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상황은 위의 단어 둘 중 아무거나 써도 설명할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지난번처럼 신의 장난은 아니었기에,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기분과 자신이 자신의 형상으로써 남아있을수 없는 참혹한 느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 신 님의 장난에도 꿋꿋이 정신 유지하며 단 한 사람. 영원불멸하며 절대적인 존재 하나만을 바라봤던게 자신 아니었니. 이까짓 꿈 쯤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해.
"으응... 참, 요즘 별에별 일들이 꽤 많이 생기네..?"
사뿐하게 앓는소리를 내며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막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지만- 이것 또한 또 다른 꿈임을 느끼며. 가현은 굳게 잠겨있는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천장이 선명하게 눈에 닿는다. 상반신을 완전히 일으키며 눈을 흘기니 불쾌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모든 것이 익숙하되 어색했기 때문이다. 교복, 전신거울, 벽난로, 마침내 불쾌함의 정점을 찍는 것은 청룡 선추가 달린 부채였다. 청옥 특유의 선명한 푸른 빛. 그는 눈을 슥 비비고 다시금 선추를 바라보았으나 청옥이 홍옥 되는 일은 없었고, 더욱 선명한 세상만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
꿈이니까 다시 잠들면 어떻게 될까. 꿈에서 다시 잠든다 하여 깨어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 평소 같으면 그저 잠들겠으나 지금의 상황은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의 주술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이딴, 이딴 고문은 바라지 않았어……. 나를 농락하려고."
차라리 잠든다면 이 빌어먹을 선명한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아, 이 빌어먹을 세상이 나를 농락하려고. 꼬여버린 마음이 가시를 세운다.
삼베라는 것은 거친 녀석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연약한 살갗이 쓸려 새빨간 자국이 남거니와 자세를 잘못 잡고 무릎을 꿇다 보면 허벅지를 찔려 상처가 남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옷을 벗을 이유는 못 됐고, 벗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즈음엔 크고 작은 느낌이 전부 그러했다. 아픈 것도 없고 배고픈 것도 몰랐다.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 무엇에 집중했는지 금세 까먹고 말았다. 얼굴도 이렇다 할 표정을 짓는 법을 잊어버렸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릎을 꿇는 일밖에 없었다. 이렇게 몸이 게으른 것을 보니 시린 북부의 추위가 야금야금 몸을 집어삼키나 보다.
아, 그것참 잘된 일이다.
어린 아회는 멍하니 무릎을 덮어가는 눈더미를 보며 생각했다. 눈발이 거센 것을 보니 이제 종아리를 완연히 뒤덮은 눈은 곧 다리를 온통 뒤덮을 것이다. 그렇게 냉기가 혈관을 타고 오르며 온몸을 맴돌고, 마침내 심장에 냉기가 도달하면 얼음 동상이 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겠지. 자신은 북부의 일부가 되고, 북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간절히 소원을 빌고 동상이 되어버린다니, 일면만 보먼 참 아름다운 얘기다. 이 집안의 사람들은 차라리 그래버리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이번만큼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내 바람을 들어준다면 좋을 텐데. 단 한 번이라도……. 아회는 사무친 추위 속에서 뽀얀 숨을 뱉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회의 편이 아니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익숙한 무늬가 새겨진, 별채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자신의 방 천장이었다. 아회는 한참이고 천장을 쳐다보다 허탈한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따스한 공기가 온몸을 뒤덮고, 어디선가 고소한 내음이 났으며, 부드러운 감촉이 몸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거친 삼베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누군가 분명 아회를 데려와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음은 쉬이 짐작이 갔다. 아회는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고는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고, 그제야 보인 전경에 다시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넉넉하게 장작을 넣은 난로, 협탁에 놓인 따스한 옥수수 죽, 몸을 덮은 비단 옷…… 아회는 시선을 내려 몸을 덮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어째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따스한 피풍의가 몸을 덮고 있었음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무력감이 밀려왔다. 속절없이 떠밀려오는 감정이 온몸을 짓누르고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는 것만 같아 몸을 웅크렸다. 귀한 피풍의를 덮어준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온정임은 분명했으나, 아회가 느끼기에는 사생아 따위가 아직 고통을 사함 받기에는 이르다는 것 같았다. 집안을 뒤집어버린 존재, 태어나서는 안 될 인물, 결국엔……. 어찌 되었든 죄 그 자체인 녀석이 어딜 편해지려 들까!
"흐."
아회는 웃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숨을 뱉고 울음을 삼켰다. 공허하게 몇 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얼굴을 꽉 쥐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참함? 모른다. 비참함이 이런 것이라고 배워본 적이 없다. 슬픔? 아니다. 슬픈 건 이런 곳에서 쓰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품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같이 바다에 가자고 했을 때, 차라리 하루만 더 일찍 바다로 가자고 할걸. 그랬더라면 이렇게 서로 떨어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이 설움을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음이 아회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을 불러 그 이야기를 해봤자 돌아올 반응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설렁줄을 당긴다 쳐도 사용인은 오지 않을 것이다. 얼굴을 덮어가리고 새벽 동이 틀 때, 아회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시비는커녕 청지기도 방을 찾지 않았다. 형님 또한 마찬가지다. 소식을 들었다면 본가로 왔을 것 같은데,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았다. 다시금 유령이 되어버렸음을 실감했으나 무력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 차라리 이 안에서 쓸쓸히 지내다 진짜 유령이 되어버렸으면. 그럼에도 한 명 정도는 나를 기억해 줬으면…….
