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궁금한 것이라면 절대 참지 못하곤 하는 유현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자제하기로 했다. 지금은 객기 부릴 때가 아닌 듯하고, 사감의 경고에서부터 추후의 가능성을 읽어내었기 때문이다. 묻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지금'은 갖지 않는 게 좋다고 했으니 어쩌면 나중에는 물어 볼 기회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음'은 기대해도 된단 말씀이겠죠?"
싱긋 그려진 미소가 왜인지 얄미운 미소를 닮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순히 발 돌려 학당 안으로 들어선다. 수상하다 생각하기야 했지만, 설마 저 무엇인가가 직접 언급했던 존재가 추 사감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 해서 끔찍하단 생각이나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감들의 정체는 정확히 무엇이며 저 형제란 존재들이 대체 몇이나 있을까 하는 사실들이 궁금해졌을 뿐이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유유히 그들을 등지고 자리를 떠난다.
자신이 누구냐는 반문, 그에 궁기 당신의 이름을 말하려던 연은 입을 벙싯대다 그만 다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침묵한다. 역으로 당신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며 가현과 이야기했던 것. 아무렇지 않게 당신을 대해야 했던 것에 또 멍청하게도 제 감정을 다루지 못하고 이렇게 나서버렸으니. 연은 고개를 젓는 궁기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다가 답한다.
"나도 알아. 그냥 그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서 그래."
학당의 문이 닫혀, 오랫동안 열리지 않음에 밖에서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테니. 또다시 진심일지 모르는 달콤하고 따뜻한 말을 속삭임에 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위험한 사람이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더욱 짜증이 나는 요소였을까. 연은 앓는 소리를 내다간 말한다.
"정말 내가 위험에 빠지는 걸 원치 않는 것 뿐이야? 궁기, 당신을 쉽게 믿을 수 없어서 그래."
하고서 연 고개를 들며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본다. 말 끝을 흐리며 연은 시선을 제 발치로 내리깐다.
덕과 선행을 쌓으면 언젠가는 등선하리니. 다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가 등선할 수 있는가? 아마 안될 것이고, 기회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등선할 생각은 없다. 땅신령의 선택을 받았으니 지선 되고자 한다면 그 앞날이 수월할 터인데도 큰 관심은 없으니 지선의 자리를 바라는 자가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리라. 그렇지만 어찌, 이미 막중한 삶이 주어졌는데 그 길을 회피하고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운명을 피하는 것은 겁이 많은 자의 발악에 불과하다는, 그야말로 고리타분한 고집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
하여 땅의 일이든 하늘의 일이든 일절 관심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억지로 관심을 주니, 요괴 사냥은 신체 능력이 커버가 안 되고, 카페는 한때 있었던 일로 다시는 발 들이지 않은지 오래고, 선물 고르기는 령도라서 싫었다.
천선을 위해 도달한 곡옥. 아마 그 순간부터일 터다. 그는 거부감이란 것을 흑룡에게서 주로 느끼곤 하였으나, 오늘은 유달리 그 거부감이 심했던 것이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든 생각이 있었다. 제사장. 제사장의 호위 가문이었기 때문인지, 그리고 겨울탑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피 깊은 곳에서 각인된 무언가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
지금이라도 물러서는 것이 좋을까. 어차피 다른 누군가 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대로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 또한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겨울탑 사람, 천선은 어떻게 보면 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 겨울탑인 자신을 보면 죽이려 들까? 그렇게 죽으면 학당은 역시 아무렇지 않게 사람 하나 죽었다 살아가겠지.
그렇다면 자신은 그 사실에 미련이 없는가? 정녕 미련이 없는가? 거사를 치르지 못하고, 제 형에게 뇌까렸던 그 저주를 정녕 속에 담지 않고 편히 눈을 감을 것인가?
"…하."
