되는지 모를 시간 혼자 살아야 하는데 다른 반려 만들지 말라고? 웃기지 마. 혼자 나가면 당신 따위 깨끗이 잊고 새 반려 맞을 거야. 신수는 몰라도 인간은 그렇거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져 이윽고 잊어버려. 내 졸업까지의 시간이 당신에겐 찰나라고 했었나? 그렇다면 나는 학당 밖으로 홀로 나설 적 그 지면 딛는 것만으로 잊어주겠노라 단언해주지. 반려로 맞아놓고 생이별한 과부로 만들어버리는 신수 따위 내 인생에 없었던 것처럼 잊어주겠어."
쉼 없이 긴 말 웃으며 쏟아내고 한 숨 고른다. 들끓으려던 감정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긋하게 덧붙인다.
"그러니. 나갈 수 있냐 없냐. 불가능이냐 아니냐. 그런 사실적인 건 다 집어치우고 당신 마음 가는 대로 대답하세요. 솔직하게."
"내 훔치긴 무얼 훔쳤다 그러오. 가령 훔쳤다 쳐도 그이가 가만 있겠소? 하나도 아닌 둘인데?"
놀랐는지 당황했는지 혹은 불신해서인지. 제 말을 부정하며 훔쳤다는 춘 사감- 사자 머리를 한 신수 향해 말했다.
"정 의심스러우면 당신네 형제 불러다 물어보소. 내가 아닌 그이 당사자한테 물어보면 믿을 수 있겠지. 아니 그렇나? 아니면 지금은 결을 나눈 형제마저 믿을 수 없는게요?"
낄낄낄. 거침없이 말을 내뱉던 중 아회 향한 말에 고개 슬핏 기울였다. 기울인 턱 끝에서 땀방울 떨어진다.
저 이의 집안이 그랬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인데. 일단 그건 나중에 알아보고. 이제 무얼 어떡할까.
춘 사감은 계속해서 분노하고 있었다. 분노인지 원망인지 또 다른 무언가인지는 사실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계속해서 무언가 표출하고 있었으니 그걸 받아주면 진정될까 싶다. 일단 속에 쌓인 것 많아보이는데 말이나 들어볼까. 사자 형상을 한 춘 사감 자리에 앉자 저도 냉큼 바닥에 주저앉았다. 옷이 흐트러지건 어쩌건 털석 하고 앉아서 춘 사감 마주하고 제 무릎에 역린 뉘여놓았다. 그리고 크흠! 목 한 번 고르고. 좌중 들리도록 목소리 높였다.
"무엇이 그리 한탄스럽고 무엇이 그리 분노케 하는지! 내 그 원흉 아니라 알지 못 하지만은! 그 열화 지금 내 앞에 있으니 죽음 각오하고 기꺼이 들어 드리리다!"
하 사감 때는 대화조차 통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 춘 사감이라면 해하지 않고- 역린 들지 않고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무엇이 저 신수를 이토록 불타오르게 하였는가 그것 듣고 알고 풀어주기 위해 지척에 앉아 똑똑히 마주했다. 뒤를 보면서 동석한 이들에게도 말했다.
훔쳐? 무엇을? 하물며 누굴 죽여? 그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주어진 정보는 적었고, 상황은 사감이 표적을 학생들로 돌렸음이 확실했다. 여러 존재가 지은 죄를, 학생들이 인간이란 이유로 뒤집어 씌우는 것이리라. 그는 혹여 땅신령이 품에서 떨어질까, 조심스럽게 옷깃 사이로 땅신령을 고이 모셨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그렇게 나지막이 얘기하면서 그가 잠시 멈춰섰다.
"……내 집안이?"
또 이 빌어먹을 핏줄이 문제인가?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이야기에 그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무력함에 치를 떨기에는 한시가 급했으며, 이해를 요구하듯, 혹은 한풀이를 하듯 모습에 구슬땀이 이마에 맺혀 흘렀다. 인간들로 인해 변해버렸다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할 수 있다. 인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변한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신조차 뒤집히는 것이 인간의 행동임을 그는 알고 있었고, 자신이 변한 것도 인간들로 하여금 벌어진 일이었으니.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 안에 담긴 깊은 마음까지 이해할 수는 없다.
"내가 어찌 알겠소. 변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했는지, 돌아온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찌 아냔 말이오."
재가 되는 것은 여기에서 될 일이 아니거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일갈하는 소리 들렸을 적, 아회는 잠시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부적을 꺼내려던 손에서 힘을 빼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일단 듣겠다마는, 통하지 않는다면 잘 알 것이라 믿는다."
자리에 털썩 앉으려 들며 손으로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땀방울이 손바닥에 묻고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감각이 심히 불쾌하나 인내하기로 했다. 와중에 고이 모신 땅신령 더 괴로워할까 최대한 열기에서 멀어지게끔 옷깃 세웠다.
아회 앉는 기척 느껴지니 그쪽 슬핏 보고 씨익 웃었다. 저도 끝까지 어울리라 할 셈은 없으니. 한 번이면 족할 것이다. 한 번. 판단하기까지.
그리고-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게도 불길이 날아들었다. 급히 소매 휘둘렀지만 그마저도 타들어가 팔뚝 화끈해졌다. 독하게 입술 깨물고 비명 참았다. 소매 하나 홀랑 태운 불길 서둘러 떨쳐내고 성한 쪽 손으로 역린 쥐었다. 더운데 아프기까지 하니 정신 아찔해졌지만. 아직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버틸 수 있어.