아무리 누군가 삶을 포기한다 한들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세 번째 밤이 찾아왔다. 그날은 달도 뜨지 못해 별채 안은 어두웠고, 궁상맞게도 빗방울이 흩날렸다. 아무리 귀기 무 씨라 한들 요괴들이 도사리는 북부인지라 호법하는 호위가 있기 마련이거늘 별채엔 호위는커녕 사용인의 발길도 끊겨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아회는 별채에 홀로 남아 한참이고 창밖을 바라봤다. 공허한 눈빛을 뒤로 벼락이 쳤을 때, 무언가 뚝 끊기는 소리를 뒤로 아회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촛불 하나 없이 몸을 일으켜 침상 밖으로 나섰을 뿐.
관리가 안 되어 풀이 무성히 자란 땅은 물에 젖어 미끄럽고, 차가운 빗방울은 살을 에고 서늘하게 몸을 적신다. 세상은 어두웠고 바람은 매서우며, 이따금 치는 천둥번개는 귀를 먹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길게 뻗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빛을 잃었고, 눈빛은 알 수 없었다. 아회는 유령이 되어 비바람 속을 배회했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 휘청이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옷깃 나부끼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그마한 유령이 향한 곳은 유일하게 빛이 남아있는 본채의 한구석이었다. 호위는 유령의 존재를 눈치채어 경계했다.
"누구냐." "……."
호위는 유령을 정확히 마주 보다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사락거리는 소리를 뒤로 창호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캉, 하고 문이 닫혔을 적, 호위는 뒤를 돌며 깊은 시름에 빠져 탄식했다.
다 젖었네. 우산도 없이 온 걸까……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마 당신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있었나, 잠을 잘 채비를 마쳤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학업에 열중했나. 아회는 대답 대신 몽롱하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젖은 맨발이 족적을 남겼고, 젖은 머리카락은 길게 줄을 그었다.
"용서해 주실 거죠. 제가 이렇게 방자히 굴어도."
형이라면 용서해 줄 거라 믿어요. 제멋대로 얘기한 아회는 팔을 벌렸다. 조그마한 몸을 파묻고, 옷깃에 고개를 묻었다.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젖은 몸으로 타인 품에 파고드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이 지금은 더 중했기 때문이다. 아회는 등허리를 팔로 감으며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긴 속눈썹이 올라가 공허한 눈동자를 온전히 드러냈다.
나긋나긋 속삭이는 목소리는 작았다. 어린 나이에도 감정이 무뎌지듯 어딘가 마모되어 삭막했고, 몽롱한 눈 너머로 투명하게 무언가 차오르다 공허하게 떨어지길 반복했다. 목 놓을 수도 없었다. 울음소리를 들켜 본관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님이라도 나타나면. 아회는 품에 고개를 묻었다. 자신보다 큼직한 존재의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리고 꿈결을 걷듯 나긋한 목소리가 작은 몸집에서 흘러나왔다.
"형, 별채는 춥고 어두워요…. 저는 사무치게 외로우니 부디 오늘만큼은 밤 동안 함께 있어 주세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아회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참을 침묵했다. 우습게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호위를 보고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버리고 말았다. 과거를 회상하던 자신을 속으로 몇 번 탓하고는 아회는 손을 뻗었다. 아직 감상과 현실의 경계에 위치했는지 느릿한 손길은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금 침상 위로 툭 자리를 잡았다.
"영아."
아회의 나긋한 목소리에 검은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금빛 눈의 남성은 고개를 한층 더 깊이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예, 주군." 묵직한 목소리가 기숙사실 안을 울렸다. 암실 속은 벽난로가 피어오르지 않고, 땅 신령은 단잠에 빠져든지 오래였다.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던 아회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영원한 것이 있다 보니?" "……아니요, 영원한 것은 없다 생각합니다." "그래. 영원한 법은 없는 법이지……."
아회는 느릿하게 중얼대다 침상 위에 모로 뉘었던 몸을 뒤척이더니 이불을 그러쥐었다.
"이부자리가 차구나." "난로 불을 피워드릴까요?"
아회는 호위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지 입을 작게 벌리다가도 이내 입을 다물곤, 지그시 잇새 사이로 깨문 입술을 휘고 숨을 뱉듯 희미한 웃음만 흘렸다.
거울 속에 비친 낯선 모습에 늘봄은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할 수만 있었다면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에 감긴 붕대가, 그로 인해 짐작할 수 있는 묵직함의 원인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손늘봄은 경악에 휩싸여 스스로의 얼굴—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는 생판 남의 얼굴—을 양손으로 더듬는다. 뭐야 이거! 꿈인가? 아, 그래. 꿈이로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당연히 꿈이니까 말이 안 되겠지만 이건 진짜 말이 안 되잖냐!
목 위로 솟구치지 못한 외침들이 갈비뼈 속에서 맴돈다. 그 즈음 문이 거칠게 열리고, 늘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누가 이렇게 요란을 떨어?!
>>214 지금까지 읽어온 아회 관련 독백은 전부 눈물 나는데 동시에 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읽는 게 즐거워요:) 내용은 눈물바다인데 문장이 보석이라니 이 서글픈 아름다움이란... 아회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ㅠㅠㅠㅠ 전 아회주를 믿어요 행복하게 해 주실 거라고... 행복하자 아회ㅠㅠㅠㅠ
꿈이라는 것은 늘 그렇다. 상식 외의 상황이 던져지며, 자신은 그것에 맞춰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어떠한 거부 의사도 표할수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원래 그랬던 것처럼. 가끔은 자신이 자신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가. 익숙한 여학생을 바라보던 시선은 느릿하게 깜빡여지다 이윽고 호선을 그린다.
"으응, 고마워~ 애정이니까. 조금 더 버텼어야 했는데."
양피지 묶음을 받았다. 이 시간선 내의 수업 내용이 적혀져있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지켜본 당신은 자신보다 앞서 있었으며, 이런저런 마법들을 자신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그런 당신이었다면, 이것을 당장 펴 읽어보았을까.