놀랍게도 아무련 미련이 들지 않는다. 어차피 질 것을 알기 때문인가. 이미 신의 진노는 자신의 핏줄로 한 번 샀고, 두 번은 몸에 받아들였다, 신은 필히 부정한 자신이 발 들이면 죽이려 들 터이지. 그렇다면 그 뜻대로 죽어주는 것이 옳을까. 어차피 인간이 날뛰는 것이라 신의 손에 죽으러 가면 당신은 쓸모가 없었노라 생각하며 어련히 잊지 않을까……. 애초에 내가 여기서 태어나고 싶은건 아니었는데. 나도 남들처럼 령도에서 유유자적 살아가거나 곡옥에서 축복 받으며 살고 싶었는데, 하물며 천부에서 시끌벅적하게─ 가만히 문 바라보며 한때 수도 없이 했던 생각만 하다 돌아섰다. 어찌해도 태생은 바꿀 수 없다.
"북부 전체를…… 산제물로 바쳐도 머잖아 흥미를 잃고 새로운 북부를 만드실 것을 감히 압니다."
당신의 이름을 말할 적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이, 못 들었을 것도 아닌데. 뭐라도 반응을 해줬으면 하여 연은 고개를 들어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면 당신의 가면 뒤 숨겨진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마냥. 정말 자신의 눈앞에 있는 당신이 그렇게나 유명하다던 궁기라니. 연은 당신의 말에 투덜 거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조언과 선물이 도움이 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당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잖아."
당신이 궁기인 걸 알게 된 이상, 어떻게 그 호의를 순순히 믿을 수 있겠어? 연은 다시 한 번 당신의 이름을 강조하여 말하고선 당신의 반응을 살핀다.
그 말대로 품었던 예상은 당신의 이어진 행동들에 확신으로 변한 듯싶다. 참 백룡답게 굴었다는 말에 늘봄을 고개 끄덕임으로 동의했다. 새하얀 머리카락 만큼이나 새하얗게 물든 듯한 속내가 방금 몰아친그 질문들로 인해 겉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을 가감없이 목도한 기분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늘봄은 유현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대체 염치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정확한 이유를 듣고 나서도 샐쭉한 기색이 가시질 않는다. 빼도 박도 못하게 성가신 인간 확정이다. 정작 본인은 그런 걸 신경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백룡인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방금 그 말로 확신...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백룡의 화유현 씨. 아무리 그래도 후자는 별로 되고 싶지 않고, 너랑 친밀하게 말을 놓고 싶으면 더 친해지면 된다는 거지?"
딱 부러진 거절에 불만이 잠시 불꽃처럼 일렁였으나 몇 초 사이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었는지 늘봄의 눈은 곧 파동이 멎은 샘처럼 안정을 되찾는다. 뒤이은 목소리는 사뭇 활달하다. 오락가락이 초 단위로 진행되니 당신이 따라가기 버거워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늘봄 본인조차 스스로 날뛰는 감정을 정리하고 가다듬기 어려울 때 많았기 때문에.
"그럼, 그으럼... 아직 진짜 무척 친한 친구는 무리지만, 그냥 친구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 만난 것도 인연이겠다. 구슬 찾아준 것도 고맙고. 친구는 많을 수록 좋고... 그렇지 않아?"
짐짓 동의를 구하는 이유는 직설적으로 친분을 요청하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쑥쓰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늘봄은 머쓱한 듯 제 볼을 한번 긁적였다가 눈을 또렷하게 뜬다. 나름 용기 내서 말한 건데 거절은 거절이다! 푸른 눈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짝였다. 성가시기 이를 데 없다. 질려서 떠나가도 이해될 수준이다. 정말 그 말대로 동갑이 맞나 의심될 만큼 유현과 늘봄의 정신 연령은 한없이 차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그리고 너도 내가 표현력 좋다며? 표현력 좋은 친구 하나쯤은 둬도 괜찮지 않아? 으으, 이건 너무 억지였나. 사실 내가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다른 기숙사 친구 있으면 재밌잖아? 재밌을걸?! 난 재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의도치 않게 애원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늘봄은 볼이 약간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뭔데, 뭔데! 어떡해, 나 또 도 넘게 날뛰어 버렸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