"거 참... 말귀 더럽게 안 듣는 신수일세. 그리 성질 더러우면서 어찌 사감 노릇 하고 있나 몰라...!"
이 악물고 태연한 척 내뱉으며 자세 고쳤다. 한 쪽 무릎 세우고 수그린 자세로. 히익. 후우. 뜨거운 숨 몰아쉬어 정신 다잡고. 제게 달려들려 하는 춘 사감 똑바로 응시했다.
"나를 갈라 그이의 것 되찾아가시겠다. 하! 그러면 그이가 잘도 좋아하겠소. 잃은 것 되찾아주어 고맙다고 하겠구려! 내 어리석은 바람에 응해 기꺼이 반려 되어주겠노라 했던 것이 누구인지 알고!"
의식 놓지 않기 위해 부러 목소리 높이며 역린 뽑아들었다. 기어코 이걸 쓰게 만드는구나. 이번엔 당해주지 않을 요량으로 앞서 뛰쳐나갔다. 역린 강하게 움켜 쥐고 앞세워 저 춘 사감의 주둥이 꿰어버릴 작정이었다.
앉았던 것이 화근인 듯싶다. 얼마 없는 인내심을 십분 발휘해 한풀이라도 들어주려 했으나 스스로 그 기회 걷어찼구나. 그는 앞머리를 넘기던 손을 흔들듯 하며 머리를 헝클었다. 만약 자신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공감할 정도로 아량깊은 사람이었더라면 이조차 감내하고 끝까지 인내심을 시험하며 사감을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으니.
"……."
자신이 아는, 가문의 죄와는 다르다. 아니, 자신이 아는 것이 제한된 정보였다면? 그 '과정' 속에서 형제라 칭하는 자의 죽음이 있었더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으리라. 사생아니까 무엇이든 알려주려 들지 않았을수도 있다. 그렇다기엔 너무 우물 안이 아니었나? 선조는 죄 죽었는데 어찌 물어보라는 건지. 따지려 들었으나 그 방법을 알 것만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들며 부적을 태웠다.
"……학당의 일을 왜 죄다 떠맡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만."
물은 써본 적이 없어 어렵다. 다만, 북부의 혹독하던 추위를 떠올리며 날선 고드름 솟아나 진로 방해하려 들었다.
역린은 제대로 춘 사감 꿰뚫었다. 가죽과 뼈와 근육 찌르는 감각 고스란히 제게 전해졌던가. 다만 묵직함 만은 선명했기에 그 무게로 인해 놓치기 전에 서둘러 역린 뽑아내었다. 바닥에 쏟아지는 액체 힐끔 보고 허공에 역린 휘둘러 묻은 것 털어내었다. 깔끔한 동작과 달리 내뱉는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잠그면. 된다고. 슬퍼하거든 기억을 잠그면 된다고? 잊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그면 된다니! 그리 사는 것이 살아있다 할 수 있는가? 죽음은 그리도 집착하면서 사는 것은 그 따위로 밖에 못 하나? 하도 징글징글하게 살아서 기억 따윈 아무래도 좋은가 보오. 허면! 그 죽은 형제의 기억도 잠궈버리지! 왜 잠그지 않고 이리도 집착을 해! 하등 상관 없는 그저 피를 이었을 뿐인 인간이. 우리가 무슨 죄라고!"
발악인가. 절규인가. 목에서 피라도 토할 듯 격히 소리친 온화 재차 역린 겨누었다. 어쩐지 오늘은 손에 착 감기더라. 묘하게 조용했지만. 이 때를 기다린 양 손에 감겨온다. 데이지 않은 팔뚝으로 얼굴 문질렀다. 땀방울 거두기 무섭게 다시 역린 세워 춘 사감에게 달려들었다.
제대로 찔러내었구나. 소리와 더불어 비린내 코를 자극하니 아회 가늘게 눈 뜨며 단안경 너머 세상을 가늠해본다. 아예 인간의 탈을 벗어던진 모습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고든다. 요괴를 잡는다면 모를까, 인간의 탈을 쓰고 자신들을 통솔하던 존재를 때려 잡아야 한다는 말은 학당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노라 속으로 비아냥대듯 생각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저러니까 이해를 못하겠지."
슬퍼하면 기억을 잠근다. 과거 청각을 잃고 목소리와 다리까지 잃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런 것을 당연히 여기니 당연히 인간을 이해할 리가 없지.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거니와, 그럴 선택을 하느니 타인의 기억을 잠글 이기적인 존재들인데. 아회 느릿하게 손 뻗는다. 앉게 둘 수는 없다.
"하면 묻겠소. 그리 슬픈 기억을 잠글 수 있다면 인간에 대한 증오를 잠그면 되는 것 아니오?"
다시금 부적 태우며 아회 살그머니 미소 짓는다.
"혹여…… 겁이라도 나는 게요? 슬픔도 잠그고 초월적으로 승화시키며 날고 기어 인간 위에 도사린다는 신수라는 존재가, 고작 증오라는, 인간들이나 가질 법한 알량한 감정을 가지고 말이오. 인간의 손에 죽을까 싶어 겁을 집어먹지 않고서야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을 리가 없을 터라 생각하외만."
북부의 추위를 되새긴다. 앉는 자리 한차례 얼어붙게 만들듯하며 얼어붙은 자리에서 날선 창이 솟아오르게끔 하려 들었다. 찔리고 싶지 아니하다면 강제로 자리 뜨게 만들 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