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손차양 만들고서도 눈이 부신지 가늘게 뜬 눈 거의 감다시피 한다. 비릿하면서도 짠, 습기 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혹자는 그것을 아름다운 정경 정취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통 그러지 못하겠다. 물비린내부터 익숙지 않음은 둘째치고, 가뜩이나 여름이라 더운 와중에 해안 인근은 겨울탑 출신인 그의 기준으로는 너무나도 습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것까지 다 감안하고 정한 선택인 것을. 이제 와 후회하지는 않으나,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우선 그늘 자리부터 찾았다. 화유현 같은 인간일지라도 생리적 불쾌감만은 생생하게 느낄 줄 알아서다. 거리가 복잡하니 어디에 발 걸리거나 누구와 부딪히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고.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온 봉사의 시간. 턱을 만지작거리며 어디로 향할까 고민하던 그의 눈에 피로 쓰인 의뢰서와 눅눅해보이는 의뢰서가 보였다. 이런건 누가 보낸거람. 눅눅한건 바닷가라 그렇다고 생각해도 피로 쓰인건 누가봐도 나 불길해요, 하고 얘기하고 있는듯 했다. 아무래도 이런곳은 좀 곤란하지.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그는 오랜만에 평범하게 가게 오픈을 해보기로 했다.
주변 살피며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태반이 생선 이야기이니 뭍사람이고 물고기 따위에 관심 없는 그에게는 무의미한 내용들이었다. 잠깐 쉬었으니 바다로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불쑥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돈 있냐고? 대뜸 이런 말부터 하면 일반적으로 무슨 의미더라? 갈취?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무언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자이거나, …어쩌면 단순히 돈 꾸어 가려는 행인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리고 사실 어느 쪽이든 유현이 돌려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는 눈 느릿하게 깜빡이며 상대를 쳐다보다, 고개 느긋하게 기울였다.
"없네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없다. 그야 의뢰 수행하려 나온 길인데 거금 지니고 있을 리가……. 물론 만일을 대비해 몇 푼 정도는 소지하고 있긴 하지만, 넉넉한 수준은 전혀 아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알 도리가 없다. 그냥 눈을 감고 모르는 척, 지나가 버리면 되는 것을 또 이렇게 고민하게 된다. 타인의 죽음 따위 자신에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 곁의 사람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그 명을 달리하고, 사라지고. 혹은 자신의 명을 꺾어내기 위해 기를 쓸 텐데. 어째서 자신은 그런 타인 앞에서 자신의 결정을 망설이는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멋대로 생각하게 된다. 신이 뒤집어진 이유를 떠올리고, 자신이 앞으로 해낼 일을 합리화했다. 뒤집힌 것은 정명하지 못한 것을 정명하다 받들게끔 하기 위함이리라,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현재 심상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쓰다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곳이 머리구나, 이곳이 머리카락이구나. 바스라질 것 같았던 목소리 탓에 쓰다듬는 손길이 영 자연스럽질 못하다. 뻣뻣한 손길을 뒤로 두 번째 패배를 인정했다. 그렇지만 화가 나거나 괴롭지 않다. 체념의 감정도 아닌, 기묘한 감정의 연속이었다. 무엇인지 정의하기엔 지나치게 평온하여 마땅한 이름 붙일 수 있나 거듭 생각하게 되는.
"……꼴이 엉망이구료."
사실 모른다. 그렇지만 꼴이 엉망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울음을 그렇게 쏟아냈는데 엉망이지 않을 리가. 고개를 끄덕이듯 살구색 빛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 눈으로 담아보다가, 아회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은색 눈동자가 세상을 다시금 거부하고 암흑이 드리우자 평온함이 얼굴에 깃든다. "이길 수 없겠지?" 어딘가 뻔뻔하게 흐려진 말의 끝을 정의하고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었다.
"그리 셈 치겠다면야. 이쪽 또한 원껏 물어보도록 하지."
아직 감정의 여파는 다 흩어지지 못했다마는, 한결 평온할 수 있었다. 재의 잔불이 꺼지는 것 쉬운 탓이다. 편하게 고쳐쥐는 손길에 이걸 어쩐다 싶다가도 가만히 손 놔둔다. 그래, 무르기로 했으니 봐줘야지. 그러다가도 결국 한숨 푹 쉬어버리는 것은, 당신의 장난스러운 이야기 때문이다.
"에이잉, 신수 님이 기거하고 계시니 적당히 간식거리나 챙겨 오거라."
동침은 잘 모르겠고, 간식 먹을 거면 오든지. 그런 느낌이었나? 제법 얄궂은 사람이다. 아회는 느릿하게 남은 손 허우적거려 손가락 두어 번 까딱였고, 지팡이는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앙상한 손아귀에 안착하듯 나타났다. 지팡이를 땅에 한 번 짚고 디딤대 삼듯 두어 번 툭툭, 땅을 쳐보더니 이내 자리 떠나기 전 하지 못한 말 있었다는 듯 입 벌렸다.
"네 탓이 아니다."
늘 그렇듯 어떤 의미인진 알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마찰 빚었던 일에, 혹은 당신이 보여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깜깜한 카페 내부를 보며 그는 이마를 짚은채 중얼거렸다. 불을 꺼놨다고해도 주변은 한낮. 창문으로 태양빛이 들어가서 밝아야할 이곳의 내부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거 정말 괜찮은걸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필연적으로 커다란 키일 수밖에 없다. 제 눈높이에서 고개 돌렸다가 얼굴이 아닌 목언저리부터 보게 된 그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입가 슥 닦는 모습으로부터 대단한 위협이 읽히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갈취는 아닌가? 그는 미련 있어 보이는 상대를 멀뚱히 바라보다 제 품을 뒤적였다. 이내 동전 두어 푼이 나와 유현 손에 쥐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