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되기 전에. 이리 극으로 치닫기 전에 더 많은 대화를 했었어야 했다. 아니면 더 거리를 두었어야 했다. 바라지 않을 것이라면. 기대하지 않을 것이었다면. 어떤 상황에도 예외를 두지 않고 대했어야 했다. 감정과 충동으로도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두어 저를 당신을 각자를 지켰어야 했다. 지금에 달하지 않을 수없이 많은 방법 있었다. 그러나 항상 모든 방법이 해결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첫 마디부터 참지 못 하고 내지른 온화와 달리 아회 목소리는 끝까지 그 선 유지할 것만 같았다. 온화 무얼 해도 눈 뜰 만치 놀라지 않았던 것처럼. 눈 떠버린 지금은 언제라도 이 자리 일어나 가버릴 것처럼 보였다. 아. 처음부터 그랬다. 잿더미가 왜 잿더미인가. 언제라도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이 잿더미 아닌가. 사라진다. 또 누군가 제 곁에서 사라져. 아회에게 거짓 고하지 않으면서도 그리 말한 것은 그 무의식의 발로였을 지도. 혹은.
...온화 그러한 것처럼 아회도 다그쳤다. 즐긴 것이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하였느냐. 온화야말로 왜 그랬느냐. 동정. 호기심. 그 따위 것으로 그리했냐. 가지고 놀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비수가 사정없이 날아든다. 아회의 말은 아팠지만 그 원인은 저였다. 제가 한 짓이다. 그 순간의 치졸한 감정에 휘둘려 충동적으로 저질러 버린 결과였다.
"아ㄴ... 아..."
아. 아아. 말을 해야 했다. 적어도 제가 그런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라 하고 싶은데. 생각과 다르게 입은 그 동안 담아두었던 것들 쏟아내기에 정신없었다. 저와 당신은 말을 너무 아꼈다. 그 동안 아낀 말이 너무 많아 이리도 격히 부서진다. 제 바람이. 당신의 바람이. 상충할 것은 당연한 것을.
일방적으로 극렬히 흐르던 공기 터지는 것 찰나였다. 이 역시 단 한 번도 듣지 못 했던 아회의 고성이었다. 순간 어찌나 놀랐는지 울음도 숨도 그쳤다. 눈물에 엉망된 얼굴과 표독히 일그러진 얼굴 마주쳤다. 잠깐이었지만 너무나 선명했던 표정에 숨이 역으로 들이쉬어진다. 그 뒤로 들리는 말 반은 웅웅거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나 기묘하게도 머리는 다 이해했다. 지금까지의 모든게 그것이 아회의 방식이었노라고. 그러한 연유로 그러할 수 밖에 없었겠구나. 이해하지만 이해를 받아들일 정신이 되질 못 했다. 머리로 할 말을 생각하는 것 보다 아회 일어나 가버리려 한다는게 더 크게 와닿아 버렸다.
"나도... 나도 맹세하면 당신 지킬 수 있게 해줄까 싶었어. 나. 나 도술도 제대로 못 쓰고. 멍청하고. 재주도 없지만... 그렇지만 당신 아끼는 마음 참말이니까. 나도 단 한 번도 허투로 대한 적 없었어... 항상 소중한 오라버니야..."
고성에 그쳤던 눈물 다시 왈칵 차올라 떨어진다. 저러다 다 쏟고 말라 바스러지지 않을까. 제 옷 겨우 움켜쥐고 있던 손이 부들거리며 아회에게 향했다. 아회의 손이든 팔이든 바짓가랑이든 잡히는 것 쥐려고 했을 것이다. 피하면 고꾸라질 듯 위태로이 몸 일으키기도 했겠지. 다시금 시작된 울음에 떨리는 목소리 말한다.
"...ㄹ다면... 위험이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당신도 나 지켜주면 되잖아. 그렇게 위험하면 멀어지면 안 되는 거잖아. 혼자 두면 안 되잖아. 왜. 왜 위험하다면서 나만 두고 가...?"
다 제 잘못이다. 그리 바란 것이 잘못이다. 멍청한 고물 주제에 과한 것 바란 탓이다. 누구에게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해놓고 제 손으로 다짐 깨버렸으니 응당 받아야 할 대가인 것이다. 이 어찌 어리석고 아둔한지. 그럼에도 아회 가지 말라 잡으려 하는 꼴이 추잡스럽기도 하지.
"나를 가벼이 여긴게 아니라면 그렇게 가면 안 되잖아... 내가 이렇게 우는데. 울지 말라 한 마디도 안 해주는데. 그게 가벼이 여긴게 아니란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차라리 화를 내... 뺨이라도 때려. 차라리 그게 낫겠어.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마냥 남겨지는 것 보다 차라리 맞기라도 할래..."
겨우 겨우 말 다 할 쯤에는 하도 울어 목소리 쉬었다. 가쁜 숨에 간신히 들썩이는 어깨가 무거워 보일 정도로 그 몸에 기력 수척해졌다. 그럼에도 손 만은 아회가 어거지로 떼어내지 않는 이상 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조차 가누기 힘들어 푹 숙였으면서.
"진실... 그래 원하던 것이긴 했지. 하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고, 불편한 관계로 맞닥뜨리는 건 원하지 않았어."
그 진실을 너무나도 가볍게 알게 되며, 호기심이 충족되는 순간이었건만은. 비밀을 알게 된 이후의 의심을,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한계를 연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부담을 안게 된 기분이었으며. 앞으로 사감님들을 볼 때마다 그 본 모습을 생각하게 되니, 끈질긴 의심의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은 제가 왜 화를 내는지 진심으로 모르는 듯한 궁기를 보고선 입술을 비죽 내민다.
"친절한 선배인 양 나를 속인 게 괘씸해서."
궁기가 주머니 손끝을 건들 적에 극도로 싫다는 표정과 동작으로 휙 보따리를 거둔 연은 물끄레 궁기를 바라보단 흥, 하며 주머니를 옷소매 속으로 다시 감춘다. 더 못 쓸 것이라 하여도 그 안의 내용물을 두고 춘 사감이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쉽게 버릴 수는 없다. 여전히 자신이 보따리를 열지 못할 것임을 다시금 알려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못마땅하다는 얼굴이던 연은 이어지는 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의심하는 눈으로 보며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